강남-누가복음 1장 32절 (예언과 면역체계) 200317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장 32절 (예언과 면역체계) 20031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자기만의 교유한 자기 면역체계를 고집하는 것. 그러면 그게 하나의 등치가 되겠지요. ‘나’라는 이름의 등치가 되겠지요. 그 등치를 가지고 인간은 뭘 하느냐? 나름대로의 자기의 악의 구역을 피해서 자기의 살 구역으로 이동한다. 이동하고 싶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피하고 싶다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게 구원입니까? 전혀 그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스스로 작용하는 예언 요소가 없어요. 마치 이건 뭐와 같으냐 하면 자기만의 고유한 면역체계를 그걸 지켜내면서 더럽고 죄 많은 세상에서 벗어나서 좋은 곳에 가겠다는 말은 마리아가 전혀 아기 예수님을 임신하지 않은 채 그 몸뚱아리 가지고 천국 가겠다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예언의 요소가 자기 속에 스며들어와서 그냥 스며들어와서 부분으로 멈추는게 아니에요. 스며들어온 그 예언이 지금껏 자기가 고집하는 자신의 주관을 이겨야 돼요. 부풀어 올라야 된다고요. 부풀어.
인간의 몸이 지금 뭐를 이해하셔야 되느냐 하면은 내 몸 안에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살고 싶다 하는 이것이 그냥 내 마음이지만 그 안에 뭐가 작용하고 있느냐 하면은 악령의 수상한 공기가 또는 여기 공기가 있어서 여기서 악령의 중력장을 형성하고 있어요. 중력장.
중력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물체를 잡아당기잖아요. 발목 잡는다 이 말이지요. 사는게 남는 거야 이 인간아 하는 그러한 요구 조건이 어쨌든 너만 살면 그만이야. 너만 이 악한 신종코로나 피해서 잘 지내면 결국 살아남는게 남는거야 그게 이익이야 라고 외치는 그런 중력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말이죠. 우리 안에서.
예언이 우선이 아니라 예언은 없애버리고 예언 자리에 절대적인 ‘나’가 계속 유지하고 지배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세상은 멸망해도 자기는 멸망 안 하고 싶고 안 당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나 정말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임신했다면 자기가 무너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아니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아름답다로 봐야 돼요. 아름답다.
아름다운 소식으로 여겨져야 돼요. 아름다운 소식으로. 물론 마리아가 처음에는 그게 당황스럽겠지만. 나중에는 그걸 알겠지요. ‘아름다운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두자로 줄이면 뭐가 되느냐 이게 바로 복된 소식, ‘복음’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을 풀이하게 되면 달리하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여야한다.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주께서 세상을 작살내는 그 모습이 최고의 예술작업으로 느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최고의 극상의 순금으로 느껴져야 된다. 아름다움으로. ‘극치의 미’로 느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 2장에 그 나오는 그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2장 29절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하는 말이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준다” 이 말이죠. 평안히 놓아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는 일이 정말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을 지금 아무 차질 없이 잘 진행시킴을 알게 된 겁니다. 성령 받아서 알게 된 거에요.
그 아름다움의 일의 극치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이어지는 주의 빈틈없는 작업. 십자가로 이어지는 빈틈없는 작업. 이 작업을 보고 복음,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볼 수 있어야 돼요.
그중에 내 자존심과 내 가치, 의미가 무너지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그렇게 지키고 싶은 나의 역사가 하염없이 그냥 여지없이 작살나는 것을 보면서 참 하나님께서는 하는 일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심지어 자기가 죽는 것까지.
사도 바울이 자기가 죽는 것을 무서워했습니까? 아니면 원했습니까? 원했지요. 왜?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복음에 속하는 일이니까요.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예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예언이라는 것, 들어옴으로써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아까 예언에서 제가 언급했는데 그냥 다시 이야기하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러한 취지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고 그 다음에 야곱의 집,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이어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왕 노릇, 왕의 등장. 네 번째가 나라의 그 나라의 영원함. 한때 등장하고 그 다음에 끝나는게 아니고 영원함.
자, 그렇다면 이 예언을 파악하는 환경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악마가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거에요. 이 세상에서는 뭐가 없느냐? 다윗의 자손이 오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방해공작이 있었던 겁니다. 방해공작.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들어 놨는데 농부한테 세를 받는데 그 농부가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 되는 것을 싫어해서 종을 품삯 받으러 온 종을 죽여버리고 오면 죽여버리고 마지막에 아들 보내니까 아들마저 죽여버렸다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요. 마태복음에.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그 포도농부의 비유에 의하면 그동안 다윗의 자손 오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이미 상주하고 있다. 이 땅에. 아까 그 신종 코로나가 이 세상에 인간과 함께 계속 살고 앞으로도 계속 살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백신을 만들든지 말든지 하여튼 신종 코로나 한번 나타나면 없어지지 않아요. 계속 있어요. 같이 살아가요.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인간과 악령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살아가면서 그들이 악령이 놉니까? 뭐 하품 크게 하면서 아무 일 없이 할 일 없이 그냥 빌빌 거려요? 아니에요. 극구 반대해요. 예수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고요.
인간은 다윗의 자손에 관심이 없어요. 다윗의 자손이 뭔지도 몰라요. 옛날 이야기인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악마는 알아요. 다윗의 자손이 오면 안된다는 거에요. 두 번째는 다윗의 자손 세 번째는 왕의 등장했는데 네 번째 따져 봅시다.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게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비밀을 글자로 굳어져 있던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이게 다윗의 자손이 해야 될 거에요.
요한계시록 5장에 5장 5절에 보면 이 책을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갇혀 있으면서 계시를 받았지요. 책을 봤는데 4절에 보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 요한이 책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걸 열 수가 없어요. 봉인되어 있으니까 닫혀있으니까 자물쇠로 잠겨 있으니까 운거에요.
그 책을 편다는 것은 책에 활자로 굳어져 있던 현실이 바깥 현실을 구성한다는 뜻이거든요. 실제 현실로 형성되어 지고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울었더니 장로 하나가 나와서 이미 장로라는 것은 구약 때 순교자를 말하는데 구약 때 순교자가 와서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되어 있어요.
여기 이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와가지고 예수님이 와가지고 단추 떼듯이 톡톡 떼면 될 문제가 아니고 뭔가 전쟁을 해야 될 문제가 있는 거에요. 전쟁. 이 전체 이 세상에 상주하고 있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듯이 뭔가 싸우지 아니하면 열리지 않는 내용이 바로 이 세상의 진짜 현실이 된다 이 말입니다.
현실은 더 굳게 콘크리트 됐다고 할까요. 콘크리트화 됐다. 완전히 사방이 철벽으로 갇혀 있는데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걸 그 콘크리트의 벽을 두꺼운 장막을 깨는 작업을 하신 거에요. 깨신 작업을. 그 두꺼운 장막이 뭐냐 하면은 바로 죽음이고 그리고 율법에 의한 저주요 악마의 권세요 죄의 권세고 그런 것들이죠. 그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또는 그걸 우리 실제적인 표현을 한다면 육에 갇혀있고 또 가족에 갇혀있고 이 나라 눈에 보이는 세상에 갇혀있고. 보는 것이 다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보는 것을 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 조차도 사실은 보는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상상 안에 인간은 또 갇혀있고.
무슨 말이냐 하면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성령 받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거에요.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뒤편에 무슨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성령 받지 않은 악령 받은 인간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말은 보는 세계를 전제로 해가지고 그 너머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보는 세계를 전제로 해서. 이것이 있는데 이것이 다가 아닐거야라는 생각을 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보는 것 자체가 이게 엉터리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에요. 보는 것도 맞고 그 너머에 우리가 믿지 못 하는게 있을거야. 그게 우리 인간이 갖춰야 될 우리의 겸손함이야 라는 새로운 윤리로 등장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자체가 바로 이런 생각 자체가 갇혀 있는 거에요. 이런 생각 자체가.
보는 것이 보인다는 이것조차도 이게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없어 버리면 이 자체가 환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논해도 그 자체가 환상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세계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그것을 상품으로 그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걸고 그걸 미끼로 해가지고 운영하는데 그 자체가 엉터리에요.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다윗의 자손이 오기 전까지 이 세상은 이런 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그 장벽을 깨는 거죠. 이기는 거죠. 이건 뭐냐? 전쟁하는 분, 전쟁하는 분이에요. 다윗의 자손은 뭐라고요? 전쟁하시는 분. 누구하고 전쟁한다고요?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게 만드는 다른 모든 그러한 배후의 요소가 그러한 어떤 인격체와 전쟁하는 거죠. 이게 시편 110편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110편 1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2장 34절에서는 뭐냐 하면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되어 있지 않고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34절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아 참 이상하지요? 구약 유대인들이나 인간들의 사람들의 상식은 절대적인 그분에게만 하나님, 신이라는 또는 주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논리고. 최고의 자리는 두 사람 되면 안 되고 한사람으로 봐야 되지요.
그런데 시편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여기서 이 시편 110편을 보게 되면 인간의 시간성으로 보게 되면 ‘까지’ 라는 말 자체가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쓰여 지느냐 하면은 완료는 되지 않았고 완료될 것을 목표로 움직여 나갈 때까지라는 그 말을 쓸 수 있다고 보지요. 보통 인간세계의 시간론에서는.
그런데 사도행전에 와서 보게 되면 여기 까지라는 말은 주님 하시는 기능을 주의 심판주 노릇하는 그 기능을 가지신 분이 드러나는 그 드러나는 그 위치를 묘사할 때 지상의 시간으로 그 위치를 표현해주는 겁니다.
주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하는데 성사되신 분 만이 그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은 주가 됐습니다 라는 설명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까지’ 라는 시간적 부사를 사용하는 거에요.
어디 까지라는 말은 시간의 한정됨이 아니고 현재 갖고 있는 누리고 있는 위치가 어떤 기능을 완료했기에 이런 위치에 도달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면서 원수를 정복하기 까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까지’ 라는 이러한 표현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나와요. 거기에 보면 5절에 보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그 천년이 차기 까지”. ‘까지’ 라는 말 천년이 차기 까지 살지 못하리라 이 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잘못 해석하느냐 하면 천년이 차고 난 뒤에 그 천년이 차고 그 뒤에 7절에 보면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을”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천년이라는 기간이 지나고 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잠시 사탄이 풀려가지고 인간을 괴롭힌다라는 식으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적인 그 시간의 개념가지고 이 ‘까지’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설명하면 안돼요.
이 ‘까지’라는 말은 현재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어떤 기능을 완료했는가. 뭐를 대상으로 싸움에 승리했는가. 어떤 대상을 상대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동원된 시간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완료성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는 어떤 기능자는 이미 그 안에 시간에 대한 완료자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를 표현하기 위해서 지상에서 ‘까지’ 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함락할 때까지 오른편에 있다가 그 다음부터는 다시 네 자리로 내려가 이런 뜻으로 설명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까지’ 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수가 발등상 되기 까지 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기능은 원수를 밟는 것이다. 발판되게 하는 것이다.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는 그 기능이 너의 기능이다.
그의 기능이 완료가 된다면 너는 영원히 얼마까지가 아니라 영원히 너는 오른편에 앉아 있어야 된다 라는 식으로 지금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성령 받아서. 베드로가 설명하는데 우리가 뭐 베드로가 설명해서 틀렸다하면 안되지요. 사도니까.
그래서 종말인겁니다. 종말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가 종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종말이 된다면 종말에서 오른편에 계신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준다면 비로소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떤 안목이 열리는데 그 안목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살아가고 있다라고 현재를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정확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와 살아 왔었다라고 왔었다고 과거 완료로 설명해야 돼요. 완료형으로 설명해야 옳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완료적 신분을 부여받았거든요.
따라서 나는 옛날 살아생전에 악마와 한통속이었었다라는 다시 말해서 지금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위상에 위치에 있다. 왜?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주와 함께 하늘에 앉혀있으니까 오른편에 앉아있으니까 우리는 과거완료로 설명해야 옳다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게 되면,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과거완료로 되어 있지요.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 얻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얻은 것.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완료된 거에요. ‘앉히시니’.
로마서 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아신 자들을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완료형입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미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그러니까 창세전에 지금까지 모든 것을 이미 완료에서는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거에요. 정지화면이죠. 그림처럼. 한 화폭에 다 담아있는 것처럼. Stop이 되어 있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상태. 그게 바로 특징이 사건 안에 특징이 그런 거에요. 사건 안에서는 시간이 여기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쪼개버리고 시간의 흐름을 중단시켜 버리고 시간의 이어짐을 차단시켜버리는 역할이 사건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윗의 자손이 오는 것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아직도 붙들고 있는 이 악령의 세계에 대해서 시간을 중지시키고 완료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실 분이 다윗의 자손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필이면 왜 다윗이 해야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뭐 사울의 자손 또는 노아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다윗의 자손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약속한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약속한 게 있습니다.
다른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런 사람에게 약속한게 아니라 다윗에게만 약속한게 있는데 뭐냐 하면은 다윗의 자손, 다윗의 아들이죠.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되겠다 이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은 육이 없지만 내가 다윗이라는 육, 다윗의 아들로 태어나는 육신을 입겠다 라고 다윗에게 제일 먼저 약속을 한 거에요.
하나님께서 누구 자식을 낳겠다가 아니라 그건 아브라함에게 그런 약속했잖아요. 아브라함아 너 자손이 많아지겠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겠다는 거에요. 사람의 아들 인자죠. 사람의 아들로 오겠다.
그래서 인자라는 것은 다윗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예수님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오겠다는 말은 나는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의 아들로 왔다는 뜻이에요. 그 엄청난 이 예언의 내용들이 지금 마리아를 임신케 한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전쟁하러 오신 거죠. 그 전쟁을 누구하고 하느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누가복음 1장 52절에 보면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내리쳤다는 것이 굉장히 폭력적이죠. 그리고 폭력적이면서 폭력적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의 대상이 있다는 말이고 그 대상이 누구냐? 여기에 권세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권세 있는 자가 왜 하나님 앞에 얻어맞아야 될 대상이 되는가? 거기에 보면 거기 51절에 보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권세 있는 자가 필요 없다가 아니에요. 권세 있는 자를 만드는 이유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사회에 심어서 교만 덩어리가 인간세계에서 실제로 눈에 보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에요.
자, 권세 있는 자 보이느냐? 보입니다. 저게 교만한 자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럼 우리의 생각은 뭐냐? 아니 권세 있다고 다 교만한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하고 싶지요. 권세, 교만한 자가 권세 있는 자가 아니라 권세를 가지게 되면 누구나 교만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교만하지 않은 자가 누구냐? 그거는 권세있는 자에게 날마다 얻어터지는 자가 교만하지 않은 자겠죠. 특히 누가복음에 46절에 나오는 이 찬양이 누구를 그대로 표절했느냐 하면은 바로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의 찬양을 그대로 표절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반복해서 주어지는 거죠. 반복하면서 그 심도, 깊이는 더하게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가 찬양하는 그 대목 2장 1절에 나옵니다. 똑같아요. 교만한 말 이렇게 해서 권세있는 자 가난한 자 내치시고. 그대로 오늘 마리아가 하는 찬양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런데 여기서 왜 여기서 한나가 그 당시에 이러한 찬양을 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한나에게 어떤 원통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통함.
한나의 찬양에 그게 나옵니다. 한나의 그 여기에 보면 한나의 원통이 있다는 말은 원수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한나가 어떤 분노를 갖고 있고 분함이 있는데 그것은 사무엘상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사가랴, 엘리사벳 누구죠? 바로 세례 요한의 아빠 엄마죠. 세례 요한의 아빠 엄마가 잉태치 못했습니다. 잉태치 못했다는 걸 분명히 해놓고 아기를 낳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아예 잉태고 뭐고 결혼한 적도 처녀가 임신을 해버리죠. 마리아가.
이런 것은 인간의 육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들이 육을 장악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얼마나 권세 있고 교만한 척을 하고 있는가를 지금 폭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잉태치 못하는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신 거에요.
인간은 육으로 태어나는데 겸손하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세상의 공자나 맹자가 하는 소리고요. 인간의 몸이 있는 한 인간은 교만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지금 주님께서는 말씀하시 고 계시는 겁니다.
성령 없이 자기 혼자 도를 닦아가지고 명상에 몰입해가지고 나는 겸손하다 이래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게 아니에요. 나는 안 무너지면서 내가 완전히 하나님께 깨지지 않으면서 내가 겸손해야지. 그런 겸손으로 구원받아야지 이런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건 악령의 존재를 무시하는 거에요. 우리 속에 악마의 바이러스를 지금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했어요. 잉태지 못하니까 잉태치 못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 그래야 잉태했다고 우기는 브닌나라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 이 땅이 그냥 빈공간이 아니라 지금 주께서 전쟁을 하려고 하잖아요.
주께서 주에게 또는 여호와께서 주에게 전쟁을 하게 한단 말입니다. 전쟁하려면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야 되고 원수는 그 실제성이 드러나야 돼요. 그냥 인간들이 사는 세계로서는 끝난 게 아닙니다.
인간들 세계 같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 협상하고 회의하고 국제회의 해가지고 좋게 그냥 꾸역꾸역 꾸려나가면 되겠지요.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지 않지 않습니까. 없다고 여기죠. 하나님의 원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의 원수가 있게 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계의 종교인들 다 회의한다 합시다.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 뭐 티벳 불교 또는 그냥 불교, 소성불교, 대성불교, 기독교 모든 종교가 다 합쳐서 원불교까지 다 합쳐서 주요 종교라는 것을 다 모아서 인도의 종교 힌두교까지 와서 회의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세상에 신은 있고 신은 사랑이다 이게 결론이에요. 우리는 전부다 하나의 신의 백성이다.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인간세계에 뭐가 없어요? 원수가 없는 거에요. 악마가 없는 거에요. 악령이 없는 거에요. 여기에 기독교도 가담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천주교도 가입되어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악마 본인을 숨기기 위해서 악마가 없다고 자꾸 인간들을 설득시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 악마 없었습니까? 악마가 안 들어왔습니까?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만 있고 뱀은 없었습니까? 뱀이 있었잖아요.
이 뱀을 요한계시록 12장은 이걸 옛뱀이라고 해요. 옛뱀. 옛뱀 용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에덴동산에 누가 들어왔어요? 악마가 들어왔잖아요. 악마가 있다 이 말이죠. 악마가 인간을 지배했고 그 죄가 왕 노릇했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다윗은 친히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이 땅에 나오겠다는 겁니다. 아들 이 땅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윗에게 준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호칭할 때 인자라고 하신 거에요. 이렇게 할 때 그 한나가 예언하면서 나오는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다윗이에요.
그러면 그 한나의 분노와 원통함, 원통하고 억울한 것. 얼마나 기도했으면 술 먹고 기도한 것처럼 보였을까. 그 정도로 분해서 기도하는데 그 분노가 결국 원수를 원수 되게 드러나게 하고 여기서 어떤 전쟁의 분위기로 몰아세우죠. 전쟁하는 분위기.
원래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전쟁관계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싸우는 관계에요. 신과 인간이. 그런데 인간은 그러고 싶지 않지요. 신과 싸우고 싶지 않고 신에게 잘 보이기를 원할 겁니다.
그러나 이미 인간이 모르고 있는 이 상황,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인간들은 좋은게 좋게 넘어가는 그런 신, 그런 여호와를 원하겠지요. 실제로 진짜 여호와가 이렇게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누구의 아들로 왔을 때 인간들은 그분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좋게 넘어갔습니까? 죽였습니까? 죽였잖아요.
하나님의 모든 일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생각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모든 면면을 다 드러내겠다는 의도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차근차근하게 십자가로 이어져가는 하나님의 자기 역사를 누가복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면역체계에 빠져있어요. 본인의 마음에 만족했을 때만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자기 개인적인 만족에. 그러나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복음의 내용에는 자기의 무너짐이 있어야 되고 곧 죽음이 있어야 되고 죽음에서 살려냄의 내용이 포함될 때 그게 복음이 되는 겁니다. 살려냄이 되려면 일단 죽어줘야 돼요. 비참하게 죽어야 되지요. 죽을 때 아플 때 아름다운 아픔이라고 해서 그게 안 아픈게 아니잖아요. 아파요.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뭉개버리는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까 동영상할 때 했지만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모든 것이 찬미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씀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갇혔을 때 요한계시록이라는 그 비밀인데 뜯어낼 수가 없어요. 이게 완전히 이기는데 완료 모든 전쟁이 마감될 때 이겼던 그 상태의 놓여 있을 때나 이 세상의 진정한 모든 비밀은 다 공개가 되면서 알려집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게 공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실제화된다는 겁니다. ‘실제화’. 어떤 실제화? 말씀이 실제화된다. 말씀은 어디 안의 말씀이다? 바로 하나님의 예언 안에 함축되어 있는 말씀이 펼쳐지게 되면 이게 실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봤는데 예수님께서 악마를 이겨가지고 악마를 이겼으니까 꽁꽁 묶어놨던 이 세상의 실상이 단축되듯이 하나하나 봉인되지요. 한꺼번에 다 열수가 있습니다만은 1,2,3,4,5,6,7로 뗍니다.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하나하나 천사를 보내가지고 이걸 떼어버려요.
떼어버리면 그 갇혀있던 내용이 활개 치면서 바깥에 나오게 되면 그 세계는 어떻게 되느냐? 멸망당해야 하는 세계로 현실화되는 겁니다. 멸망당하는 세계. 신나게 무너져내리는 세계. 신나게 고통받는 세계. 신나게 심판받는 세계. 신나게 저주받는 세계. 이 자체가 주님보시기에 복음, 아름다운 소식이에요. 이게 아름다운 소식.
이런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받은 사람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로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 또는 교회. 이들은 자기가 죽는 것조차도 아름다와요. 요한계시록에 12장에 보면 자기가 죽는 것조차도 아름다워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하소연하고 그 응답으로서 세상은 또다시 새로운 단추를 떼듯이 봉인되고 봉인되면 준비됐던 멸망을 다 쏟아붓죠. 계속 쏟아붓는 거에요. 종말화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예수님의 예언이 마치 하나하나 진척이 되면 될수록 세상은 그냥 세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멸망 될 세상의 풍경, 하나의 그런 광경으로서 펼쳐지는 그러한 현상이 누가복음을 통해서 앞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 누가복음 1장을 다시 보게 되면 다윗의 자손의 위치를 저희에게 주시리니 전쟁하는 하나의 원수를 정복하는 그러한 기능 자리를 그분이 차지하실 것이니. 그 다음에 영원히 다윗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야곱의 집이라고 했어요. 집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안 사는데 집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니까 누가 집에 있다. 그냥 집에 있다하면 안 되고 누구의 집이야? 누가 살고 있어? 이렇게 물어야 이게 집의 의미가 드러나겠지요. 누가 거주하느냐?
여기에 누가 거주하느냐하면 야곱이 거주한다 야곱의 집이란 말입니다. 야곱의 집. 그러면 야곱은 누구십니까 하면 옛날 야곱은 야곱을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이 계속 예수 그리스도로 와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됐다는 말은 야곱 언약도 예수님께 완성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야곱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야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지 예수님 바깥에 따로 있는 오늘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이 먼저 이스라엘 되고 그 이스라엘 된 속성이 파급되면서 현실에 등장한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나타나고 있어요. 요한복음 1장 그 끝에 보면 나다나엘과 만나는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1장 49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인자 위에 사다리 야곱의 꿈이란 말이죠. 천사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바로 야곱이 되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에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거 아시죠? 그때 야곱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붙히면서 살아온 겁니다.
아까 제가 신천지 이야기했는데 신천지 사람들의 심리가 뭐냐 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어떤 역경이나 어떤 요한계시록의 파멸 가운데에서 본인만이 살기 위해서 부적처럼 쥐고 있고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게 신천지를 그렇게 크게 만들었던 겁니다. 나만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이 결국 믿는 것은 신천지라는 집단을 믿은 거에요. 집단을. 그러나 성경에서는 신천지 집단을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이 있어요. 예수님이 만든 이스라엘 바로 이것만이 영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간 게 아니고 소위 인간이 신천지 교도들처럼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이러한 의도를 전부 뭉개버리는 그러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이 왕노릇 된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은 나의 의도가 이렇게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내 의도대로 구원되었네 라는 소리를 못하는 거에요. 내 기대한대로 구원됐네 이 소리를 못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수작을 벌려 버리면 그건 전부다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버려요. 내가 참된 이스라엘이냐 아니냐 하는 그 규정은 주님의 왕으로 대언한 뒤에 일방적인 어떤 계획에 의해서 그 다음에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미리 예상한다고 해서 그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죄라는 뜻이고 그게 악마의 정신이다 이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보고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오고 그거는 신천지 교도들하고 똑같은 생각이에요. 자기만 살겠다는 부적이라든지 아주 이상한 것 신기한 것 비밀한 어떤 비밀을 내가 쟁취하고 소유함으로서 나는 살았다 이러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 그 본성이 뭐냐? 살겠다는 그것이 본성으로 안 뭉개진 거에요. 살겠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복음 알아서. 이 자체가 비복음적이에요. 이 자체가 비복음적입니다. 자기는 조금도 안 깨졌거든요. 자기는 여전히 훌륭한 사람 되어버리고 그렇지요.
누가복음 1장 그 대목 다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35절에서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자기는 자기가 알고 있는 과거가 나오지요.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남자와 동침을 해서 결혼을 해야 합방해서 애기를 낳는다. 이런 과거 내가 알고 있습니다에서 멈추는게 아니에요. 이런 과거. 남자와 여자가 동침을 해야 애기를 낳는다는 이 사실은 결단코 이게 정당한거 맞지요? 라는 생각을 나의 역사로 나는 간직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을 지금 마리아가 천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35절에 보니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네게 임하고’.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어버리면 너는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러므로 거룩한 자가 태어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천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너한테 일 시킬 때 너하고 사전에 너하고 의논하거나 협의하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했다 이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예언의 진품이고 예언이 이 땅에 올 때 그런 방식으로 와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의논대상이 안돼요. 협의대상이 안된다고요. 너희들의 의견은 무엇이냐 이런거 물을 이유도 없어요.
그냥 막 침투하고 막 공격하고 막 쳐들어오는 거에요. 전쟁이라는게 원래 그래요. 신사적인 전쟁 없습니다. 한쪽이 한쪽을 적으로 보는데 무슨 거기 상대방을 존경하겠습니까. 존경 없어요. 원수인데 뭘. 말살될 대상인데 무슨 존경을 합니까. 전쟁하러 오는데요.
잉태치 못하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데 잉태치 못하는 것은 육에 속했다는 단지 그 상황 자체가 하나의 원수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육에 속했다는 그 자체가. 육에 속한 것을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뭐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그런 변명하지 말라는 거에요.
육에 속했기 때문에 육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마치 잘못한게 아닌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예언은 우리 육에다가 완전히 긁어지나가 버립니다. 물론 예언이 긁어진다는 그 자국이 뭐냐? 내 자국이 아니고 십자가 지셨다는 자국을 우리 안에 남기는 거에요.
따라서 예언이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 성도 안에 이 세상이 멸망할 흔적과 자국이 들어있다는 뜻이죠. 멸망하는 것이 들어있다라는 데에 멈추는게 아니고 멸망되야 마땅하다라는 그 증거를 성도만이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고 발현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 예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과로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만이 야곱이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집된 부름 받은 택함 받은 자의 집단만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3절 다시 보게 되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이르게 되어 있으니까 이 말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없으면 이거는 때려 죽어도 골백번 다시 죽고 태어나도 그거는 절대로 이 비밀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이걸 알기 위해서 우리가 성령오기를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 저한테 질문을 한다면 성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기다려봤자 소용 없고.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데 이 결과가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느냐 하면은 적어도 우리의 육적인 본성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어제 대구 강의에서도 했지만 두 개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는 사람.
그 소리 다 들을 수 있고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사람만이 이게 성도답고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다 알아요. 자식을 낳으려면 남자와 동침해야 된다는 사실을. 남자와 동침=자식. 이것도 알고 있고 무엇도 아느냐 하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능력으로 임신 가능함. 이 둘 다 이게 예언의 능력, 이 둘 다를 다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마리아가 되고 성도가 된 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우세하냐? 당연히 주의 능력이 우세하지요. 왜? 원수를 이겼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봐서는 인간의 자력으로 봐서는 우리는 이 능력을 이길 수가 없어요. 육의 죄의 힘이 더 센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게 되면 나에게 선을 원하지만 선보다 악이 더 우세하다는 말을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두 가지 소리를 다 듣고 있으니까 알고 사실을 아니까 이야기 하고 곤고하다 해놓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찬양한다. 기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의 실상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리아에게 임했던 것이 이게 거짓말이 아니고 이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진실이라면 이런 성령의 진실됨과 세례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