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설교 / 과부의 생명 / 200329
과부의 생명 200329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의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할 거예요. 깍깍 까마귀 나오지요. 까마귀 나오고 여기 수염 난 아저씨가 있지요. 까마귀가 날다가 하늘에서 뭔가 툭 하고 떡을 하나 주고 엘리야 선지자는 떡을 받고 있지요. 엘리야 선지자는 이 아저씨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시를 하고 그 지시를 받은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나님 시키는 대로 온 동네 다니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아주 편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굉장히 편안한 직업이에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이처럼 편한 직업이 없지요. 남이 욕을 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아요.
문제는 떡을 이틀 치, 이년 치 주는 게 아니고 고작 그날 치만 준다는 게 이게 고역이에요. 이게 고생이에요. 까마귀가 안 주면 굶어죽어요. 그래서 까마귀가 왔는데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지시가 내려왔어요. “니가 어느 과부 집에 가거라.” 과부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남편 없고 여자 혼자 애기가 있는 경우를 과부라고 합니다. 남편하고 어떻게 헤어지고 혼자 사는 과부 집에 자식이 있는데, 이게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벌을 받아가지고 비가 오지 않았어요.
옛날 농경시대에는 비 안 오면 끝입니다. 농사 심어봐야 안 자라요. 먹을 게 없어요. 먹을 게 없어가지고 사르밧 과부 집에도 역시 먹을 게 없어가지고 굶어 죽게 되었는데 그 때 엘리야가 “물 좀 주세요.”라고 했어요. “물은 드리겠습니다.” 물을 줬더니만 염치없는 선지자가 더 달라하네. “혹시 떡이 있습니까?” “떡은 없습니다. 떡은 없고 밀가루하고 기름은 있습니다. 떡을 만들 재료는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엘리야가 하는 말이 염치없이 “그렇다면 그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내게 주세요.” 하니까 사르밧 과부가 하는 말이 어이가 없어가지고 “밀가루가 있고 기름도 있지만 딱 최후의 떡 그것밖에 안 됩니다. 내가 밀가루 있고 기름 있다는 말은 당신말고 나하고 우리 아들 불쌍한 아들이 있는데 그것 먹고 같이 동반자살하려고 마지막 최후의 떡을 먹으려고 그 밀가루하고 기름 있다는 말을 한 겁니다. 당신 줄 건 없고 우리가 먹고 죽으려고 한 겁니다. 이제 아셨지요? 아셨으면 가세요.” 하니까 엘리야가 하는 말이 “마지막 떡을 나한테 주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지막 떡이 새 출발의 떡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떡을 거의 뺏다시피 줬어요. 주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없어야 될 그 밀가루 통이 계속해서 밀가루가 퍼내도 또 생기고 퍼내도 또 생기고 기름도 탈탈 털어서 기름을 부었는데 놓자마자 기름 생기고 또 붓자마자 기름 또 생기고 끝과 시작이 반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끝났다 시작했다, 끝났다 또 시작이네. 어쩌라고. 끝났다 시작이다, 음악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넣었는데 또 생겼어요. 없을 거야. 또 생겼어.
이게 바로 생명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목숨은 죽으면 끝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대로 영원토록 하게 하시는 그게 생명나무의 원래 있던 과실을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이 아줌마는 사르밧 아줌마는 우리한테 양식이나 주는 무한대로 주시는 좋은 분인 줄 알고 그래가지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니었으면 우리는 굶어죽었어요. 고맙습니다.” 이 정도로 멈추고 거기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보니까 아들이 죽었어요. 죽으니까 엄마가 엘리야의 멱살을 잡고 “당신 와서 재수 더럽게 없다. 떡 달래서 떡 줬는데 왜 살아있는 내 아들까지 죽이느냐? 당신은 나한테 기름 주고 밀가루만 주면 돼. 그걸로 그 정도만 해.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게. 그런데 왜 멀쩡한 내 아들을 왜 죽이느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엘리야가 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이건 밀가루하고 기름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 자체가 갖고 있는 당신의 목숨과 생명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으로 바꾸려면 일단은 죽어줘야 되겠습니다.” 전에는 죽으려고 하다가 과부 아줌마도 되바라졌어. 죽으려고 하는 인간을 살려놨으면 죽은 게 당연한데 살려놓으니까 왜 죽이느냐고 달려드는 거예요. 기가 차서. 참 기가 찬 거예요.
마치 가게에서 돈이 없어서 쇼윈도우에서 머뭇거리니까 주인이 와가지고 “아줌마, 왜 이렇게 머뭇거립니까?” “옷이 입을 옷이 없어가지고 다 떨어져가지고 돈은 없고 옷은 입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아줌마가 “불쌍해라. 이 옷 하나 입어보세요.” 하고 옷 하나 줬다 말이에요. 옷 주고 집에 갔으면 될 거 아닙니까? 집에 갔다 오자마자 화를 내면서 “맞는 옷을 줘야지. 지금 이건 허리가 안 맞잖아요?” 주인 아줌마가 “똥배 빼면 됩니다. 똥배 빼면 맞아요.”
옷 없다고 옷 주니까 옷 안 맞는다고 닦달 내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우리는 없어야 돼요. 없어도 괜찮아요. 니도 없어도 돼. 없어야 되는데 있었잖아요. 누가 있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있게 했다 말이죠. 옷 안 맞는다 이러지 마시고 없는 걸 있게 했으니까 죽는 것도 주께서 알아서 죽이겠지요. 죽이는 것도 알아서 죽이겠지요, 하는 사람이 알아서 살아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살아난 사람.
그래서 엘리야 붙들고 고함지르고 “내 아들 죽은 아들 살려내라.” 하니까 엘리야가 다락에 올라가가지고 “어디 죽었습니까?” “다락에 죽어있어요.” 다락에 죽어 있어가지고 엘리야가 자기의 몸을 펴서 엎드리고 거기다가 자기 몸을 엎어가지고, 엎기보다는 아이 위에 세 번 펴가지고 엘리야 몸을 덮어요. 세 번 펴고 덮어가지고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 달라, 하니까 죽었던 혼이 다시 들어와서 애가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드디어 엄마가 아이를 안고 그렇게 좋아하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 그러니까 처음에 아줌마는 자기가 재수 없어서 양식 떨어져서 죽는 줄 알고 내 죄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요. 그저 세상에 비가 안 와서 죽는다, 비가 안 오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딱 오니까 죽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죽는데 왜 죽느냐 하면 늙어 죽는 게 아니고 내 죄 때문에 내가 애초부터 죽어야 될 인간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걸 알려주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합한 사람은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 되어버리고 나중에는 뭐냐? 나중에 다시 영생의 부활로 살아난다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엘리야에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서 알려줬고 알려준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말로 하다가 몸으로 보여준 거예요. “봐! 죽잖아. 내가 죽어. 잘 봐. 내가 죽어. 봤지? 나는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봤지? 제자들 도망간 거 봤지? 아무도 믿는 사람 없지?” 그 다음에 사흘 뒤에 가보니까 앉아가지고 다리 꼬고. 다리 꼬지 마라 했는데 다리 꼬고 앉아가지고. “아저씨, 누구십니까?” “내가 방금 죽었다가 살아난 나잖아. 봐도 몰라?” “전혀 얼굴이 다른데.” “다르지.” 만지려고 하니까 “만지지 마! 만지지 마. 아직까지 니가 만질 군번이 아니야. 고생 더 하고 만져. 나중에 천국 와서 만져도 돼.”
그래서 엘리야에서 일어나는 이 일이 장차 올 예수님의 일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구약 성경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많은 과부가 있더라도 나는 아무나 찾아가지 않는다. 오직 내가 택한 백성만 찾아가서 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세상에 문둥병자가 그렇게 많아도 아무나 문둥병자 아무나 찾아가는 게 아니고 오직 찾아야 될 사람만 찾고 그 다음에 엘리야가 사르밧 땅 과부에게만 갔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간 거예요. 그 사람에게 갔을 뿐이고, 여기서 뿐이고 노래가 나오네. 그 사람에게 찾아갔을 뿐이고, 그러니까 우리에게 찾아올 뿐이고. 우리의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주께서 이미 창세전부터 아시기 때문에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누리야! 찾아갔나? 주님 니한테. 찾아갔음 좋겠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찾아온 것은 주님 자신의 뜻을 담으려고 찾아온 것인 줄 깨닫고 내가 살기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