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호 8장 7-10절(앗수르)200311-이 근호 목사
32강-호 8장 7-10절(앗수르)2003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8장 7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3페이지입니다.
호세아 8:7-10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찌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 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저희가 열방 사람에게 값을 주었을찌라도 이제 내가 저희를 모으리니 저희가 모든 방백의 임금의 지워준 짐을 인하여 쇠하기 시작하리라.”
여기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등장하지요. 현대인에게는 상당히 낯선 나라가 등장하고, 이스라엘은 여러분이 잘 아시고요. 호세아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앗수르하고 이스라엘하고 9절에 보면 뭘 했느냐? 연애를 했다는 겁니다. 물론 앗수르만 연애한 것이 아니고 그 주위 애굽이라든지 여러 나라와 이스라엘이 연애를 했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연애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못해서 일방적인 짝사랑을 했을 뿐 결국엔 이스라엘이 연모하던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삼켜지고 정복당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멸망할 때 호세아선지자는 예언해서 이야기하기를, 그 이방나라를 사모하고 연애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보통 남녀 간에 있을 수 있는 사랑이야기, 연애이야기를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는 연유, 이유가 뭐냐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연애라는 이 자체가 조절이 안되는 감정이에요. 한번 빠져버리면 주위에서 어떤 충고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연애할 때는 미래도 보이지 않지요. 내일이 관계가 없습니다. 푹 빠지지요. 앞뒤 안가리고 거기에 모든 것을 몰입해 버립니다. 연애감정의 특징은 한마디로 해서 통제되지 않는 욕구,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하고 연애할 때 왜 방치하시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7절에 보면,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열심히 약속의 땅에서 농사짓는다고 나름대로 하는데 뭘 심었느냐? 알토란같은 곡식을 심은 것이 아니고 바람을 심었고, 바람을 심으니까 열매로 뭘 얻느냐? 광풍을 얻을 뿐이지요.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살아보려고 농사지으면서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바람을 심고 바람을 거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형편에 있다고 단정 짓습니다. 이게 이방나라가 아니고 자기백성 이스라엘에게 그런 결과를 예언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문제 있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인데 젖과 꿀이 흘러야 하는 땅에 아무 소출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나무라시고 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자체가 쭉정이같이 아무것도 없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약속이 있고, 택한 백성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짓을 했다는 것을 노출시킵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언약으로 당부했잖아. 이방민족과 사귀지 말라고.”
이방민족에는 하나님의 언약도 없고 예언도 없고 계시도 없어요. 그들이 믿는 신은 뭐냐? 그들은 우상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겨야 되는데 우상을 섬겼다는 겁니다. 우상을 섬기는 본성이 이스라엘의 연애감정, 이방나라에 대한 선망, 선호도 그런 것으로 노출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리 안되도록 조치했으면 되었지 않겠느냐, 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그릇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는 그 인간의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구원해 버리면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내가 구원받을 만한 자질과 인품, 그럴만한 품격이 되었기에 구원한다’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구원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간에 끼어드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분의 공로로 구원하고 그분의 희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잘나서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요즘 방송에 자꾸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신천지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 엉터리에요. 신천지의 핵심에 다가서려면 신천지의 교리 자체가 문제 있음을 지적해야 돼요. 그러나 mbc나 kbs, 어디에서도 신천지의 교리를 제대로 다루는 데가 아무데도 없어요. 다룰 자격도 안되고요.
신천지의 주장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14만 4천에 들어가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 내 미래 책임지기 위해서 악착같이 설치는데 가족이나 식구나 국가가 뭐 중요하냐는 말이지요. ‘신종코로나가 뭘 중요한가? 내가 14만 4천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이게 신천지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거예요.
이 만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만희가 말하는 그 구원의 방법이 너무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목표를 주는 거예요. 인생에 의미를 주는 겁니다. 14만 4천에 들어가라고. “전도해서 들어가는데 전도 못하면 110만원 벌금 내라.” 110만원 벌금 내도 좋은데 14만 4천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왜? 성경에 그게 나와 있으니까.
그런데 성경이라는 경전, 하나님의 계시라는 성경이 있고, 거기에 어떤 단어가 나오고 개념이 나온다고 해서 그걸 믿을 내용으로 하게 되면 그것은 이단이지요. 성경의 14만4천을 알려면 우선 십자가속에 들어가야 돼요.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는 사람에게만 14만 4천의 의미가 다가오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14만 4천의 의미를 몰라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본인이 구원을 받겠다는 이것이 죄라고 등장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나는 구원받고 싶다. 나는 죽어서 천국가고 싶다.’라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가 되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다.’ 그것이 죄성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14만 4천은 누구 몫이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의사지 우리의 요구사항을 하나님이 들어주는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신천지가 이 14만 4천을 모르지요? 신천지만 모를까요? kbs, mbc, tbc, 아무도 몰라요. 한국교회도 이 사실을 몰라요. 신천지와 똑같은 방법으로 교회업이라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십자가의 영이 오는 것은 주님의 고유권한이에요. 성령이 와야 십자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의 능력이잖아요. 주께서 오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구원받겠다고 설치면 신천지 꼴이 나는 거예요. 신천지와 한국교회가 한통속인데 누가 누굴 공격합니까? 다 이단인데, 둘 다 이단인데.
어떤 사람은 “개혁주의 신학을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데 개혁주의 신학을 하면 구원받습니까? 개혁주의신학을 하겠다는 그 자체가 구원욕구인데요. 신천지와 똑같은데요. 왜 인간이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창세기 3장 7절에 이미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졌다. 그래서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그 전까지 자기의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내가 벌거벗었다고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못합니다. 눈이 밝아서 자기자신을 객관화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대상으로 볼 수 있고 판단한다는 것, 이미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내가 주관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거울보고 내가 저기 있다, 혹은 내가 누굴 평가한다는 것은 이미 그걸 평가하는 주인공이 누구냐? 본인으로 이미 장착되어 있는 거예요. 주체가, 내가 있는 이상은 내가 어떤 객관이 있더라도 그 객관을 주체의 힘으로 바꿀 수 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이미 죽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의 그 주체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그 선악과 따먹은 것을 취소시키고 다시 선악과 따먹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차단시켜 놓았어요. 이미 범죄한 주체로서 생명나무 따먹을 수가 없어요. 그냥 따먹고 싶다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호세아 8장 7절에서 이스라엘을 텅텅 비워냅니다. 다시 말해서 바람같이, 어떤 공간을 빈 공간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쭉정이만 있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공간으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단계에 이스라엘을 빈공간, 헛방으로 만드시는 거예요. 바둑 두는 사람들은 알아요. 바둑이라는 것은 가로 세로 열아홉 줄, 열아홉 줄 그어놓고 거기에 교차점이 361개가 있거든요. 그 교차점에다 백돌을 쥔 사람과 흑돌을 쥔 사람이 번갈아서 딱 한 번씩만, 연달아 두 번은 안돼요, 딱 한 번씩만 둬서 백돌 같으면 백돌로 둘러싼 공간, 혹돌이면 흑돌로 둘러싼 그 공간에서 누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느냐, 더 많이 차지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바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번갈아서 두되 한 사람이 두 번 연속으로는 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번갈아가면서 한 번에 돌 하나만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집이라 해서 백돌로 죽 둘러싸도 그 안에 흑돌이 들어와서 두 집 이상 내버리면 백돌의 자기공간은 다 깨지는 겁니다. 내 공간 안에 두 집 이상 내버리면. 만약에 흑돌이 한 집이면 백돌로 둘러싸서 다 집어내버리면 되는데 흑돌이 두 집을 내버리면 동시에 못놓기 때문에 그 영토를 다 내줘야 돼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의 내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내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빈 공간일 때 이게 진정한 나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둑을 두신다 할 때 하나님의 천국은 뭐냐?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만 채워지는 공간, 하나님이 백을 둔다면 흑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나라를 이스라엘로 생각해서 이스라엘로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그 공간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유지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은 백을 쥐어놓고는 자꾸 흑을 사모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주변의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의 계시도 없는, 하나님의 뜻도 없는 그 나라를 되게 사모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모할 때 그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에스겔 16장에 그 이유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22절에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유다나라를 보고 이야기하면서 그 언니는 북쪽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나라인데, 언니가 음란해서 앗수르나라에 잡혀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동생이 되는 남쪽 유다나라가 더 심하게 음란한 죄를 범해서, 이제는 앗수르 다음의 나라 바벨론에 잡혀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호세아의 주제가 이스라엘을 음란한 여인으로 보고, 그 음란한 여인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저주받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안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남편으로서의 값을 치르고 기존의 모든 잘못을 덮어주면서 백성 아닌 자를 백성 만드는 그 예언이 호세아의 예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왜 이스라엘이 음란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음란한 이방나라를 상대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계속 언급을 하고 있는데 호세아도 그렇지만 에스겔도 마찬가지에요. 에스겔 16장 25, 26절에 “네가 높은 대를 모든 길머리에 쌓고 네 아름다움을 가증하게 하여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행음하고 하체가 큰 네 이웃나라 애굽 사람과도 행음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도다.” 이렇게 했어요.
여기에 큰 게 나오지요. 남성의 생식기가 크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큰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상당히 에스겔의 경우에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다리를 벌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남편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정결한 아내로 삼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7)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만들어놓으니까 이방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이 굉장히 아름답거든요. 14절에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보석이나 장식품, 이런 것을 탐해서 이스라엘을 넘보는데 이스라엘은 착각을 해서 자기 자신이 좋아서 이방인들이 자신을 점령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남성과 여성의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을 가지고 에스겔 16장은 설명하고 있어요. 남성은 주는 존재고 여성은 받는 존재. 남성은 채우는 것이고 여자는 담아내는 존재. 그리고 그 연결지점은 다리를 벌려서 그 사이에 있는 그곳이 바로 남자의 것을 받아 챙기는 여자의 신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남자의 뭘 원하느냐? 그 연결조건에 생식기, 하체가 큰 이웃나라라고 상당히 외설적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통제할 수 없는 욕구라는 거예요. 큰 것을 사모하는 통제할 수 없는 욕구가 성욕이라고 단정을 짓고 그 통제할 수 없는 성욕을 중심으로 해서 그 다음에 큰 것에 무엇을 집어넣느냐? 아름다운 장식품, 돈이 되지요, 금욕, 권세욕, 그리고 생존욕구, 이것을 누가 갖고 있는가? 앗수르가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오늘 호세아 본문에 앗수르가 나와요. 왜 이스라엘은 왜 앗수르를 연애했느냐? 지금 그걸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이스라엘이 그만한 어떤 자격이 있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제 꿈을 꾸었는데요. 제가 어느 강의 장소에 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강의실밖에 있었어요. 제가 강의실에 들어갔고 그 사람들이 강의에 참석을 해야 되는데 뭐가 굉장히 바빠요. 뭐하는데 바쁘냐 하면 손 씻는다고 바빠요.
평소에 워낙 매스컴에서 손을 씻으라고 하니까요. 첫 번째, 손을 비비면서 씻고, 두 번째, 또 손등끼리 비비면서 씻고, 세 번째, 손가락을 하나하나 돌려가면서 씻고……, 꿈 내내 강의 내용이나 복음의 내용은 하나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그저 손 씻는 그것만 보이더라는 겁니다. 손 씻는 그것에 분주해요. 그걸 보고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아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만 챙김 그것이 자기 주된 내용이구나.’
예를 들어 일기를 쓰는데 “오늘 날씨 맑음. 아침부터 손을 씻었다. 끝” 그 다음날 “오늘 흐림. 아침부터 열심히 손을 씻었다.” 그것뿐이에요. 손 왜 씻습니까? 나 오래 살기 위해서. 내 몸 내가 관리하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내 몸은 내가 스스로 관리한다는 그것이 뭐냐?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몸을 객체로 보는 거예요. 지금 있는 몸이라도 건지자는 그런 취지거든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고 나보다 더 잘사는 나라, 돈이 많은 나라, 권세가 있는 나라, 그 나라에 대해서 선망하는 거예요. ‘우리는 언제 잘 사는가?’ 손 씻는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15장 2절에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손 씻는 것이 마태복음부터 나와요.
예수님하신 말씀이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몸 하나 챙긴다고 그 몸이 천국갈 수 없다는 거예요. 18-20절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사람을 죽이기는 해요. 손 안 씻으면 바이러스가 사람을 죽이기는 하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을 가지고 손 열심히 씻는다고 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람들의 관심사가, ‘내가 내 안에 어떤 더러운 것 때문에 죽었느냐?’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손만 박박 씻는 거예요. 매일매일. 방송도 그것만 이야기하고. “이렇게 손을 씻으세요.” 당신만 문제가 아니고 남들에게까지 피해 입히지 말라고.
그러나 인간은 피해 입을 것도 없어요. 큰 것을 사모하거든요. 대단한 것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잘되니까 이방나라들이 그 약속의 땅에서 잘되는 그 땅의 백성들과 그 땅을 차지하고 싶어서 그들이 노린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있는가? 이스라엘은 큰 것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덫이에요. 이방 앗수르라는 악마의 나라,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바벨론나라, 이 나라가 왜 악마적이냐 하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미끼로 사용하신 거예요.
이스라엘은 에스겔 말씀처럼 어릴 때부터 아름다웠다. 곧 모든 장식을 했는데 그 이스라엘은 이방나라가 자기를 예뻐해서 자기에게 관계를 맺는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특히 크다는 것, 생식기가 크다는 말은 그만큼 통제할 수 없는 탐욕, 인간의 본성은 큰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라는 그 말입니다.
마태복음 4장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을 때 악마의 무기가 있어요. 그것가지고 인간을 그동안 현혹했고 조종해 왔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생존에 대한 욕구와 인기, 자기가 유명인사가 되려는 유혹과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겠다는 유혹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지와 나사로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경우라도 부자가 거지나사로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지가 팔자 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자기는 부자인데 자기 집 앞의 거지를 보니까 아무리 봐도 거지의 운명이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를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그 예를 드시는 이유는 절대로 악마가 천국 가는 일이 없게끔 하는 겁니다. 그 반면에 부자는 많아요. 크고 많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요. 많은 것을 가진자가 아무것도 없고, 게다가 몸까지 아프고, 건강하게 될 징후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러워 안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큰 것은 복이고 작은 것, 미미한 것은 시시하게 보는 거예요.
어떻게 모든 것을 가진자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선망하겠어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객관화 할 정도로 자기가 주체화 되어 있어요. 그냥 주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악마가 품고 있는 악마의 원함, 악마의 정신이 그 주체를 통해서 마구마구 터져 나오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앗수르가 남자고 이스라엘이 여자라면 남자가 여자한테 주려고 해요. 남자는 자꾸 여자한테 주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의 것을 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남자는 주는 존재고 여자는 받는 존재거든요. 이미 범죄한 인간, 대표적인 범죄한 인간을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책정을 하시고 이스라엘은 큰 것이 자기한테 오기를 바라는 겁니다. 대단한 것.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보다 큰 것을 바라는 것.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주고,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의 것을 원하고, 같은 말입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주고 인간은 악마의 것을 받고, 하체,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의 만남으로 자식을 생산하게 되면 악마의 정신은 확대되고 이 땅에 대대의 자식을 통해서 그 정신이 번식하게 되는 겁니다.
악마의 새끼를 계속 인간의 몸을 통해서 번식시키게 돼요. 이게 바로 손 씻는 거예요. 인간은 평생 손 씻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평생 자기 몸만 챙기면서 살다가 죽어요. 시편 78편 39절에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인간이 바이러스 감염 막는다고 아무리 손씻어봐야, 오늘 씻고, 내일 씻고, 20년 뒤에 바이러스 돌면 또 손 씻고, 그래서 인간의 주된 관심사는 손잘 씻어서 전염병에서 벗어났다. 그게 자기 일기장의 주된 내용이에요.
어떤 사람은 생각합니다. ‘3월에 바이러스가 번지니 좀 쉬었다가 4월에 교회 갈게요.’ 하는데 여러분, 3월의 신앙이 4월 된다고 바뀝니까? 신앙이 바뀌겠어요? 한때 쉬었다고 갑자기 좋은 신앙 됩니까? 4월 신앙은 3월을 통해서 이미 위선적이라는 것이 다 들통나버렸어요. 자기 살길, 생존의 욕구, 이것은 걷잡을 수가 없어요.
어젯밤의 꿈이 너무 고마워요. 그냥 손 씻는 것만 기억나요. 손만 그냥 씻어요. 모든 관심사가.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몸 편하고 따스할 때 믿는 신앙, 그러면 몸 힘들고 추울 때 신앙은 신앙도 아닌가요? 주님께서 부자와 거지나사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주체가 되어서 나라는 객체를 아무리 해도, 나는 거지를 미워하고 거지를 붙잡을 수 없는 주체입니다.’라는 흔적을 가진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나의 힘으로, 어떤 노력으로도 나를 바꿀 수가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그게 신앙이에요.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지기 전에 부자와 거지나사로 이야기를 한 겁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성급해서 ‘나는 천당 가는 거지 될래.’ 이렇게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면 안되고요. 부자 쪽으로 가야 돼요. 부자 쪽으로 가보게 되면 어떤 경우라도 거지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거지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안됐다고 측은해 하지요.
그리고 부자 됨을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어떤 인간도 스스로 부자가 거지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19장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왔을 때에 예수님은 절대로 부자청년에게 붙잡히지 않았어요. 부자청년이 오히려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아무도, 예수님이 부러워서 따라 오는 위인은 인간 속에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부럽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객관화해서 볼 때 예수님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은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요만큼의 애정이나 사랑도 인간에게는 애초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에스겔 16장에 나오는대로, 큰 것을 원하고 세상 것을 원하는 간음한 이스라엘나라지요. 모든 결혼이 다 외설적이에요. 모든 남자가 다 간부고 모든 아내는 전부 다 음녀에요. 여자들이 남자 고를 때 큰 것 원하지 작은 것 원하지 않습니다. 신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통제할 수 없는 욕구의 그 큼, 그 내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만약에 여자가 남자를 고를 때 어떻게 하느냐? 일단 키 크고, 인물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돈 있고, 나만 바라보고. 벌써 몇 가지입니까? 여기에 믿음 같은 것은 ……, 나중에 거지되고, 그런 것은 없어요. 키 크고, 성격 좋고, 인물 되고, 돈 되고, 나만 바라보는 것.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구할 때는 에스겔 16장에 나오는 것처럼 이방민족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점령하려고 하는 그것과 마찬가지에요. 남자가 여자를 고를 때 첫째 예쁘고, 두 번째 예쁘고, 세 번째 예쁘고, 네 번째 참하고, 다섯 번째 섹시하고, 여섯 번째 자기한테 고분고분하고, 일곱 번째는 여자가 돈 벌어서 자기는 취미생활하고. 그저 술이나 먹고 벤츠나 타고 다니는 그런 것. 남자한테 잔소리 일체 안하고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해도 고분고분하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모르는 점이 뭐냐? 이스라엘은 그저 다리나 벌리고 남자는 하체만 바라본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인물이 돼야 하체도 보는 것이지 인물이 안되면 꼴도 보기 싫어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에스겔서에서 이야기하듯이 이것이 인간이 객체가 된 내 안의 욕망을 주체가 통제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걷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타고난 인간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걸 대표로 이스라엘이 보여줬고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복이 보기 좋아서 이방민족이 와락 달려들 때 그 이방민족은 드디어 하나님의 올무에 빠진 거예요. “너의 정체는 악마였다.” 그 앗수르에 대해서 선지자가 성경 여러 곳에 몽둥이로 봐요. 이사야 10장 5절에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나라를 몽둥이로 사용해요 야구방망이로 사용해요. 몽둥이로 사용해서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패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자기가 쳐요. 마치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패는 것처럼, 죽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패는 거예요.
패야 돈가스가 맛이 나요. 제주도 어느 셰프, 백종원이 소개한 그 셰프의 돈가스가 맛이 있답니다. 나무망치를 가지고 돼지고기를 계속 패는 거예요. 얼마나 손님이 오는지 하루 손님숫자를 제한해서 받는 답니다. 돈가스 재료인 돼지고기를 패야 맛이 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몽둥이로 사용해서 패는 거예요. 계속 패는 겁니다. 바람이니까 허깨비,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없어야 이게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패면 팰수록.
자기 천당 가겠다고, 14만 4천에 들겠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패는 거예요. “너는 구원될 자격이 없어. 너는 부자이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가난하고 가난하신 예수님을 사랑해? 어딜 그런 거짓말을.”
“나는 예수님을 따를 맘도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도리어 미워합니다.”라는 흔적을 가진 자가 바로 구원받은 자에요. 왜? 돌이켜 봐서 내 주체를 포기한 사람이니까, 자기를 부인했으니까. 나라는 객체는 주님의 주체 앞에서 버려져야 될 객체임을 주님의 주체가 들어왔기 때문에 비로소 눈이 뜨이면서 파악하는 거예요. “주여, 제가 창녀고 제가 세리고 내가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저 같은 것은 지옥 보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연한 조치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몽둥이는 이사야 30장 32절에 가면 몽둥이가 패니까 나중에 몽둥이 스스로 교만해졌어요.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앗수르 다음에 나오는 몽둥이가 바벨론이라는 몽둥이에요. 하나님이 몽둥이를 가지고 몽둥이를 쳐버린 겁니다.
그 몽둥이, 바벨론 몽둥이는 누가 치느냐? 바로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예수님, 인자되시는 분이 오셔서 쳐버려요. 그리고 그 바벨론은 나라가 두 나라, 세 나라, 2백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나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벨론은 온 나라가 바벨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다루어집니다. 모든 나라가 선망하니까.
지금은 지구공동체, 빌리지라 하지 않습니까? 지구가 한 마을이잖아요. 감염병, 전염병, 신종코로나 같은 감염병에 걸리니까 걷잡을 수 없이 온 나라, 온 세계가 다 걸리지 않습니까? 전부 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것을 욕구한다는 것이 증명된 거예요. 똑같은 것을 욕구하는 거예요.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고, 걸릴 때도 똑같이 걸리고, 남녀노소, 직업, 인격, 신앙, 품위, 필요 없어요. 다 걸려 죽게 되어 있어요. 나만 빠질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병에 들어 죽어도 합당합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는 것은 뭐냐? 주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바로 쓴잔, 우리는 쓴잔 마셔도 당연해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쓴잔은 너무 씁니다.” 하지 마세요. 주님은 죄인도 아니면서 그 쓴잔을 마셨잖아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쓴잔 마시는 것이 낯선 것이 아니고 지당한 거예요. 지당한 것을 주는 거예요.
드라마 인현왕후인가 보면 장 희빈이 나오지요. 장 희빈이 사약 마실 때 아주 발악을 해요. 사실은 그게 콜라거든요. 그런데 연기가 그럴싸하게 보이지요. 발악을 하면서 먹었다가 다시 뱉어내고 그런다고요. 왜 그렇게 발악해요?
주님이 주신 사약은 우리보고 죽으라고 주신 사약이에요. 그래야 바둑판의 빈공간이 흑집이백집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자기 것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약을 내리신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거기에다가 선악과를 지우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의 대신 죽으심으로 쓴잔을 마시는 것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말이지요.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바로 그 흔적을 두고 사도바울은 내가 그 흔적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십자가를 나눠주는 겁니다. 14만 4천이 아니고요. 십자가를 주시는 거예요. 십자가를 마시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이 형성될 때 십자가의 죄씻음이 의미가 생기잖아요. 주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과, 주님의 죄씻음과, 대속하심이 의미가 생긴다고요. 주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요. 우리 안에서. 그 주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은 그것이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덫이 되어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에요.
사로잡혀 가서 이스라엘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 아니다.”라는 그 흔적을 가질 때 비로소 주님께서 주신 열두 제자를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 십자가가 들어오는 이스라엘로 형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작전이에요.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습니다. 뜻이 있어요.
“잡혀가라 세상에. 잡혀가고 네가 스스로 너를 구원하는 그러한 자체가 악마적이라는 것을 알아라.” 번식된 악마의 사고방식, 내가 스스로 구원하겠다, 스스로 선악과 따먹은 것을 취소 시키겠다고? 안됩니다. 주님이 주체가 되시고, 희생하신 주님이 그 쓴잔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 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은 뭐냐? 권세를 원한다. 하지만 너희는 권세를 원하지 말라. 스스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라. 그럴 때 비로소 왜 거지 나사로를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을 알든 모르든 간에,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따라잡을 수가 없느냐? 그것은, 인간의 욕구는 거지 나사로 쪽이 아니고 부자 쪽으로 쏠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거지 나사로가 나다.”가 아니라 “부자가 바로 접니다.”라고 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의미 있게 나타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우리가 남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누가 계신가를 보게 하옵소서. 자기 안에 주님께서 왜 십자가 지셨는가의 이유를 아는 영안이 열리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