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위한 십자가
누군가 자신에게 사회에서 종양 같은 자, 또는 교회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하면 두렵고 싫은 이유는 소속감이 주는 안정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힘 있는 자와 한편이고 싶고 그 힘의 영향력 안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그 힘을 본인이 직접 발휘하고 싶어 하는 최종적 방향까지 있다. 그래서 절대 힘의 원천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본능이다. 그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야무지게 따먹고 신과 같이 된 그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하나님이다. 인간이 최후까지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나’이니 결국 나는 신이다. 그리고 그 ‘나’는 내가 아는 그 ‘나’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나’가 누구인지.
사람은 그렇게 신과 같이 되고 싶어 했는데 막상 하나님은 너무도 사람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방어막 하나 없이 누가 봐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정신병원에 보내지거나 신성모독으로 찍히기 딱 좋은 모습으로. 그분의 정해진 행로가 그의 정해진 때에 맞춰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이고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대제사장들과 공회가 예수님을 그저 ‘미쳤다. 마귀 대장이다’라는 분노에서 끝나지 않고 ‘죽여라’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필요한 요소를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신과 같이 되고자 했던 악마, 그리고 그 악마의 숙주들, 여기에 상대가 될 만큼 만만하고 사람과 별반 차이 없는 약한 하나님이 와주시면 십자가를 이루기 위한 모든 셋팅이 다 이루심의 완성 지점을 향해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총집중해서 공격하고 쏘아 만들어진 구멍이 십자가이다.
전에 다시 교회를 다니고 있을 때 우연히 십자가 마을 말씀을 듣게 되었고 처음에는 언니에게 말해주었는데 나중에 그 교회 목사까지 알게 되었고 이 말씀은 이단적이라는 결론으로 내 앞에 도달했다. 말씀의 어느 부분이 이단적이냐고 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종교계에서의 평, 신학 역사 무시, 교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런 거 말고 말씀의 어디가 이단적이냐고 물으니 비슷한 대답이 돌고 돌았다. 그 목사는 주의 종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말씀을 들었다는 것 자체에 격분한 듯했다. 더 웃긴 건 그럼 왜 이 말씀이 진짜라고 생각하냐고 나에게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아주 멍청하고 비논리적이고 심플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예수님만 전한다. 말씀에 예수님만 들린다’ 끝...
나의 두 번째 질문은 왜 나만 이 말씀이 진짜인 것처럼 들리는 지였고 그 목사의 대답은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끌렸다는 것이다. 이때는 반발이 안 나왔다. 끌린다는 건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능한 거라는 믿음은 어디서 왔는지 그 말이 수긍이 갔다. ‘내 안에 이미 이단적 요소가 있었구나. 보면 끌려서 따먹을 수밖에 없는 이단적 요소’라는 절망감과 버려짐의 두려움이 밀려오는데 그 목사는 ‘아이들은 무슨 죄냐...’라는 정죄의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너만 지옥 가면 되지 아이들도 덩달아 교회 안 나가니 함께 지옥 가겠다는 나름의 걱정을 해주었던 모양이다.
이런 말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는, 아니 마음 쓸 내가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고 알았다 한들 그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쪽으로 해결을 할 수 있을지 머리만 굴리기 바빴을 것이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억울해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스스로 이단적 말씀을 끊고 원래대로 교회를 신실하게 잘 다니면 아무 문제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그들은 탕자가 다시 돌아왔다고 잔치라도 해주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안되었고 미쳐 돌아가시겠다는 심정으로 내 안의 이단적 요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사건으로 깨닫게 하셨으면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평안하고 감사만 하는 게 마땅할 터인데 실상이 그러한가. 새로운 사건을 통해 ‘너 이단이야. 사기꾼이야. 너의 하나님은 예수님은 가짜야’라는 말씀이 난사될 때 예수님 모독하고 모욕하는 일은 안 하고 싶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분노의 칼로 눈물의 창으로 계속 주님을 찌르는 사건이 반복된다. 마치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계속 실감케 하신다.
이 ‘나’는 겉사람이 썪어 문드러질 때까지 허깨비지만 너무 진짜처럼 허락하시는 동안은 늘 동행할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싫다고 버릴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다. 나오는 대로 질질질 흘리게 하시되 주님은 쏙쏙 의의 생산 재료로 활용하실 뿐이고 나에게 관심 있는 건 나밖에 없고 마귀밖에 없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단이고 너의 하나님은 가짜라고 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경유 해서 재규정된 성도라면, 생명 나무와 차단되어 결코 스스로는 생명에 이를 수 없는 정녕 죽은 자였음을 규정 받은 성도라면, 죽은 자가 그렇게 화내고 마음 아파하는 자신의 모습이 도리어 한심하고 수치스러울 것이다. 주님은 내가 믿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곧 나였고 그 하나님을 건들었으니 잠잠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나는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살았던 과거로 여행을 시키시면서 받은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상기시키고 사랑의 깊이를 더해주신다.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은 십자가 사건의 현장이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그 십자가는 어김없이 인간이 모시는 하나님을 공격한다. 그 현장에서 언약의 두 가지 면이 대척 관계를 이루며 발현된다. 밀어냄과 당김, 미움과 사랑, 저주와 축복.
십자가를 위한 십자가를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 사건의 유발과 그 사건을 다시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부활이 있을 뿐이지 인간구원, 인간의 부활은 없다. 십자가 사건이 부활 될 때마다 어김없이 주님을 밀치고 공격하는 전쟁이 일어나고 밀다가 도리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바깥으로 함께 딸려 나가서 자신의 실체를 발각당한 채 죽은 자로 행한 모든 것에 씻김을 받고 죄를 묻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종속되는 부류와 밀쳐버리고 여전히 자신은 안쪽에 남아 결국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속으며 저주 속에서 남는 부류로 구분될 뿐이다.
이 분류과정에서 인간이 개입될 부분이 조금도 없고 무슨 내세울 공로가 있을 수가 없다. 너무도 아끼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과 똑같이 주님을 밀치는 행위를 하다가 의도치 않게 십자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을 뿐인데 오는 동안 무척 힘들었다고 입 뻥긋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어쭙잖게 나름 착하게 살려고 했다고 내세우다가 예수님의 착한 일에 제대로 박살 날 뿐이다. 지금까지 아끼고 공들인 나 자신과 결별하도록 주님이 취하시는 조치에 몸을 맡기고 정말 살려둘 가치 없는 자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의만, 쏟아내 주시는 사랑만 감사하고 찬양할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