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0213b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안양20200213b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한 끝부분을 다시 이어보겠습니다. 내가 이단이다. 라는 말을 내가 이단이라는 말을 억지로 하느냐, 감격스러워서 하느냐, 이단이 구원받으려고 설쳤던 그 모든 시도가 후회스럽다. 할 필요도 없고 해도 소용없는 짓거리를 내가 왜 지금껏 해왔느냐 누가 나를 속였느냐, 정말 분통이 터진다. 이단이 이단다워야지 뭘 더 원해. 라는 거. 이것은 바로 야고보서4장에 나오지만, 두 마음을 품었다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없어요. 우열이 되는 거예요. 우열. 누가 위냐, 누가 아래 되느냐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욕심이 있다면 율법은 뒷전이 되는 겁니다. 할 수 없이.
양궁 있지요. 양궁을 보게 되면 여기 엑스트라 만점. 10점, 9점, 8점, 7점, 6점 있잖아요. 인간의 마음은 마치 양궁의 표적 같아요. 제일 중심에 되는 건 따로 있어요. 따로 있고,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 십자가 믿어서 십자가를 중간에다가 두고 싶어요. 자기 딴아. 나는 중심에 십자가 있다, 라는 그 인간 마음, 이런 마음 자체가 이단이라는 사실. 이게 마귀가 그렇게 시켰다는 사실을 인간은 도저히 성령이 오지 않으면 모르게 되어있어요. 성령이라는 말이 여기 4장5절에 나오는데요. 이게 바로 교만 되는 겁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려면요, 잘 들어보세요. 계시려면 내가 여기 있는 십자가를 내가 지식으로 알아서 공부해가지고 내 손으로 이걸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이게. 논리상 모순이 된다고요. 내 가운데는 가장 나다운 것이 거기에 박혀있어요. 내 마음 한 가운데는 가장 나다운 것. 이거 없으면 내가 아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이게 있어야 계속 나로 유지되는 그 무엇. 나다운 것이 있다.
나다운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이 중앙부위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걸 누굴 십자가든 예수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내 자리를 비운다 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 중앙자리를. 왜? 거기 비워버리면 나다움이 없으니까요.
심지어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지옥가도 나다움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지옥가도 있었지요. 거지보고 물 찍어달라고 했잖아요. 나다움이 있는 거예요. 끝까지. 여러분, 이 논리를 잘 보셔야 돼요. 내가 교회 다녀서 복음 듣고 누가 믿느냐 하면 내가 믿는다고 이야기해요. 내가 믿는다. “내가 믿습니다. 주의 이름을 믿습니다.” 주님이 “왜 믿는데?” “구원받으려고요.” “누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와 버리면 예수님이 오는 게 아니고 구원받은 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구원받은 나가. 구원받은 나가 자리를 차지한다고요.
이건 바로 욕심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과 소위 성경내용이 죽이 잘 맞았다고 인간이 본인이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은혜 받았습니다. 아이고, 나는 이런 복음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구원 받은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구원 받은 본인이.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십자가 이야기하고 예수 이야기하면 성질 안 나요. 왜? 예수님 벌써 십자가 지식 부분에 쫓겨나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나 구원받았다, 에 시비 걸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와락 폭발해버리죠. 결국 건드려봐야 제일 중앙부분에 너는 무엇으로 분노하느냐를 따져봐야 내 평소의 마음속에 무엇이 한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가가 그게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니 속에 로마서 같으면 십자가의 영, 성령이지요. 또는 마태복음 같으면 자기 십자가를 죽고 나와 함께, 십자가죠. 십자가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여기서 십자가가 중앙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이 그림을 그려가지고 내가 십자가를 모셔다가 집어넣는 게 아니에요. 집어넣는 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내가 있던 자리를 누가 아시는가, 주님이 뻔히 알아요.
니 속에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화내는지를 뻔히 안다 말이죠. 말이 어려우면, 쉬운 것으로 갑시다. 노아홍수 때, 홍수 나기 전에 사람들이 뭘 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노아홍수 빼고요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판다. 라고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뭐? 어째서? 뭐 사람들 다 그리 사는 거 맞잖아요. 그리 안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그리 살지.” “아이고, 예수님! 그런 말해도 나 하나도 기분 안 나빠.”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먹고, 마시고... 기분 안 나쁘다고요.
그런데 노아가 홍수 나기 직전에 먹고, 마시고 하니까 노아홍수가 심판이죠. 심판의 이유가 뭐라는 겁니까? 심판의 이유가 칼 쥐고 사람 죽이고 이거 아니에요. 심판의 이유가. 도적질한 게 아닙니다. 심판의 이유는 뭡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가 이게 죄가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아성이 바로 심판의 이유가 돼요.
먹고, 마시고, 월급 받고, 일하고, 사고, 나이 많은 만큼 놀러 다니고, 영화 보러 다니고, 이 모든 것이 죄라는 생각, 설교하고, 강의하고, 교회 다니고, 죄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그것이 심판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이 세상살이 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예는요, 흔히 세상에서 특히 결혼한 여자 쪽에서도 친정 쪽에서 그런 이야기 많이 해요. 친정 엄마가 결혼을 반대했는데 기어이 지 딸이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말이죠. 했는데, 그 집안은 안동권씨의 8대 장손집안이다. 일주일 스케줄이 제사지내는 음식 만드는 스케줄인 그 집에 시집갔다 합시다. 그 엄마는 그 딸이 꼴 보기 싫어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시집가니 좋디?” 시집가니 좋디? 하지요. 다시 말해서 “시집가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니 그게 좋으냐?” 라고 묻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니가 소속이 다르잖아. 니는 교회 다녀야되지 그 집에 지금 제사 거기에 빠져야 되겠느냐. 니는 소속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엄마가. 니 그 시간에 교회 나가 성가대 찬양해야 되는데. 교회 한 번도 못 나가고 맨날 큰 일 치르고 제사한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화가 나가지고 “그렇게 그 집에 시집가니까 좋디 그래? 응?” 여차하거든 빨리 갈라서라. 빨리 나와. 이렇게 요청하잖아요. 그게 바로 주님의 마음이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니까. 이게 당연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 할 도리 다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걸 누가 그렇게 긍정하느냐, 중앙에는 인간은 뭐가 있는 줄 몰라요. 모르는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중간에 7점, 6점짜리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거 할 때, “좀 도와드릴까요?” 아이고, 좋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면서 파고 들어갈 때는 여기서 강력한 마지노 저지선이 발동되는 겁니다. 발동.
내가 뭐 어때서? 내가 뭐 어때서? 밥 먹고 사는 게 그렇게 죄냐? 밥 먹고 살겠다는데 그렇게 죄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죄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에라, 니가 죽어라” 하고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이 그림은 양궁 표적 그림은 이렇게 추상적으로 그린 거지만.
사람 모습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람은 거울 보면 신체로 이렇게 있잖아요. 눈, 코, 입 있잖아요. 이런 사람이 몸체를 지탱할 수 있는 정신력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 정당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기 정당성. 자기 의에요. 그리고 자기 의고 여기에 대해서 외부에서 뭐라고 하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합리성이 여기 아주 작동을 해요. 변명을 하는 거예요. 합리적으로 변명. 변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눈에 보이는 거고, 눈에 보이는 이걸 야고보의 율법의 법칙에 의해서 이걸 치워버리고 남는 것은 표적. 나 자신이 여기에 들어있다는 거죠. 내가 있다면 내가 곧 신이다. 이리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신이라 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상 어디서 만들어졌느냐 하면 신이라는 것은 상인들에 의해서 이것이 만들어졌어요. 처음에 채집 그냥 열매 따먹는 채집생활, 주워 먹는 것, 따먹는 것, 채집 생활하다가 그 다음에 같이 비등한 시기에 정착을 하게 돼요. 정착하게 되면 농업이고 그 다음에 계속 떠돌아다니면 유목이 되거든요. 유목이 되는데 여기에 농사지을 때 손으로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야생에 있는 가축을 길들여서 그걸 옆에 두고 키워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2장에도 그게 나와 있어요. 그럼 이건 유목이 되겠지요. 농업과 유목이 거의 같이 가는 겁니다. 농사하고 하게 되니까 여기서 농업이 발달 돼요. 농업이 발달되는데 농기구의 발달 여러 가지 경험상 발달되게 되면 여기서 남는 여분의 생산물이 생겨납니다. 여분의 생산물이.
전에는 그저 하루 먹고 하다가 점점 발달되게 되면 여분의 것이 남아요. 바닷가에 산다고 하루에 고등어 3마리 필요해서 3, 4마리만 잡고 살았던 파푸아 뉴기아 주민들 옆에 호주가 와가지고 고등어 다 잡아갔잖아요. 잡아가니까 왠일이라? 저 사람들 매일 고등어만 먹고 살아? 이리 되는 거예요. 고등어만 먹고 사는 게 아니고 하루에 3마리만 필요하지만 그쪽은 고등어해가지고 그거 팔아가지고 그들은 다른 거 사먹고 그런다 말이죠. 고급신발이나 모든 것들을.
그때부터 파푸아뉴기아가 미개를 벗어나서 문명으로 가버려요. 여분의 것이 남으면 여분의 것은 이것은 무엇의 상대냐 하면 상인들의 무역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돼요. 무역을 하게 되겠지요. 무역을 하게 되면, 장사를 하면 이윤 없이 장사를 안 하잖아요. 그러면 장사를 할 때 거리가 멀면 멀수록 장사할 욕망이 더 땡겨지는 겁니다. 이쪽에서 천원짜리가 저쪽에서는 오천원짜리로 갔을 때 이윤 사천원을 보고 가지요. 가보니까 저쪽에는 만원한데. 그러면 오천원에 머물겠습니까. 만원짜리로 가겠습니까. 더 멀리 가겠지요. 더 멀리 가게 되면 이쪽에 있던 도시국가, 도시국가란 도시가 국가처럼 행세하는 것을 도시국가라 해요. 도시국가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지면 도시국가는 하나의 그 백성들을 묶기 위해서 지도자가 영적 카리스마를 주장하기 위해서 신의 아들로 행세하거든요. 제사장이 신의 아들로 행세하는 거예요. 그래야 단결이 되어 농업 지을 때 힘을 합칠 수가 있습니다.
비오는 것도 신의 뜻이니까 모든 사람 전부 다 자기 일 그만두고 이 관계 사업에 전부 다 충실하세요. 해야 이게 잉여 생산물이 많이 생산될 수 있습니다. 협업과 분업이 되면서 농사를 많이 지거든요. 갈 때 이쪽 신으로 가서 마을이 멀 떨어져 있으면 저쪽에 나름대로의 신이 있겠지요. 신의 이름이 다 다른 거예요. 신이란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신의 이름이 다를 때 장사하는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는 신의 이름으로 안하고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기가 저주 받는다고 자기 동네에서는 그걸 알았잖아요. 뭐든지 처음 할 때가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거든요.
진짜 이 동네가가지고 물건은 팔아야 되겠고, 만약에 다른 신을 불러버리면 다른 신이라고 배타해버리면 장사가 안 되잖아요. 그래가지고 한 번 해본다고요. 장사를. 이거 하기 전에 정보를 알고 그 다음에 수집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예측이 되면서, 예측이란 말은 합리적인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장사꾼들이. 왜? 다른 지역에 낯선 그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럼 이쪽 신에 가가지고 자기 신이 여호와인데 “에이고, 나 알라 믿습니다.” 이렇게 하면 장사가 잘 되는 거예요. 장사가 잘되면서 한 쪽은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이고, 여호와 버려가지고 벌 받는가’ 싶었는데 한 번 어겨보니 개코. 벌이 안와. 무탈해요.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쉬운 거예요. 여기서 알라 역할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장사할 때 여기 다 팔아먹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지요. 다른 곳에는 다른 신이 있겠지요. 그 다른 신도 아, 존경하고 그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그러지요. 아무 탈 없어요.
이 사람들이 본국에 들어와서 도시국가의 재정을 확보해 줍니다. 자본을 확보해주니까 진짜 신이라는 것은 뭐냐 돈이 신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해요. 돈이. 신을 인정 안하는 게 아니에요. 신은 여러 가지다. 여러 가지고 신이라는 특징은 뭐냐, 나한테 혜택을 줄 때 좋은 신이 되는 거예요. 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데 유리하게 해주면 그걸 편하게 들어오게 되면 이게 좋은 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의 기존의 신을 믿던 제사장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그 제사장이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고3이 있거든 기도하세요. 주께서 살아계셔서 응답합니다. 하잖아요. 그래놓고 제사장은 기도에 복채 얻어서 자기 고액 과외 하는 거예요. 누가? 제사장들이. 제사장들은 신을 믿으면 안돼요. 왜? 신은 있어야 돼요. 신은 있되 제사장들이 목사들이 신을 안 믿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살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 돈 가진 자는 누굽니까. 상인계급이기 때문에. 그들의 돈벌이가 없으면 나라의 돈의 회전이 안 됩니다. 신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정신적으로 전부 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의 뜻이라고 한다면 자기의 모든 죄 지은 것이 용서가 돼요. 왜?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면 용서가 되니까. 면죄가 되니까요.
종교라는 게 얼마나 좋은 줄 몰라요. 돈은 더럽게 벌어놓고 천국은 갈 수 있는 그러한 방안은 다 교회가 있음으로서 방안은 다 되는 겁니다. 주님 뭐라고 했습니까? 근원적으로 따져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것이 무엇의 근거다? 심판받는 근거다. 야고보서4장에서 이 세상을 쫓아난 것은 다 악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인간이 생각한 그 세상에서 쫓아난 것은 다 악한 것이다.
신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각 쪽 신마다 다 다르고 그 신을 신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의 이름으로 마음이 편해진 사람들의 돈벌이에 의해서 성직자들이 생활의 유지 종교가 되니까, 종교가 되어야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니 나라가 돼요. 안 그러면 지 잘났다 하면 안 되거든요. 그게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동기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 나와 있던 이스라엘이 자꾸 바알신을 믿지요. 우리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믿으면서 왜 바알신을 믿는가, 이게 자본이 되려면 외국과 무역이 되어야 돼요. 농사짓는 사람이 다른 신을 믿어버리면 만약에 다른 신을 외쳐버리면 이게 농사꾼이 계몽이 되면 안돼요. 지는 왜 왕 노릇하지? 잘못된 게 아닌가, 이성이 깨어지면 안돼요. 그래, 저 사람은 왕이 되어야 할 팔자고, 나는 농사짓는 팔자다. 이리 되어야 나라꼴이 돼.
만약에 여러분 직원가운데서 로또를 샀는데 로또가 당첨돼가지고 기분 좋아서 아침에 출근했는데 위에 부장이 뭐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돼요? 더러워서 내가 이 회사 인수할게. 주식은 다 가져와. 이게 얼마야? 25억. 내가 40억에 인수할게. 더러워서 이 회사 사버린다. 이리 되지요.
계급이라 하는 것은, 회사가 되려면 어떤 보이지 않는 권위 같은 것을 해가지고 이건 내 팔자다. 이런 게 있어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초월적인 것을 해야 되는데. 이미 인류의 사회는 자본이 들어옴으로서 자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운영됨으로서 더 이상 신이라 하는 것은 허울에 불과합니다. 가상에 불과한 겁니다.
자, 아까 다시 해봅시다. 양궁. 중앙에 보통 나가 있다 했잖아요. 사실은 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악마가 있어요. 악마가 있습니다. 악마는 보이지 않거든요. 영적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을 앞장세웁니다. 앞장세워서 야고보서4장에 의하면 세상에서 자꾸 쟁취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지면 안 된다고. 나보고 자꾸 닦달을 내요. 이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다? 너다. 너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예수, 하나님 다 너 천당 보내려고 하는 거야. 왜? 너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목사치고 하나님 믿는 사람 없어요. 하나님 안 믿습니다. 그것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믿지 않고 교회를 믿지요. 자기 사업체 업소를 믿는다고요. 나는 교회 불나도 좋아요. 예수님만 좋아요. 그런 목사 거의 없어요.
여러분, 교회 불나는 게 벌 받은 거예요? 여러분 몸 아픈 게 벌 받은 겁니까? 이게 벌 받았다고 생각하면 여러분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악마가 들어있는 거예요. 벌 받는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에요. 왜? 태어난 거 자체가 벌 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벌 받는다 소리 하지 마세요. 사는 게 벌이에요. 나 위주로 사는 게 벌이에요. 그런데 그 벌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어떠한 가능성도 없고 그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도 않아요.
아니 내가 없어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예수님은 좋겠다. 지는 구세주라고 그래, 좋다.”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그래, 구세주 많이 해라. 나를 지옥 보내고. 내 지옥 보내니 기분 좋디?” 이러고 있다고요.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 그 당시 도시국가에서는 신과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신과 돈과 거래가 돼요.
그 거래를 누가 주선하느냐, 제사장들이 주선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뇌물 바치면 복 준다. 이 말은 당신은 복 받을 자격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러니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신의 세계가 아니고 뭐냐, 인간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거리는 뭐냐, 여러분들이 전자제품을 택배로 받게 되면 택배 오겠지요. 홈쇼핑해서 전자제품 많이 받아보지요. 거기에 TV모든 부품들 함께 다 오잖아요. 그걸 이렇게 박스 째가지고 부품들 늘어놓으면 그게 TV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꽂을 때 꽂고 회로는 연결해야 되잖아요. 그죠?
오늘날 교회가 어떤 거냐 하면 성경에서 나오는 개념들 전부 다 이야기해요. 십자가복음 전부 다 이야기해요. 성경대로 야고보서, 누가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얼마나 많이 한다고요. CBS에 보면 성경공부 많이 하잖아요. 다 부품들이에요. 부품들. 부품들인데, 나중심의 뒤에는 배후에 악마가 있습니다. 나 중심의 여러 가지 것들을 성경구절들, 용어들 막 와요. 그런데 십자가로 하나로 회로가 연결이 안 되네요. 성경 단어부터 해가지고 줄줄이 외우고 성경으로부터 성경을 푼다는 교회가 한군데가 아니에요. 말씀으로 말씀을 푼다는 교회가 많아요. 많이 하는데. 많이 먹으라 해.
많이 하는데, 그렇게 많이 하는데, 보세요. 십자가를 경유하지를 않습니다. 십자가는 여러 가지 전자제품 부품 중에 하나에요. 부활도 있고, 십자가, 재림, 연결 못하고 그냥 놔둬버려요. 필요할 때, 병 아플 때는 이 구절, 애 성적 나쁠 때는 이 구절, 천당 갈 때는 이 구절, 천당 갈 때는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는 이 구절, 그리고 뭐 할 때는 기도할 때는 기도하라, 이 구절, 회로가 십자가로 모여들지를 않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해요? 십자가외에는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도대체 사도바울은 그 구약의 성경구절, 그 많은 것을 어떻게 촘촘히 연결해서 달랑 딱 하나를 이야기하지요. 십자가. 그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이게 과거 사건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 있는 현존의 방식이에요. 현존의 방식. 주께서 살아있을 때 십자가로 살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이 땅에서 철저히 패배자. 철저히 이단으로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 메시아한테 한 행세가 이거였다고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패배했습니다. 저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 버림받았습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우리의 본질이었습니다. 버림 받아야 마땅했고, 이 땅에서 성공하면 안 되고 패배하는 종자야 되고, 왜? 아담에 속했으니까. 마땅히 패배해야 되고, 악마가 이겨야 되고, 인간은 패배해야 되고, 실패해야 되고, 죽어야 되고, 지옥가야 마땅하고.
세리와 창기와 강도 그것이 그리고 귀머거리, 앉은뱅이, 눈먼 봉사, 우리가 그 사람들 가지고 동정할 이유 없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의 본질이에요. 눈 감아서 불편한 게 당연하고, 눈 떠서 보인다는 게 과분한 은총 같아. 이게 과분한 거예요. 이게. 이 내가 행세하는 거하고는 나 눈뜨면 안 되는데. 나는 지금. 청아! 이리 되어야 되거든요. 청아! 어디 있느냐 청아! 심봉사가 되어야 돼요. 요나는 물에 빠져야 돼요. 고래 속에 완전히 노량진수산시장보다 냄새 더 많이 나야 돼요. 고래 속에 빠져야 돼요.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안에는, 내 중심에 하나님의 주님, 성전이 나한테 있다는 것. 나는 거기에 대한 시다바리,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요. 하라하면 하는데, 종에 불과하지 내가 10점 만점 엑스트라 직전에 있으면 안 되거든요.
악마는 그 중심에다가 자꾸 우리를 불러 모아요. “성경공부 했냐? 방금 끝났지. 이리 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지독한 현실이다. 이거 말고 다른 현실, 니가 머리가 있거든, 깨어있거든, 니가 합리적이거든, 이성적이거든, 머리로 생각해 봐라. 이거 말고 다른 거 뭐가 있느냐, 신에게 빌어라. 잘 먹고 잘살고 잘 팔고, 잘 싸고 행복하기 위해서 그거 때문에 신이 있는 거야.
이건 인류 역사상 계속 반복해서 했던 그 악마가 이야기했던 것을 계속해서 지금도 나한테 속삭이고 있어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다고요. 아까 나의 지시 했지요. 정신 차려! 착각하지 말고. 망상가 되지 말고. 몽상가 되지 마라. 진짜 현실은 뭐냐, 먹고, 마시고, 끝! 그것뿐이야.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바로 세상이다. 그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과 원수다. 야고보서4장4절 말씀. 그러니까 이 야고보서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이건 정말 기적 받은 사람만 골라 가겠다는 뜻이거든요. 니가 애쓴 사람을 골라가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늘의 은사를 받은 사람 혹시 계세요? 그런 입장에서 찾아보는 겁니다.
그 봉 준호의 기생충이란 영화에 대해서 제가 오늘 아침에 그 뒤에 댓글 달았어요. 다시 보기에 댓글 달았어요. 뭐냐 하면 세상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봉 준호는. 뭐냐 하면 세상 있는 그대로 보면 세상에는 누가 착한지, 누가 선한지, 누가 악한지가 이젠 혼돈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 세상은 답이 없다.
내가 영화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영화에도 나왔지만, 잘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잘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에요. 남한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에요. 나쁜 놈은 남 빌어먹고 남 지하에 살면서 결국은 칼 가지고 마지막 장면에 죽이지요. 주인을 죽이는 그 놈이 은혜를 받아놓고 은혜를 악으로 갚는 그 놈이 나쁜 거예요. 못사는 사람이 나쁘다, 라고 메시지를 전해버려요.
그러면 지금까지 혁명을 외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도 못한 쇼킹한 내용이 되어버려요. 적이 누가 따로 있어야 혁명이 되거든요. 혁명의 전복의 대상이 있어야 되는데 혁명이 가능한데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분간도 안 되는 세계에서 혁명 자체가 무의미해진 이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해서 상 탄 겁니다. 그 메시지가 강렬해서. 적과 아군이 불분명해요.
다시 말해서 봉 준호 감독은 이 땅에서 답이 없다. 그럼 답은 어디 있느냐, 나도 몰라. 자기는 모르겠데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이 땅에서는 질문만 있을 뿐이지 답은 없다. 답은 성도 자체가 답이에요. 하나님의 기적 받은 성도 자체가 답이에요. 그 답이 없어요.
야고보서는 바로 그 답을 너희가 답이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바로 흩어진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어졌다. 너희는 하늘의 성령을 받았다.’ 야고보서4장5절.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스며져있다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가 정답이에요. 우리 자체가. 정답인데, 우리가 정답인데, 우리가 정답인 것을 우리가 몰라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세상 속에 떠나지 않고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은 왜 이 정답의 고귀한 가치가 빛이 나는지, 왜 주님의 십자가가, 주님의 성령과, 주님의 예수님의 하신 율법을 이룬 것이 왜 정답인지를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우리는 뭐냐,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에 대해서 감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감사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여기 4장6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 바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 겸손 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니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니 속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너는 안 중요하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령을 안 받고 겸손해 버리면 이 10점 만점이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나는 겸손하다. 가 되겠지요. 삼백이란 유명한 외국 영화 있잖아요. 그리스와 바사나라하고 페르시아하고 전쟁했던 그 때 바사나라에 나왔던 그 왕 이름이 아하수에로왕이에요. 그 사람이 망했던 이유가 남 그리스 치다가 스파르타 300명한테 당해가지고 진 거예요. 그 사람이 이상한 수레를 타고 한 말이 있어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관대하다 해가지고 도망갈 때는 막..., 관대하니 신의 관대함을 반영해주니 이 승리는 이 관대한 자의 겸손한 자의 승리라고 우기다가 완전 박살나버렸지요.
겸손을 무기로 삼은 거예요.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사고, 팔고 할 때 여유 있게 하기 위해서 신이 원하는 성품을 내가 갖게 되면 내가 먹고 사는데 유리하지 않겠느냐, 꼼수를 쓴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바로 마귀다. 그게 바로 마귀가 그런 짓한 거예요. 마귀가.
자, 4장11절 봅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했지요. 방금 우리가 배운 거 공식을 집어넣어봅시다.
나와 너는 피차가 되지요. 나와 너. 나와 너는 피차가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야고보서에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고, 너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라. 아까 이야기한 공식. 나는 뭐다? 나는 이단이다. 이걸 슬프게 하면 안 되고, 아휴!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단이 이단 아닌 체하랴 얼마나 힘들었고, 이단이 안 되고 천당 가려고 이건 교회의 목사 욕하지 마세요. 본인이 그렇게 속임을 당하려고 유난을 떤 거예요. 유난을. 날 잡수세요. 속아 넘어가세요. 하고 유난 떤 거예요. 아, 이거 빠져나와야 되는데. 나는 그냥 이단이에요. 전에는? 전에도 이단이었지요. 전에는 슬픈 이단이었지요. 지금은 기분 좋은 해방된. 이제는 나는 이단이다. 기분 좋은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 윤정 아들이 온 동네방네가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 엄마 장윤정이다!”고함지르는 거예요. 그 애가 좀 크면요, 부끄러워서 들어갔을 거예요. “느 엄마 장 윤정이다.” “하지 마. 하지 마. 조용히 해. 부끄럽다.” 이리 하지만. 철이 없기 때문에 그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 장윤정이다.”
다시 전자제품 박스를 봅시다. 박스가 아무것도 없으면 안 나와요. 회로가 되려면 이 모든 주어진 일어난 모든 일 세상의 뉴스나 신종코로나, 전부 다 어디로 회로를 이어야 됩니까? 십자가로 회로를 이어야 되겠지요. 그래야 남을 피차에 비방을 안 한다니까요. 야고보서4장 11절. 피차에 비방을 안 하고 그 자리에 율법의 완성, 여기서 율법이지만, 사도바울은 십자가지요. 완성이니까. 율법의 완성이니까. 율법의 완성을 딱 놓게 되지요.
그러나 그 방법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 방법이. 인간은 돌아서면 어느새 10점 만점에 내가 들어가 있어요. 나는 이단인 걸 알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게 들어가 있어요. 뭐만 들어오면 무조건 이게 들어있어요. 어떻게 아느냐 남이 시비 걸면, 십자가마을에 가가지고 시비 걸리면 화 확 내고 싸우고 있어요. 4장 11절에 보면 피차 형제들이 싸우는 이유가 바로 세상적인 것이 중간에 차지했기 때문에 싸운다는 겁니다. 그건 세상에서 온 거지, 하늘에서는 싸움이 없어요. 피차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럼 나는 어디에 들어가느냐, 여기 6점, 5점짜리 비켜줘야 된다고요. 그러면 내가 이 자리에 나는 이단이다. 집어넣지 말고, 어떤 계기에 의해서 내가 쫓겨나야 되지요. 그래서 십자가로 회로가 연결이 되면 항상 십자가에 의해서 내가 나의 자리가 추방되고 쫓겨나야 돼요.
내 자리는 나한테 관심 없을 곳으로 추방되어버려야 돼요. 그럼 나한테 관심이 없으려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좀 어려운데요. 내가 5점, 4점짜리로 추방되려면 그 빈자리에 내가 있던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주시는 일이 그 자리를 채워야 됩니다.
“오늘 저 뭐할까요?” 이리 되어야 되지. “저, 어때요?”하면 안돼요. 주님의 지시 “오늘 저 뭐할까요?” “이거 하게 되면 저는 이런 인간 되지요?” 라고 하지 말고 이런 인간 이건 없애버리고 “뭐 할까요?” “헤어질까요?” “뭐할까요?” 항상 뭘 할까요?를 생각해야 돼요. 뭘 할까요? 내일 생각하지 말고요. 지시 받는 거예요. 참, 이 말이 어려워요. 지시 받는다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의 율법의 완성을 지시받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을.
그 다음에 12절을 보게 되면, 첫 째 시간하고 연관해 보겠습니다. 첫째시간에 이야기한 거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의 자아는 마귀가 만든 거고 없어지고, 우리 입을 통해서 하늘의 은사에 그것이 집약체로 율법이 나온다 했지요. 율법이. 그 나온 율법을 봅시다.
12절에 보면,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누굽니까?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다. 구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되어있지요. 상당히 어렵지요. 나보고 피차에 나보고 하는 이야기 아니지요. 이건 묵직하게 되어야 되지요. 묵직하게. 나는 니하고 거래한다. 나는 니하고 흥정한다. 이거 아닙니다. 니 누고?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저요.” 니는 빠지고. 니는 누고? 니는 없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주일날 설교에 제가 삭개오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삭개오. 삭개오가 내가 4배나 갚겠나이다. 할 때, “저, 어때요?”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묵직하게 그냥 들어온 거예요. 내 집인 줄 알았는데 내 집이 아니고 누구 집이었습니까? 주님의 집이 되어버린 거예요. 들어온 순간. 주님이 오기 전까지는 내 집이란 말이죠. 내가 중앙에 있어요. 내가 돈을 누구한테 기만을 쓰던 내가 베풀던 내가 알아서 내 지시 따라서 내가 해요.
그런데 내 지시가 이게 할 필요가 없는 그 가벼움, 그 자유함, 그 고마움, 어떤 경우냐 하면 주님의 지시 따라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4배나 갚았잖아요. 이웃사람들은 주님이 안 보이니까 삭개오 마음을 모르니까 “아이고, 삭개오님 이렇게 인심도 좋고.” 개과천선했다고 뭐라고 자꾸 내 자아를 형성 시키려고 또 온갖 타인의 평가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삭개오가 뭐하고 하겠습니까? “이 돈 내 돈 아니고 이 지시한 분 내가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면서 삭개오는 주님 전파가 되는 거예요. 혀 속에 묵직한 완성이 복음의 완성이 나온다 말이죠.
야고보서는 이리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복음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피차가 의미 없이 날아가 버렸다고요. 피차가. 니는 잘났고 나는 못났다가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피차. 니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가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아까 그 꿈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꿈에 뭔가 쫓긴다는 말. 누가 쫓긴다는 말은 쫓기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지요. 그 쫓기는 것이 좋은 게 아니고 불쾌하다는 말은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나의 육의 본성 때문에 꿈에서 이게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절벽에 떨어진다든지, 누구한테 쫓긴다던지,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어요. 실험도 참 얄미운 실험인데. 꿈은 뭐 자기의 트라우마가 꿈에 나타나고 온갖 이론이 난무하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실험으로 보여줄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하고 어떤 사람이 자고 있는 걸 랜덤해서 조사해가지고 꿈에 빠졌다는 걸 깨닫고, 스포이트로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한참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물방울을 딱 딱 떨어뜨린 다음에 얼마 안돼서 그 사람이 잠에서 깼어요.
꿈 이야기해보라 하니까 잠자고 있는데 갑자기 계곡에 물이 넘쳐가지고 산 꿈이 물 꿈이 되고 홍수 꿈이 된 거예요. 홍수 꿈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자기 조직화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조직화. 스스로 자기 방어체제가 가동되어있어요. 잠잘 때를 사실은 꿈을 가수면이라 할 수 있는데, 가수면 상태에서는 육체가 그야말로 대부분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왔을 때는 차갑다는 느낌을 봐야 물에서 방어체제에 딱 돌입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인간의 꿈이라 하는 것은 대부분 자면서도 자기를 스스로 자기를 지킴. 자기를 지키는 몸 자체가 이미 거기에 자기 지키는 걸로 완전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 자기 지키는 것이 사회적으로 빠져나오면 뭐가 되느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요. 그래서 그 심리학자는 과학자 입장에서 뭐냐, 뭐가 진리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게 진리 다에요. 과학자를 들리지 않더라도 이건 본성적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간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멸망당하고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고? 우리보고. 우리 본성이 그런데. 방법은? 이단 되면 돼요. 성령 받아서, 이건 내가 고칠 문제이다. 가 아니고 개과천선할 문제가 아니고 죽을 때까지 100살 때까지 오래도 살려고 한다 하여튼. 주욱 이 조직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이걸로 그냥 가요. 이단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그냥 이단 되세요. 오늘의 복음입니다.
즐겁게 이단 되세요. 왜? 몸이 바로 복음 중심이 아니고 내 지킴 중심이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속입니까? 못 속입니다. 그토록 은혜 받았다 해도 돌아서면 다 희석되고 증발되고 남는 건 노는 것 이것뿐이에요. 그럼 왜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래야 니가 손쓴 거 말고, 정말로 성령이 온 사람, 니가 손쓴 거 말고, 수작부린 거 말고, 복음 들어서 조립해가지고 지가 어설프게 전자부품 떼어가지고 십자가 나오지도 않는데, 해가지고 화면 나오지도 않아. 잘못 끼웠어. 결국 나온 것은 나는 관대하다. 이것만 막 나오면서도.
남들한테 건드리면 나 십자가 안다고 이렇게 우기는 그 본성. 그 본성이 최선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단 맞습니다.” 즐겨. 그것이 너무나 고마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깨닫지 못한 것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했을 때, 이건 혀를 벌려서 할 수밖에 없어요. 해야 돼요. 말할 수밖에 없어요.
시어른이 “니 시집와서 한 거 뭐 있노?” “아무것도 없어요. 헤헤” 헤헤 웃으면서. “아무것도 없어요.” “니는 남편이 벌어다 준 거 니는 쓰기만 했지?” “저는 쓰기만 했어요. 아이구~ 재미있게 쓰기만 했어요.” 이게 무슨 싸움이 됩니까. 자기 저주 받겠다는데 뭐. 자기 합리화, 변명 전혀 없잖아요.
얼마나 도를 닦아야 그게 나오는지. 막상 당하게 되면요, 또 이상한 꿈을 꾸고 시어머니 목 조르는 꿈꾸고 도대체 이 몸이라 하는 것은 죽어 없어져야 이게 벗어나지 몸이 있는 한, 지 잘났다는 것은 이건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에서는 지우지 말고 계속 봐야 된다는 거예요. 니가 입법자냐?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는데 니가 뭔데 하나님을 갖고 이용하려고 하느냐. 야고보서에서 딱 하잖아요. 누구 구원하기도 주님 마음대로. 멸하는 것도 주님 마음대로인데 니가 왜 저 사람을 멸해야 돼. 저 사람은 구원 받아야 돼. 니가 자꾸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것이 니 안에 있다면 너는 그야말로 10점 만점에 주님 계신다면 나는 그 변두리에 앉아가지고 이단 맞습니다. 하고 그것도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지요. 그것이 이제 오늘 4장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해놓고 야고보서는 이리 합니다.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라고 하지요. 이걸 평생 지우지 마세요. 이게 딱 누구 이야기입니까?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 신체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신체는 지적당해도 마땅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신체는 예수님을 밀치는데 한 몫한 신체기 때문에 그 티를 그 값을 죽을 때까지 우리는 보여주면 돼요. 그것도 기쁘게, 즐겁게 하세요.
아휴! 내가 이렇게 나쁘다니. 이렇게 뭐 후회해봐야 그 후회 같은 거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니가 후회 해봤자 돌아서면 헤헤할 인간인데. 내 니 회개 안 믿는다.
따라서 주께서 우리가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냈는가, 에요. 수요일날 했지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빼낸다고요. 내가 천당 가는 정보모아서 제시카는 외동딸 손가락 꾸려가면서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게 아니에요. 딩동~ 누르는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는 그냥 내 욕망대로 남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빼내주는 것을 남한테 설명할 길이 없네요. 이 놀라운 기적을. 제 강의 듣고 나중에 결국 삐져 도망간 사람들은..., 이 강의가 굉장히 중요한 강의에요. 가라, 이 말이죠. 왜? 주께서는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는 그 권능과 자격과 권리는 전도하는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잖아요. 주님한테.
그러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요. “남은 그게 믿어지는데 왜 나는 그 말이 안 믿어지니 나한테 납득하게 설명해 보라.” 이런 이야기해요. 미치고 환장하겠네. 오메~ 오메. 나도 설명이 안 돼.
나도 설명이 안 된다고요. 옛날식 같으면 설명했지요. 기도원에 기도했다 뭐. 이 근호 목사 설교 들었다. 그거 다 말짱 다 소용없다 말이죠. 주께서 일하지, 지시 받지, 우리는 결과물이지 내가 싸대서 구원되는 것은 이것은 악마의 수작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다만 여기서 하는 건 이단이니까, 내 이단 할게. 기쁘게 이단 할 테니까 악마의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라. 오직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자랑도 없다. 이상 모델은 나한테는 없다. 이대로 살다 죽어도 괜찮아. 이단이니까. 이런 마음으로 자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그동안 속이고 왔습니다. 안 들킬까 싶었는데 이렇게 들키게 해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고,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이 사랑, 주께서 그 사랑의법 안에서 주께서 이미 성령의법 안에서 오직 주님만 십자가만 높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