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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00213a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야고보서

안양20200213a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 총 정리하는 세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야고보서3장부터 하겠습니다. 야고보서3장에서 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어요. 보통 구약에서는, 구약뿐만 아니고 인간에서는 그 사람의 특징들을 이야기할 때, 혀가 아니고 얼굴이지요. 선볼 때 헤~하고 혀 내밀고 선보지는 않잖아요. 선 볼 때는 얼굴보고 하지 혀보고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사람이 이리 있는데, 보통 옷을 입고 꾸미고 얼굴은 화장을 해가지고 멋있게 하고 깔끔하게 웃으면서 만나잖아요.

그런데 철갑옷으로 싸매요. 혀를 빼고 온 몸을 다 가리는 거예요. 온 몸을. 차도르처럼. 이슬람 여인들이 온 몸을 다하는 것처럼 다 가리되 혀만 빼꼼히 내놓고, 혀만 내놓고 나머지는 다 가려버리는 겁니다. 야고보서3장에서.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좀 이상하지요. 혀만 내놓고. 입도 안돼요. 혀만 내놓아야 돼요. 나머지는 다 가린다는 것은 이상적인 모델 상을 찾지 마라, 에요.

야고보서에서 항상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야고보서에서는 말씀이 우선이에요. 율법이 우선이에요. 말씀이 율법이 같이 쓰고 있는데. 이럴 때 인간세계는 뭘 원하느냐, 말씀이나 율법을 원하는 게 아니고 이상적인 모델이 본인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상적인 모델로. 본인이.

그래서 하루 온종일 아침 눈만 뜨면 늘 생각하는 것은 오늘 내 모습이 얼마나 근사할까, 남들 보기에 얼마나 근사하게 보일까, 그리고 3년 뒤에 5년 뒤에 모습은 어떻게 근사하게 이 세상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까, 나는 어떤 멋진 집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고, 내 가정이나 내 모든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까,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까, 그리고 자기가 자기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서 정립이 되어있을까, 그것을 사람들은 온 종일 생각합니다.

목표라는 거, 기대라는 거 있지요. 여러 번 제가 설명했습니다만, 인간의 자아라는 것. 어떤 사람은 자아라는 말만 하면 어렵다 해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아라는 것은 매일같이 어디서 확인하느냐 하면 누구 앞에서 확인하느냐 하면 거울 앞에서 자아를 확인해요. 거울 앞에서. 아침에. 거울 보면 자기 모습이 비취잖아요. 자기가 자기 모습을 못 보니까. 전신거울 앞에 보는 거예요.

이 거울이 어느 날 깨졌다고 봅시다. 거울이 깨졌다. 거울이 집에 아예 없다고 봅시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이상한 바이러스가 퍼져가지고 거울이라고 비취는 것은 다 녹아져 내렸다고 봅시다. 그렇게 되면 손거울이나 스마트폰거울이나 다 녹아져 내렸다고 봅시다. 하여튼 반사되는 건 전혀 없다고 본다면 자아를 본인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이게 바로 모든 전신을 다 가려버리고 혀만 내놓는 그거하고 유사한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율법중심으로 말씀중심으로 나가야 되는데 인간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 하면 오늘도 나 자신이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와있는가, 어느 정도로 나는 잘 가꾸어져있는가에 거기에 정신이 다 팔려있는 거예요.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전신을 이 전체를 신경을 써야 되는 거예요. 머리부터 신발까지. 머리핀까지 전부 다. 모든 게 전부 다 나를 대변해 주고 있는 그런 사물들이에요. 머리부터 해서 전부 다.

만약에 그냥 대충 이렇게 머리 핀 꽂고 신발 신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냥 가만있지 않고 속으로 하지요. ‘패션 감각하고는 참. 참 휘황찬란하다. 안 맞다. 바란스가 언바란스다.’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할까봐 사전에 밖에 나갈 때는 전신거울 앞에서 바란스가 제대로 인지 색깔이 맞는지를 보는 겁니다. 귀걸이는 벌건 거하고 신발은 시커먼 거 해가지고 바란스가 안 맞지요. 같은 브라운 계통을 하던지, 같은 초록 계통을 하던지, 나 자신을 근사하게 확립하는 여기에 모든 정신이 다 쏠려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니는 딴 소리하지 말고 혀만 달랑 내놔라. 혀입니다. 얼굴이 아니고 혀입니다. 자, 거울 없어요. 거울 깼습니다. 거울을 깨버리면 뭐도 깨지겠어요? 자아도 별 볼일 없지요. 자아가 써먹을 데가 없어요. 거울이 없으면. 왜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니까.

기말치고 난 뒤에 성적이 나올 때 됐는데 애가 성적표를 엄마한테 보여야 되는데 “엄마, 나 머리 묶은 거 어때?” “애들이 머리 묶으니까 예쁘다고 하던데.” “내 안경 쓴 거 어때?” 엄마는 뭘 기다립니까? “야, 딴 소리 하지 마! 말 돌리지 말고 성적표 내놔 봐!” 엄마가 성적표 나올 애는 성적표 그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완성도가 니 안에 들어있는지를.

그럼 혀는 뭐냐 하면 혀는 전신에 신체덩어리, 몸 덩어리는 필요 없어요. 뭐냐 하면 바로 육과 바로 몸이지요. 몸과 주님의 영, 영의 세계, 정신세계, 영의 세계의 매개체로 뭘 보느냐 하면 혀를 거론해버립니다. 혀. 혀가 매개체가 되어버려요. 희한하지요. 혀가 매개체가 됩니다.

혀에서 나오는 게 언어고, 말인데, 이 말에 불이 섞여있는지, 아니면 하늘의 것이 섞여있는지를 한 번 보겠다는 거예요. 불이 섞여있는지, 아니면 야고보서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사가 섞여있는지를 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의 은사는 이 세상에서는 성도의 혀를 통해서 전파된다. 또는 표현된다. 이렇게 지금 야고보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자아가 얼마나 근사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니 속에 들어있는 너의 본질이 혀를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 나오는 것이 율법이 원래 원했던 그 내용과 일치되느냐를 보겠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진행 논리 과정입니다. 율법정신의 여기에 확산화 또는 확산되는 것, 발산되는 것을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원하는 겁니다.

하늘의 은사 있잖아요. 야고보서1장17절 한 번 읽어볼까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각양 좋은 것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빛의 아버지로부터 오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괄적으로 욕심이라고 보고, 욕심이 있으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 사망의 지표, 사망의 환경 속에서 지금 모든 땅에 있는 것은 마지막 귀결이 사망으로 끝나요.

아무리 젊어도 나이 들면 다 죽습니다. 100살 넘었다고 좋아요? 우리나라에 현재 100살 넘은 사람이 약25천명됩니다. 많지요. 옛날에는 그렇게 안 많았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 벌을 복역기간을 늘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 하도 못돼먹었으니까 고생 더하라고 죽지는 않고 아파서 빌빌거리면서 치매 걸리면서 100살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세상은 달리 해석해가지고 “야, 세상 좋아졌구나!” 이렇게 해석하는데 할 일없으면 가는 게 좋지요. 할 일없는데. 회사 할 일없어서 책상 빼고 의자 들고 갔는데 갈데없어가지고 퇴직하고 난 뒤에 퇴직금 받아놓고 갔으면 간 거지 맨날 할 일 없어 아침마다 와가지고 다시 그 회사 출근해서 턱하니 서서 지켜보고 있으면 그 직원들이 “과장님, 이제 퇴직했잖아요. 좀 꺼지세요. 가세요.” “갈 데가 없다. 놀던 데서 놀아.” 얼마나 귀찮겠어요. 그러니까 장수 앞에 효자 없습니다. 보통 병 앞에 효자 없다하는데 병 걸리면 다행인데 병 안 걸리고 오래있으면 더 골치 아파요.

치매 걸리고 오래 산다. 요거 괜찮아요. 요거 괜찮습니다. 간섭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데 정신 말짱한데 오래 산다. 돈 가지고 자식들 줬다 폈다 놨다 해요. 정신이 온전하기 때문에. “너그 돈 때문에 나한테 찾아오지.” 아직 정신이 맑았거든요. 둘째 아들은 봉투에 얼마 넣었는데 니는 얼마 넣었는고? 이거 골치 아파요. 아주 골치 아픕니다. 자식들 온들 다 체크하게 되면 보통 문제 아닙니다. 아예 정신 없어가지고 요양병원에 지금 천구백 몇 년도인지 모를 때 편해요. 다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편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오래사세요. 하지만 사실은 그거 본인한테는 세상에 대해서 이 욕심 많은 세상에서는 교도소 같은 동기들이 “형님, 출소하지 마시고 같이 있어주세요.” 하고 똑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안돼요.

계속 말씀드린다면 이 욕심이라는 것을 내가 달리 이야기했지요. 야고보서1장에서는 욕심이라고 되어있지만, 저는 이걸 이상적인 모델을 추구하는 것. 이게 욕심입니다. ‘아, 이거 아니야. 아니야. 이거 내 욕망에 충족되지 못해. 더 있을 거야. 오! 저 사람 좋네.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오! 저 가정 행복하네. 우리 가정도 저 가정처럼 행복해 지고 싶어.’이런 것. ‘오! 저 차 뺐네. 천팔백 만원 주고 차 뺐네. 나도 중고라도 저거 한 번 해볼까.’ 김언중씨 백옥자 여사처럼. 중고차 산 거 뽑은 것처럼 그렇게 뽑고 싶은 거예요. 남 차사면 덩달아 지 차있는데도 또 차사고 싶어요. 어떤 사람은 차가 3대가 있는데 전기 차 산다고 떼 부리다가 또 세금으로 폭탄 맞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전부 다 뭐냐 하면 나의 이상적인 새로운 모델로 나한테 자꾸 다가오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결국은 죄를 낳고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죄가 장성하지요. 인격이 장성한 게 아니고, 야고보서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자아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 세상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뭐가 주인공이냐 하면 유기체가 내가 아니고, 죄가 유기체가 되어버린 거예요. 내 안에 죄가 자라나는 거예요.

내가 자라나는 게 아니고, 내 안에 바이러스가 자라나는 것처럼 환자들에게는. 나는 나의 욕망을 내가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돼요. 마치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는데 어느 날부터 강아지가 주인행세하게 되면 감당을 못하잖아요. 주객이 바뀌었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죄가 들어오게 되면 주객이 바뀌어요. 죄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방법은 뭐냐, 보이지 않는 죄가 하나의 렌즈를 통해서 나오면 죄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죄의 렌즈, 악마의 렌즈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아성을 욕망에 맞추어서 계속해서 키워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아가 키워지는 것은 내가 키울 때에 본인 혼자 힘으로 키워지는 게 아닙니다. 주위에서 떠들어요. 동창생이 와서 옷 바꿔 입자. 신상 나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주위에서 떠들어요. 너무 구닥다리다. 옛날 패션이다. 그래야 팔리니까. 계속해가지고 ‘아, 그런가. 나는 이것이 만족한데. 아, 이거 만족한 상태가 아니구나! 아, 그래 내가 옷을 엉뚱하게 입었구나. 그러면 내가 이상적인 모델을 찾아가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애가 성적이 2등하면 1등이 남아 있잖아요. 1등 남아있지만 전교1등 또 남아 있다고요. 대치동 학원에 몇 군데 다니느냐 그거 신경 쓴다고 자기는 엄마로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 할 일이 결국 추구하는 게 뭡니까. 이상적인 나, 이상적인 우리 가족 모델. 자꾸 이상적이 국가 모델.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봉 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작품상 4개를 타고 난 뒤에 일본에 있는 감독이 평하기를 같은 업종에 종사하면서 나는 봉 준호감독의 발밑에도 나는 못 들어간다. 이런 이야기했다고요. 발밑에도 못 들어간다. 그럼 그 사람은 감독을 그만 뒀습니까. 아니지요. 새로운 모델이 생긴 거예요. 그전에 서양인의 감독을 추구하다가 이제는 봉 준호감독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시상식이 있던지 우리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모든 욕망은 거기에 좍 거기에 몰려오게 되어있어요. 모든 욕망이 거기에 몰려온다고요. 거기에 야고보서는 모든 그 욕망이 한 곳에 휩쓸리는 그 곳, 그 곳 자체에 대해서 뭐라고 반격하느냐 하면 여기 17절에 보면 각양 좋은 것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다 위로부터 오는 거예요. 위는 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과 대립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요. 세상에서는 위를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에서는 위로 올라갈 수도 없어요. 아래는 따로고, 위는 따로에요. 위, 아래, 아래, 위 따로 놀아요. 야고보서에서는. 그러니까 이게 이미 나라는 유기체보다도 더 센 유기체가 죄인데 사실은 악령이라 보면 돼요. 악마. 악마가 인간을 장악해서 노림수가 뭐라 하던가요. 이상적인 모델상을 추구하는 겁니다.

반지하방에 살다가 호화저택 잔디밭 있는 그 호화저택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 쪽에.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모든 사람이 그걸 추구하니까 상을 주는 거지요. 자기의 본질이 들킨 거죠. 인간의 모든 걸 가리고 혀만 있다면 혀에서 빠져나온 게 뭐냐 하면 아카데미 작품상이 빠져나온 겁니다. 모든 인간은 전부 다 한 통속이다. 동일했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공감하는 거예요. ‘그래, 우리가 원했던 바로 내용이 저거였었어. 그거다.’

그런데 야고보는 뭐냐 하늘이 있다. 그리고 하늘이 있기 때문에 땅에서는 하늘로 가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 은사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은사이기 때문에. 그럼 좋은 것은 하늘에 있다면 땅에 것은 뭡니까? 좋지 않다 정도가 아니고 악하다. 또는 나쁘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나쁜 생각이 모아져서 자아가 만들어진 거예요. 나라는 게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 인간이 이 자아를 가지고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느냐, 그런 방식은 이게 옛날 구약방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가지고 율법을 성취할 수 없어요. 자아는 이미 오염되어있기 때문에. 죄를 오염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이상적인 모델로 달려가는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게 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할 것이다. 나는 건강할 것이다. 생활이 넉넉할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모델은 야고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니 혀로 말해봐라. 자, 말해보자. 말해보게 되면 혀만 남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머지는 이것이 사라지겠지요. 그렇지요. 혀만 남고. 혀만 남고 사라지겠지요. 혀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사라진다면 요 사라진 안에는 뭐만 남아 있느냐 하면, 이건 본질. 그 사람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이게 형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야고보서에서는 따지지 않아요. 니 내부, 또는 니 내면, 내부에 하나님의 율법이 은사로 들어왔을 때는 그것이 혀로 통해서는 언어를 통해서 그 티가 나게 되어있다. 그 품새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대로 들어나게 되어있어요. “저 어때요?” 라고 하지 마라. 니가 뭐를 추구하고 니 입에서 나오는 관심사가 뭐냐를 니 혀로서 해봐라. 이 말이에요.

해보게 되면 그 혀에서 나온 말을 구분하겠다는 거예요. 지옥불이 나오는지, 하늘의 화목의 지혜의 말이 나오는지를 보겠다는 겁니다. 3장8절에 보면 독이 가득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와 총명이 나오는지를 보겠다는 겁니다. 말입니다. 말.

많이 선생 되지 말라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남한테 자기의 의사를 이야기할 때 말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사람한테는 자기가 제자가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 순간 자기는 스승의 기능을 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야고보 말고 갈라디아서를 한 번 봅시다. 갈라디아서1장8절을 보게 되면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지금 야고보서를 정리하면서 제가 제안해보는 겁니다. 여러분의 평소 입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저주가 거침없이 섞일 수 있는 말들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이야기했는데. 이건 무슨 대단한 자심감이에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말을 대인관계에 의해서 처음 보는 사람도 괜찮고, 대인관계에 의해서 아니면 TV생중계에 나가서 이것을 아주 신나게 아주 기쁘고 즐겁게 거침없이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할 때, 사도바울은 지금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신바람이 나서. 평소에 그의 본질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었으면 이 저주 이야기가 아주 신이 났어.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이걸 이 저주이야기를 나는 노리고 있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생각할 때 아까 사도바울이 이상적인 모델 상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요. ‘그래, 나는 이상적인 사도가 되어야 돼! 남들한테 존경받는 사도가 되어야 돼.’ 이런 마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나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야 돼.’ ‘나는 훌륭한 집사가 되어야 돼.’ 그런 마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never, 결코 없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뭐가 형성될 때, 바로 악마의 렌즈, 자아가 형성될 때나 신경을 쓸 문제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야고보서에서는 율법의 완성, 말씀의 내용이 나온다고요. 그러려니 하지요. 하지만, 제가 갈라디아서1장8절 보니까 입에서 나오는 게 장난이 아니지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이렇게 표현해요.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현실이 이 혀를 통해서 드디어 나온다.’ 술술 실타래 풀리듯이 나오는 거예요. 참 이게 성경이 장난이 아니지요.

그리고 갈라디아서1장9절에서 보게 되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저주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신감이 대단합니까. 자신감이라고 했지만, 더 정확히 말해서 자유입니다. 켕기는 게 없는 거예요. 자기 몸둥아리가 본질로만 되어있고 점선으로 되어있으니까 또는 다 가려졌으니까 아예 없는 거예요. 혀만 달랑 있고 혀 빼놓고 아무것도 없어요. 살, 팔, 다리, 정강이도 없고 엉덩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혀만 달랑 있어요. 율법적 차원에서 볼 때에.

자아라는 게 없다니까요. 자아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을 안 해요. 니 혀 바닥에서 뭐가 나오는가 보자. 니 본질이 어떤가 보자. 지옥 갈 뉘앙스가 나오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화목과 지혜가 나오는지 진리가 나오는지 한 번 보자. 지옥의 말인지 아니면 지혜의 말인지 한 번 보자. 이것만 점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선생된 자들이여, 조절해라. 니가 지옥불이 나오는지, 지혜가 나오는지 보자.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니가 그 머리 염색 어디서 했어?” 이런 거 안 물어요. 천사들이 그런 거 묻지를 않는다고요. “어디 미장원에서 했는데?” 그런 거 안 묻는다니까요. “귀걸이 어디서 샀어?” 그런 거 안 물어요. “똥배는 왜 튀어나왔어?” 그런 거 안 묻습니다. 다이어트 제대로 했구나, 그런 거 안 묻는다니까요.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뭐냐 하면 그걸 아주 확정을 지어버려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하나님과 사람을 이렇게 대비시켜놨어요. 같이 안 보고 대비시켜놨습니다. 해놓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혀가 아니다.

사도바울에서 있어서의 나라 하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본질을 누르면 뭐가 나오겠지요. 양갱이를 누르면 양갱이가 터져 나오듯이. 뭔가 누르면 그 내용이 입을 통해서 뭔가 나오겠지요. 왜냐하면 성령이 불의 혀같이 나왔으니까. 불의 혀.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나왔으니까. 그만큼 언어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 로마서10장에서도 같은 말이에요.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바위가 끊어지고 태풍이 불고 신종 코로나가 있고 그게 병이 낫고 그렇게 해서 그게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내가 전한 복음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되어있거든요. 로마서10장, 참 쉽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되어있고. 전파가 중요해요.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되어있지요. 전파하는 자. 그리고 전파하는 자가 지가 전파하고 싶어서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심을 입은 자에 한해서만 전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로마서10장에서는 뭐냐 하면 성도를 하나의 빈 통으로 보는 거예요. 역시 자아는 없어요. 자아라는 것을 챙길 여유가 없어요. 그냥 말씀이 와서 쑥 통과하듯이 뭐 지나갔나? 쑥 지나간 거예요. 치킨 집에다가 치킨을 시켰는데 배달하는 총각이 이쁘다. “아이고, 총각 이쁘다.” 그런 거 물을 필요 없어요. 후딱 손에서 뭘 뺏어야 되느냐 하면 치킨만 뺏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총각인지 결혼했는지 신경 쓸 거 없어요. 문제는 이쁜 총각인데 맛이 없어. 그러면 두 번 다시 전화 안 합니다. 아줌마든지 오토바이 탄 할망구가 오던지 관계없어요. 가성비대로 맞춰. 만오천원짜리 만오천원다운 치킨만 있으면 다음에 또 배달시켜 먹습니다.

하늘에서 온 은사는 야고보서에 의하면 율법의 완성 말씀이에요. 그 말씀의 내용은 원래 출처가 하늘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왜 땅이 아니어야 하는가. 땅은 왜 아닌가. 그건 야고보서 내용대로 땅은 지금 죄가 인간들을 전부 다 정신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은 사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서 여기는 각양 좋은 것은 이 땅에 찾아와도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봉 준호 감독이 작품상 받을 때 우리는 기뻐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런 상 없어도 또 다시 그걸 확인하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상 없더라도 주면 받지만. 없더라도 그게 각양 좋은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나를 이 자아를 더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게 만든다면 이건 좋은 게 아니에요. 하나의 빈 관으로 쓰신다면 이제 다 썼다 하게 되면 오히려 홀가분하게 이제는 퇴직하시면 되는 겁니다. 떠나면 되는 겁니다. 관으로.

다 쓰지도 않았는데 지가 알아서 자살하고 이러면 또 안 되고요. 주께서 다 쓰실 때 떠날 준비가 돼있다면 그 사람 입에서는 하늘의 것만 계속해서 평소에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모든 행위 같은 것도 나오지요.

다시 강의를 처음부터 하게 되면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에요. 한 사람 안 왔기 때문에 서론이에요. 본론은 다 오셔야 본론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와 나의 지시. 내가 누구 지시를 받고 사느냐를 보자. 내가 평소에 누구 지시 받고 사느냐. 인간의 지시는요, 항상 뭐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괜찮은 자아상과 관련되어있어요. 괜찮은 자아상과 관련되어 있는데, 주님의 지시는 이 자아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아상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주님의 지시와 나의 지시 사이가 함께 이 세상의 몸을 지니고 있으니까 여기에 악마의 작용도 함께 있지요. 이 가운데서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지시하느냐 하면 나의 지시를 뭐하느냐 하면, 여기 나가 있잖아요. 내가 항상 주님의 있을 자리를 내가 건방지게 자꾸 빨리 이걸 치우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치운 경향을 이 인간의 육이 있는 이상은 이걸 어떻게 조절하거나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내 육에 충실하고 주님은 지시대로 작용한다면 나는 필히 뭐가 되느냐 하면 이단이 되어야 돼요. 내가 이단. 특히 야고보서에서의 율법은 역시 율법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도다 하는 자리에다가 나는 이단이라고 할 때, 만약에 내가 나를 지시한다면 이단이 마귀가 나를 지시하는 게 되겠지요. 이 자체를 첫 번째, 즐겁고 고맙고 감사하다. 요런 생각이 들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서글프다, 구원에 실패했구나! 어쩌지? 무슨 노력을 더 해야 되느냐? 나는 초조하다. 나는 불안하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성도는 뭐로 보느냐 하면 내가 이단된 것을 기쁘고 즐겁고 감사히 여기는 것이 바로 성도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없어요. 이 둘 밖에 없어요.

자기가 이단된 것이 즐겁고, 기쁘고, 감사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된 것을 기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나를 없애는 게 아니고 주님의 지시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계속 나를 살려요. 한 번 물어봅시다. 나라는 것이 세상에 속했습니까? 하늘에 속했습니까? 나라는 것이. 내 몸이. 세상에 속했지요. 세상에 속한 것은 죄에 그리고 거기에 욕심, 죄, 사망, 여기에 속한 것 중에 일부가 나기 때문에 나가 나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결국 누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하늘의 각양 좋은 것과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과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내가 이단이 아니고 성도의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생각한다면 거기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여기 가로에 누가 포함되어있습니까? 나를 집어넣겠지요. 자아를 집어넣는다고요.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다. 이리되면 내가 여기 들어가겠지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악마가 노리는 거예요. 악마가 원했던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어요. 야고보서에서의 원하는 것은 자아입니까? 율법입니까? 율법이지요. 예수님은 율법대로 오셔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각양 은사를 무상으로 우리에게 줬잖아요. 무상으로.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뭐가 갑이 되어서 살아나야 돼요? 주님의 은혜가 주님이 주신 각양 은사가 갑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럼 갑이 갑 되려면 무엇이 을이 되어야 됩니까? 내가 을이 되어야 되지요. 나는 욕망이기 때문에. 을로서 나타난다는 것.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까.

지금 내가 말장난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디모데전서에서 이야기했지요.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복음 앞에서 나는 그런 것을 내가 복음이 아니었더라면 이걸 어찌 알았는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 않고서는 내가 이단인 것을 어떻게 내가 인정하겠느냐 말이지요. 자꾸 성도되려하고 이스라엘 되려하고 내가 구원받으려고 안타깝게 손톱 다나갔어. 절벽 올라간다고. 손톱 다 날아갔어. 이거. 그래도 나중에 미끄러지거든요. 자기 몸무게에 의해서. 자기 세상의 당기는 중력에 의해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곱 번 실패하면 여덟 번 또 시도하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아이고~~ 그게 무슨 짓이에요.

이걸 로마서9장에서는 간단히 표시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랑이, 미움 받는 사람은 애초부터 본인이 무슨 행동하는 거 관계없이 미움이 있는 거예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뭐든지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이에요. 시부모가 며느리를 미워한다. 어떤 짓을 해봐요. 그 마음은 안 바뀝니다. 니 내 아들 손잡고 처음 올 때부터,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집에 놀러올 때부터 나는 기분 나뻤어. 하면 죽을 때까지 기분 나쁜 거예요.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애초부터 첫 인상이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거예요. 오히려 시어머니한테 잘해주는 그 꼴이 더 미워.

맨탈에서 이겨야 돼요. 니 미우면 나는 나도 한 미움하거든. 같이 미워해버려야 돼요. 같이 미워해야 되지. 그래야 공평하거든요. 한 쪽은 미워하는데 한 쪽은 그걸 달래려고 그러지 마세요. 남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남편이 싫어한다. 같이 싫어하면 돼요. 남편이 잔소리 한 마디 하려하는데, 남편은 그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여자는 부엌에 가면 부엌에 따라가 가지고 계속, 계속 이야기해요. 부엌에 가면 부엌에 가서, 거실에 가면 거실에 가서 김언중씨를 백옥자여사가. 계속 따라가면서. 고만! 고만! 질리게 만들어버려요. 한 번 다시 그런 헛소리 했다봐라. 그게 얼마나 길게 했던지 광산김씨 테이프가 빨리 돌아가요. 너무 잔소리를 많이 해서. 한 마디 했다가 식겁했어.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 따라다니는 모습이 희한하지요.

무시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사적은 모든 기도가 이단입니다. 라는 걸 내용이 포함된 기도가 무시로 기도에요. 그게 뭐냐 하면 몸 위주가 아니고 진리 위주, 또는 복음 위주. 그래서 기도는 복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내 몸, 내 자아위주 아니에요. 몸이 어떻게 됐든 간에 그냥 복음과 진리만 발산되기를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모든 전신은 다 가려버리고 뭐만 빼꼼히 내놓는다? 혀만 내놓는 거예요. 혀에서 뭐가 나옵니까? 언어가 나오거든요. 말이 나온다. 말이라는 것은 니 속에 있는 본질을 눌러보니까 이게 혀의 말로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말로서.

그 말이 하늘의 은사와 일치되는지, 아니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욕망의 내용과 일치되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세상과 욕망되면 그걸 이미 지옥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지옥의 불.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악마의 독이라고 표현합니다. 독물이 묻어있는 말을 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밑에는 독이 서려있고 지옥불이 있는 것은 딱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자아 긍정’이에요.

내가 니한테 잘해주니까 니도 잘해줘. 내가 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니도 나를 사랑해줘. 자,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자기 자아 긍정이지요. 내가 니를 사랑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니가 부정하지 마라. 내가 얼마나 인간성이 좋았으면 너 같은 인간을 사랑했느냐. 이게 다 깔려있어요. 부부사이도 마찬가지고 자식사이도 마찬가지고 다 깔려있어요.

그러면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러면 되지요. “나는 이단이다!” 나 이단 깔고 들어가요.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될 수 없다를 밑에 깔고 들어가면 돼요. 왜? 나는 개판이기 때문에. 이걸 깔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뭐 티 잡을 게 없어요. 본인이 괴물이라는데 뭐. 알아서 괴물이라 하는데 뭐. 그 뭐라고 티를 잡습니까. 인간은 움직이는 폭탄입니다. 폭탄이에요. 그냥. 뭐가 터져 나올지 몰라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제가 야고보서는 율법 했지만, 제가 지난 설교에서는 이걸 가지고 기록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록. 말로서 기록. 우리에게 나오는 것은 내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야고보서에 이런 말들이 있더라. 로마서에 이런 말들이 있더라. 갈라디아서에 이런 말들이 있더라. 우째 그 말이 이단 같은 내 몸을 통해서 어떻게 복음이 나오느냐 말이지요. 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내용이 나오느냐 말이죠.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주님만이 구원자다. 하는 그게 인간의 구원은 소용없고 주님만이 나온다는 말이 어떻게 나같이 나만 챙기는 인간에게 어떻게 입에서 그런 하늘의 본질이 나오는지. 본인이 깜놀! 본인이 깜짝 놀랄 지경이에요.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지요. 나는 이단이니까. 내가 한 게 아니고 성령이 나로 하여금 이단을 이단 되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여분의 것으로 튀어나와버려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잘난 체 하기 때문에. 잘난체하는 나를 아주 이단으로 만드는 과정 속에서, 이단으로 만드는 그 에너지, 하늘의 에너지가 입에서 튀어나와버리면 이건 자기를 미워하는 거고 자기를 부인하는 거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모습이 되는 거예요.

다시 해볼게요. 갈라디아서1장에. 사도바울은 자기의 말 속에 무슨 단어를 아주 자신감 있게 집어넣었다고 했습니까? 저주. 그럼 천주교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가 남을 저주하다니 그럼 너는 저주 안 받나?” 하겠지요. 그럼 사도바울이 준비된 게 뭡니까? 나도 이 복음, 이 기록, 이 주신 말씀, 나도 이 말씀을 내가 받지 않으면 나도 저주받는다고 1장 8절에서 이야기했잖아.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말씀을 전하는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복음을 아는 우리라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가 된다? 저주를 받는다. 그 저주 속에 나를 집어넣었잖아. 됐냐? 할 말 없지? 그게 바로 당당함이지요. 자유지요. 당당함. 자기 자신을 이단 속에 집어넣는 것. 저주 속에 집어넣는 거지요.

어제 수요일 날 설교하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을 언급하면서 뒤에다가 그러나, 그런데, 하지만, 제발 이런 말 좀 넣지 말라는 말이죠. 이런 말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주님 생각하다가 갑자기 본인 생각나가지고 저도 좀 넣어주세요. 갑자기 혀만 남는 게 아니고 혓바닥 빼놓고 다 뒤집어씌웠는데 갑자기 이걸 벗겨버려. 괜찮은 혀 가졌으니까 나머지도 건져주시옵소서. 이런 본전 챙기겠다는 시도밖에 안돼요.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필요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면 끝날 문제지요.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 야곱이라면 “나는 태초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됐어. 그래서 나는 지금 턱 괴고 편안하게 있는 거야.” 여기에 무슨 하지만, 그러나, 이런 거 없어요. 끝났어. 끝났다는 뜻이거든요. 모든 게 최종적 완결된 상태의 자신감, 자유라는 말이죠.

“그런데 목사님, 그래도 자꾸 그런데, 그러나, 하지만, 저는 뭐 자꾸 그런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처음시작은 주님부터 시작을 했어요.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복음 전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지금 나는 잘 전하고 있지. 지금 하나님께서 천사가 지금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지금 제대로 설교하고 있는 거야. 그지. 자기가 이단이 되어야 되는데 이단이 안 되고 복음 전한다는 그걸 근거로 해가지고 이단에서 면제된 사람처럼 지가 지금 이상적인 모델로 자기 자신을 모델화시키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중에도 누가 작용합니까. 악마가 막 작용하는 거예요. 그걸 야고보서에서는 욕심이라고 해요. 이왕이면 이거해가지고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3명 4명 말고 삼천명, 오천명이 갑자기 욕심이 막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욕심이. 어떤 실적에 대해서. 결과에 대해서.

그러니까 설교하는 것도 죄가 된다. 기도하는 것도 죄가 되고, 무시로 기도하는 거요, 무시로 기도하는 거 죄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는 거. 뭘 해도 성경의 어떤 단어를 다 집어넣어도 이건 나하고 정착될 게 아니고 내 속에 있는 본질 혓바닥하고 이렇게 정착되어야 되지 나하고 정착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나잘났다 밖에 안돼요. 남이 지적하기 전에 먼저 내가 나를 지적할 줄 알아야 돼요.

우리는 그 자체가 기록이 되어야 되고요. 몸이 아니고 진리가 되어야 되겠지요. 복음이 되어야 돼요. 진리, 복음이 되기 위해서 강도는 평생 강도짓 했어야 되는 겁니다. 강도짓 했어야 돼요.

그래서 첫 째 시간을 마감하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묵직함’ 길바닥에서 낙엽을 주우면 낙엽이 빳빳하지는 않잖아요. 낙엽이 휘어졌잖아요. 낙엽이 휘어지고, 은행잎도 이렇게 구부러져 있다면 여고생이 이걸 책갈피에 넣고 위에 묵직한 벽돌 석장을 덮어버리지요.

이 사소함이 자아와 결부될 때는 절대로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집에 수도관이 샌다. 이거 사소한 문제 아니거든요. 부르면 몇 시에 오고 나가야 되는데 몇 시에 오겠나, 이런 사소한 문제가 아닌데, 이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게 뭐냐 하면 자아가 사소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이 내 몸이 아픈 걸 아픈데 그걸 사소하다 하는 것은 그건 속임수에 불과해요. 꿈도 아니고요. 정말 사소한 게 아니거든요. 어떤 분이 애를 가르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가 하는 말이 “선생님, 어제 꿈에 어떤 괴물이 따라와요. 괴물이 막 따라와서 나를 잡으려고 해요.” 이 꿈을 분석하게 되면 문제가 괴물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가 더 대단해요? 괴물 앞에 잡히는 내가 평소에 대단하게 여겼기 때문에 적이 발생한 거죠. 아닌가요? 맞지요.

괴물이 괴물답다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내가 괴물 이상으로 나를 더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 다 뽄대가 난 거예요. 다 들통이 난 겁니다. 그러니까 날 잡아먹는 괴물이 왔지요. 그래서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상담해줘야 될지. 상담은 간단해요. 뭐냐 하면 앞으로 괴물오거든 자기가 괴물 속에 들어가면 돼요. 괴물 속에 뭐가 들었는가 보자. 내가 괴물의 일부로서 들어가면 돼요. 도망치지 말고 그 속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악마 속에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에이, 별거 없네.” 이리 되거든요. 왜? 악마 속에 들어간다는 말은 니만 악마인가 나도 악마거든요.

악마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은 이 자아가 아무것도 아닌 게 바깥으로 괴물 노릇하고 악마 노릇하면서 “나는 위대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하고 떠버리고 다녔다는 거지요. 허구가, 아무것도 아닌 허구가 죽으면 그만인 것을. 아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잖아요. 그걸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 처음부터 우리는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망이 지배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안개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없어지는 것이 되도 않게 유명세를 떨면서, 없어질 것들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행세를 했던 그 허세, 그 객기, 그게 꿈으로 나타난 거예요. 괴물로 나타난 거예요. 괴물로. 앞으로 그런 꿈을 꾸거든 “반갑다. 괴물아! 목 벌려라. 내가 니 속에 들어갈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 땅의 삶은 피하지 마시고 그 속에 그 구멍 속에 들어가 보세요.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기껏 이거야? 나한테 협박의 본질이 이것밖에 안 돼?” 하고 그냥 한 번 들어가 보세요. 10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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