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강-YouTube강의(기다림과 막연함 누가복음3:4)20200218-이 근호 목사
303강-YouTube강의(기다림과 막연함 누가복음3:4)20200218-이 근호 목사
제303강, 제목은 ‘기다림과 막연함’. 이것도 아까 ‘배제와 삭제’처럼 유사한 단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애써 분리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소망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죠. 그래서 소망한다는 것은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 기다림이죠. 그런데 기다림 그 안을 깨보면 막연함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식을 잘 안할 경우가 있어요. 막연한 거예요.
“아이고, 뭐 되겠지. 오시겠지” 이건 막연함이거든요. 기다림이 아니고 막연함이에요. 막연하면 “아이고, 뭐 오시면 오고 말면 말고” 이건 막연함이고, 기다린다는 것은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거기에 초점이 맺혀 가지고 다른 세상의 여타의 것들은 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이 기다림이죠.
망부석이라고 들어봤죠? 망부석. 전쟁나간 남편 또는 배 타고 나간 남편을 마냥 기다리다가 기다림이 너무 도가 지나쳐서 딱딱해져서 바다 쪽을 향하여 돌이 됐다는 전설. 어떤 부인이 너무 기다린 거예요. 그 부인에게 뭐 돈줄까, 뭐 어디 상줄까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오직 한 사람에, 그 사실에 모든 게 꽂혀버린 겁니다. 꽂히는 거예요.
그러면 막연함과 기다림이 차이나죠? 이걸 달리 말씀드립니다. 막연하면 아무런 증거, 근거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막연함이 되고 기다린다는 것은 그 흔적이 이미 도달해 있는 거예요. 이건 막연함이 아니고 진짜로 오실 분이 오신다는 그 확실한 증거 안에 이미 자기가 놓여져 있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본인 자체가 그 증거가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달라졌다는 자체가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증거물로써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이 말입니다. 나를 만약에 모독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모독하는 것이 되도록 그런 식으로 거기에 마음이 다 빼앗긴 거예요.
그러면 그 증거에 대해서 그런 사례에 있는 사람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지요. 누가복음 3장 4절에 보면 선지자가 나옵니다, 선지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선지자는 막연함일까요, 기다림일까요? 선지자가 막연함이 아니고 기다림인 이유가 선지자가 본인이 선지자 하고 싶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것은 이미 자기가 선지자 되게 하신 그 자체가 기다림이 실효성이 있음을 그 시대에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선지자 된 겁니다.
21세기 이 시대에 주님께서 확실히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미리 성도된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러죠. “에이, 예수님이 오시겠나. 말뿐이지. 안올 수도 있잖아.” 할 때 “나를 봐” 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돼요. “나를 봐. 나는 완전히 망부석이야. 나는 뭐 다른 세상 기쁨 같은 거 없어. 나는 주님 보고싶어. 그게 내 소망의 끝이야. 내 소망의 전부는 주님 만나는 그거야. 그것만 학수고대하고 있어.” 하는 그런 내 마음으로 달라졌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이사야의 말씀이 나에게 적용이 됐다 이 말씀입니다.
자, 그런데 그것이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한 게 아니고 제가 누가복음 이야기했죠? 누가복음에서 이사야의 말을 방금 인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사야의 말이 적용된 사람이 있을거라 이 말입니다. 그 사람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이 이사야의 말을 누가 하느냐? 세례요한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에 있어서는 이미 이사야가 자기 안에 완료가 된 거예요. 이사야는 기다림이지만 세례요한은 그 이사야의 기다림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이사야의 기다림의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그러면 세례요한은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 모든 것을 평탄케 봐요. 모든 높낮이가 있던 골짜기가 세례요한에 와서는 완전 불도저로 밀어버린 거예요, 완전 고속도로가 된 거예요. 첩경, 주께 가는 길이 온갖 어떤 난관이라든지 온갖 어려운 자갈밭 있는 것이 예수님이 보이는 끝으로 바로 쫙 펴진 거예요.
그런데 펴진 것을 보려면 누구하고 마음상태가 동일해야 되냐면 세례요한과 동일하게 되어야 돼요. 세례요한은 뭐냐 하면 본인을 위해 살지 않고 내 뒤에 오실 분, 예수님이 계시다는 조건 하에 본인은 지금 이 땅에 출생한 거예요. 누가복음에서 계속 하겠지만, 세례요한의 출생이 세례요한을 위한 출생이 아니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출생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연관된 출생을 한 거예요.
그러니 세례요한보고 “당신의 본래 자립적인, 독자적인 의미는 뭡니까?” 물으면 세례요한은 이야기안합니다. “나한테 독자적이라는 말을 묻지 마세요. 나는 누구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은 성령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누구하고 연계된 인생. 애를 키우든지 뭘 하든지 누구하고 연계된 인생이에요. 자꾸 나보고 너 똑똑하다, 잘났다, 너 못났다, 왜 그런 식으로밖에 인생 못사느냐 할 때 독자적으로 나를 평가할 생각하지 마라. 나는 그냥 내 자체가 김기다림, 최기다림, 박기다림이에요.
그 기다림이 막연한 게 아니고 예언한 것이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볼 때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는 겁니다. 그 안목이 뭐냐? 신분, 재벌, 뭐 가난하다, 잘났다, 못났다, 남자, 여자, 남녀노소, 학력, 인격이 어떻고 전부다 그런 차이는 불도저가지고 밀어버립니다.
새로 시작하자는 거예요, 새로. “주의 말씀대로 새로 시작하자.” 다 밀어버려요. 누가 잘났나 못났나, 누가 승자냐 패자냐, 니 평생 고생했나 편하게 살았나 그거 따지지 말자. 독자적으로는 따지지 말자. 그냥 밀어붙이자. “니 안에 이사야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 니 이사야 있어?” “너도 이사야 있어? 너도 이사야 있어?” “나도 이사야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있는데.”
말씀에 의해서 가동되는 인생. 말씀에 의해서 기다림이 기다림으로, 그리움이 그리움으로 활성화되는 인생.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라는 이름의 선지자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고 예수님을 전한 선지자로서 이 땅에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세례요한 볼 때 “그래 훌륭했었어. 세상에, 목 베일 정도로 순교자였어. 하지만 옛날 이야기야. 지금은 그 분은 안계셔.” 이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세례요한이 한 것은 어떤 용기? 각오? 결심? 자기의 실력? 지혜? 아닙니다. 이사야에게 있던 말씀이 그냥 덮쳐버리고 그 이사야의 말씀을 주신 분은 오실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먼저 태어나게 하셔가지고 집어넣고 세례요한에게 있는 그 말씀과 예수님 자신을 일치시키죠.
그 원리, 그 구조가 우리한테도 그대로 작용되는 겁니다. 못났다, 자기밖에 모른다, 이기주의다, 예수는 생각도 못했다,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밖에 안섬긴다, 이단이다, 우상이다.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복음 집어넣고 십자가 집어넣어서 예수님과 연결시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을 볼 때 주눅 들지 마시고 협박, 공갈 받지 마세요. 누구로부터 협박이나 공갈 받지 마세요. 우리 그런 자리의 사람, 그런 신분 아닙니다. 협박, 공갈은 십자가만큼 센 협박, 공갈이 없어요. 제대로 받았어요. 죽어 마땅하고 주 앞에 버림받아도 할 말 없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버림받아도 당연하다. 십자가까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람이 뭘 더 이 세상에 무슨 호강하겠다고 더 기대하겠습니까?
기능은 말씀을 실어 나르는 수레, 리어카, 또는 1톤 화물차,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뒤에, 짐칸에 있는 화물을 삽으로 퍼내면 되죠. 내 인생을 이 말씀이 주도했다는 그 사실을 퍼내면 되는 거예요, 퍼내면. 그 앞에서 뭐 곁들여서 “나는 실력있다. 나는 믿음있다”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그냥 말씀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을 위한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의 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