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200213a 베드로전서3장 21절(지정된 바닥)-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200213a 베드로전서3장 21절(지정된 바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전서 3장 21절부터 하기로 되어 있는데 실은 18절부터 다시 들어가야 되겠죠.

말씀은 자체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말씀은 스스로 구성, 그리고 완성. 말씀은 스스로 구성하고 스스로 완성해요. 그래서 말씀은 우리 말을, 또는 나의 말을 안듣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은 스스로 구성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말씀은 우리 말을 안듣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스스로 가동시키고 움직이게 하시는, 말씀 안에 들어계신 분이 있죠. 그 분이 누구겠어요? 구약에서는 여호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약속을 던져놓고 그 약속 안에 들어가서 약속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장갑차가 움직인다. 그 안에 누가 들어있겠죠? 아무도 없는데 장갑차가 움직인다. 그런 장갑차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장갑차는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까, 차는 운전자가 보이지만 장갑차는 운전자가 안보이죠. 알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다 깔아뭉개죠. 탱크. 보이는 건 다 깔아뭉갭니다.

그것이 여기에 바로 오늘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노아’ 그 다음에 ‘홍수’가 나오죠, 홍수. 자, 홍수는 모든 것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노아 홍수에 대해서 인간이 이의 걸 수 있습니까?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십니까? 뭐 이런 거 있겠어요, 없겠어요? 안되죠, 안되겠죠. 그러면 노아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 방금 이야기를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노아 홍수는 말씀이 스스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 말씀 안에 계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 또는 언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라는 약속을 스스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 언약은 사람이 지키는 게 아닙니다. 언약은 사람이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알아서 움직여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 간단하죠. 뭐가 간단하냐 하면 이 말씀하고 내 몸하고 맞바꾸면 되겠죠. 참, 말이 쉽죠? 그냥 바꾸면 되겠죠. 왜냐하면 말씀 안에 들어가면 주님이 알아서 해주고 말씀은 주님이 관리하고 내 몸은 누가 관리하고? 내가 관리하고.

그러면 말씀이 내 말 들어요, 안들어요? 안듣는다고 했죠? 그럼 자기 몸을 계속 유지하게 되면 동떨어지게 됩니다. 말씀의 완성과 별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말씀은 말씀대로 가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문제는 이 말씀이라는 탱크가 노아의 홍수에 의하면, 이 탱크가 그냥 인간사는 동네를 완전히 밀어버리는 게 문제가 돼요. 말씀이 다른 동네가서 완성하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노시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면 서로 win win하고 좋겠는데, 하나님이 말씀 가지고 어디서 노시느냐 하면 인간의 문명, 인간사회,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일으키시는 거예요. 그 증거가 노아의 홍수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난 비오는게 좋다. 내 취미가 비내리는 거야.” 그러면 인간사는 동네말고 저 황무지 있잖아요, 사람 안사는 데. 거기에 가서 실컷 물을 퍼붓든지 하시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를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부은 게 아니고 어디다 부었습니까? 인간이 애지중지하고 또는 다른 사자성어로 오순도순, 가족끼리 애들하고 오순도순 살고 빡시게 일해서 겨우 결혼 15년 만에 조그만 빌라 1층 하나 장만한 그런 집. 어느 날 물 들어와가지고 가재도구 다 떠내려가고 사람까지 다 빠져죽게 만드시는 우리의 하나님. 15년 만에 집 한 칸 마련해가지고 이제는 한번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다짐의 다짐, 손가락 있는대로 다 걸어가지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자’ 하는데 비가 와도 너무 와. 너무 오는 거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드니까 하나님께서 “이게 내 언약이다, 내 장갑차다” 그 말로 끝났어요.

알아서 바꾸지 왜 안바꾸냐, 네 몸하고. 네 몸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인생, 행복한 니 인생, 그 인생하고 말씀하고 왜 안바꿨냐 이 말이죠. 니가 독자적으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은 난 몰라. 난 말씀하고 관계없어. 난 내 식으로 살거야’ 라고 고집하는 것은 오기라서 좋긴 좋은데. 좀 멋있어 보이고. 남자같으면 남자답잖아요. 좋은데 문제는 그 말씀이 건드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말씀이 건드린다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말씀이 다른 동네에 하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집을 지을 때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다가 집을 지어도 되는데 꼭 집을 지을 때 인간들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다정하게 살려는 그것을 그냥 밀어버리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을 지어버리니까 그동안 인간들이 애쓰고 수고한 것이 다 소용없죠. 인간은 신을 인정안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신을 인정하기는 하되 신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인간 쪽에서는 용납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따로 말씀을 알아서 구성하시면서 사람들 사는 동네에 가서 그렇게 구성을 하느냐.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구성하실 때 그 장소가 어디냐? 그 장소가 썩은 곳이에요. 썩은 곳을 하나님께서 환원시킵니다. 썩은 곳을 환원시킨다. 환원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있던 걸로 다시 회복한다, 처음 있는 것을 다시 발췌해낸다’ 그런 뜻이거든요. ‘환원한다’ 또는 ‘숨겨져 있는 근원을 발굴한다’.

환원이라는 말은 화학용어죠. 화학에서 환원이라 합니다. 수소(H) 2원자와 산소(O) 1원자가 만나면 물 1분자가 됩니다. 물(H₂O)을 환원시키면 2개의 수소원자와 1개의 산소원자가 되는 거예요, 환원시키면. 환원이라 하는 것은 ‘원래재료가 뭐냐’ 하는 거죠, 원래재료.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그냥 따로 살림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내 것 네가 망쳤다”라는 그 사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인간 세계에 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알아서 점잖게 하나님 뜻에 맞춰서 착실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수고를 하나님의 말씀 성취로 간주하지를 않아요,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체가 썩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외피로 둘둘 감아서 안썩은 척 해도 인간은 썩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내용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째서 썩었는가? 어째서 죽어 가는가? 망해 가는가?”.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기정사실화시켜요, 인간을. 죽어 마땅했었다. 망해야 했었다. 희망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지시다. 인간의 힘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애시당초 성립이 되지 않는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아놨으니까. 그런 것을 자꾸 이렇게 추궁해나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삽니다.” 라고 우기고 나오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비유를 제가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은 포도원이다. 옛날 미국영화에 보면 농장이름이 뭐냐, OK목장 있죠. 그럼 OK목장 주인, 목장주가 있겠죠. 간판을 걸죠. ‘OK목장’ 거기서 나온 유명한 결투가 뭡니까? ‘OK목장의 결투’에요. 이거 젊은 사람은 모르는구나, 그 영화를. 1960년대 나온 영화인데.

이 세상은 간판이 ‘하나님 나라’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OK목장이라고요. 그런데 포도원이 뭐냐, 하나님 나라의 포도원이에요, OK목장처럼. 여기 품꾼이 있는데 누구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품꾼에게 일시키고 주인님은 한 번씩 소출 얻으러 간다 이 말이죠. 가는데 농부들이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어요. 전부다 한통속이 되어가지고. 그걸 사자성어로 노동조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동단결해가지고 소출 안주기로 마음을 정했어요.

주인님은 소출을 받기 위해서 종을 보냈습니다. 선지자죠. 죽였습니다. 또 보냈습니다. 또 죽였습니다. 주인님이 ‘설마 내 아들을 보내면 영접하겠지’ 하고 보냈어요. 그런데 농부들이 아들을 보니까 전에 있는 종하고 달리 보인다. 저 분은, 저 사람은, 아들은 상속자라고 보는 거예요. 회장님의 직원을 보내는 것은 하청업체가 거부할 수 있어요. 그건 거부할 수 있다고요. 또 직원 보내면 거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재벌2세가 그 하청업체에 갔다. 그런데 하청업체에서 죽여버리자.

죽여버리자는 그러한 발상이 딱 떠오르는 이유가 아들만 죽이면 이 농장은, OK목장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그들의 것이 되겠죠. 그들의 것이 되면 포도원의 주인이 바뀌게 돼요.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아들을 죽였죠. 자, 아들을 죽였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 농부들이 일치단결된, 하나같은 그 마음을 확실하게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테스트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낸 겁니다.

선지자 보내고 아들 보냈다는 것은 환원작업이에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썩었느냐? 그냥 뭐 양심의 가책 정도냐, 아니면 하나님 안보이니까 하나님한테 한 번 대들어보다가 하나님 만나면 ‘아이고 하나님 잘못되었습니다’ 하는 그 정도냐, 아니면 원초적으로 하나님하고 한번 해보겠다는 식이냐. 그것을 오늘 제목으로 삼을 수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입니다. ground. 최후의 마지막 바닥.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어디로 찾아가고 방문하는데 뭐를 찾아가는 말씀입니까? 뭐를 찾아가겠어요? 바닥을 찾아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심보, 정신상태 이런 것의 바닥, 그 지점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 자신이 내 몸을 내가 관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씀하고 맞바꿔서 이제는 말씀 안에 우리 몸을 실어버린다면, 말씀을 우리가 다룰 수는 없는 거고요, 말씀은 우리 말을 안들으니까, 말씀에 실려서 가게 되면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가겠습니까? 어디까지 가게 되겠어요? 바닥까지 가는 거죠. 그게 바로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사는 이유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인간세계의 바닥을 들추어내는 용도로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 높은 곳 아닙니다. 저 낮은 곳이에요. 저 낮은 곳입니다. 저 높은 곳 아니에요. 저 높은 곳에서 자기를 이상화하는 어떤 모델 같은 것 찾지 마세요.

인간 세계는 신을 인정한다고 했어요, 인정 안한다고 했어요? 인정해요. 인정하는데 신이 자기를 절대화해서 일방적으로 일하는 그런 신은 인정하지 않고 인간과 협의하기를 원해요. 좋은 게 좋다고 win win하자. 하나님도 살리고 인간도 같이 인간의 가오 또는 인간의 자존심도 살리고. 둘 다 살릴 수 있는 협의카드, 협상카드를 인간 쪽에서 계속 제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인간 대표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들까지 보내버린 거예요. 아들을 보냈다는 말은 그동안 선지자를 죽였던 그 본색을 결국은 바닥까지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인간세계의 바닥에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멈추지 않죠. 어디서 멈춰지는가? 바닥까지 다 내려갔을 때 멈춥니다. 지하5층이 있다면 마지막 지하5층 내려갔을 때 엘리베이터가 스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어디까지 내려간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바닥까지, 바닥의 바닥, 더 내려갈 자리 없는 그 곳까지 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어디에 있는 영들에게?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감옥에 갇혀 있다는 식이죠. 죽음의 자리라 해야 되는데 그걸 죽음에 갇혀 있는 상황으로. ‘죽었다’하고 ‘죽음에 갇혀 있는’ 것하고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죠?

환원 조치하는 것, 세상의 가장 기본으로 내려가는 이러한 작업은 그동안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추구하는 것과 방향이 완전히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노아 홍수 왜 일으켰습니까? 뭐를 찾아가기 위해서? 바닥을 찾아가기 위해서. 노아의 홍수 일으킬 때 얼마나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원망을 많이 했겠습니까? 한 사흘 비 내리고 멈출 줄 알았는데 끝도 없이 비가 오죠.

자, 홍수내린 비를 예수님께서 뭐로 보느냐 하면 ‘심판’으로 봅니다. 노아의 홍수는 심판이죠. 하나님의 언약이 스스로 구성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언약은, 말씀은 말씀대로 알아서 체제를 잡아가요. 그 체제의 방향성이 어느 쪽입니까? 심판이죠. 바닥 찾기죠. 바닥을 찾는 거죠, 심판. 그런데 인간의 몸은 본인이 알아서 바닥을 찾습니까? 스스로 “저 심판해주세요” 요청합니까? 안하죠.

내 아들 군에 보냈으니까 ‘군에서 지뢰 밟게 하옵소서’ 뭐 그런 기도합니까? 제대로 밟게 하옵소서. 자식한테 무슨 원수진 일 있는가. 이참에 군에 가서 보내버리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기도 안하죠. 그저 편안하게 잘 있게 해달라고 그런 기도를 많이 하죠, 새벽마다. 어떤 분은 자기 아들 월남전에 가고 난 뒤에 한시도 집에서 밤에 잠을 안잤어요. 왜? 내가 기도해야 2억만리 떨어져 있는 맹호부대, 대한 뉴스에 나오는 맹호부대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효험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양자역학에서 이거 나옵니다, 놀랍게도 양자역학에서. 두 입자가 있는데 하나는 시계방향으로 돌고 다른 하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어요.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을 up이라 하고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은 down이라 해요. 두 입자가 서로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면 상쇄돼서 환원되거든요. 환원 배웠죠? 이 두 입자를 백만광년, 엄청난 거리를 띄운다고 칩시다, 백만광년. 어느 입자가 어떻게 도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한쪽을 “아, 이 입자는 up이네” up이라고 보는 순간 백만광년 떨어져 있는 다른 입자가, 인간들이 이걸 관찰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갑자기 이게 down되어 버려요. 서로 반대방향으로 간다고요. 이걸 가지고 ‘동시성’이라고 합니다. 양자가 서로 소통하고 있다. 연결되어 있다. 이걸 ‘양자 얽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기하죠? 참 신기한 거예요.

이 양자 얽힘을 가지고 만들어낸 새로운 컴퓨터가 양자 컴퓨터라고 하는 겁니다. 기존의 컴퓨터보다도 수천 배 더 빠르죠. 0과 1로 하지 않고 0과 1이상으로 하나의 숫자가지고 여러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그런 원리를 이용해서 양자 컴퓨터가 새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눈도 코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뭐를 관찰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서로 얽혀져 있는 거예요. 이런 비슷한 예가 바로 백지영 노래에 있어요. 미국에 이민 간 자기 애인에게, 몸은 떨어져도 같은 하늘에 있잖아. 같은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환원되게 될 때에 그 환원된 하나님의 원칙에 대해서 인간의 자기 몸의 관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바닥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은 바닥을 찾아간다. 그런데 바닥을 찾아가는 것은 인간 세계를 환원하기 위해서, 진짜 인간 세계의 내막이 뭐냐,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었는가를 다 도려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 이 언약, 말씀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일까요, 아니면 보편적일까요? 특수한 개인에게 감정 있어서 이렇게 심판할까요? 인간의 잘잘못, 인격 그런 거 안따지고 전면적으로 다 관리할까요? 전면적이죠. 왜냐하면 사람하고 의논을 안하니까. 자 너가 얼마나 착한가 보자, 네 성적 얼마나 나왔어? 이런 거 묻지도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따라서 자기 믿음 속에 자기 행함을 섞어 넣지 마세요. 섞어 넣으면 안돼요. 주님의 하신 일만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되지, ‘내가 성심성의껏 주님께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으로 그 내용에 자기 걸 집어넣으면 안됩니다. 사람이 자기 걸 집어넣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무엇에만 자꾸 주목하느냐 하면, 자기가 거기에 한몫 한 것에 대해서 그게 우상화되어 버려요.

어느 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무심코 하지만 그 피아노 기증한 사람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런 거 귀에 안들어오고 내 피아노에 누구 애가 올라가지 않는가 그것만 신경 쓰는 거예요. 교회에 만약 누가 꽃꽂이를 했다 그러면 그 주간은 말씀이고 뭐고 없고 꽃꽂이의 꽃이 시드냐 안시드냐, 꽃꽂이 스타일이 구도가 잘 맞춰졌나 그것만 신경 쓴다고요. 바짝 긴장되어 가지고. 그래가지고 머리 기른 애가 왔다갔다 하면서 꽃 부수고 그러면 “떼찌, 이놈” 하고 난리도 아니죠.

사람이 내 것을 하나님 앞에 섞어 넣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 좋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보다 내가 더 우선적으로 좋다는 표시에요. 나는 하나님보다 내가 더 소중해요. 이 소중한 것을 하나님 키워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했습니까? 내 것이 들어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바닥을 찾기 때문에. 내가 찾을 수 없는 바닥을 계속 찾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왜 우리는 바닥을 찾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자꾸 자기의 가치를 향상시키려는 것에 대해 추구를 해요. 주님께서는 바닥, 끝을 향하여 계속 나가고 있는데 인간은 오히려 자기가 위대한 초월적, 절대적인 장소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죠. 시작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약부터 시작해요. 인간은 어디부터 시작? 자기로부터 시작, 자기가치로부터 시작해요. 자 이제 기독교가 어떻고 침례교, 성결교, 장리교, 감리교 따지지 말고 이단이 뭐냐? 이단이 뭔지 확실해졌죠? 모든 이단은 뭐부터 출발합니까? 자기가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자기가치로부터 출발하는 대표적인 게 구원론이죠. 나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단입니다.

시작점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시작하니까 아까 꽃꽂이하는 예처럼 신경을 어디 씁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관심없고 얼마나 내 행동에 조심하고 절제하고 하나님 뜻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조마조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관리에다가 바짝 신경을 쓰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마찬가지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게 뭔 뜻이에요? 둘다 출발점은 같아도 나는 세리보다는 더 우수하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인가, 카레이스하는 겁니까? 교회에서 저 사람보다 낫고 이런 거 생각하면서 교회다닙니까?

인간이 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신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고 ‘신에 대해서 타협할 여지가 있다’ 라는 그런 주장이에요. 농부가 주인하고 “우리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하고 협상할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보기에는 아주 시건방진 거예요, 인간이. 그걸 교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교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바닥을 감추는 게 교만이죠.

이런 건 어떨까요?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교만일까요, 교만 아닐까요? 교만이죠. 관심사가 내가 어디까지 낮아지는가에 관심 있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내려놓자, 또 내려놓자, 또 내려놓자”, “실례지만 지금 어디까지 내려놓으셨습니까? 아직 멀었습니까?”, “내려놓자”. 봉준호 감독 영화에 보면 물이 났어요. 부잣집 아래층에서 반지하로 내려옵니다.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간다, 내려간다. 계단이 왜 이리 많은지 몰라, 그 영화 보면. 한참 내려가. 끝도 없이 내려가, 계단으로.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본인이 알아서 내려가는 바닥은 바닥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이에요. 자기 몸하고 주님 말씀하고 바꿔야 되는데 주님이 알아서 바닥을 찾아가 주는데 그 주님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겸손한 자리를 가겠다는 거예요. 내려가봤자 그 지점은 주님이 시작한 지점이 아니고 본인이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새로 설정한, 자기 출발점이 되는 거예요, 자기 출발점.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 정도 겸손하면 됩니까? 내가 이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 되겠어요? 제가 의사지만 의사 돈벌이 치우고 남수단에 가가지고 내가 흑인들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 내가 대장암 걸리더라도. 톤즈야 울지 마, 톤즈야 울지 마, 울지 마 톤즈. 이런 식으로. 남들 보기에 되게 내려간 것 같죠.

그러면 거기서 자기가 멈추는 그 곳이 주님의 말씀이 멈추는 곳이에요? 아니죠. 남수단에 가가지고 죽도록 의료봉사하는 것이 인간의 제일 밑바닥이에요? 아닙니다. 말씀하고 바꾸란 말이에요.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낮은 곳은 돈 많이 벌 수 있는 의사가 저 낮은 곳에 가서 무료 봉사한다. 이게 자기 딴에 낮다고 낮췄지만 성경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말하는 낮은 곳은 어딥니까? 딱 한군데밖에 없어요. 보편적입니다. 개인의 역량과 관계없이 딱 한군데에요. 그게 뭡니까? 십자가에 죽기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십자가로 가죠. 만약에 집에 십자가가 저 위 천장 가까이에 있다면 이건 낮은 곳일까요, 높은 곳일까요? 천장에 붙어 있더라도 이건 낮은 곳이죠. 자기 몸은 멀쩡한데 십자가가 생각난다. 이건 자기가 낮은 거예요, 높은 거예요? 그게 바로 낮은 거예요. 몸이 멀쩡하든 몸이 건강하든 수입이 쏠쏠하든 관계없이 십자가 생각하면 그게 낮은 곳이에요. 왜? 자기 있는 모든 것이 누가 데려갔기 때문에? 주님이 데려가신 거예요. 내가 거지꼴 되는 게 낮은 곳이 아니라 내가 남들 보기에 부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십자가가 다가오는 그 순간이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같이 출발하자” 라고 하는 그 지점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21절에 나와 있어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서 노아 홍수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바닥을 치고 오르신 분이 먼저 따로 계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누구의 양심을 말합니까? 자기의 양심이에요, 주님의 양심이에요? 주님의 양심이죠. 지금 말씀하고 누구하고 바꾼 거예요? 말씀하고 자기 몸하고 바꿨잖아요. 그러면 자기 몸 안에 스며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뭡니까? 주님이 내려갔다가 올라왔을 때의 그 시각, 그 세상 보는 시선, 그것이 계속 흘러들어오는 겁니다.

노아 때 방주 이야기 나오는데 여기도 20절에 나오죠. 자, 노아가 방주에 탔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 뚜껑 열지 않고 창문 열지 않고 그냥 안에 앉아있을 때 노아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뭐에요? 비오는 광경 아니겠죠? 뭡니까? 잣나무로 만든 방주겠죠. 그러면 노아는 어떤 의미에서 방주 안에 갇힌 셈이 되죠. 그걸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 안에 갇혀 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주안에 갇혀 있다”. 그게 바로 21절에 보면 ‘구원의 표’가 되는 거예요, 구원의 표.

베드로전서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다림질해서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다리미질하면 이렇게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 거예요. 하나는 전면적인 환원, 다시 말해서 전면적인 심판이 필요해요, 구원이라는 것은 전면적인 심판. 전면적인 홍수가 아니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심판이라는 거예요. 심판은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어요. “아이고 내가 하늘나라 수도꼭지를 안잠갔구나, 미안하다” 이게 아니고 노리고 들어가요. 뭐하라고? 니 주제파악하라고. 너는 무슨 대상이다?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요, 심판의 대상이요.

그러면 보편적 심판에서는 심판하시는 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 바꿔치기하는데 우리의 몸과 말씀을 바꿔치기한다고 했죠? 그런데 우리가 바꿔치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바꿔치기를 어떻게 하느냐? 너는 말씀에 의하면 무슨 대상이다?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에요. 심판의 대상이니까 여기서 뭐가 탈락이냐 하면 구원에 대한 욕구, 구원에 대한 기대는 여기서 탈락이 돼요. 심판을 하겠다는데 심판대상인데 무슨 구원을 또 넌지시 기대를 해요? 안돼요.

십자가를 제대로 성령을 통해서 안 사람은 구원이라는 것을 입에서 꺼낼 개념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앞에서는 내 구원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마저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는 이 세상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인간을 다 세상과 더불어 버리는 그런 하나님의 자기 의사표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살려주세요” 할 수는 없어요. 그냥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버림받은 것까지는 알고 구원은 손들고 해야지. 그런 꼼수는 쓰지 마세요. 그냥 버림받아야 되요. 버림받는 과정 안에 뭐가 보이느냐하면 바로 방주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두 가지 요소에요. 하나는 뭐가 있다? 전면적인 심판, 두 번째는 구출의 방편 또는 구출의 방식. 구출할 수 있는 그런 바탕, 제도, 또는 형식이 심판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어두움이 없으면 뭐가 없다? 빛이 없는 거예요. 심판이 없으면 뭐가 의의가 없습니까? 구원의 의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의 방주, 노아의 홍수 나오니까 방주라고 합시다. 이 방주에서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느냐 하면, 우리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달랑 이 세상에 여덟 식구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잃어버렸음을 목격하고 그걸 후대에 전하는 사명. 그것이 바로 노아가 구원받은 이유가 되겠죠. 잃어버렸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진행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자격이라고 할까요, 그만한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구원의 요건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잡아 죽여야 그다음에 준비되어 있는 양으로 인하여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지 말고 죽이는 척이나 해라. 내가 수풀에 다 준비해놨거든. 너는 연기만 하면 돼. 이랬습니까? 근처 수풀 속에 양 있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주께서는 넌지시 말씀해줬습니까? 안했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뭡니까? 그냥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말씀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말씀의 일이다’ 하고 아들을 사정없이 죽여 버렸죠, 중간에 스톱했지만.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내가 십자가 믿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 해서 나는 죽는 척만 해도 구원받는다.’ 이 꼼수는 어떨까요? 이거 십자가 받아들인 거예요, 안받아들인 거예요? 안받아들인 거죠. 지금 십자가를 갖고 농락하고 있는 거죠. 십자가에 대해서 내가 잘 아는데 설명해줄까? 십자가는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신 피흘려 죽은 것이다. 맞지? 합격. 나는 천당. 뭐 그런 공식 있습니까? 그런 공식 없어요. 지금 그렇게 십자가를 논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구경꾼이에요. 관찰하고 있다고.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뭐냐 하면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같이 죽자. 살아서 “주님 혼자 죽으세요, 나는 여기서 구경할게요” 이게 아니고. 십자가 달릴 때 같이 죽은 사람 있죠? 누굽니까? 강도죠. 강도가 예수님 십자가 죽고 자기는 슈퍼맨이 와가지고 못 다 빼가지고 멀쩡히 예수님이 대신 죽는 거 구경했습니까? 예수님, 힘! 힘내라 힘. 힘내세요. 예수님 죽어야 내가 구원받습니다. 이러면서 응원가 불러주고 찬미하고 이랬어요? 같이 죽었죠. 같이 죽는 것을 강도는 아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게 몸과 말씀을 바꿔치기할 때 내 실력, 기술, 스킬이 개입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행 작업에 자기가 휘말려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마치 뭐가 같냐 하면, 제가 옛날에 고추 빻으러 방앗간에 가는데 고추만 집어넣어야 될 걸 애가 철이 없어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고추 빻았을 때 뭐가 같이 나오겠습니까? 이거 엽기적인데...DNA조사하면 걔 피부조직부터 해서 손가락 조직이 빻아져 나오겠죠? 그게 십자가 아닙니까. “주님 내 죄 잘 빻아주세요” 하고 박수치는 걸 가지고 고추가 손 잡아당겨서 같이 죽자고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고추 빻을 때 같이 집어넣어버려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손가락 멀쩡한대요” 그러거든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일생을 고추 빻는데 집어넣는 일생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아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건 없어요. 말씀이 나를 안떠나요. 십자가에 함께 죽었음을 늘 확인시키는 그러한 일생을 보내게 하는 겁니다. 누구한테만? 성령이 임한 사람한테만.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만.

성령은 노아 당시에 방주와 같은 거죠. 노아는 방주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합니까? 잃어버린 자. 그것도 마땅히 잃어버려야 될 자로 보는 거예요. 어떻게? 슬프게? 우울하게? 통한의 가슴을 치면서? 아니죠. 신나게, 즐겁게, 고마워하면서, 감사하면서. “나는 잃어버린 자다. 99마리 양 중에서 내가 1마리 양이다. 내가 탕자다. 잃어버린 동전이다” 하면서 아주 즐거워하면서 주님의 방앗간에 고추 빻으러 가가지고 같이 주님과 섞여서 평생을 완전히 환원되는, 흙으로 환원되는, 잘게잘게 부셔지는, 잘게잘게 부서져서 산산히 부서질 이름이여. 내 이름 주욱 써서 찢어버리든지 가위가지고 오리든지 다 날아가버려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런 분이셨다는 것을 나의 일생을 통해서 발산하고 표현하고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돼요, 인간의 힘으로는.

홍수, 십자가, 그리고 주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되는 이 엄청난 내용을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못 만들어냅니다. 봉준호 감독도 못만들어내요. 엄청난 일을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안에서 겪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이것은 감히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일을 우리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일 오전에는 제가 부사로 표현했어요. ‘묵직하게’.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묵직하게 내려앉아요. 네가 생각하는 낮아짐,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첫 원천은 네가 찾아가고 가난한 자에게 다 주고 백날 따라와도 그건 소용없어요. 어떤 노력으로도 이 웅장한 드라마를 우리가 기획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냥 맡길 뿐이에요. 하루하루 살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바닥이다. 내가 사는 게 바닥이다. 그냥 바닥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너무 염세적이라 하니까 뒤에 붙여요. “바닥이다” 다음에 “히히히” 또는 “ㅋㅋㅋ”. “이번 달 나는 수입이 850만원이다, 바닥이다. 히히히”, “우리 애가 또 백점 맞고 또 전교 1등했다, 바닥이다. 히히히” 이렇게 되는 거예요. “ㅋㅋㅋ”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 알면 바닥이에요. 세상이, 내 형편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오늘도 건강검진 받았는데 아무 탈 없다. 나는 바닥을 맛보았다. ㅋㅋㅋ” 이런 거. “그냥 우연히 사놓은 주식값이 백배 올랐네, 나는 바닥이다. ㅋㅋㅋ”.

꾸미지 마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낮아짐을 스스로 연출하지 마세요. 이것은 악마가 그 짓하게 하는 거예요. 그 짓하면 악마가 그걸로 만족하는 줄 압니까? 더 낮아져야지, 더 내려놔야지. 너 용돈 지금 지갑에 5만원 있잖아. 저 봐. 저 노숙자 있는데 그냥 가면 너 안되지. 너는 나쁜 놈이지. 이게 바로 선한 양심이야, 야. 자꾸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의 선한 양심은 그게 아니에요. 뭐가 선한 양심이냐 하면, 여러분 한 수 배우세요. “나에게는 네가 원하는 금과 은은 없거니와” 이게 선한 양심이에요.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때려 죽여도 안줄 거야. 돈을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돈을 안줄거야. 이게 주님이 다녀갈 때의 마음가짐이에요.

병 고치러 모든 사람이 주님께 찾아갔다고 다 고쳐준 게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과 너희들 생각이 다르다는 거. 너희들이 생각하는 바닥과 내가 생각하는 그 바닥의 출발점 지점은 다르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3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7,817 묻고답하기 착한 일 - 최고관리자 20-02-23
17,816 강의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2 - 파괴자 창세기 최고관리자 20-02-22
17,815 자유게시판 안양20200213b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 최고관리자 20-02-22
17,814 자유게시판 안양20200213a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 최고관리자 20-02-22
17,813 묻고답하기 The Dear Brother in the Lord 주 안의 형제 - 최고관리자 20-02-22
17,812 자유게시판 29강-호 7장 13-16절(하나님의 개입)200219-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2-20
17,811 묻고답하기 몸의 주인-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0-02-20
17,810 자유게시판 몸의 주인 - 최고관리자 20-02-20
17,809 자유게시판 303강-YouTube강의(기다림과 막연함 누가복음3:4)20200218-이 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2-19
17,808 자유게시판 302강-YouTube강의(배제와 삭제 시편 35:1)20200218-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20-02-19
17,807 강의 유튜브강의(302강, 303강), 배제와 삭제, 기다림과 막연함 200218 시편 최고관리자 20-02-19
17,806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2 (탈출의 경로)200204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2-17
17,805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2 (탈출의 경로)200204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2-17
17,804 자유게시판 63강-엡 6장 21-24절(형제)200216-이 근호 목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20-02-17
17,803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213b 베드로전서3장 21절(지정된 바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2-16
17,802 자유게시판 18강-욥기 6장 8~13절(무정한 하나님) 20200216 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2-16
17,801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모세의 할 일 / 200216 - 최고관리자 20-02-16
17,800 묻고답하기 사도의 편지 - 최고관리자 20-02-16
열람 ➜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213a 베드로전서3장 21절(지정된 바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2-16
17,798 자유게시판 제3차 복음세미나(정석훈목사) - 최고관리자 20-02-14
17,797 자유게시판 정석훈목사 2월 집회안내 - 최고관리자 20-02-14
17,796 묻고답하기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무시로 기도하라 - 최고관리자 20-02-14
17,795 자유게시판 28강-호 7장 8-12절(화덕위의 전병)200212-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2-13
17,794 묻고답하기 십자가 - 2007년 4월 7일 한진영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0-02-10
17,793 자유게시판 영화 [기생충 ]평 다시 보기 - 최고관리자 20-02-1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