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전신갑주
몇 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임신 중에 정기검진하러 산부인과를 갔을 때이다. 2주 전까지도 힘차게 뛰고 있던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고 의사는 죽은 상태로 오래 자궁 속에 있으면 안 좋으니 수술날짜를 빨리 잡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내 심장이 멎을 만큼 제법 충격을 받은 거 같은데 의사는 담담하게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간호사가 마취하려고 흡입 마스크 같은 것을 씌워주는데 눈물이 났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성된 나의 이야기들, 그리고 임신을 통해 그나마 괜찮아졌던 가정 분위기, 그리고 앞으로의 벌어질 일들에 대한 자체 예상, 이혼...짧은 시간에 이런 생각들이 쑥 지나가는데 간호사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 마세요. 여기 의사 선생님 깨끗하게 수술 잘하세요” 그 간호사가 꼭 성도 같다.
울고불고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는 나라는 자아, 이 존재를 형성한 장소들과 추억이 되는 시간들, 그리고 그 시공간 안에서 형성된 치열한 삶의 집착, 한 맺힘, 자기 연민, 이런 나름의 의미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죽은 공간에서 심장 뛰지 않는 죽음의 시간이고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 사실을 통보해 주신 분이 아무 찌꺼기 남지 않게 독한 자아를 잘 부숴서 깨끗하게 긁어내 주시는 유능한 의사라면 이분에게 감사히 맡기면 될 텐데 자신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반발심은 멈추지를 않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주변에 전신 갑주의 구성 요소인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말씀의 검은 보이지 않는데 이것으로 무장하라고 할 때 이것이 ‘나’에게 한 말씀이 아닌 것을 이제는 제법 빠르게 눈치챈다. 그냥 잠잠히 있으면서 그 이루어지는 일을 지켜보다 보면 십자가 우편인지 좌편인지, 거지 나사로가 있는 곳인지 부자가 있는 곳인지, 의의 종인지, 죄의 종인지 구별된다고 하신다.
이미 수술 완료된 몸에 주님이 주체로 중심에 계시면서 말씀이 안을 꽉 채우면 주님 자아의 렌즈를 통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이 전신갑주의 기능들이다. 반대로 ‘나’라는 자아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자아라는 렌즈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나를 나라고 믿게 하며 자아를 이용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는 마귀이다. 즉 자신이 자체적으로 뭔가를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무기들이 아니고 자기 안에 어떤 것으로 채워 있는지에 따라 영적 무기들이 활성화되어 발현되든지 악한 영의 욕망이 드러나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인 ‘그러면 나라고 착각하게 하는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확인시켜주는 과정에서 결코 이겨서는 안 되는 상대를 이기게 하시고 자신의 승리로 희생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게 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신다. ‘내가 드디어 가장 센 상대를 제압하고 이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라고 신나는 마음인지 아니면 내 안에 들어있는 괴물 같은 욕망이 발산됨을 인식하는 계기에 도리어 나의 승리로 희생되신 분을 통해 애통하고 주의 의를 갈급하며 통곡하는지를 묻는다.
절대 지지 않으려는 실패 하지 않으려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 알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하나님을 이기는 사건 현장에서 자기 안에 내재 된 신에 대한 살기 어린 악마의 복수심이 들통나며 자기가 사람이 아니구나를 깨닫고 주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때 주어지는 죽음 통보가 축복이다. 희생물을 통해 만들어진 자아 죽음의 자리에 주님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주님의 자아가 귀환하면 자석에 철이 달라붙듯 전신갑주의 기능들이 몸 주변을 감싸며 말씀의 주인과 소통하며 움직인다.
요즘 일이 자꾸 취소되고 일하는 것보다 고객 설득하느라 에너지가 더 방출되고 먹고살 궁리 하느라 부산히 움직이는데 주님은 “너는 쓸데없이 심각해라. 나는 나의 일 한다. 아주 일이 잘되고 있다”라고 하시며 끝까지 이 고깃덩어리만 챙기는 육의 일을 제거해주지 않으신다. 죄가 없이는 십자가를 통한 의의 생산도 없기에 주님의 의의 생산의 재료로 흙이 될 때까지 이렇게 철저하게 이용하신다면 그게 감사한 일인 것이 가면 갈수록 주의 일은 더욱더 모르겠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그것조차도 착각임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랑이 덮치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 사랑의 본체로만 출처로만 마음이 향하기에 주변의 뒷담,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뽕나무에라도 기어 올라가서 그분을 보고 싶어 하지만 정작 자신은 주님이라는 분에 대해 아무런 아는 것이 없다. 그런데 주님이 자신의 사랑을 입은 자를 알아보시고 같이 유하시겠다고 안으로 들어와 주신다는 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적이고 기쁜 소식이다.
아무 사랑받을 가치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시고 사랑으로 덮으시며 그럴 수밖에 없음을 그렇게 되어야만 했음을 통보해 주시니, 더이상 자아를 붙잡고 버텨야 할 필요가 없게 하시고 세상에서 로드무비 같은 자신의 역사도 혈육도 그 무엇도 지극히 사소함이 되며 가벼움과 자유를 덤으로 주신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선물은 어마어마하게 받고 있는 이 뻔뻔함이 아직은 적응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싹싹 긁어져야 할 자아가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아래 있거나 중간에 걸쳐있거나 부분적인 것만 보일 때 세상은 여전히 입체적이고 뭔가 부산히 움직이는 것 같은 운동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오직 말씀만이 늘 아래쪽 시야밖에 없는 우리를 맨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분의 위쪽 안목으로 비춰 주실 때 세상은 그저 정지된 그림임을 알게 하신다. 주의 이름이라는 제목이 쓰인 하나님의 그림은 창세 전부터 완성되었는데 육에 속해 세상에 던져져 있는 이들은 아직도 회오리바람 속에서 같이 맴돈다. 끈 떨어진 낙엽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끈에 매여있기에 어지럽긴 해도 놀이기구 타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