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5"30-35 (성도들을 돌보기)
Re..행 15:30-35 (성도들을 돌보기)
이름 : 이근호(IP:)
성도들을 돌보기
2004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5:30-35
15: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15: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사도들이 하는 일을 오늘날 우리들이 보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왜 사람들이 호응하지도 않을 일을 힘들게 하느냐 하는 점일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간주할 때는 보람도 나고 힘도 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런 분위기에 편성하지 않고 독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디모데전서 1:18에 나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그곳은 천국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선한 싸움'을 싸워하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믿음에 파선했다고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고,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채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나서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는 것도 아니요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예수님을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예배 시간에 정기적으로 등장해서는 '못 먹는 감 찔려나 본다'는 식으로 예수에게서 뭐가 나오냐 하는 식으로 꾹꾹 찔려보다가 다시 교회 문을 나가서는 오로지 자신을 믿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자립심을 더욱더 강화시킨 사람입니다. 사람이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자신을 더 측은히 여기고 자기 애착과 자기 방어가 더욱 심화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보다는 예수님에게 대들고 항의하기 바쁩니다. 맹목적으로 주님에게 항의하고자 달려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삼층천까지 구경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도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영달과 부귀 영화를 위한 목적과 결부되지 아니합니다.
사도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돌본다는 것은, 병원의 환자들 돌보듯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원주인은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자를 가르치는 은사를 비롯해서 각종 은사 받은 자들이 영적으로 돌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돌봄'에 대해서 성령으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사람과 악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확정된 대상이 아니기에 언제 어디에서 말씀과 복음에 대해서 무슨 반응을 나타낼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가게에 손님이 오면 물건을 팔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인 돌봄은 물건을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냐를 유심히 살펴서 돌봐 주어야 되는 겁니다. 자칫하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입장에서 명심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교인들이 결코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요구하는대로 돌봐 줄 수는 없고, 참된 성도라면 배후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 예수님 보시기에 올바른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관권입니다.
따라서 교인과 교인의 만남을 계획적으로 주선해서는 아니됩니다. 교인과 교인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만약에 주님의 성도를 만나게 되면 이 만남의 주선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만나는 상대로부터 그 어떤 이익이나 혜택을 얻고자 시도해서는 아니됩니다.
도와주고 봉사하기 위한 만남이지 가르치는 자의 이용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도움을 받을 때에도 배후에 계시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져야지 마치 서비스료를 받는 것처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20:33-34에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는 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이는 그들 교인들을 감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배후에 계신 분이 바로 사도 바울이 믿는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께서 사도를 이들 사람들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인간적인 조직력이나 행정력이 스며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다.
사람이 복음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마치 대학 입시를 앞두고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교사의 입장과 같습니다. 진실로 꼭 대학에 가야하는 학생이 하나 있다면 그 학생을 위하여 입시 과목을 강의해야 하는 것이 강사의 임무입니다.
대다수가 그 과목에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 대다수에 사람들은 아예 대학 진학 자체에 상관없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런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음적인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처해있는 세상이 지속적으로 그들을 향해 불신앙 사람이 되기를 독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적인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한다면 처음부터 천국에 못 갈 사람만 소복히 모여든 셈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철저하게 복음과 말씀으로만 교인들을 돌보게 됩니다. 만약에 참으로 구원될 그리스도의 형제가 거기에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하든 말든 그 사람을 보고서도 오직 복음적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어차피 그 교회에서 그 사람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9-10에 보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결코 제자들은 이 세상적인 영광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양 손 다 털고 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의지하는 신앙인이 있는가 하는 신기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면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과연 천국에 관심 있는 자가 있는가 하는 신기함이 우리의 기쁨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