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종
‘막산다, 마음대로 산다,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해라’라는 말이 듣기에는 참 좋은 말 같다. 누구에게 구속받지 않고 잔소리에서 해방된 나만의 자유로운 세상 같은 느낌처럼 다가온다. 단, 그렇게 막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는 결론이 나왔을 때만 이 말에 수긍이 될 것이다.
한정된 범위지만 어릴 때부터 제법 막살아 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삶이 가능한 몇 가지 상황적 조건이 허락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부모가 무척 바빠 나를 돌볼 수 없어야 하고 나에 대한 그분들의 기대도 없어야 한다. 하도 허약체질이라 하루하루 움직이고 있는 것만도 만족하신 듯하다. 둘째는 돌보지 않아도 애어른처럼 눈치껏 그 상황에서 주변 인물들이 요구하는 것을 미리 앞서 해놓으면 된다. 셋째가 제일 중요한데 이렇게 막살았을 때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막산다는 것의 대부분의 결과는 실패, 낭패, 혼란이었던 것 같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지가 용감을 불렀는지 ‘죽으면 죽지’가 그때의 마음 자세였다.
위에서 말한 것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스스로 조성할 수 있는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감당도 자신의 몫이 아니다. 어떻게든 결과를 바꿔보려고 나름의 발버둥을 쳤지만 온 힘을 다해 막살아 볼수록 내 맘대로 하고 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질리도록 하다가 무능이라는 낙인만 더 커진 채로 주저앉게 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어떤 강력한 욕구가 솟구침을 느끼게 된다. 도리어 자유가 아니라 꼼짝할 수 없는 구속력으로 자신을 통제해 주기를 바라는 어떤 힘을 동경한다.
십자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때 나름 이런 힘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 참가한 수련회에서 결론의 말씀은 ‘그러니까 막살아라’였다. 지금껏 그렇게 살았으니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은 말이었으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바라고 왔다가 ‘그러니까 죽으라고’라는 말로 해석하고 돌아간 듯하다.
육이 원하고 움직이는 방향성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비참하든 양상만 다를 뿐 늘 ‘살아야 한다, 존재해야 한다, 어찌하든지 힘을 얻어야 한다’라는 것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다.
남자와 여자, 부부,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성 속에서 복음의 움직임,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지를 보다가 오늘은 종과 주인이라는 관계성 밖의 사회, 그 사회 속에서 사람대 사람, 개인을 주목하게 된다. 살았던 그 모습 그대로를 설명하시니 이해가 어찌나 쏙쏙 되는지 아멘이 절로 나온다. 언약의 흐름은 부부를 통해서 희생을 끄집어내시고 부모와 자식을 통해 약속 성취의 경로를 다룬다는 말씀보다 거꾸로 사회에서의 개인을 출발점으로 개인이 서열화된 사회 속에서 어찌하든 종의 자리보다 더 위로의 상승을 목표로 하며 종의 서열은 어찌하든 꾀를 써서 주인의 마음을 속여야 하고 주인은 종에게서 자리를 지키며 더 높이 오르기 위해 공갈을 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더 이해가 잘 된다.
이렇게 사회에서 개인적 속성에 완전 몰입된 상태로 가정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이 나태한 꼴을 볼 수가 없다. 게으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닦달하며 어떻게든 힘을 가질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찾아 아이들을 양육한다. 어느새 가정은 신분 상승의 도구를 양성하는 양성소로 전락한다. 현실적으로 이런 설명이 더 납득이 간다.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변수는 이 흐름을 방해하는 손길이 개입했을 때이다. 방해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방향을 바꾸신다. 다 같이 한 방향으로 달리다가 자기 혼자 방향이 바뀌어 있을 때 여전히 예전 방향으로 달리는 모든 사람들과 다 부딪쳐야 한다. 안 부딪치는 두 가지 방법중 하나는 다시 같은 방향으로 그들과 달리면 되고 두 번째 방법은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부딪치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거.
부딪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이 사회가 문제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도 나름의 고통을 감수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그 고통의 결과를 예측하며 참고 견뎠다. 그러나 방향이 틀어져 있을 때는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고통이 어디서 오는 지도 파악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제 이 고통의 출처를 자신에게서 자신의 육에서 찾지 말고 방향을 틀어주신 분에게서 오는 사건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고통이 누구의 고난을 재현하고 있는 것인지 알게 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쇠구슬처럼 단단해져 있는 자아를 피를 담은 죽음을 담은 십자가로 관통하신다. 오직 자신으로만 죄 덩어리로 단단하게 뭉쳐있는 육에 구멍이 뚫리고 십자가 바늘에 달린 사랑이라는 실이 구멍을 관통한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난다. 단단한 개인들이 육들이 사랑의 실로 엮여서 하나가 된다.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바늘귀로 통과하시는 주님의 효과로 낙타 같은 죄 덩어리들이 실에 엮여서 천국으로 딸려 들어간다. 말도 안 되는 이 사건을 통해 누가 영광 받으시는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리에서 이 지옥 바닥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종 되신 자리를 바라보게 하신다.
지금 종의 자리에 있든지 주인의 자리에 있든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도리어 자리를 역행해서 어느 누구보다 가장 낮은 자리로 가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 진리의 말씀을 믿게 하셨다면 더이상 사람을 그리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 말씀의 종으로 두렵고 떨리는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