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55강 사무엘상17장55절(새로움)20191231-이 근호 목사
대전-55강 사무엘상17장55절(새로움)20191231-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55절부터 읽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아브넬은 사울의 장수입니다. 56절, “왕이 가로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의 앞으로 인도하니” 58절,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사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떤 존재냐 하면은 그냥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새롭다는 말은, 여러분, 새롭다고 하면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사울에게는 이 새로움이 오히려 자기를 왜소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자기의 존재가 갑자기 없는 존재가 돼버리고 다윗 앞에서 졸지에 무시당한 셈이 돼버리죠. 사울이 생각했던 세계가 이만큼이라면, 사울은 왕이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게 속해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내게 속해있다. 속해있는 게 A,B,C,D.. 뭐 여러 가지가 있겠죠. 예를 들면 어떤 가정이 오랜 만에 휴가를 맞아서, 여기는 휴가를 가면 주로 어디에 가죠? 대전 사람들은 계룡산에 갑니까? 대천해수욕장이나 뭐 이렇게 가족끼리 휴가를 내서 바닷가나 산으로 간다면, 그 가족 한 사람 한사람은 그 사람들이 태어날 때 호적이 어디에 등록이 되어 있습니까? 동사무소에 등록이 되어 있죠. 그렇죠. 그럼 그 사람은 한 가족인데, 아빠 있고 엄마 있고, 자식이 있으면 이 사람의 모든 것이 국가에 등록이 되어 있죠. 그럼 그 사람들이 대천해수욕장에 놀러간다. 그러면 그 사람이 놀 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대천해수욕장에서 놀면서도, 노는 그 한사람, 한사람은 이 대한민국에 속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놀고 있는 거예요. 그 가족들이 놀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족이라고 해요. 우리가족. 우리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가족에 대해서, 만약에 조선시대라면, 왕의 입장이라면, 가족들이 대천해수욕장에서 놀고 있는데 하필 그 시간에 임금님이 해수욕을 하고 싶어서 대천해수욕장에 왔다. 그럼 잘 놀고 있다가 제일 좋은 자리를 누구한테 양보해야 되겠어요? 임금님한테, 왕한테 양보를 해야 되겠죠. 왜냐하면 이 임금은 나라님이니까. 여기 이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없어져도 나라는 유지되지만 임금님이 없으면 나라가 안 되니까요. 그걸 가지고 아주 고상한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대빵이라고 하죠. 대빵. 대빵이 없는 조직은 없어요. 그리고 대빵이 생각하지 않는 인생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대빵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거예요. 가정의 대빵이 죽었다면, 벌써 갑자기 속 시원하면 안 되겠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본인은 평생 동안 얼마나 그렇게 여기면서 했겠습니까? 그러나 본인이 대빵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뭐가 대빵이냐 하면은 죽음이 대빵인 것을 몰랐죠. 그래서 평소에 죽기 전까지도 사는 이유가 뭐냐, 죽을까봐 살아요. 죽을까봐. 죽을까봐 산다고요. 자기는 대빵이라고 큰소리쳤는데 어디 쫓기고 있어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16절에 나오죠. 죽기를 무서워해서. 이 죽음을 가지고 협박하는 자가 악마입니다. 악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거든, 우리 마음속에 죽는 것이 무섭거든 그냥 악마가 대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대빵 밑에 쫄따구로 산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신약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흔히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하고는 전혀 달라요. 일반인들은 내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나의 의지와 나의 결정에 의해서 된다고 했거든요. 나의 의지와 결정이, 절에 갈까? 교회 갈까? 그래. 결정했어! 교회가기로 결정했어! 이렇게 되면 인간 앞에 절과 교회 두 군데를 놓고 자기는 중성지역이에요. 중립지역에 있는 거예요.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다 그렇게 하니까.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갈비탕 먹을까? 안 그러면 돼지고기를 구워먹을까? 모든 것은 내 선택에 대해서 내가 그 결과를 낳는다는 그런 식으로, 이런 원칙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나도 못하죠. 근데 사람들은 그 중간에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할 때에 그 뒤에 괄호를 생략하고 있어요. (나는 죽음을 벗어나려면 어느 것을 먹어야 되느냐?) 죽음을 벗어난다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겁니다. 죽음을 벗어나려면. “에이, 라오스에 가지 말고 성경공부에 나오지.” 이거는 만약에 성경공부에 나왔다가 내가 사는데, 내가 그냥 살면 안 되죠. 행복하게 사는데 어느 것이 나한테 손실을 가져오느냐를 생각하겠죠. 그렇게 생각하겠죠.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신약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보게 되면 나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계산하지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면 한번 봅시다. 어렵지만, 자기유익이라고 되어 있죠.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할 때에, 이 자기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알고 있다는 그 자기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랑이라는 것이 오게 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를 포기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자기유익할 때 유익은, 평소에 나는 이게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기라는 그 범주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추구하지 않는다. 이건 평소에 사랑이 오기 전까지는 뭐만 추구했다는 뜻이에요? 줄곧 자기유익 외에는 생각한 게 없어요. 없다 이 말이죠. 수련회 가는 것이 나을까? 마는 게 나을까? 이게 뭐예요? 이게 자기유익이잖아요. 자기유익. 그런데 사랑이 오게 되면 뭐부터 발로 차버린다? 밟아버린다? 자기유익을 원하지 않는다. 자기유익을 왜 평소에 원했는가 하면은, 히브리서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한다고 되어 있고,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런 감정적인 것보다도 더 원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데, 뭐냐 하면은 인간은 죄와 저주에 쫓기기 때문에 그렇다. 죄와 저주가 무서워서 죄를 어떻게 처리해보고, 죄가 있으면 행복을 요구할 수가 없잖아요. 죄인주제에 이거 살려 달라, 이거 달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꾸 죄인이 아니고 싶어요. 그리고 뭘 달라할 때 정당하게 달라고 할 권리가 나한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정도로 착하니까, 이정도로 보상은 주어져야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얼추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교회에 나오면서 오늘도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뭐 오늘 교회에 나가서 작살을 한번 나볼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안 나오잖아요. 맨날 무슨 일이 벌어지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스스로 자기에게 자문하죠.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맨날 이거죠.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내가 뭐가 잘못되어서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오히려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나같이 아무것도 안 한 사람에게 웬 사랑? 용서를 주십니까? 이거는 불공평합니다. 주님이여! 공평치 못합니다. 제가 천국가기 위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데, 왜 저에게 용서라는 사랑, 이쁘다는 사랑, 너를 보면 기쁘다, 즐겁다는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좋아하심을 왜 제가 이렇게 받아야 됩니까? 이 큰 선물을 받을만합니까? 라는, 그런 고백을 내놓아요. 그 순간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그렇게 사랑을 고백한 순간 자기유익은 저절로 날아가 버리죠. 왜냐하면 자기유익은 무엇을 낳기 때문에? 걱정과, 걱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겁니다. 공포심이에요. 공포심. 걱정. 여행갈 때는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비행기 탈 때는 좋은 자리에 앉아야 될 텐데. 모든 발걸음 한걸음마다 계속해서 걱정근심이 마중을 나오죠. 계속해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등장하는 걱정이 또 새롭게 추가가 됩니다. 걱정 없이 살 수가 없죠. 아이고, 애들 군에 보내서 속이 다 시원하네. 어, 제대할 때가 다 됐네. 어떡하지? 다음 달에 제대인데 어떡하면 되지? 시간을 맞이한다는 것은 걱정이라는 맞바람을 맞는 거예요. 맞바람을. 늘 보는 해인데 내일의 해는, 내일 뜨는 해는 뭡니까? 그저 올 한해는 식구들 다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되고 애들 공부 잘했으면 좋겠다.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자기유익이죠. 자기유익을 이미 하고, 그것을 속에 담아놓지 않고 달 또는 해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묵호 등대에, 우리나라에 일반인 가정에서 제일 가장 경치 좋은 데가 묵호라는 곳인데, 바닷가 바로 옆에 언덕이 있고 등대가 있는데, 등대 밑에 촘촘히 옛날 40년, 50년대 낡은 가옥들이 있어요. 이 가옥들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sbs기자가 물었어요. “해 뜨니 좋습니까?” “니 한번 살아봐라. 좋은지.” 처음에 하루는 좋아요. 외국에 있는 호텔이 동쪽으로 되어 있으면 해가 떠서 온 햇살이 다 들어오잖아요. 첫날 가면 해 뜬 거 사진 찍고 난리가 납니다. 한 3박해보세요. 그 다음부터는 커튼 닫아버리죠. 늘 보는 바다는 오히려 우울증을 유발합니다. 마치 나의 세계의 반이 날아간 것처럼. 반을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늘 봐도 늘 쓸쓸하죠. 인간은 자기유익으로 포위가 되어 있고, 그래서 쫓겨 가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뭔가 둘러싸여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죄와 율법에 둘러싸여 있다. 죄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법 쪼가리 같으면 걱정이 안 되는데, 여기서 뭘 예상하느냐 하면은 사람은 폭력을 예상하게 되어 있어요. 폭력을. 반드시 힘이 주어진다는 것. 내가 나쁜 짓하면 힘이 주어진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 속에 있는 양심이나 도덕률이 있죠. 근데 그 도덕률은 누가 심었다고 했습니까? 악마가 심어놓은 거예요. 도덕을 위반했다고 상벌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도덕 자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새로우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에서 이런 말씀을 했거든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의 도덕률하고 예수님하고 조인join이 되지를 않아요. 결합이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온 사람들은 전부 다 벌벌 떨고 오잖아요. 자기 도덕률에 준해서. 인간의 도덕은 어디서 왔고, 그게 문제가 있느냐, 그게 실제적인 효과가 있느냐를 문제 삼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 나 착해야지, 이래 보면 안 되고. 내가 착해야지 한다는 것이 분명히 수상해. 이게 병든 양상인데, 이걸 어떻게 빼내고 이게 왜 문제가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봐야 돼요. 발견하기 위해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대화가 바로 거기서 어긋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자의 대화는 항상 나름 자기의 도덕성을 자랑질 하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서 모든 언어를 내뱉게 되어 있어요. 헛소리죠. 헛소리. 거기서 나오는 게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최선이에요. 최~선, 그게 자기를 지옥으로 보내는 줄 몰라요. 길이 두 가지가 있다고 제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주님이 이야기했거든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나의 길은 뭐냐, 영생으로 통하는 길이 있고 또 하나의 길은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현재 주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현상적으로 어느 길이 영생이고 어느 길이 멸망인지 우리가 관심을 둬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걸 진지하게 여기신다면, 이걸 개떡같이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여기신다면, 사람이 태어나서 죽었다, 뭐 결혼했다, 뭐 돈이다, 그거 지금 문젯거리가 아니에요.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이 말이죠. 공부 끝나고 어디 가서 저녁을 먹나, 그거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길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니까, 지금 나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되겠죠. 주님께서 영생으로 통하는 길, 마치 사다리타기 하는 것 같아요. 제비뽑을 때 뭔가 하나가 있는데 결과는 감추어있어요. 뽑기 같으면 아무거나 뽑으면 되는데, 이건 뽑기가 아니고 지정되어 있고 정해진 거예요. 주님이 숨겨놓은 겁니다. 왜 숨겨놓았을까요? 영생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영생 가는 길을 이야기하고 숨겨놓았다 이 말이죠. 그 말은 인간이 자기결정으로 그 영생의 길을 선택할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새로움과 새로움, 매일 새로움이 있어야 해요. 매일. 매일같이 새로움인데 그 새로움은 자기유익과는 별개, 자기유익을 고려하지 않는 새로움,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새로움, 오히려 걱정근심, 지금까지 살아온 바에 의하면 그 원리원칙에 전혀 맞지가 않는 새로움. 이런 원칙은 생뚱맞다. 처음이라고 매일같이 느껴지는 그 새로움. 그 새로움이 밑에 컨베이어처럼, 가만히 있어도 딸려가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새로움을 주시면 우리에게는 바깥에 어떤 풍경이 보이는가 하면은, 나처럼 살던 사람이 뒤로 물러가는 풍경들이 보이는 거예요. 같이 친구라고 여기고 여고동창생이라고 여겼는데 점점 더 멀어져가네. 점점 더 멀어져가요. 같은 식구라고 여겼는데 내 원수가 집안 식구라. 점점 더 멀어져가요. 대화가 안 되는 이유가 주님의 이 원칙에 의하면 멸망하는 것들로 그쪽에서 계속 대화를 시도하죠. 그러나 그쪽에는 뭐냐, 새로움이 없어요. 오늘 본문 같으면 사울에게 뭣이 없다? 다윗이 없는 거예요. 사울은 왕이기 때문에 다윗을 자기 나라의 하나의 백성으로 간주한 겁니다. 백성으로 간주해서 질문이 뭐냐, “뉘 집 아들인고?” 이렇게 묻는 거예요. 다윗 같으면, 우리 같으면 “니가 알아서 뭐하게? 니가 알아서 뭐 할 건데? 니가 왜 묻는데? 왜 우리 집안이 딱딱하고 평소에 군사훈련 많이 해서 골리앗을 이 긴 줄 알아? 그거는 사울 니 식이야. 니 식. 니가 평소에 왕으로서 이 나라를 내 나라로, 나라님이니까, 왕으로서 모든 사람이 속속들이 니 손아귀에 있다고 여겼던 그 사고방식에 내가 포함이 안 돼서 화났어? 그래서 성질났어? 그래, 그러면 좀 미안하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골리앗을 보냈다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자꾸 다윗 편에 서려고 하지 마시고 우리가 이 순간 누구 편에 서야 돼요? 사울이나 골리앗 편에 서야 돼요. 골리앗이나 사울 편에. 자, 사울 편에 섰을 때에, 남들 보기에는 사울 왕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다윗은 그 백성들 가운데 하나고. 그럼 다윗이나 사울은 둘 다 이스라엘 백성이 맞죠. 남들 보기에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죠.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보내줘 버리니까, 나라가, 이 이스라엘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나라의 잉태가 시작되는 겁니다. 새로운 나라의 잉태. 이걸 아주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내 세계관에 속한 나가 아닌 새로운 나를 매일 준비해주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왜? 매일 새로워지니까. 그러면 내일인 내가 볼 때 오늘의 나는, 내일의 새로운 인생으로 볼 때 오늘의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되겠죠. 왜? 과거는 죽었으니까. 그래서 주일 낮에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잖아요. 자기를 볼 때에 과거동사를 써서 자기를 봐라 이 말이죠. 표현해라. 과거인물로. 과거완료로. 주일에 했던 하나의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면, 요셉이 마리아하고 정혼한 사이죠. 그러면 우리는 마리아편에 서지 말고 요셉 편에 서세요. 자, 요셉이 생각한 한도가 우리 생각의 한도하고 딱 맞아요. 그 레벨이 딱 맞다고요. 아니, 요셉은 우리보다 더 도덕률에 있어서 더 선한지는 모르겠어요. 가방 사줘, 우리 이렇게 해서 아파트하나 장만하자고 이야기가 다 돼, 이제 결혼 날짜만 잡고 혼인만 하면 될 입장인데, 어느 날 내가 모든 인생을 걸고 모든 것을 추구했던 그 사람이, 저 우리 헤어지자가 아니고, 마리아가 뭐라고 했습니까? 임신했다고 하죠. 이거 새로움이에요. 첫 번째 강의 제목은 ‘새로움’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요셉의 입장이 된다고 했죠. 참 기가 차죠. 기가 차. 이걸 우리나라 노래에 난감 하네~ 난처하다 이 말입니다. 난처한 상황을 만들었어요. 자, 어느 정도로 난처 하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유익을 챙길 수 있는 그 바탕이 작살나버린 겁니다. 다 깨져버린 거예요. 평소에 내가 나를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인생에 뭐가 개입했어요? 마리아가 개입했고. 마리아가 개입한 것은 전에는 좋았죠. 근데 어떤 마리아로 새롭게 다가왔습니까? 임신한 마리아로 다가왔어요. 임신한 마리아로 왔을 때 요셉은 난감 하네~ 보통 문제가 아닌 거예요. 이걸 제가 말하겠습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대빵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휩싸여 있다, 휘둘려있다, 이래보시면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은 조립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왕 앞에 자기 모든 백성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소유물이 되죠. 소유물. 근데 소유물이 되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옴으로 말미암아 이 소유물에서 이탈돼버린 거예요. 이탈. 왜냐하면 왕 사울은 골리앗을 못 이겼었는데, ‘그 골리앗은 때려죽여도 이건 못 이겨. 이번 전쟁은 우리가 진 거야.’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울 왕이 그동안 평소에 살아왔던 인생 전부를 다 농축해서, 그걸 전부다 모아서, ‘이거는 큰일 났다. 우리나라는 졌다.’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확정된 자기세계죠. 사울의 자기세계라는 범주에서, 이 세계가 자기세계의 전부가 된 겁니다. 전부. 영어로 하면 ALL올이 되겠죠. ALL. 올인데, 그 올에 포함이 되지 않은 낯선 이벤트,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 사울 왕의 이 모든 것은 새로움 앞에서 자기는 갑자기 작아졌죠. 작아지고 이게 뭐냐 하면 무용지물, 소용이 없이 됐죠. 자기 인생이. 왕이라는 지위자체도 없어졌죠. 소용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거는 곧 무의미가 되고, 나는 졸지에 새로움 앞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쓰레기. 구약에서 사울은 화를 내지만 신약에서는 쓰레기인 자만이 웃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내일 되면 주께서 주시는 그 새로움으로, 그 관점으로 오늘을 보게 되면 주께서 왜 나를 오늘까지 살게 했는가, 어제까지는 쓰레기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이 시간에 비해서 어제는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버려라. 쓰레기는 폐기처분하거나 버려라. 그 까짓것 얽매일 필요가 없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해라. 신생아라고 여겨라. 그리 보는 겁니다. 신생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가 어제 그렇게 되려고 했던 애씀과 노력과 결정과 나의 기대와 의지가 이 신생아에 전부 다 차단이 됩니다. 봉쇄돼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뭐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웠다는, 하나님의 은혜만 남겠죠. 그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새로운 피조물입장에서 지난 어제를 생각해볼 때는, 과거 것은 이 새로움 앞에서 무용물이 되고 무의미하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거죠. 사람이 걱정한다는 것은 과거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과거의 가치를. 과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가 없죠. 내일 되면 또 새로울 테니까. 새로움이라는 것은 이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새로움은 무가치해요. 새로움이 튕겨버리죠. 오늘 본문 사무엘상 17장 55절에 보면, 사울이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고 묻습니다. 58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의 사람, 누구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새의 아들이죠. 이새의 아들. 이 대화가요,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달리는 열차 같아요. ‘이새’라는 인물. 신약에서는 이걸 ‘이새의 싹’이라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을 한번 볼까요? 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됐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나오죠. 그러면 이새가 아비라고 누가 말을 했습니까? 다윗이 했죠. 그러면 사울 다음에 왕이 다윗이 아니고, 사울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잖아요.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과 다윗에 속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층위를, 위상을 구분합니다.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이 1층이라면 다윗에 속한 이스라엘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1층이 아니고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은 2층으로 올라가죠. 1층은 1층으로 끝나버리고 2층으로 올라가버리죠. 아까 제가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길이 몇 개 있다고 했습니까? 두 개 있다고 했죠. 하나는 영생으로 통하는 길, 하나는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 있죠. 자, 멸망의 길옆에 영생의 길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멸망의 길은 멸망의 길로 줄곧 가요. 죽어서 지옥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있으면서 이 대전바닥에 살면서 지옥경험을 충분히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맹탕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구원되느냐 하면은 지옥에서 특혜 받은 사람만 뽑아내는 거예요. 지옥에서 특혜 받은 사람을 뽑아내는 거예요. 사실은요, 남들한테 부러움 당해도 흐뭇해야 돼요. 우리가 시기질투를 받아야 될 입장입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주위사람들로부터 하여금 질투의 박수를 받을만한 위치에요. 서울대학에 수시로 붙어도 박수 받는데, 서울대학 나왔다고 천당 갑니까? 천국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인간이 가고 싶은 그 최고의 천국에 합격을 이미 받았으면 이거는 정말 으스댈 만한 신분이에요. 천사들도 되게 부러워한다고 했어요. 천사들도. 히브리서에 나오죠. 기뻐하라, 찬미하라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천국에 이미 합격을 받아놓은 상태에요. 까짓것 합격 받아놓은 상태에서 지옥생활을 좀 하면 어때요. 이게 뭐 대수입니까? 신분 자체가, 아니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도 이 땅에서 와서 거지가 됐는데. 우리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왕자 아닙니까? 왕자가 이 거지생활 좀 해도 괜찮아요. 한 달 수입 한 천 이백만원 정도. 좋은 별장 두 채 갖고 있는 정도. 그것도 일종의 거지인데. 천국에 비해서는 거지가 아닙니까? 망해봤자 천국이거든요. 망해봤자. 죽어봤자 천국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이야기한 거예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할 때에 제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이해한 거예요. 그것은 제대로 이해한 거예요. 부자는 불가능하다 이 말이죠. 가능치 않는 거예요. 죽어야 될. 그래서 가능치 않다는 말씀을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제자들에게 제대로 이야기했어요. 아, 살아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지금 내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은 자로 보시는구나. 죽은 자로 보시고 자꾸 주께서는 죽음 이후의 말씀을 던지니까, 우리는 그걸 오해해가지고 산 인간이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산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됩니까? 구원파 있죠. 구원파. 구원론. 예수 믿을까요? 십자가 믿을까요? 자꾸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백날 예수 믿고 피 믿어봐야, 그거는 뭐냐 하면은 그거는 장난치는 거예요. 그거는 오락입니다. 그거는 연기하는 거예요. 그거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짓이에요. 하나님의 천국마저 자기 소유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새로움이 없고 자기의 도덕률에 준해서 착한 일 한번 해보겠다고 예수 믿어주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거짓말이에요. 지난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내사랑하고 남편존경해서 지옥 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요, 자기가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이에요. 그냥 푹 빠져버린 감정이에요. 푹 빠진 감정이라도 나중에 뒤돌아보게 되면 그것이 자기유익을 위하여 활용당하고 있어요. 아무리 누굴 사랑해도 그 사랑의 힘으로 악마의 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랑했다가 폭력의 이유가 되고 근거가 돼요. “내가 너 사랑해줬잖아”가 돼버려요. 진짜 사랑하려면 자신이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데서만 나온 사랑이어야 돼요. 그래서 복음적인 부부는 뭐냐 하면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안 되고, “나는 쓰레기야. 나는 못났어. 나는 과분해. 나는 죄인이야.”라는 이런 이야기로 주고받는 것이 복음적인 부부의 대화죠. 자,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났다고 함으로서, 이 층이 사울 옆에 다윗이 아니고, 다윗의 이스라엘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다윗 앞에 있는 왕이 사울이 아니에요. 다윗은, 다윗이 첫 번째 왕이 되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왕을 일부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변해서 일부러 세운 거예요. 세우고 이거는 제거용입니다. 제거용이에요. 제가 지난주일 설교를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제가 반복합니다. 아담에 속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걸 제거하려고 해요. 제거하시면서, 제거하는 과정 속에서, 새 아담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아담의 자식들이 결혼하는 것, 이 결혼도 제거대상이에요. 제거대상. 뭐 결혼뿐만 아니고 사는 것조차도 이거 죽음으로 제거 돼야 되니까. 그래서 성령이 오시는 것은 니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이 오죠. 성령이. 근데 펄펄 살 때는 계속해서 성령이 꾸짖습니다. 제거된 인간한테는 어떤 것도 안 받는다. 어떤 선한 이런 것도 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이야기할 때는 우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무엇을 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너희에게 행한 것만 받는다는 것을, 예수님과 우리를 자꾸 대조하고 비교하는 방식으로 성령께서는 일하죠. 강의 첫 부분에 한 것을 다시해보겠습니다. 자, 사울이 왕이죠. 왕인데, 골리앗을 이기고 온 다윗에게 물었다고 했죠.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다윗은 사울의 범주 안에, 사울 보기에 자기 속에 속해있다. 일부다. 내가 통치하는 일부라고 했는데, 골리앗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다윗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사울 자기의 통치력을 벗어나 있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이 왔다. 성령이 왔다고 하면 국가부터 해서 가족, 모든 단체, 사회단체 있잖아요. 친구, 어떤 단체도 우리가 그 단체에 구애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 소속입니까? 우리는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죠? 주님의 것이죠.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은 우리 안에 뭐가 담겨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값, 곧 주님의 피가 흐른다는 뜻이에요. 우리 안에. 성도 안에.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다룰 때, 무엇을 표준으로 해서 우리를 간섭하고 다루시고 합니까? 피를 니 행함으로 가리지 말라는 거예요. 피의 가치를 너의 가치로 가리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함이 있고, 그 행함은 잠시 생각하게 되면 이 행함을 자꾸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가치 있는 어떤 성과나 업적으로 자꾸 바꾸려는 생각이 있어요. 인간은. 강의를 몇 번 했다든지, 설교 어떻게 했다든지, 뭐 교회 몇 군데 세웠다든지, 전부 이런 거잖아요. 행함을 가치 있게 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결국 나의 가치를 못 버리고 버티겠다는 거예요. 버티겠다는 겁니다. 이 고집스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이새의 아들을 사울은 이제는 공격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기가치, 범주, 내 통치력을 벗어나면 죽여 버린다는, 내 통치 안에 있는 다윗이어야 하는데, 내 통치력을 벗어나면 자기가 쪼그라들기 때문에, 자기가치를 버티기 위해서는 그게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다윗을 계속 물고 뜯으면서 이걸 제거해야 되겠죠. 이것이 인간세계가 갖고 있는 무슨 내면이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예수님 제거작업입니다. 악마의 심보죠. 악마의 심보가 이 심보에요. 악마한테 벗어난 자는 악마인 내가 용서 못하겠다는 식으로 달려들어서 계속해서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 5장 8절에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택한 자를 노린다. 다른 사람은 안 노려요. 다른 사람은 자기들이 알아서 이 세상에서 죽기 무서워서 죽음에 굴복하기 때문에 이거는 가만히 놔둬도 자동적으로 악마한테 고개 숙이게 되어 있어요. 죽는 게 무서워서. 근데 성도한테는 이미 소속이 이 땅의 소속이 아니거든요. 좁은 길은 이미 지옥을 통하지만, 이미 지옥에 가는 길은, 그러니까 넓은 길옆에 좁은 길이 아니고, 나란히 가는 길이 아니고, 넓은 길 위에 좁은 길이 새로움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넓은 길은 아무리 해도 좁은 길로 갈 수가 없어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넓은 길로 가는 사람한테는 좁은 길이 없고 그 길은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생의 길은, 없는 바로 그 길이 영생의 길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령이 오셔가지고 이 지옥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특혜를 줘가지고 뽑아내야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새로움이거든요. 그러면 새로움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고, 주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하면서, 지난날까지 자기 자신은 점점 더, 하루하루 살면 살수록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쓰레기인 것을, 그것도 아주 기쁘게 다행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쓰레기라는 말은 허수아비였다. 이미 죽었던 허수아비를 내가 살려보려고 얼마나 부둥켜안고 애를 썼는지. 그거 헛수고죠. 사울 왕이 갖고 있는 군사들이 많잖아요. 사울 왕이 왜 그렇게 군사들을 모아놓고 훈련시켰습니까? 누굴 이기기 위해서? 블레셋을 이기기위해서죠. 다른 말로 하면 블레셋의 대표 골리앗을 이기기 위해서 훈련시켜놨죠. 근데 막상 골리앗이 등장하니까 그 많은 숫자의 군사들이 소용이 있었습니까? 소용이 없죠. 교회 가서 열심히 목사 말 듣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예배드리고, 나를 지켜 주리라고 여겼던 그 많은 행함이 소용이 있던가요? 소용이 없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죠. 주께서 화를 내시는 거예요. 니가 언제까지 그렇게 멸망의 길로 갈래? 소용없는 것을 자꾸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의미를 주다보니까 점점 더 집착에 집착을, 집착에 플러스곱하기 하는 거예요. 자아 안으로 응축이 돼버려요. 더욱더 단단해져버려요. 사울처럼 내 가치를 버티기 위해서, 그러면 버티는 대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에요. 누굴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아까 사울이 누굴 공격합니까? 다윗이라고 하지 말고 이새의 아들이라고 하세요. 이새의 아들. 왜냐하면 이사야 11장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가 한 가지에서 나서. 2절, 여호와의 신. 그러니까 이사야 11장을 통해서 본문 사무엘상 17장 끝을 보게 되면, 결국은 뭐냐 하면은 이새의 싹이라고 하는 것은 이새가 다윗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이새의 싹이 아니고. 이새도 육에 속한 인간이에요. 그런데 이새라는 그 아버지는 누구 덕분에 이렇게 육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할 수 있는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자식 때문에 그래요. 자식 때문에. 그러면 자식 때문인데, 그 자식 안에 뭐가 개입해서 갑자기 자식 덕분에, 이새의 아들로, 다윗을 이새의 아들로 하느냐, 자식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약속이 들어있으면 약속은 헬륨가스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지옥의 백성으로 가만두지를 않아요. 이거는 우리가 아무리 저항해도 우리는 어디를 가야돼요? 영생의 길로 가야 됩니다. 가는데, 아까 풍경이야기 했죠. 지옥 가는 사람은 점점 뒤로 밀리죠.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대화하니까 대화가 안 돼요. 이거는 내 의사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대로 구현하다보니까, 바깥으로 이러한 현상이, 이러한 징후들이, 뭐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꾸 발산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그걸 못 느끼지만, 버스를 딱 타게 되면 대번에 술 먹은 사람에게서 냄새가 확 나죠. 버스 타게 되면 정류장에서 담배 피다가 끄고 올라온 사람에게서 냄새가 대번에 확 나죠. 난다고요. 근데 담배피운 사람은 그걸 못 느껴요.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못 느낀다고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목사가 설교를 딱 하면 저것이 사람들을 집단으로 지옥 보내는 말씀이라는 것을 대번에 딱 감 잡아요. 자기부인이 아니고 주님께 감사가 아니라 열심히 해보자는 쪽으로, “올해는 이랬는데 내년에는 더 열심히 해서 돈 바치고 시간 바치세요.” 이런 식으로 송구영신예배를 드릴 때, 대번에 이게 알콜 냄새가 난다고요. 지옥의 냄새가 확 풍기잖아요. 이사야 11장 2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그분이 바로 여호와의 신,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그러니까 소년 다윗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어른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소년을 세웠고요. 허나 이거는 구멍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언약이 나오는 언약의 출구라고 보시면 돼요. 소년 다윗은. 따라서 우리는 다윗을 본받자고 하면 안 돼요. 우리는 누굴 본받아야 돼요? 사울을 본받아야 돼요. 본받을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사울이니까. 우리는 아예 사울이에요. 쓰레기라니까요. 다만 이렇게 쓰레기라는 것을 알 때만 새로움의 가치, 새로움의 고귀함, 새로움이 나를 새롭게 한다는 그 하나님의 원칙은 바로 이사야 11장 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신, 여호와의 신은 항상 우리에게 날마다, 한번만 아니고 날마다 우리에게 뭘 준다? 새로움을 주는 거예요. 천국의 새로움. 지옥과 대비되는 양상의 천국의 새로움. 날마다 송구영신예배죠. 매일같이 송구영신예배. 이사야 11장 3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않는다 이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속을 말하거든요. 우리의 속을, 우리의 양심을 보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는 겉과 속이 똑같아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우리 속에 새로움이 우리 속까지 들어왔다는 그 새로움을 보신다는 거예요. “니가 어떻게 니 욕구, 욕망대로 하고 싶어도 니 뜻대로 안될 걸”이라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늘 통보해주시는 겁니다. 이사야 11장 4절에 보면,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겸손한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겸손한 자를 구분시킨다는 이 말이거든요. 우리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고. 자만의 근거가 뭐냐 하면은 자기유익이죠. 세상이 뭐래도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자세. 그것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죠. 그러니까 다윗과 사울의 만남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지적인 예언이 되는 겁니다. 이 사태가 예언의 말씀이에요. 예언의 말씀이라는 그 원칙이, 계속해서 영원토록 되풀이 되는 원칙을 다윗과 사울의 만남에서 주는 겁니다.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기쁘고 반가운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일단 화들짝 놀라게 만들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허수아비 붙들고 내 것이라고 우겼던, 망상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그것으로 천국 가겠다고 나댔던 그 헛수고. 주님이 새로움으로 옴으로서 내가 평생 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된 헛수고에 불과한 것을 까발려주시는 그 새로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