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1212b 베드로전서3장 18절(특수한 인간)-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91212b 베드로전서3장 18절(특수한 인간)-이 근호 목사
아까 갈라디아서 1장 10절 계속 해보죠. 사도바울이 사람을 좋게 하고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사람들을 꼬신다든지 설득할 의도는 전무하죠. 이게 설득해서 성도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사람이 설득해서 성도가 되어 버리면 그것은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대해서 정보가 없던 사람이 예수에 대해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맨 그 사람이라니까요. 맨 육이 육이 되는 거예요.
육인데 육은 자기의 과거,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면서 뭐를 추구하느냐 하면 초월을 추구해요, 초월을. 인간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초월을 추구하거든요. 초월을 추구한다는 말은 그만큼 이 육은 스스로 뭘 하느냐 하면 아까 한계라고 했죠. 한계는 이것까지는 내가 접수했는데 더 깊은 것까지는 내가 아직까지 미흡하니까 모르는 것은 악이라 하고 아는 것은 선이라 한다면 이것은 무슨 사고방식입니까? 여전히 선악지식에 그냥 매여 있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상태밖에 안돼요. 지금 이것까지는 알지만 더욱더 공부에 박차를 가해가지고 미진한 부분을 마저 채우면 내가 얼마나 훌륭하겠느냐 생각하겠죠. 얼마나 훌륭하겠나 하는 것은 바로 미래의식 아닙니까? 미래의식이죠.
아까 성도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이 육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차단성을 가지고 발생되는 거잖아요, 차단성을 가지고. 차단성이 내부에 꽂혀 있는 거예요. 단절성이 꽂혀 있다 이 말이죠, 단절성이.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 성도된 적이 없음이 그 성도 안에 계속 자리잡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전에 인간이라고 여겼던 그 인간이란 개념은 성도 안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인간 개념은 없어요. 그 인간 개념은 그저 자기 한계를 알고 더 발전을 도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사도바울이 ‘사람을 좋게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도바울이라고 하는 그 인간성은 보통 인간하고 달라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18절에. 이거 설명하려고 이렇게 길게 설명했어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영으로 살리심을 받을 때 그 인간이 단절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 존재기 때문에 성도는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고 전혀 특수한 인간이라고요, 특수한 인간. 오늘 제목이 ‘특수한 인간’이다.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 혼자 돛대라는 게 아니고, 특수한 인간. 특수한 존재로서 특수한 인간이죠, 성도라는 것은 특수한 인간입니다.
자, 특수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떻게 시도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허락입니다. 예를 들면 이 집에 분재를 좀 키우네요. 분재 맞지요? TV로 기어 올라가 있는 거 저런 거 분재 맞지요? 분재를 키워가지고. 저 분재를 목사님이 키우고 있습니까? (사모님이 키우셔요) 사모님이 계셔야 되는데... 분재 있는데 내가 아이고 이걸 똑! 하고 가지를 아주 와장창 관절 꺾듯이 꺾어놨다. 그러면 분재에 몰두한 그 분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그러면 멱살을 쥐고 “왜 내 분재에 손댑니까?” 하면 그 사람 하는 말이 “주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말은 나한테 책임이 있다, 없다? 책임이 없는 거죠. 그게 성도의 신분입니다. 여러분, 놀랍게 들립니까? 터무니없는 망발로 들립니까? 어때요? 좀 터무니없는, 무책임한, 얍삽한 말로 듣기시는 거예요, 아니면 감격스러운 말로 듣기십니까? 우리가 육체로 있을 때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거예요, 우리가. 누구만큼?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훌륭한 ‘사람’.
그러면 나와 훌륭한 사람 사이에 단절성 있어요, 없어요? 단절성, 전혀 없지요. 분재 분질러놓고 주가 허락했다는 그런 막되 먹은 인간을 목표로 합니까? ‘나 이제 예수 믿고 분재 한번 작살내 봐야지.’ 이걸 목표로 성도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요. 성도의 의식 속에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해서 성도된 게 아니라는 게 자리잡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가 내가 원해서 성도되는 게 아니고 성도되는 것도 주님의 허락이 우선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허락 때문에 성도된 거거든요. 그러면 이게 한 번으로 끝날까요, 계속 이어질까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하다가 돌에 맞습니다. 돌에 맞을 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현장에 스데반 집사라고 생각해봅시다. ‘야 이거 내가 설교 잘못했나? 내가 이러려고 설교했나? 유명한 말처럼, 내가 이러려고 설교했나?’ 그런 생각 막 들겠죠. 그죠? 황교안이라는 자유당 대표입니까? 그 사람이 일주일째 청와대 앞에서 금식을 했잖아요. 만약에요, 아무도 안말렸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의식 없어졌는데도 안말리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죽었을까요, 아니면 에이씨하고 스스로 일어설까요?
아까 분명히 갈라디아서 1장 10절, 나는 사람을 좋게, 기쁘게 하는 게 아니죠? 그 사람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본인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전에 육체로 있을 때 은근히 기대했고 ‘나 이렇게 하면 성도 맞다’ 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을 주께서는 죽음에다가 다 집어 넣어버린 거예요. 에라 죽어버려라, 인간아. 이 육체야. 니 육이야, 니 죄야. 따라서 너는, 그것은 죽어 마땅해. 그 육체를 어떻게 요리하고 거기다가 뭐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꾸며가지고 그것가지고 영의 성도라고 우길 생각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도는 육체로 있을 때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오늘 제 강의의 핵심은 이겁니다. 성도는 우리가 인간으로 있을 때는 예상도, 상상도 못했다. 내가 이럴 줄을 몰랐다. 내가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 줄은 몰랐다. 착실해야 되고 스스로 관리해야 되고 자기 절제해야 되고 자기 조심해야 되고 살펴서 남들에게 해를 끼치나 안끼치나 늘 이렇게 고민해야 되고 남을 배려해야 되고. 남에게 빛과 소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려고 애를 써야 되고.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육체로 있을 때 성경 보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그 개념들을 종합해 볼 때에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천사처럼 사는 것이 성도다’ 라고 여기는 거예요.
성도가 안되었을 경우에는, 계속 우리는 그 천사 이미지가 나의 목표로 남아있는 겁니다. 나는 우리교회 권사님이 너무 천사같아. 언제 저렇게 기도해서 권사님처럼 본받을까. 하여튼 의존교회나 우리교회나 참 좋은 점은 본받을 자가 없다는 거예요. 아주 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기도할 때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겁내는지 몰라요. 생중계도 생중계지만 기도 한번 하고 난 뒤에 뒷담화, 얼마나 씹어댈까요?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 기도하는 꼬라지 보니 믿음 없다는 이야기가 막 귓가에 기도하는데도 왕왕 들리는 것 같아. 자기 속에 있는 수준 완전히 다 엑스레이 찍듯이 다 노출되는 그 수치심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기도할 때 이론이 그거거든요. 사람 보지 말고 누구만 보라? 주님 보라. 이론상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예를 들어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들 보지 말고 주님이 여기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라’ 라고 설교하는데 아이 울고 휴대폰 울려가지고 “예예, 좀 이따 내 곧 갑니다. 가게 문 엽니다.” 뭐 이런 이야기 들리고 말이죠, 시끄럽게 할 때 “에이 때려치워라. 나 설교 못하겠다.” 이렇게 하겠죠, 인간인 이상.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을 의식하는 거고 사람을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은연 중에 기도나 설교할 때 사람을 만족스럽게 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티가 나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이 전도해야 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전도는 성도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이 못해요. 특수한 인간이 하는 것이지 인간이 전도하게 되면 그건 전도가 아니고 자기 동호회에요, 동호회. 동호회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청소년 애들이 같은 커플 옷 입고, 옷 비슷하게 입고 같은 은어 쓰는 것 있잖아요. 자기들끼리 통하는, ‘깜놀’해가지고 줄여 쓰는 거 있잖아요. 찐남자. 찐남자가 뭔 뜻이냐 하면 진짜 남자라는 뜻이에요. 이거는 신천지랑 똑같아. 자기들끼리 노닥거리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공통언어 사용하면서 공통 관심사 해가지고 하나의 공동체 유지하는 거죠. 그거는 노는 거지 동호회, 친목단체죠.
그 조직이 자기를 대행하니까 거기서 그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죠. 그러면 그 공동체가 예수님을 대신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신천지를 믿는 거예요, 신천지 교인들이. 마치 오늘날 교회가 예수 안 믿고 교회 믿듯이 똑같은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조직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조직을. 왜? 조직이 있어야 사람들이 올 게 아니냐. 이게 뭔 뜻이에요? 조직이 있어야 조직 있는 자체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사람을 좋게 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꼬시자 이 말이거든요. 꼬셔서 뭐 할건데요? 사람 꼬셔다가 사람밖에 더 됩니까? 성도됩니까? 거기에 어떤 단절이 있어요? 어떤 자기부인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까 단절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 이야기 다시 한번 해봅시다. 베드로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창하게 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아주 칭찬이 늘어졌어요. “네가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했는데 지금 베드로에게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는다는 이 사실이 빠진 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는다는 사실이. 왜냐하면 죽는 스승을 따라 다니면 자기는 지금 헛짓하는 거예요, 헛짓.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베드로야, 헛짓해라. 그게 교회야. 헛짓하란 말이야, 헛짓. 그동안 뭐했어요? 나를 기쁘게 하려고 성도 되려고 한 거예요. 나를 기쁘게. 죽어서 천당 가려고 성도 되고 싶어 했던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포기를 못했어. 그러니까 죽는다 하니까 “그런 부정적인 것은 하지 말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에요. 너희는 죄인이다. 주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죽으시고 영이 되었다. 여기 뭐 문제 있습니까? 문제 없지요. 뭐가 문제냐 하면, 문제는 없는데 그게 주님의 뜻이잖아요. 그러면 주님의 뜻이 여기 도달하면 그만인데 그게 아니고 그걸 자꾸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자꾸 내 것 만드려고, 내 소유화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나 이 정도로 안다고. 인간의 육이 있는데 육을 죽일려고 하는데 육을 안죽이고 육 안에 성도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무엇이며 십자가가 뭐냐 이걸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육은 육대로 있으면서 이걸 담아서 뭐 할건데? 이거 담아서 뭐 할건데요? 이거 성도도 아닌데.
자, 진도를 나가봅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도는 어떻게 삽니까? 주님의 허락으로 삽니다. 허락이 뭡니까? 일체 자기 일어난 일에 책임지지 않는 겁니다. 그럼 불안하지 않을까요? 불안하다는 자체가 뭡니까? 역시 시공간에서 안죽었다는 뜻이에요. 시공간에서 죽어야 되는데 시간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고 있고 공간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 이거는 죽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습니까? 한국에서는 신자인데 미국 가서는 신자 아니고 미국 LA 카지노판에서는 신자 아니고 한국 오면 신자 되고. 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느 장소에, 북극에 가든 북한에 가든 중국에 가든 어느 장소에서도 그 사람은 뭐여야 한다? 성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뭐하려고 이곳까지 왔느냐?’ 이렇게 후회하지 않는 것. 주께서 허락해서 지금 중국에 왔다. 허락해서 지금 북한에 왔다. 허락해서 미국 갔다. 나는 주님의 허락 하에 지금 강남에 50억짜리 아파트에 산다.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다. 주님이 허락해서 구차없이 할 수 없어 내가 사는기라. 아이고 이 넓은 아파트 귀찮아 죽겠다. 청소하려고 하니까. 로봇이 청소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가 되어서 이것은 할 일이고 이것은 안할 일이고는 성도한테는 그게 일체 없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허락 하에 사니까. 자유 아닙니까? 자유. 내가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자유를 보여주자는 말이에요. 주님의 자유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된 거예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특수한 인간이라서 인간이기도 하고 인간 같지도 않고 뭐 이런 거. 꼭 주님 같아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여기서 표현을 ‘영’이라 하는 것은 귀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뭐 라면 끓일 때 물 끓으면 안에 수증기 나오죠? 그 수증기, 영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도. 그 성도가 구약에 있었다, 없었다? 이미 성도가 구약에 있었다 이 말입니다. 여기 주님 이야기하죠. 19절에, “저가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으니”
아까 제가 허락이라는 말을 했죠? 주님의 허락입니다. 주님의 허락이 되게 되면 성도된 것도 허락이지만 성도의 반대말은 성도 아님이죠 뭐. 그렇죠? 참 쉽죠? 성도 아님도 주님의 허락에 의해서 성도 아닌 거예요. 이 성도 아닌 사람은 어디 가느냐 하면 지옥 갑니다, 지옥 가요. 이 사람은 심판 때의 염소같은 거예요. 성도는 마지막 심판 때 양과 같아가지고 영원한 영생을 얻습니다. 이게 전부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 주님의 허락 때문에 그런 거예요.
따라서 주님의 허락 때문에 성도 아니고 성도라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합니까, 상대 안합니까? 상대 안하죠. 그걸 아는 사람이 성도다 이 말이죠. 주님은 나하고 상대 안해요. 나를 부리고 나를 활용하죠. 사용하지 내하고 상대 안하죠. 내가 고민하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책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책을 왜 합니까? 자책하는 의도가 뭐에요? 허세떠는 겁니까? 아, 저런 실수만 안했으면. 너는 있는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실수에요, 그게.
규정을 했다는 말. 이게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흙에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집어넣었잖아요. 그게 규정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만듭니까, 하나님이 만듭니까? 하나님이 만들죠. 하나님이 만든 그 형상에 대해서 인간이 반대하거나 저지하거나 훼방하거나 할 능력이 없지요?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르게 이야기해볼까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거예요. 맞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겁니다. 고로 인간은 자기 생각할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할 권한? 없는 거예요. 참새를 보라, 들풀을 보라. 참새, 들풀 누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들었죠?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따라서 참새, 들풀 안에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그 권한이 가득 들어있죠? 그래서 참새나 들풀은 그걸 마음껏 보여줬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사람은 마음껏 보여줘야 되는데 하나님의 허락 하에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을 가야되는 인간들은 성도 아님에 대한 표현, 성도 아닌 그러한 행위들을 주님의 허락 하에 뭐 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 없이. 북한의 김정일부터 시작해가지고 우리 주변에 보면...여기 시장 있잖아요. 신곡시장 가보셔요. 거기 뭐 반짝반짝반짝 그래요, 전부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지옥 가는 사람들이. 본인이 애쓴다고 예수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뭐 뻔한 이야기, 기본 중의 기본 같은 이야기를 지금 제가 계속 하는 이유는 구원받은 기쁨을 우리가 너무 얕보지 말자는 뜻이에요. 세상의 어떤 기쁨도 이 구원받은, 성도됨의 기쁨을 못 따라옵니다. 이 말은 성도됨의 기쁨이 있다면 생활에서 어떠한 짜증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짜증은 하나의 교만이에요. 짜증낸다는 게 교만입니다.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아셨다 치고.
허락으로 살아갑니다. 허락으로 살아가니까 자책할 게 있다, 없다? 없지요. 여기가 어디냐? 묻지도 말아요. 지금 몇시냐? 묻지도 말아요, 그냥. 잠을 자야 될텐데. 잠 자지 마세요. 잠을 허락해야 자지, 허락도 안했는데 잠을...잠 자야 될텐데 해가지고 그거 한다고 밤새지 마란 말이야. 잠 자야 될텐데 한다고 밤 다 새버렸어, 벌써.
그 다음에 더 나아가 봅시다. 성도는 아무도 나의 운명을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리고 나의 운명에 손 댈 위인도 없다. 이미 성도 자체가 완제품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 들어옵니다. 성도다움에 필요한, 거기에 합당한 말씀들이 성도에게 계속 주입이 되다 보니까 성도 말고 다른 인간들이 내 운명에 관여하거나 도와주거나 해치거나 할 그 어떤 경우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도 없어요.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주님께서 가룟 유다한테 이렇게 무서운 얘기를 했어요. 참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한 이 말을 풀어낸 그 내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한 가치 있는 말씀이에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마치 영화의 조커같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네게 좋을 뻔했다.” 자, 이 말씀을 오늘 특수한 인간, 성도 입장에서 한번 보세요. 성도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 가룟 유다가 스스로 자기가 사탄을 물리칠 수 있어요, 없어요? 물리칠 수 없죠. 그렇죠?
사탄이 육에 왔다. 그러면 육은 사탄이 오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불행 중의 불행이라는 결과를 낳아요. 차라리 안태어났었으면 불행하지 않을 운명을, 태어나게 함으로써 불행하게 되었죠.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받고 불신자된 사람들은 가룟 유다와 동일한 평가를 받게 되어 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왜? 사람은 죽는 것은 한번 정한 것이고 그 뒤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거든요. 심판 없으면 니가 어디 가서 어떻게 놀든지 신곡시장에서 무슨 장사하든지 다이소하든지 니 마음대로 해. 다있다 하든지 다없다 하든지 마음대로 하란 말이죠.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한다는 것은 일단 어떤 경우입니까? 태어났다는 전제하에. 그러면 태어났음에 대해서 인간이 후차적으로 여기 운명에 손댈 수 있다, 없다? 손을 못대는 거예요. 손을 댈 수가 없는 거예요. 그쪽 인간의 운명도 마찬가지지만 성도 인간의 운명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주님이 성도되게 하신 허락 하에서는 내 성도됨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손질할 수 없어요. 그 운명을 수정하거나 변경할 그런 권한도 없어요.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평에 의하면 성도는 어떤 평을 받았겠습니까? “너 참 태어나길 참 잘했어.” 자, 보세요. 이게 우리가 잘한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잖아요. 그러면 가룟 유다보고 한 이야기는 뭡니까? 사탄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가룟 유다보고 한 게 아니라 사탄보고, 물론 가룟 유다도 포함되지만. “사탄아, 니가 차라리 악마 안되었으면 좋을 뻔했다”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아니 태어남에 대해서 태어나기 전인데 어떻게 태어난 당사자가 자기 태어남을 관여하겠어요?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은 불행의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지옥가는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성도는 뭡니까? 천국가는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니가 잘하면 내가 너 칭찬해줄게”가 아니라 너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기쁨이 된다는 말이에요, 니 존재 자체가. 성도는 존재 자체가 기쁨이 되요.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말씀 생각나죠. (누가복음 2장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무도 나의 운명을 도울 수 없고 나도 내 운명을 변경하거나 손댈 수 없어요. 이게 답답합니까, 고맙습니까? 어때요? 이런 고마울 데가. 얼마나 고마워요. 이 기쁨을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자꾸 놓치고 있는 거예요. 왜? 사람들같은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 되고 싶어서. 그들이 알아주는 사람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는 특수한 사람인데 그 특수를 빼버렸어요. 자책하고 후회하고 그리고 자책, 후회 그런 것들이 남들한테는 그대로 핑계가 돼서 변명하고.
자, 베드로전서 더 해봅시다. 지금까지 제가 육에서 영으로 옮겨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빠진 게 있었는데 아까 18절에 보면,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대신하셨다고 되어 있죠? 불의한 자를 대신 했다. 인간은 자기가 불의한 지도 몰라요.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하니까,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잖아요. 아 그렇다면 나를 대신한 분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곧 이것은 주께서 대신 안했더라면 우리는 마땅히 버려지는 존재가 된다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마땅히 버려지는 존재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안졌다고 한다면 내 스스로 이것을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는 뭔가 조치가 있어야 돼.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르죠. 왜? 인간은 여기까지는 괜찮으니까 그걸 키울 생각을 하죠. 여기까지는 선하고 여기부터는 악하니까 앞으로 선을 키우고 악을 줄이면 내가 뭔가 안되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전적으로 누가 와서 나를 대신할 정도로 그렇게 무능한, 나의 죄에 대해서 철저한 죄인이라는 의식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대신하는 분이 있기 전에는. 그러니 주님이 고맙죠. 대신하러 안왔으면 아무리 내가 몸부림쳐도 소용없는 거예요.
이제 그 다음 문제, 자,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가 되었고 영이 되었고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 하는데 어떻게 죽은 것이 우리에게 의가 됩니까? “당연히 믿죠” 하지 마시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죠. 우리 전도사님 집에 강아지 있죠? 강아지 죽으면 전도사님의 죄가 씻어집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굉장히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죽으면 내 죄 없어집니까?
여기에 사람1이 있고 사람2가 있는데 사람1이 죽으면 사람2 죄가 없어집니까? 이런 논리가 있어요, 없어요? 있을 수가 없죠. 니는 니고 나는 난데 어떻게 니가 죽는다고 내가 살아요? 말이 안되잖아요. 말이 안되죠. 뉴질랜드에 화산이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화산은 또 터질 건데, 또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데 배도 없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 어디서 구조대원이 와가지고 이 사람 태우러 와서 드디어 이 섬을 떠났습니다. 20분 후에 터져 가지고 서 있던 자리가 완전히 화산재 덮혀서 죽을 뻔했습니다.
자, 이 구조대원이 이 사람 대신한 거예요? 안그러면 구출한 겁니까? 대신한 거예요, 구출한 거예요? 구출했죠. 그러면 화산섬에 있던 이 사람이, 구출당한 이 사람이 인간이라면 구출당하고 난 뒤 영이 되었습니까, 성도되었어요? 아니죠. 이건 구원이 아니잖아요. 구출이죠. 그 인간이 그 인간 되었잖아요, 그 인간이 그 인간. 그 인간이 시공간이 여기 있다가 다른 데 사는 것뿐이에요. 북한에 있다가 남한에 내려왔다. 구원된 겁니까? 자본주의 찾아온 거예요.
어떤 철학책에 이런 이야기 있어요. 하나님이 죽었대. 하나님 만세! 이게 보세요.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이죠. 하나님이 죽었대요. 이제 인간 마음대로 해도 된답니다. 그래서 그 고마움을 누구한테 표현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쵸? 항상 인간은 자기 이익이 우선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구원을 뭐로 보느냐? 자기 이익 중의 하나로 보는 거예요. 내가 천당가는 것을 자기 이익 중의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 ‘나’. 그 나는 전혀 달라진 거 없어요. 그냥 성경에 나오는 정보만 획득했다 뿐이지 본인은 달라진 게 없어요.
따라서 주님께서 죽었다는 이 말은, 대신 죽었다는 이 말은 너의 목숨을 대신한다는 말이 아니고 너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대신한다는 말이에요. 인간은 그냥 맹탕이 아니에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같으면 마땅히 누구에게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할 책임이 있지요? 순종할 책임이 있는데 선악과 따먹어버렸잖아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순종하겠어요? 맨날 순종, 순종해봐야 누구한테 순종? 악마한테 순종하죠.
주께서 우리가 지켜야 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될 모든 것을 대신해버린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순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못벗어납니다. 왜냐하면 대신한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자, 이룬 자 속에서 우리가 몸부림쳐도 못벗어나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이룬 자가 되어버려요.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보면 뭡니까?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인.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온전히 말씀을 지킨 자가 되어버렸어요. 의인.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 못시켜서 아주 환장한 분으로 여기는데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선악과 자체를 심지도 않았을 거고 그 다음에 선악과 따먹은 거 또 만들면 되지 뭐 귀하다고 쫓아내고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생명나무 들어오는 걸 감시를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떼찌, 하고 혼내주고 “앞으로 그러지 마라” 할 수 있잖아요. 뱀을 허락한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도 약간 책임이 있네. 그 뱀에 마귀가 안들어오도록 해야지. 너무 경비를 허술하게 섰는가.
하나님은 인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그게 영광이에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이름을 높임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이 되느니라. 빌립보서 2장 11절. 우리 정신차립시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아버지께 바르게 살아야 될 일이 있어요. 그걸 대신 해주신 거예요, 그걸.
그러니까 이름이 우리 이름인데, 우리 이름에다가 예수님 자기 이름을 써버린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이름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이름 안에 녹아져서 들어가버렸죠. 그러면 나는 어디 있습니까? 누구 이름으로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있다면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고 누구 안에서 살아야 돼요? 주 안에서 살아야 될 운명이에요. 그만한 능력 있어요, 주님의 능력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아,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해. 자꾸 죄를 지어. 이 죄를 누가 대신 씻어주는 사람 없나?’ 거기 가면 있어요. 목욕탕에 가면 대신 때밀어주는 사람 있어요. 주님이 목욕탕에서 때밀어주는 사람입니까? ‘아, 나 구원 받고 싶은데 죄가 많아서 천당을 못가는데 누가 대신 죄씻어주면 참 좋겠는데...’ 이거 무슨 생각입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좋게 하는 생각이잖아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초월성입니다, 인간의 초월성. 인간은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영적으로 저 하늘나라 도달하자, 높은 곳을 향하여. 그렇게 세운 탑이 무슨 탑? 바벨탑이에요, 바벨탑. 인간의 속성을 집약한 게 바벨탑 아닙니까? 그게 종교 아닙니까, 종교. 종교는 자꾸 높은 곳을 향하죠. 고딕건물 보세요, 대성당의 시대에 고딕체 성당 높이 올라가잖아요, 80m, 100m 막 올라가잖아요. 200년 동안 짓고 150년 동안 짓고 하잖아요.
종교라 하는 것은 신을 향하는 겁니다. 그만한 권한이 본인한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할 때 주님은 어디를 향했습니까? 예수님은 뭐냐? 현재 네 상태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네가 네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거다 이 말이죠. 버림받는 거예요, 그게. 그게 아버지의 뜻에 부합돼요. 나같은 인간은 버림받아야 돼요. 나뿐 아니라 여러분 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그 죄로 인하여 버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버림받는 게 합당해요. 그 버림받음 속에 주님도 끼어들어 같이 버림받았잖아요.
죄를 씻어준다고 세례요한이 물세례 베풀 때에 어떤 분이 훅 뛰어들었거든요. 세례요한한테 성령이 임하고 보니까 아, 저 분. 죄도 없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이러시면 안됩니다. 죄 있는 인간들만 들어오지 죄 없는 분은 들어오면 안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들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대신했다는 말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님께서 알아서 다 때 씻어줬다는 말이 아니라 주께서, 죄 없으신 분이 죄 속에 들어왔다는 그 고역과 심적인 고통,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겠죠. 그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그걸 가지고 “쓴 잔”을 마신다고 하는 거예요. 쓴 잔.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너희들 쓴 잔 마셔야 된다고 하니까 제자들은 쓴 잔이 뭔지도 모르고 아주 대답은 잘해. “예수님, 좋아요. 마시겠나이다.” 참 내. 다 도망가 놓고 마시겠나이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너희들이 마시는 게 아니라 내가 마시게 해줄 거다. 마시게 해줄 거다, 쓴 잔을.”
그 쓴 잔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이에요. 구원이고 뭐고 어디 건방지게 천국을 가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우리 입장에서는 천국이고 뭐고 지옥에 가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뜨거운 지옥불이. 그래서 지옥이 있는 거예요. 이게 니 모습이라는 거예요. 지옥을 아는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사는 것이 지옥 가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굴하지 않고 거지로 살았어요. 의지의 거지. 부자가 뭣도 모르고요, 좋다고 날마다 연락하고 파티, 파티, 물론 아모르 파티는 아니지만, 파티를 열고 난리를 했죠. 지금 본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는지도 몰라요.
성도됨이라는 것은 그 안에 주님의 대신 죽으심의 그 효과가 계속 살아있어요. 한번 헤헤거리고 피 발라 놓고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평생토록 그 안에서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성도고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특수한 인간이 되는 거죠, 특수한 인간. 시공간의 변동이 없는 것. 성도 자체의 신분이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가 주님 안에 있다 보니까 세월 흐른다고, 장소 바뀐다고 성도인 게 아닌 게 되고 그런 거 없어요. 어디 가도 성도고 어떤 시대에도 성도에요. 그래야 육이 아니고 영적이라 할 수 있죠.
자, 그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모습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오죠. 20절에 봅시다. “그들은 전에” 그 다음에 무슨 날입니까? “노아의 날에” 아이고, 어지간히도 멀리 잡았다, 참. 옛날 노아의 날을 끄집어낸다고요? 노아의 날은 한물 간 거, 옛날, long long ago 아닙니까? 옛날 전 아닙니까? 이건 뭐냐 하면 옛날이 아니고 성도 입장에서는 시공간의 구애를 안받으니까 그 때 성도나 지금 성도나 맨 같은 성도라는 거예요.
여기 그 때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죠? 8명. 숫자도 나와요, 숫자로. 8명이에요.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다시 말해서 주님께 구원받기로 허락된 자가 그 당시 그 때는 몇 명이다? 8명이었다. 숫자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소원대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이미 허락된 숫자를 채우는 방식으로 성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작업에. 그래서 인간은 성도되는 데에 어떤 보탬도 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 성령을 통해서 하신 일이 성도됨입니다.
19절 봅시다. “저가 또한 영으로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영으로서 그 다음에 공간에 얽매이지 않죠. 어디를 갔습니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를 갔습니까?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 자, “영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성도가 지옥갔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고 ‘영’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는 영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거든요. 전부다 육입니다.
죽음에서는 육이 아니고 전부다 영들로 규정이 되는데, 영 중에 두가지가 있겠죠. 하나는 지옥갈 영이 있고 하나는 천국갈 영이에요. 우리는 아직까지 안죽었으니까 그냥 영=우리는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천국 가기에 예비되어 있는 사람들. 이미 확정되어 있으면서 아직 죽지는 않은 사람. 이게 예수님처럼 우리가 영이 되는 겁니다. 특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가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의인되는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죠? 단독으로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누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분이 대신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요.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율법을 다 이루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랑이 나오거든요. 그럼 사랑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율법을 다 이루었음이 들어있죠.
자, 율법을 다 이룬 것이 사랑이고 사랑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율법을 다 이루었음이고 그러면 사랑 안에 있으면 어떤 잘못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적 못하죠.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심판에도 두려움이 없다. 심판에도 두려움이 없으니까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죠. 신분상 변동이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랑 안에 있으니까.
사랑 안에 있다는 말은, 이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소유 당하는 거거든요, 소유 당하는 거.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 쪽에서 주님의 손을 막 비틀고 꼬고 할 수 있습니까? “너를 사랑한다” 손 내미니까 손가락을 다 빼버리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는 거란 말이죠.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주는 게 아니고요, 받을 자격도 없는데 사랑이 와서 덮쳐버리죠, 사랑이 와서.
올해는 눈이 많이 안왔다마는 벌판에 보면 쓰레기가 있어요. 그런데 지난 밤에 하얀 눈이 와서 자고 일어나 보니까 아침에 온통 하애요. 뭐가 안보입니까? 쓰레기가 안보이죠. 시커먼 게 안보이죠. 눈이 하얗게 덮인 거예요. 만약에 우리 마음에 주의 사랑이 덮인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어두운 것, 시커먼 것 이런 것들이 사랑에 다 녹아져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시커먼 걸 봐야 되요, 사랑을 봐야 되요? 사랑을 보고 다시 우리의 시커먼 걸 보게 되면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이죠.
사도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베드로 본인도 지금 이런 마음자세로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사도가 될 때, 뭐 거침이 없죠. 세상의 정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사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무서워할 이유 없죠. 그 사람들이 바로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받은 사도 바울처럼. 성령받은 사람은, 다 성도는 이렇게 사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을 떠나서 산속에 들어갈까? 허락한다면.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거 허락한 적 없어요. 허락하신다면. 항상 성도는 허락에 의해서 그 현장에 등장하는 존재라 이렇게 보시면 돼요.
지금 주님은 감옥에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파했죠? 자, 이와 같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가 노아의 날을 무슨 날로 보느냐 하면 심판의 날로 보는 겁니다. 심판의 날로 볼 때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할 때 물로 뿌려서 심판하는 게 아니고 물로 덮어서 심판했죠. 이거는 죽어라, 다 죽어라 이 말이거든요. 다 죽이기 위해서 물로 온 거예요. 따라서 노아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그들도 죽어야 되는데 어떤 예표가 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예표. 그러니까 정결한 짐승이 결국은 이 노아를 살리기 위해서 죽는, 홍수 끝나고 난 뒤에 방주에서 나올 때 정결한 짐승을 잡는 제사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 때 구원받은 사람이, 특수한 혜택을 받은 사람이 달랑 몇 명? 8명. 산 8명하고 죽은 사람들하고 숫자로 비교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죠. 안되는 거예요.
이 8명이라 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단독과 마찬가지에요. 숫자 1과 마찬가지에요. 다른 사람 다 망해도 예수님만은 살아났다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정도로 희박한 숫자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하는 일과 예수님의 하는 일이, 시공간적으로 동일한 일이 옛날부터 이미 있어왔다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겁니다. 노아 때 숫자 8명이 1명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 단독으로만 했다는 그 말이나 그 당시에 딱 8명만, 여덟 명뿐이라 했잖아요. ‘뿐’. 이게 많다는 거예요, 아슬아슬하게 적다는 거예요? 아슬아슬하게 적은 거예요.
옛날 노아 때 한 일과 동일하게 예수님은 그걸 해내셨다 그 말이죠. 마땅히 다 멸망해야 되는데 구원의 길은 있었다 이 말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대신 지킴으로 말미암아 이제 육이 아니고 영이 된 사람한테는 그 노아의 여덟 명처럼 그들도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런 말씀할 때는 반드시 세상과 연계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 뭐하셨지? 나 믿어야지.’ 이렇게 하면 안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 자신과 결부해서 ‘니가 지금 성도야? 맞아? 성도라면 성도의 기쁨을 알아? 자유를 알아?’ 결부하면서 이 말씀 주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만사 통해서 주께서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심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들만 부지런하게 일하는 줄 알았더니만 주님도 일하심을 깨닫고 그 일의 결과가 성도인 것을 이제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