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9a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20191209a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6편 하겠습니다. [다윗의 믹담]이라고 돼있지요. 다윗의 시로 돼있습니다. 시편을 여러분 읽어보셨겠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 16편 같은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내용이 있단 말이죠. 시편 16편이니까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신앙 생활하는 나에다가 시편 16편을 참조로 해서 더 보태면 된다고 보통 이렇게 생각해요. 좋은 아이디어기 때문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잘못입니다.
신앙의 콘셉트는 이걸 없애버리고 시편 16편에서 정리하고 배치돼있는 개념들로 채워야 돼요. 이 개념 뒤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여기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시편 16편 말고 누가 일한단 말입니까? 내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게 돼요. 내가 만든 내 콘셉트에 맞춰놓고 시편을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콘셉트 자체가 안 맞는 거예요.
확 밀어버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야 되는데 사실은 가져오질 못하고 이게 이중성을 갖게 돼요. 아래층은 우리 일이 위층에 새로운 시편 16편이 들어온단 말이죠. 중첩되겠지요. 중첩됐으니까 주님은 양보를 안 할 거고 우리도 양보를 안 할 거니까 여기서 신앙적인 투쟁이 있을 것이고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긴장관계라는 것은 신앙의 구조가 이미 하나님이 알아서 다 정해놨는데 우리가 너무 오지랖을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지요, 이렇게 하면 나에게 점수를 더 주겠지요, 라고 자기 적절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한 거예요. 예를 들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애들과 같이 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헨델의 를 공연하면 기뻐하시겠지. 하는데 그런 것은 주님께서 확 밀어버리고 싶어. 다 지워버리고 여기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이 침노가 되는 겁니다. 점령군이 와서 그 지역을 점령하는 데서 비로소 구원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점령하는 분이 계시고 점령당할 자가 있지요. 침노하실 분이 계시고 침노당할 자가 있지요. 이걸 오늘 제목으로 해도 괜찮은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란. 여기 시편 16편 2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분란을 일으킨 이게 복입니다. 주님 쪽에서 가만있는 나를 더 쑤시는 게 복이에요.
그러면 이게 분란이라면 저주는 뭡니까? 분란이 없는 게 저주겠지요.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어버려둠이라 합니다. 아, 이거 정말 무서운 거예요.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생자기 때문에.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내어버려둬요.
생중계를 하는데 생중계를 담당하는 제 아내에 의하면 제가 설교하게 되면 거기에 카톡방인가 뭔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데요. 그런데 실시간으로 생중계를 하니까 스트리밍이라 합니까? 뭐라고 불만이 있느냐 하면, 제가 어제 갈라디아서 4장 8절에서 악마의 종은 악마를 모른다는 게 악마의 종이에요. 인간에게 무슨 악마가 있습니까?
악마가 없으니까 인간은 그대로 창세기 3장의 꼴로, 3장의 인간형으로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시작이 나부터 해서 나로 시작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율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존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게 악마의 죄의 종의 모습이거든요.
이걸 설교하는 대목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토를 다느냐 하면,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악마의 종이란 말인가, 불만하고 쑥 나가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결국 뭐냐 하면,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이 여기 대해서 달기를, 끝까지 들어봐라. 그렇게 자기들끼리 나는 설교하기 바쁜데 끝까지 들어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어버려둔다는 것은 시작을 출발하는 거예요. 이런 예는 세상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교회 내에서 아주 허다하게 발견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콘셉트를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악마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이미 악마로부터 맛이 갔다,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다. 그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정상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뭔가 남보다 더 성실하고 제대로 해보려고 지금 마음 다 잡고 교회 왔다. 술, 담배 끊고 마음잡았으니까 이것만큼은 주께서 괜찮은 콘셉트로 인정해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누구의 종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는 거예요. 자존적이고 자립적인. 교회 갈까, 절에 갈까? 본인이 선택한 거죠.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복이란 것은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가만 놔두질 않아요. 왜? 친아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건드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사람은 이건 어차피 맛이 간 인간들이기 때문에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항상. 로마서 1장에 나오듯이 지가 동성애를 하든지 무지개를 날리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냥 놔두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친 백성은 놔두질 않지요.
그럼 시편에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만두십니까, 건드리십니까? 가만두지 않고 계속 건드리지요. 건드릴 때 다윗의 시, 다윗의 신앙의 특징은 죄가 보인다는 겁니다. 보통 보인다고 할 때는 죄가 보인다는 말을 잘 안 써요. 세상이 보인다. 그런데 세상이 보이기 때문에 죄는 안 보이게 되거든요. 세상이 보이는 것은 이렇게 돼요.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가 됩니다. 또 다른 세상이 있단 말이죠.
그럼 다른 세상과 현재 눈에 보이는 세상과의 관계는? 그건 모르지요. 보이지 않으면 없는 거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목사 당신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 괜히 말을 만들어서 하나의 개념을 당신 마음대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은혜 주려고 사람들을 혹하려고 뭔가 조작해낸 개념일 수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요.
그럴 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요한복음 1장 18절.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이야기할 때는 생각 안 났는데 돌아서서 이 말할 건데. 그런데 그렇게 후회하고 애석해 해도 그것조차도 배우는 거니까 그런 식으로 복음으로 달려가는 하나님의 분란이거든요. 복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후회하지는 마세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사도 요한은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조작된 겁니다. 전부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모든 신은 다 거짓말이에요.
제가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전통적 이천 년 동안 신학은 삼위일체 이론 같은 걸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도 하도 인간이다. 이게 저는 틀렸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어요. 그리고 인간들이 자기를 인간으로 보는 것, 이건 창세기 2장이고, 창세기 3장에 죄의 종이 된 상태에서 자기를 인간으로 규정한 겁니다. 인간이 뭔지도 몰라요. 그냥 자기를 인간이라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이라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에요.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인간이고 한다면 이 콘셉트를 인간이 자기 과업으로 내가 천당 가기 위한 과업으로 이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받으려고 시도한단 말이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입니다. 그것 믿는다고 구원받은 것 아니거든요. 그건 내가 하는 작업이잖아요.
이거는 외부에서 자기를 분란을 안 일으켰잖아요. 자기를 건드리지 않았단 말이죠. 내가 나를 자극해서 신앙인이 아닌 나를 내가 손질해서 신앙인 만드는 겁니다. 바다에 사는 상어고기 있지요. 상어고기를 손질하면 돔배기 되는 거예요. 전라도 사람들도 돔배기 아십니까? 제사할 때 올리는 것, 손질하면 돔배기잖아요. 교회에서 예수님을 돔배기로 만들은 거예요. 내가 납득되고 내가 이해되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수요일에 설교하게 됩니다만 간음이란 뭐냐? 타인을 대상화하는 게 간음이에요. 내가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게 간음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할 준비한 설교가 뭐냐? 아내들이여, 하는데 모든 부부는 간음자들이에요. 왜? 상대를 대상화시키기 때문에. 본격적인 간음은 결혼을 하고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간음은 사랑이 아닌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익히 인간들이 아는 콘셉트에서 나오는 그 개념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침략을 받아야 되고 침노를 받아야 되는데 이걸 그냥 꾹 쥐고 여기다가 하나님, 이 개념을 채워주시옵소서. 그릇은 내가 제공하고 내용은 주님이 채우는 이렇게 자기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하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관계는 간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간음이다. 이런 논리가 되는 겁니다. 그건 잘하면 참으면 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아니면 모조리 간음이에요.
계속해봅시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요. 그럼 하나님 없는 겁니다. 인간에게 하나님 없어요. 그런데 구약에서 누구든지 하나님 만나면 죽어요.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 그래서 제발 하나님 안 왔으면 좋겠어. 왜? 하나님 나타났다 하면 죽으니까 하나님께서 안 계시고 하나님, 너거끼리 놀고 우리는 이 동네는 인간끼리 노는 것이 인간에게는 이미 관습화돼있고 습관화돼있는 거예요. 이게 편하지요.
교회에 주님이 오신다든지 사도 바울 오게 되면 교회 개판 돼버립니다. 사도 베드로 오면 안 돼요. 교회는. 교회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어야 되고 사도 바울의 무덤이 있으면 그걸로 관광객해서 수입 괜찮아요. 그러나 직접 산 채로 성령이 오고 이러면 교회 자체가 부정당하는 거예요. 왜? 죽으니까. 인간은 인간끼리 놀아야 되지요.
유치원 애들 보면 요즘은 빨라서 두 살부터 늦으면 일곱 살까지 있잖아요. 유치원에서 미운 일곱 살을 어르신네라고 하거든요. 유치원에서 도사라. 어디에 뭐가 있고 장난감 어디 있고. 완전히 어르신네에요. 원로에요. 유치원의 장로급이에요.
교회에도 장로가 있잖아요. 장로치고 신앙이 있는 사람 혹시 본 적 있습니까? 거의 없는데 혹시 본 적 있어요? 장로 부인을 권사라 하지요. 권사 중에 신앙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권사가 없어서 내가 분명히 하는 이야기지만. 관심사가 주님이 아니고 인간들끼리 역량으로 할 수 있는 단체에 거기에 적절한 콘셉트로 질서 잡는 것, 그게 그만 관심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보이는 거니까. 이거는 인간이 다룰 수 있다고 본 거지요.
그런데 본 사람 없잖아요. 여기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 사람 없으면 안 봐야 되는데 그 다음에 문제가 돼버렸어요. 하나님 품속에 있던 독생자 되신 분이 나타나버렸다는 거예요. 초라한 암행어사처럼. 이 도령처럼. 와버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분이지만 그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졌거든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어요. 빌립보서 2장 7절에선 종의 형체를 가졌고,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육신의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이게 처음에 이야기한 하나님이 제공한 콘셉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로 오셨고 그 다음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이 분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마련한 자기 콘셉트를 포기하고 어디에 합류해야 됩니까? 바로 이 두 개념에 합류돼야 돼요. 합류하는데 자진해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진짜 중요해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가 있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선악과는 선과 악에 대한 나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선과 악의 지식을 갖고 있다 할 때 이 내용을 풀 필요가 있어요. 과학은 또는 수학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과학과 수학 자체를 사람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하나의 기술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잖아요.
이 세상에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것 없어요. 이 수학과 과학과 의학 모든 것, 이걸 발명한 인간은 온전함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선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신약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 그걸 뭐로 보느냐? 악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그림자처럼 뒤에 악이 있는 거예요.
인간 위주로 출발하면 선을 성공사례가 되고 악은 실패사례가 돼요. 한 집안에 수능을 쳤는데 네 개 틀리고 다 맞았다. 이건 성공사례가 되지요. 그런데 어떤 애는 네 개 맞고 다 틀렸다. 너는 나가 죽으라 하지요. 왜냐하면 선악 지식에 보면 악에 해당되기 때문에. 엄마가 신장 아파서 다 죽게 됐는데 딸이(동백이죠) 신장 떼어줘서 살았다. 이걸 뭐로 봅니까? 선으로 보지요.
그런데 동백이가 오해해서 엄마, 오랜만에 17년 만에 찾아온 것은 내 신장 떼어가려고 했지? 실은 엄마는 보험금 오천 만원 주려고 온 것도 모르고 했지, 라고 한 것은 여기서 그 엄마는 악한 엄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늘 수시로 선과 악을 한 번도 선택 안 하고 골라잡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 없어요. 모든 게 선과 악입니다.
문제는 선택을 내가 하지요. 진짜 문제는 뭐냐? 내가 수시로 환경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달라져요. 선입견이라는 것이 늘 변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 선악의 판단은 옳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판단으로 다른 환경에 들어가니까 내가 뭔가 오해했구나. 내가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했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일곱 살 때 사탕을 물고 있으니까 엄마가 물고 있던 사탕을 빼앗았어요. 그러면 일곱 살 그 시점에서 선과 악은 뭡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걸 뺏겼으니까 악이고 악한 엄마가 되지요. 나중에 친구들은 다 아토피 걸렸는데 자기는 아토피 안 걸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나중에 열두 살 되니까 엄마를 어떤 엄마로 봅니까? 참 선한 엄마가 되는 거예요.
비행 청소년이 나중에 스무 살에 교도소 가면서 엄마를 원망하기를 엄마는 내가 공부 안 하고 딴 짓할 때 왜 나를 나무라지 않았느냐고 엄마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환경이 바뀌었으니까. 나이가 바뀌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일곱 살에서 열두 살도 바뀌었지요. 스무 살도 바뀌었지요. 서른 되면 또 바뀌지요. 사십 되면 바뀌죠. 육십 되면 바뀌죠.
나중에 구십 되면 뭐로 바뀔지 몰라요. 이때는 바뀔 것도 없어요. 정신이 없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바뀌고 자시고 물불도 못 가리는데 끝났다마는.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선과 악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에 대해서 그 다음에 세월이 지나면 선택한 나 자신도 완전히 확정된 게 아니에요. 종잡을 수가 없지요.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성도가 있는데 주변에 많은 선한 인간들이 나의 허점, 나의 죄 짓는 것, 지적할 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선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악한 자가 필요했고 악한 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가 그나마 작아 보이는 선이라도 이걸 키우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부자고 애 공부 잘하고 그런데 그 집이 서울 강남에 56몇 층에 산다. 그것도 70억 되는 아파트에 산다. 같은 동창생인데 잘 산다 할 때 자기는 이 사람은 성공했으니까 선으로 보는 동시에 나는 졸지에 악이 돼버린 거예요. 성공사례 앞에서 나는 실패했으니까 악으로 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 사람의 허점을 집어내야 그나마 있는 선을 내가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뭐냐 하면, 56층에 산다고? 그것 관절에 안 좋아. 기껏 핑계 대는 게 난 1층에 살았어. 계단 없어. 이것으로라도 스스로 자위하려고 자기를 위로하려는 거예요. 우리 애는 공부는 못해도 몸은 하나 튼튼하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나마 있는 선을 자체적으로 방어하고 방비하는 거예요. 그래서 윤복희가 그러듯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가만있는데 무슨 여러분이에요. 호응해달라는 거죠 자꾸. 나를 응원해달라는 겁니다.
성도가 있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시기, 질투, 모함해서 죄라고 끄집어내요. 끄집어내면 성도도 여기에 반응을 나타내면서, 그래 맞아. 나는 죄인이야. 당신의 지적은 옳습니다. 내가 이렇게 온전치 못했습니다, 라고 온갖 이해하잖아요. 그러면 성도도 선악 지식체계에 말려들었지요. 이것을 과감하고 통과 또는 관통해버려야 돼요.
이걸 관통해서 선악지식이 지적하는 죄의 지대 또는 영역을 벗어나면, 주께서 그렇게 하셔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다른 지대에서 선악으로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진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유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 책임질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는 남들이 끄집어내는 죄에서 이제는 끄집어내니까 나도 같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알거잖아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그 죄의 지대에 옮기는 겁니다.
이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8장에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이 지대에서 누구나 아는 간통은 나쁘다, 간음한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하는 그 지대에서 예수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이 지대로 끌어버려요. 누가 너를 지적하느냐? 누가 있느냐, 둘러봐라. 여자가 참 멋진 말을 해요. 노바디, 노바디, 아무도 없나이다. 교회 가도 아무도 없나이다.
그리고 본인도 나를 지적할 내 죄를 내가 지적할 것에서 손을 뗐습니다. 이게 자유 아닙니까. 내 양심이 나를 지적하다가 이제는 내 양심마저 절대적인 죄 앞에서는 나를 손을 떼야 돼요. 왜? 어차피 주님만 아시는 죄기 때문에. 주님만 아시는 죄의 지대, 바로 이 지대로 끌기 위해서 주께선 뭘 하느냐 하면, 끊임없이 우리에게 분란을 일으킵니다. 분란을 일으켜서 주님만 아시는 죄로 가는 겁니다.
갈 때 여기서 뭐가 기다리느냐? 바로 죄의 형체 또는 육신의 죄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위에서 받아내는 게 아니고 인간인 밑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밑에서 기다렸다가 자기 백성을 이쪽에 시달리는 인간을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이쪽에 와버리면 이쪽에 먼저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 이들이 천국 가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
그러면 여기의 죄란 예수님의 콘셉트기 때문에 이 죄를 줄 때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 되어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죄인 돼야 하기에 예수님을 반영하는 입장에서 죄인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 죄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준비된 의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죄인이기에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비로소 발현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콘셉트를 하나의 공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율법이 있고 그 다음에 왕이 있죠. 오늘 시편 16편에 다윗이 왕이잖아요. 쫓겨 다니는 왕이지만 왕이잖아요. 그러면 신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거꾸로 입니다. 왕이 있고 그 다음에 율법 대신에 마지막 왕이 나타나니까 복음이 있고 복음에서 새 이스라엘 또는 백성이 만들어져요.
이쪽에선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다수입니다. 숫자가 많아요. 그러나 왕은 한 분이에요. 하나님은 어디서 기다리는가?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율법을 줌으로써 모든 인간이 율법에 죄인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누구와 연락을 취하느냐? 왕을 내세우는 거예요. 그 왕의 준비된 콘셉트가 시편 16편입니다.
여기서 16편 볼까요.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나는 누구지요? 다윗이죠. 일단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왕을 보호하소서, 하는 것은 그전에 이스라엘 율법을 다 경유해서 나타난 왕입니다. 그 왕이 고백 또는 예언된 시편 16편을 누가 인수받아서 완성시켰느냐 하면, 바로 마지막 왕 되신 예수님께서 그걸 인수받아서 완성을 시키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 왕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하나는 종의 모습, 또 하나는 육신의 죄의 모습으로 오시지요. 완성을 했으니까 그분이 의인되지요. 내용은 의인인데 바깥은 종과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거죠. 이 둘이 합쳐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 되어서 자기 백성한테 가는데 백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없어요.
복음 자체가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새 언약이고 이룬 것을 택배로 전달받을 때까지 사인 받고 인간 내부까지 확실하게 택배 마감까지 마치는 그 능력까지 새 언약에 포함돼있어요. 그러니까 없는 백성이 새로 생겨버린 거예요. 택배 역할은 성령이 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없던 백성이 새로 생기죠. 이게 하나님의 창조지요, 뭐. 없는데 새로 생겼으니까 창조가 돼요. 하나님의 콘셉트에 맞는 창조가 되는 겁니다.
창조가 되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 하나님의 창조가 들어오게 되죠. 들어오게 되면 기존에 우리 육신에 속한, 이건 구약적이죠. 육신에 속한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건 선악체계지요. 선악적인 선입감이죠. 여기다가 무엇이 덮칩니까? 주님의 이미 완료가 덮친 거죠. 어제 낮 설교처럼 최종점을 찍어버린 거예요. 최종점을 찍어버린 것이 와버려서 여기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겁니다.
밑에는 내 식으로 구원받겠습니다. 위에는 그럴 필요 없다. 끝났다. 모든 작업은 끝났어. 그럼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 둘 사이가 갈등이 생기니까 틈이 생기겠죠. 틈이 생길 때마다 복음이 나타나고 복음이 여기서 새롭게 전달되는 거예요. 지식으로 예수님 십자가 전한다고 복음 아니에요. 나를 경유해서 내가 박살나는 것을 경유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자리가 복음을 위하여 할당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뭐가 됩니까? 보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지요. 하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 자체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확장된 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상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계셨던 그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반영하면서 주께서 오셨거든요.
그럼 그 세계가 이 땅에 왔잖아요. 이 땅에 왔는데 이 땅을 주님의 구원의 콘셉트에 적용시키면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바로 나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지금 내 안이 예수님이 기거하시는 독생자가 기거하시는 땅으로 제공된다, 또는 반대로 할당받는 거예요. 하나의 대지를. 주께서 여기서 일하시옵소서.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이잖아요. 성령이 임해서 여기서 독생자로 일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여기서 싸움이 있을 것이고 우리 본성의 죄가 있을 것이고 주께서 완성과 미완성의 다툼이 있고 거기서 틈이 있고 그 틈 속에서 창조된 복음이 발생되는 겁니다. 틈이란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이 수준이 있으니까 이렇게 갑니다. 틈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인간은 틈이 없습니다. 왜 틈이 없느냐 하면, 자아는 의식의 통합의 결과기 때문에.
인간은 흩어져있는 자기의 체험과 기억들을 주워서 거기서 하나의 나다움을 만들어내요. 다섯 살 때 사탕 빼앗긴 것, 이때는 엄마가 심했어. 열두 살 때는 좋은 엄마고.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들 가운데서 계속 주워 모으는 겁니다. 마치 터미네이터 영화에 보면 쪼가리 하나만 있어도 그것도 다시 본체로 원형이 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에 나오는 눈사람처럼 가지 팔 다 빠져도 한 번 구르면 다시 하나가 되듯이
그 모습이 우리 의식 가운데서 몸은 안 쪼개져요. 몸이 나가 아니거든요. 몸은 따로 놀고 나는 몸에서 기억의 통합체가 바로 나에요. 몸이 있고 몸과 나는 따로 논다니까요. 꿈속에서 나는 항상 28살이에요. 30살 됐다가 15살 됐다가 40됐다가. 나라는 것은 기억에서 나온 것이지 몸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따로 논다니까요.
몸은 죽어가도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몸 보고 죽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나 보고 살았다고 우기고 있잖아요. 나 살아 있잖아. 너? 살아 있는 기억의 쪼가리야. 몸은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살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불멸의 요소, 죽어서 천당 갈 거야. 뭘 천당에 가. 그건 하나의 파편들인데.
그런데 이 나라는 것이 몸에서 발생되지만 여기 기억들이 있지요. 그 기억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만 기억이 돼요. 나를 아프게 했다. 난 의인인데 선한 인간인데 나 보고 누가 욕하더라. 그러면 그게 상처가 오래 가서 항상 꿈에도 막 나타난다고요. 그걸 몸이 있지만 나는 따로 있고. 그걸 주체라 합니다.
주체는 항상 미완성이라 그어버립니다. 항상 주체는 있는데 이게 분열돼있다고 하는 거예요. 왜 분열돼있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것과 남의 말도 들어야 되니까 항상 주체는 분열되는 겁니다. 가정주부가 남편 말도 들어야 되고 내 말도 들어야 되고. 매순간 이 주체는 분열되지요. 아이고, 모든 걸 잊고 산에 기도하러 갈까? 아니면 해외여행 갈까? 그러면 가정이고 자식이고 다 잊어버리고 나를 찾아서 오십에 바다를 보았다 해서 다시 나를 찾는 거예요.
나에서 몸으로 가는 방법은 없어요. 나가 있다는 것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은 어딜 공략하느냐 하면, 몸에다 주께서 작용해버려요. 그러니까 하나의 몸을 두고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냐, 아니면 주님이냐? 사도 바울은 아예 이미 목표를 정해버렸어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몸에 계시다. 나는 뭐냐?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게 바로 나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 결과물로서의 나란 말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나가 아니고.
이것이 성령 안에서 뭐냐 하면, 나는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주님의 콘셉트가 주님이 정해놓은 조건들, 구원받는 요건들이 채워져 있으니까. 내 게 아니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행하는 과제가 아주 매끄럽게 차질 없이 다 진행됩니다. 이 몸은 내 몸이 죽어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아주 지장이 없어요. 제대로 가고 있어요.
몸은 죽도록 돼있거든요. 흙으로 돌아가게 돼있다고요. 흙으로 돌아가는 게 주님의 스케줄에 포함이 돼있단 말이죠. 태어나서 학교에 가서 너 소원이 뭐냐? 나중에 뭘 될래? 흙 될래요. 이런 아이 없어요. 그건 주님의 소원이지 내 소원이 아니거든.
나는 부모가 우리 가문을 생각해서 아버지, 어머니의 명예를 생각해서 너는 밖에서 똑바로 행동해야 돼, 라는 외부의 시선과 요구와 욕망, 그것이 내 안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때 그것이 주체가 되고 그 주체는 나에 대해서 자꾸 다툼이 일어나니까 여기서 주체가 분열되는 거죠. 내가 열 살 때까지는 말 들어준다. 이런 식으로. 주체가 분열되는 겁니다.
남녀가 서른 돼서 서로 연애할 때 각자의 음흉한 의도가 있는 거예요. 결혼하면 보자. 지금은 참아준다. 다 음흉한 게 있지 않습니까.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는 실연당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친구가 있다가 너는 썸도 안 타고 무슨 실연을 당하냐. 일방적으로 좋아해놓고 실연당했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분열되기 시작한 나의 고집이죠. 나, 주님한테 버림받았어요. 주님과 썸 탄 적이 없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성령을 주시면 그 성령 때문에 버리지 않아요. 그런데 히브리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고 버려버리죠. 그것은 뭐냐 하면, 성령의 은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오게 되면 뭐가 성립 안 되느냐? 버려진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분란을 일으킨 자체가 이미 자기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버려졌다는 그 생각 자체가 성립 안 되거든요.
애초부터 이 사람은 버려진 거지 처음부터 십자가를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들은 버림받았는데 성령께서 은사를 줌으로써 너는 버린 자야, 라고 확인 차해서 삐져서 예수 안 믿는다고 나오는 거예요. 애초부터 그 사람은 버려진 사람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두 번째 시간에 집중적으로 하겠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잠수함이 물 밑에 있는데 잠수함이 뭔가 발견했다. 그러면 잠수함 승무원이 밖에 나가서 확인하거든요. 확인할 때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일단 승무원이 스쿠버 장비를 갖춥니다. 빈 공간에 들어가 있어요. 거긴 물이 없어요. 해치를 여는 동시에 밑의 해치를 열어버리면 갑자기 물이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아무리 나쁜 짓해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이것을 선과 악 중에서 나는 선하다. 아무리 악하지만 요만큼은 선한 게 있다 하다가 갑자가 주님이 주시는 환경 속에 물이 들어와 버리면 이거는 어떤 것 속에도 나는 뭐가 된다? 죄인이 된다가 되는 거죠. 이처럼 주님께서 허락하신 주님께서 이끌어주신 죄의 지대가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죄의 지대지요. 여기에 누가 이걸 만드셨는가? 주님이 먼저 이걸 만드신 거예요.
이걸 신약에선 뭐라고 하느냐?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안이라 하는 거죠.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 여기서 의가 기다리는 거예요. 주님의 의가.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