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6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20191206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죄라는 것 또는 하나님 모독이라는 것은 대상화로부터 생겨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나오는 살인 같은 것도 너의 자리와 나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고, 뒤에 나오는 폭행이란 것도 남을 손상 입히는 것도 나의 자리와 너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는 너의 자리, 나의 자리 구분이 없습니다. 왜? 둘 다 죽은 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이 땅에 죽음의 자리를 만들고 그 죽음의 자리가 하나님에 약속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아들마저 그 죽음의 자리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몽땅 다 죽어 마땅한 고장, 영역이라는 사실, 그런 공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일을 벌이신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의 정체,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에 본질을 드러내주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마음껏 발휘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대표적으로 성경 초기에 들어가면 아벨이죠. 노아도 그렇고 아벨도 그렇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 리스트가 쫙 나오는데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벨이죠.
살아 있는 아벨을 죽게 하는 그 원칙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로 결속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이야기, 성경 내용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뭘 하면 되느냐? 그냥 우리가 처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결국 죽이시는 이유는 살아 있음과 그리고 죽어 있음이 어느 쪽이 하나님 앞에 진리냐 하면, 예수님이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되겠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뭡니까? 살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죽기 위해서 오신 이쪽 편에 속한 자가 바로 진리에 속하고 믿음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 아담이거든요. 나머지는 죄 지었던 첫째 아담이고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그리고 두 번째 아담, 진짜 아담이란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짜 아담을 증명하기 위해서 진짜 아담이 아담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이 악마로 하여금 자기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고 우기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이니까 살아 있다는 고유의 힘들이 있겠지요. 고유의 자기 자리가 있겠지요. 자기 자리가 있으니까 자기 자리 전체를 자리를 위한 힘이라고 보고 힘과 힘의 충돌에서 뭐가 생기는가? 폭행과 살인 같은 것이 벌어지는 거예요. 죄가 되는 거예요. 간음이 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게 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걸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자리가 있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대상화시키는 거예요. 거리를 두고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면서 자기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자리를 도와달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무슨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어린양의 표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제사의 취지가 그거잖아요. 이러면 굉장히 간단하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살아 있는 이 죄에서 어떻게 주님의 자리에 올 수 있는가? 여기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배신이 필요해요. 자기가 자길 향한 배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배신 해봤습니까? 자기 자신이 배신이 안 되지요. 손해 안 보려 하잖아요. 왜? 내가 실망하니까. 손해 보면 내가 바보 같으니까. 바보 되기 싫거든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에게는 어떤 개념이 해당이 안 되느냐 하면, 바보 같다, 등신 같다, 손해 봤다, 망했다, 실패했다는 게 이미 죽은 자에게는 이게 전부 다 해당이 안 되는 개념들이에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죽음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현실이 아니고 망상들이에요. 잘났다, 출세했다, 성공했다, 건강하다. 전부 다 망상입니다.
나이 구십 아홉 되서 잘났다, 건강하다 해보세요. 젊은 사람들이 웃지요. 나 구십 아홉인데 아직도 뛴다, 마라톤 한다. 기록이 어떻게 되십니까? 17시간 25분. 적어도 2시간 6분대에 들어가야 되지 17시간 이래서는 기어가는 거지 이게 무슨 마라톤이에요. 하룻밤 자고 가겠다. 인간은 자기 기록에 대해서 어째 그렇게 자기 우호적인지. 인간은 자기 배신 못합니다. 자기 연민이 너무 강해요. 이걸 자기 애착이라 할 수 있는데 자기 애착, 자기 연민. 헤어져도 꼭 저쪽에서 안 찼어. 내가 찼대. 이혼해서 내가 먼저 찼대.
이렇게 인간들이 자기 애착, 자기 연민에 빠져서 결국 자아도취에 빠진 거거든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이게 정신병 된다고 정신분석학에선 이렇게 진단하고 있어요. 모든 정신병은 자아도취에서 되는 겁니다. 자아도취라는 것은 자기를 둘러싼 그 현실에 대해서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 본인은 현실에 대해서 해석을 해요. 해석을 할 때 동원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걸 언어에요. 말. 언어가 자기가 아는 개념 또는 의미가 주어진 현실을 자기한테 그냥 해석이 아니고 일방적 자기를 위로하는 해석으로 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한 짓이 이 짓이에요.
모세율법을 들고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들은 지금 건전하다, 아무 문제없다. 우리들이 문제없다는 말은 우리를 욕하는 이방민족은 필히 멸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신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특히 시편 대목으로. 여러분, 혹시, 혹시 시편 보신 적 있습니까? 혹시 보시게 되면 일방적으로 뭡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지요. 그 ‘나’에 본인들을 대입해버린 거예요. 이거는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그러면 신앙인은 누구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내가 신앙인이다. 따라서 시편은 나에 대한 시편이다. 거기서 나온 것들이 찬송가잖아요.
그러나 사도행전에 2장에 보면 시편은 누굴 위해 쓰인 시편이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쓰인 게 시편이에요. 성경 전체가 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위해 썼기 때문에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사람에게 미움 받은 예수님이거든요. 사람에게 미움 받은 예수님이라면 시편에 나오는 원수라는 것, 다윗의 원수라는 것은 결국 누굴 이야기합니까? 모든 인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성경이란 언어로 개념을 가지고 자기위주로 하는 거예요. 자기위주의 극치가 뭐냐? 나,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구원에 대해서 자기와 결부시켜버립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죄인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우리 자신을 의인으로 몰아가면 안 되고 죄인으로 몰아가야 예수님의 생각과 합치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본성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요. 아까 디모데후서 3장에서 자긍하며 나오지요. 자기를 사랑하며 그 다음에 교만하며 자긍하고 나오지요. 교만하고 자긍한다는 것의 공통점은 뭡니까? 나는 나를 지키는 쪽으로만 모든 태도가 나오고 생각이 나오고 행동이 그렇게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지요.
그렇다면 내 중심을 못 떠난다면 방법은 뭡니까? 내가 나를 배신해야 되는 거예요. 왜냐? 평소에 육체의 자연스러운 본색은 내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지 않는 쪽이지만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나로 하여금 주님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는 죄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는 인간인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왜 평소에 감사 못합니까? 너무 생각이 내 수준을 높여서 그래요. 나 이 정도 돼야 성에 차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어디까지 낮춥니까? 예수님의 죽기까지 낮춰버리면 밥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과분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맨날 세 끼 밥 다 해내라 하고 지는 라면도 못 끓이고. 그러면 안 되고 자기를 낮출 때에 상해죄, 폭행죄, 살인죄, 하나님의 이름 모독,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지요.
천하제일 못난 게 자기 자신인데 어떻게 화낼 여지가 없잖아요. 지금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면 누구한테 분노하거나 누구한테 그 분노를 폭발할 일 없지 않습니까. 왜 팼느냐? 술김에 팼다. 술을 왜 먹어요. 왜 그랬습니까? 필름이 끊겨서 그랬다. 술 먹어서 내가 욱하는 성질에 그랬습니다. 왜 술을 먹어요? 자기를 낮추려고 술 먹습니까, 높이려고 먹어요? 세상 더럽다고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과장 놈이, 부장 놈이. 더러워서 회사 때려치우지 하면서 퇴근하고서 한 잔 한다고요.
내가 염두에 두었던 그 수준이 타인들에 의해서 짓밟힐 때 모욕감을 느끼고 그 모욕감을 빠른 시간 내에 회복하기 위해서 가까이에 있는 술병을 당기는 거예요. 이걸 지난 낮 설교에 연속성이라고 했지요. 할 수 있는 것,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높이고 싶은 거예요. 디모데후서 3에 보면 자긍하며 교만하며, 라고 돼있지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토는 뭡니까? 자존감을 가져라. 자긍심을 가져라. 어딜 가도 줏대를 놓치면 안 돼. 부러질지언정 꺾이면 안 돼. 이런 것.
참, 마귀가 웃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모으는 이 방식은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에요. 오직 마귀가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첫째 시간 10분 쉬니까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외우는 셈 치고 합시다. 네 가지 타입이 있다.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지요.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악착같이, 이것 들어가야 돼요. 악착같이 살려는 사람. 두 번째 뭐라 했어요? 살려고 애쓰지는 않는 타입. 세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10분이란 시간이 그만큼 길어요. 죽음을 목표로 하는 것. 네 번째 타입은 뭐라 했습니까? 이미 죽은 자.
1번부터 3번은 아무리 애써도 결국 1번에 다 달라붙어요. 죽음을 목표로 한다 해도 결국은 건드리면 이건 자기 말뿐이고 실제 몸은 1번을 벗어날 수 없어요. 악마가 우리 몸을 그런 식으로 훈련시켜놨기 때문에 악착같이 사는 방법 외에 다른 생각이 일체 들어있지 않습니다. 괜히 이론상 성경 보고 그럴싸하게 신앙인 티, 신앙인 척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이지 1번밖에 없어요. 그래서 1번에서 4번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4번 된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4번 된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나는 매일 나를 배신하는 거예요.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즐겁게. 그러면 나를 배신하는 방법은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내가 다른 사람한테 어떤 힘을 빼어보기 위해서 강제로 빼어오든지 아부해서 빼어오든지 뇌물주고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빼어오든지 하여튼 간에 인간은 남의 힘을 뺏어서 내 힘 만드는 그것 외에는 다른 아이디어가 없거든요. 사는 방법이.
그런데 이미 4번이 된 사람은 뭐냐 하면, 인간을 피하는 방법이죠. 사람과 엮이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나를 배신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나를 배신 안 하려면 남을 이용할 타인들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배신 안 하는 방법은, 사람을 피하는 방법은,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내가 자체로 죽은 자인 것을 인식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살아 있다면 더 살기 위해서 뭘 해야 되는데 충분히 죽어 있다면 구태여 남을 이용할 생각 없잖아요.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에요.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었고. 그 사람들은 국가가 뭐라 해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실라와 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는 깊은 단잠을 잤고,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을 때 도리어 찬송했어요. 둘 다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옥에 오래 있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리고 둘 다 탈출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는 천사가 옥문을 열고 나가라고 이야기했고, 바울과 실라 같은 경우에는 옥문이 열려서 다른 죄수들은 다 갔는데 그들은 바깥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앉아 있었던 거예요. 그 이유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죄수 풀어주면 간수가 목숨을 자기가 갚아야 되니까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을 때 말리기 위해서 있었던 거예요. 어찌할꼬?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유명한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이 거기 나옵니다.
그럴 때 그 대목에서 간수가 왜 자살하려고 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과 더불어서. 간수가 왜 자결하려고 했을까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죠. 간수가 왜 죽으려고 했을까요? 인간이 자기 자리가 확보돼있으면 그 경계선 바깥에는 다른 사람, 타인이 있다고 했지요. 항상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보로 보지 않을까, 나를 병신으로 보지 않을까, 나를 잘났다고 보지 않을까? 항상 타인을 의식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내가 행동에 나서지요.
학교에서 학생들 시험 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채점합니까? 아니지요. 채점은 선생님이 내는 거니까 많은 점수를 받아야 평소에 내가 살아온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는 그것이 가장 나다운 거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남이 인정해주는 그것이 나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나가 한 개가 아니고 나가 두 개에요. 나가 두 개로 돼있다고.
이미 이걸 정신분석학에선 정신병으로 보는 거예요. 자아가 분열돼있는 거예요. 자아와 주체로 분열돼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주려는 것을 주체라 하고, 내 욕망이 너는 이렇게 돼야 돼, 내가 호소하는 걸 자아라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것은 자아도 없고 주체도 없고 뭐만 있느냐? 몸뚱이만 있는 거예요. 정신분석학에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자꾸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못 배웠든 인간은 왜 정신병자냐 말이죠. 왜 초연하게 못 사느냐는 말입니다. 왜 세상을 초연하게 못 사느냐? 그거는 홀로 살기 때문에 초연하게 못 살지요. 홀로 살면 홀로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말로는 홀로 산다고 청도나 지리산이나 들어가 놓고 계속해서 남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소식 전하고. 우리 아들 사우디아라비아 가 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식 전하고 소식 받고. 이게 뭐냐 하면, 나의 나다움, 평소에 살아왔던 모든 것이 그런 거예요.
“아이고, 아들 장가보냈습니다. 딱 떼놨습니다.” 떼놨으면 아들 낳든지 딸을 낳든지 관심 놓아야 될 것 아닙니까. “너희 아이 생겼느냐?” 아이 생겼는지 왜 묻습니까? 엄마가 떼놨으면. 이것은 바로 주체라는 것과 자아라는 것이 하나로 묶어져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주체가 변변치 않을 때 자아가 살 힘도 없고 여력이 없을 때 여기서 뭘 택하는가? 자살을 택하지요. 죽어 버립니다. 이런 식으론 수치스러워 못 살겠다. 차라리 내가 콱 죽으면 되지 않겠느냐.
크리스마스트리라는 이름을 가진 혜성이 길이가 800미터, 폭이 500미터짜리가 지금 지구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충돌할 가능성은 거의 없데요. 그것과 충돌하게 되면 지구멸망이죠. 충돌 소식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지요. 그런데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의 글이 있어요. 이참에 너 죽고 나 죽자. 왜? 나는 통장에 120만 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 있습니다.
아이고, 꼬시다. 잘 됐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또 그 사람은 외부에 있는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거예요. 남들은 120만 원 이상 있는데 본인만 120만 원밖에 없어요. 그러면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통장에 50억 있는 것과 120만 원 있는 것은 숫자에 불과하거든요. 한 번 적어볼까요. 1,200,000원 있다. 5,000,000,000 있다.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보세요. 그냥 숫자잖아요. 120만 원 있다고 오줌발이 약해지고 그런 것 없잖아요. 그냥 숫자에 불과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정신병을 연구하는 정신학회에서는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숫자에 불과한데도 벌벌 떨고 있는 이유가 뭐냐? 이거는 남들에 의존하는 인간의 주체의식이 인간의 자아를 통제하고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사람들은 악마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껏 밝혀낸 게 인간은 주체가 있는데 이게 허당이다, 허구다. 그래 보는 겁니다.
중들이 동안거 들어가요. 동안거는 겨울에 홀로 있겠다고 들어가는 거예요. 한 번 보세요. 동안거 할 때는 조그만 틈이 있어서 밑에다 밥만 넣어주고, 안에 화장실 구비돼있으니까 밥만 넣어주고 점 하나 찍고 그것 들여다보며 하루 종일 도 닦는 거예요. 부처가 되겠다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아마저 없애버리겠다고 아주 독을 품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언제까지 한다고요? 삼 개월 겨울동안 하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의 무한대로 합니까, 삼 개월만 합니까? 삼 개월 하잖아요. 보세요. 시간에 얽매었잖아요. 일종에 자살 아닙니까. 뭘 도를 닦아요. 미친 짓이지요. 정신병자들이에요. 전부 다.
인간을 자기를 배신할 수 없어요. 자기를 포기 못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작용합니다. 이래도 배신 안 할래, 이래도 너한테 의지할 만한 것이 남아 있느냐, 라고 계속해서 갉아먹고 잡아먹고 찾아와서 들볶고 말씀으로 귀찮게 하고 억압할 때 그게 주의이름이 하시는 일이에요.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런 네가 의로우냐? 주여, 맞습니다. 죄 맞으면 네가 살고 있는 것도 감지덕지하고 고마워해야지 의인도 아닌 주제에 그만큼 살았으면 됐지 뭘 그렇게 불평이 많으냐, 라는 방식을 지금 레위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게. 율법이 여기는 상해죄, 살인죄,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만 나와 있거든요. 그러나 들어가게 되면 점점 더 추가가 돼요. 계속 추가가 된다고요.
하나님과 함께 전쟁할 때는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러한 조항이 있거든요. 민수기에 보면 나와요. 그렇게 민수기에 나와 있을 때 사람들은 그러면 승리하면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전부 다 자기 일이 아닌 듯 여겼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호수아에 보면 아간이란 사람이 등장하지요. 아간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여호수아 7장에서.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이 맞춰보세요. 하나님의 전리품을 숨긴 자가 누구지요? 아간이지요. 그리고 난 뒤에 작은 성 아이 성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그냥 공격했어요. 너무 작으니까. 했는데 몇 명 죽었느냐 하면,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육 인쯤 죽이고” 여기 죽은 사람은 무슨 죄로 죽었습니까? 이게 제 문제입니다. 36명이 죽었어요.
그 사람들 무슨 죄로 죽은 거예요? 본인들이 외투 숨긴 적 없어요. 하나님의 전리품 받아 챙긴 적 없습니다. 그런데 서른여섯 명이 죽었어요. 그 가족들까지 계산해보세요. 백 명 이상이 슬퍼하게 됩니다. 누가 이렇게 슬퍼하게 했습니까? 이 문제 어려운 문제에요. 누가 이야기해보세요. 왜 이 사람들 죽습니까? 첫째 시간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정답은? 첫째 시간부터 했는데 다시 해야 됩니까?
이 사람들 왜 죽습니까? 처음부터 이 사람들은 죽었던 자에요. 아간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 마세요. 여호수아가 교만해서 죽었다고 하지 마세요. 죽음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라 했잖아요. 하나님과 있는 죽음이라 했잖아요.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만 살아도 할 말 없는 사람인데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우리 살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거예요.
레위기의 이 말씀은 어디를 통과하는데 유효하게 쓰여지느냐 하면, 광야입니다. 레위기 자체가 광야에서 주신 말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말씀입니다. 광야란 환경을 생각해봅시다. 광야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광야란 환경은 뭐냐 하면, 약속이란 경험하지 않더라도 아는 것이어야 돼요.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 말씀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질 것이라고 아는 것, 또는 믿는 것, 또는 그 사람 안에 이미 현실화된 것, 이게 바로 약속이거든요.
약속이란 경험하지 않더라도, 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인간이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뭘 하냐? 경험을 통과해야 믿을 것이 만들어져요. 인간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광야에서 들어간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갈렙과 여호수아가 정탐을 했는데, 아까 제가 강의한 걸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은 어떤 주어진 상황을 해석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을 동원해서 해석한다 했지요. 그러면 인간이 어떤 해석을 통해서 내가 지금 내 안에 나는 어떤 마음 상태인 것을 그대로 폭로당하고 발각당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니까 정말 젖과 꿀이 흘러요.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것이 절대로 되지 못하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눈으로 온 몸으로 체험을 한 겁니다. 가질 수 있음을 체험했다, 안 그러면 못 가질 것을 체험한 겁니까? 못 들어간다, 못 가진다는 것을 체험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못 들어간 사람이 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왜 어려운지 아시겠어요?
아까 첫째 시간의 어려운 것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니까 처벌하신 게 아니고 처벌이 먼저 있고 그 처벌이 왜 정당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짓게 돼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이게 우리 현재 인생 경험상 체득되고 체감됩니까? 지옥이 있는 이유는, 죄 지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을 분류하기 위해서 지옥이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천국은 내가 예수 믿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서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을 위하여 우리는 간택된 거예요. 뽑혀 나온 거예요. 일방적으로.
천국 가는 데 우리가 할 게 남아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예 남아있지 않지요. 이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천국 개념과 이 개념이 서로 일치가 안 되는 거예요. 뭔가 해야 될 것 같아.예수를 믿든지 뭘 해야 될 것 같아. 주님이 구원한다는 것은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나의 의지지 반대해요. 온 천지가 구원파 아닙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구원파거든요. 구원파 모토가 뭐예요? 아무것도 안 하면 천국을 못 들어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게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 먹혀들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들을 허락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아는 천국은 악마가 조장한 거짓 천국이고 그런 거짓 지옥인 것을 주께서는 티내기 위해서 지옥 보내기 위해서 교회를 만드신 거예요. 얼마나 주께 우리가 감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로 성령이 아니면 옛날에, 옛날에 속아 넘어갔어요. 십오 년 간 십일조 했다. 한 번도 안 빠졌다. 부도나도 십일조 했다. 그런 것 있잖아요.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그게 구원과 아무 의미가 없음을 뒤늦게 체험하는 거예요. 주의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요지가 돼야지 내가 했다는 게 요지가 되면 안 됩니다. 요점이 되면 안 되거든요. 인간이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은 누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이 사실이 더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냐는 그보다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 이게 바로 정신병, 악마가 만든 정신병이에요.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보면, 베드로가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할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보니까 자기 옆에 요한이 있거든요. 그때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나 잘하세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너나 잘하세요. 왜, 편하게 노니까 너보다 팔자 좋은 줄 알아? 대상화시킨 거예요. 자기와 사도 요한을 경쟁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다. 대상화시킨 게 죄가 되는 겁니다. 대상화시켰다는 말은 천상천하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그만 노출시킨 거예요.
다시 광야로 돌아가 봅시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체험케 하시는데 어떤 체험이냐 하면, 네가 약속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세상 돌아가는 것과 네 생각에 전혀 안 맞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몰아넣을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믿음의 삶과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하나의 공통점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너의 믿음을 네가 배신할 줄 알아야 된다. 나의 소망과 사랑과 믿음을 내가 배신할 줄 알아야 돼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약속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돼요. 나와 상관없이. 다만 그 사실을 나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것뿐이에요.
자, 광야가 왜 있어야 되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광야에서는 그들을 어디까지 낮추는가? 신명기 8장 봅시다. 낮추는 이야기를 또 제가 해야 될 이유는 오늘 본문의 범죄 자체가 마음이 교만해서 생긴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낮아져야 되느냐 이 말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 광야 언급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고 너로 주리게 하시며”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이유는, 만나의 취지와 광야의 환경이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거든요. 만나의 취지가 뭐냐 하면, 만나는 농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냥 한 푼 주세요, 와 똑같은 거예요. 빌어먹는 거예요. 인간이 농사짓게 되면 여분의 것 생산물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거지나 노숙자는 빌어먹기 때문에 내 것이 없잖아요. 나의 자리도 없고 나의 영역이 없단 말이죠.
그럼 어디까지 낮아져야 되느냐, 광야에서. 빌어먹어라. 매일같이. 한 달 수입, 한 천오백만 원 정도. 집은 이백 평정도. 그것조차도 빌어먹는 레벨이라고 봐라. 나한테 어떤 수준이 오더라도. 진짜 빌어먹는다고 해서 돌아다니지 말고. 내게 준 어떤 것도 이게 광야에서 빌어먹는 수준이란 말이죠.
마음을 낮추게 되면 내 것이 없으면 오늘 본문 레위기 24장에 나오는 누굴 치거나 분노하거나 화를 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자기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을 침범한다고 상대방을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 것이 있어야 침범이고 자시고가 있지요.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자인데 그냥 죽었으면 좋겠는데 죽이지 않고 계속 주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면 자, 약속입니다. 살려냈으니까 내가 납니까, 죽은 내가 납니까? 죽어 있는 나가 그거지요.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은 것, 아직 안 죽었으니까 경험하지 않은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약속이다, 복음이란 말이죠. 내가 안 죽었지만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이 경험이 나를 죽은 것으로 경험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성령의 해석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는 해석이 되는 거죠. 미래에 대해서 초조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과거에 대해서 특히 후회하지 마세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살인하지 말라 할 때 같은 성도들끼리 인간은 인간과 싸우니까 같은 이웃끼리 성도끼리 형제끼리 이렇게 살인하지 않는다는 말을 신약에선 살인의 반대말을 했어요. 살인의 반대말은, 네 가지 타입이죠. 살인의 반대말은 안 죽인다. 두 번째, 안 죽이고자 노력한다. 세 번째, 안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네 번째, 이미 용서했다. 몇 번입니까? 4번이죠. 4번입니다. 4번이에요.
1번부터 3번까지는 이게 자기 의가 되어 높아져요. 나 이정도로 잘났다, 믿음 좋다. 자기 의로 높아져요. 이거는 자기가 굳어지게 되면 예수님마저 대상화되죠. 대상화되면 주의 이름 모독하는 게 되니까. 나 이렇게 믿음 좋은데 왜 믿음 없다고 하느냐? 다시 뭐가 일어나요? 분노가 일어나요. 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미 용서한 거예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제발 강의나 설교 시간에 대중가요하지 말라고 당부하는데 대중가요 안 하면 내가 의인되는 겁니까? 우연이가 불렀던 란 노래에 보면, 우연히 옛날 헤어진 남자를 만나지요. 우는 거예요. 나, 너 떠나보내고 얼마나 후회한지 모른다. 과거를 생각하면 너한테 잘못 많이 했어. 그럴 때 여자가 어깨를 두드리면서 벌써 용서했노라, 하잖아요. 집에 가서 들어보세요. 벌써 용서했단 말이죠.
과거에 얽매인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낮아졌다는 것은 내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이미 죄인 중에 괴수가 된 입장이고 죽어야 마땅한 존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내 볼 일을 찾는다든지 내 주장을 부릴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약속이란 내가 경험하지 않지만 이미 현실이 된 게 약속이거든요.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약속이 이미 와버렸단 말이죠. 약속이 약속대로 파급되고 퍼져있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 앞에 십자가 앞에 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건 앞으로 처벌이 있고 죄를 짓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다음부터 계속 우리로 하여금 그걸 평생토록 경험케 하실 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고.
여러분들이 약속을 알았고 주님의 용서를 알았다면, 여러분들의 지난날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남이 잘못했다고 얼마나 탓을 했습니까? 부부나 가족에 대해서. 내 딴에 자식 잘 키웠다고 자부했는데 완전히 자식을 개판으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지요.
끝으로 한 말씀드릴 것은, 그러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나의 것이 아니라면 뭐만 있느냐? 사명만 있어요. 내 것은 없고 사명이 있기에 그 사명이 나를 다시 한 번 쪼가리, 쪼가리 진 것을 하나로 뭉치게 합니다. 이 집과 너의 현재 목숨과 생명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네가 해야 될 사명과 관련돼있다.
사람이 사명이 없으면 은퇴하면 심심해서 우울증 걸려요. 퇴직해서 등산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엔 관절 아파서 올라가지 못해요. 해야 될 일이 없어. 그러나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해야 될 일을 알려주면서 이제는 이미 죽은 몸이니까 이것을 위해서 네가 매진해야 되지 않느냐고 주께서 우리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전하는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들이 세상이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어떻게 태도가 달라지든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이 하는 대로 주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