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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91206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자유게시판레위기

20191206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4장 15절부터 23절까지 하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그렇게 진행돼있지요.

성경은 상당히 무거운 책입니다. 왜 무거운 책이냐 하면, 거기에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인간은 보통 살면서 끝에 죽게 되는데 죽어가면서 이유를 알고 죽어야 되거든요. 죽음이란 것인 인생의 끝에 있지만 죽는 이유는 죽음이 오기 전에 모든 하루하루의 그 이유가 바닥에 다 깔려 있습니다. 결국은 죽기 때문에 그래요. 이래 죽든 저래 죽든 죽기 때문에 인간은 사는 이유가 죽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왜 사는지, 왜 죽는지 같은 이유가 돼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구분이 없다. 구분되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 모여 있으니까 죽는 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고 죽는 것도 이게 하나님의 일이에 돼요. 그러면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러이러하면 죽는다는 말은, 사는 것이 조건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말은, 그것도 돌로 쳐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걸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사는 이유가.

그것 아니면 우리가 왜 사는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아요. 어차피 사는 것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과 삶이 구분 없다면 죽는 이유가 곧 사는 이유가 된다면, 그 죽는 이유를 성경에서는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의 무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대란 뜻이에요. 이 세상 현실은 인간의 무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하는 나타나는 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위한 세상은 없지요. 나를 위한 그런 현실도 없고요.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말은 이걸 바꾸어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너의 생명은 어디 있지? 너의 목숨은 어디 있지?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당신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화낼 겁니다. 질문을 해도 알아먹게 해라.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내 목숨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신의 생명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저의가 뭐냐? 아마 굉장히 분노할 거예요. 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에너지 때문에 살아간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왔는데? 우주에서 왔다. 그럼 우주는 어디서 왔는데? 그건 모르죠. 어디서 온 걸 몰라요.

인간에겐 대략 60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세포는 각자 살아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살아 있는 그것이 에너지의 힘으로 살아 있다. 쉽게 말해서 그 힘 때문에 인간은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데? 모르지요. 그럼 죽는 건 왜 죽는데? 에너지가 빠지면 죽는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에너지가 왜 빠지냐고 물으면, 또 답변 못해요. 에너지가 지가 빠지고 싶어서 빠집니까? 세포가 암세포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주여, 세포가 암세포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검사 해보니까 암세포가 퍼져있는 거예요.

그럼 그 암세포가 어디서 온 겁니까? 암세포가 도대체 멀쩡한 세포를 잡아먹는 거예요? 그걸 암세포에 물어봅시다. 암세포야, 너는 왜 멀쩡한 세포를 잡아먹는데, 라고 물으면 암세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잡아먹으면 안 되는데?” 오히려 이렇게 대꾸할 겁니다. “도대체 네가 뭔데 내가 안 잡아먹어야 돼. 네가 하나님이라도 돼?” 하나님 아니지. 하나님도 아닌 게 너의 고유 권리를 주장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되지도 못한 게 살아야 되겠다는 고집을 부리느냐 말입니다.

암세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느냐 하면, 암세포처럼 인간을 잡아먹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인간을 잡아먹는 하나님. 그만한 권리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란 누구에 의해 잡아먹히는 기간, 이게 인생이죠. ‘누구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에 의해서 잡아먹히는 그 기간이 인생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수명입니다. 하나님과 이렇게 엮여 있어요. 그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목숨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 질문조차도 이해 못합니다. 그 질문이 성립이 되는 이유는, 당신의 목숨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지금 당신은 죽어 있다는 뜻이에요. 당신을 내가 보니까 당신은 산 게 아니야. 지금 죽어가고 있어. 그렇다면 당신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이에요. 이게 의미 있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되게 무거운 책이에요. 이 성경은 우주보다 무게가 더 나갑니다. 왜? 거기에 인간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 이야기가 이 책에 들어있기 때문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하는 레위기 24장 15절에서 23절 이야기도 죽음 이야기에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모독하면 모욕하면 또는 무시하면, 외면하면, 거부하면 반드시 죽일 지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밥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밥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공식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독 안 하면 되잖아요. 사람 쳐 죽이면 반드시 죽일 지라고 했는데 안 죽이면 되잖아요, 라고 우리는 반발하고 여기서 대들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취지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이, 현재 갖고 있는 그렇게 해서 유지되는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 아니라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15년 동안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다음 해에 사람 안 죽인다는 법 없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법 없어요. 마태복음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 했어요. 아무리 버텨봤자 그것은 영원히 삽니까? 한 번도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 한 번도 살인하지 않고 팔십, 구십 평생 살았다고 해서 죽음이 아예 없어지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처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죄 짓게 돼있어요. 마음을 이렇게 먹어야 굉장히 속이 편해요. 처벌이 먼저 있고 하나님의 조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하나님의 처벌이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모든 인간으로 거기에 걸려들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 죽는데 죄 때문에 죽지요. 로마서 6장에.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이 공식이 틀린 공식이 아니고 이 공식이 유일하게 맞는 공식이에요. 죄 지어서 처벌 받는 게 아니고, 그건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거짓말로 계속해서 속여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죄가 있는 자에게만 처벌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죄만 안 지으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처벌은 없을 것이라고 악마한테 속았고, 그걸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 계속 속아온 거예요. 어느 누구도 반대로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처벌이 먼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구원받는 방법은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사람이 죄인 되면 구원받아요. 예수님께서 죄인 되게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 오신 티가 나잖아요. 예수님이 일부러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죄인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죄 안 지으면 그 사람한테는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 돼버린다고. 예수님이 쓸모없는 사람 되고 예수님이 필요치 않는 존재가 돼요. 그 사람한테는.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죄 짓기 위해서 산다는 그 사실을 보고 우리는 무한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책 펴놓고, 보자. 오늘은 어느 항목에 걸려들었는지 찾아보는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여러분 오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제가 토정비결 보는 점쟁이처럼 찾아드릴까요?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열다섯, 여섯 가지 나오는데 한 번 읽어보세요. 읽어보고 해당 안 되거든 돌로 치고요, 해당 되거든 돌을 놓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젊은이까지 집으로 돌아가야 돼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첫 번째,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사람들은 자기에게 목숨이 있다고 여깁니다. 목숨이 있는데 목숨을 더 든든하게 오래 지키는 방법은 뭘까요? 돈입니다. 돈 있으면 사는데 유리하고 돈 없으면 사는데 불리해요.

내일 결혼식이 부산에서 있는데 남녀가 결혼하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남녀 관계, 부모자식 관계에서 돈 빼면 이야기가 안 돼요. 부부관계도. 일단 돈이 되니까 좋다고 희희덕거리면서 같이 놀러 다니는 거예요. 기본 베이스가 돈입니다. 돈 없는데 왜 삽니까?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이 말은 뭐냐? 상대를 볼 때 배우자를 볼 때 내 돈 얼마나 관리 잘 하느냐, 또는 내가 먹고 사는 돈을 얼마나 충당해주느냐? 보이지 않는 돈의 생각, 이미지로 상대하고 한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같이 있는 거예요. 돈 벌어줄 때까지만.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를 살리는 방법은 돈 외에 달리 적절한 방법이 생각이 안 나네요. 하나님이 한 푼도 안 보태주니까. 하나님은 돈 보태주는 분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한 푼도 안 보태주니 믿을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돈만 믿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빈다고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은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해서 있는 돈까지 다 빼앗아갈 요량으로 쳐들어오는 데 그 하나님을 감당하겠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뜻은 인간을 잡아먹는 거예요. 하나님은 암세포입니다. 멀쩡한 우리를 잡아먹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있는 하나님, 같은 말로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죽음. 죽음과 함께 있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십자가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죽음, 그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돈과 함께 있고 싶지요. 그 말은 현재 있는 내 에너지, 내 힘, 내 목숨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달리 말해서 나는 힘 있는 나와 함께 있고 싶어요.

이미 범죄 한 인간으로서는 다른 속셈 없습니다. 최후의 속셈은 바로 그것뿐이에요. 힘 있는 나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 불멸의 존재, 그것 외에는 진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솔직하게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힘 있는 신이 되는 것, 하나님 되는 것, 그게 가장 솔직해요. 누구도 나를 개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 그게 인간이 가장 솔직한 겁니다. 그 방법은 돈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여기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그 다음에 “돈을 사랑하며” 다 같은 말이거든요. ③“자긍하며” ④“교만하며” ⑤“훼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치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참소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⑮“배반하여 팔며” ⑯“조급하며” ⑰“자고하며” ⑱“쾌락을 사랑하지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가 그렇게 사는데 어딜 돌아서, 돌아서긴 뭘 돌아서요. 매일매일 이렇게 사는데. 하나둘 셋에서 열아홉까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사람과 대화할 때 이 주제 말고 다른 주제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대화할 때 그게 주제가 된다는 말은 속에 담겨있는 것이 솔직하게 밖으로 표현된다는 거거든요. 그 표현은,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이것을 인간은 매일같이 숨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드러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타인을 대상화한다. 나의 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대상의 특징은 거리가 만들어져있다. 거리란 말, 알지요. 내 몸이 있고 대상이 되는 타인의 몸이 내 몸과 앞에 있던지 떨어져있든지 그게 거리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띄어있는 거예요, 안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암세포가 멀쩡한 세포를 잡아먹으면 암세포는 들어와 있지요. 그건 곧 죽음이죠. 하나님이 원하는 건 바로 그거에요.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는 말은 곧 너를 죽게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있으란 말이거든요. 아무리 살려고 애써도 결국은 죽잖아요. 그걸 미리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때는 더 이상 내가 하나님과 있다고 하면 안 돼요. 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죽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또는 죽음의 증거, 죽음의 징후, 징조로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죽음, 김 죽음, 최 죽음, 박 죽음이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죽은 자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 우리가 죽었으니까 우리 죽음을 통해서 유감없이 발휘가 돼요. 그분이 누구냐?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이 본문에서는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주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잠식하려고 하는 거예요. 잠식해서 뭘 얻고자 하느냐? 예수님 자신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성령 받은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죽었음을 늘 인정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지금 돌이 날아와도 설교하잖아요. 죽은 자가 죽는 게 뭐 이상스런 일입니까, 자연스런 일이지요.

예수님도 그런 말 했거든요. 어떤 제자가 예수님 따라가려다가 갑자기 계획을 변경시킵니다. 다음에 따라갈게요. 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무나 매정하게 들리지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고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다시 말해서 너를 어디서 어디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 죽은 자의 입장에서 죽은 자란 표현형에서 이제는 나의 죽음과 같이 죽음의 길 가자. 동행하자. 그러면 그것이 바로 네 목숨 어디 있느냐, 할 때 영생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면 죽인다, 저렇게 하면 죽는다. 나중에는 더 추가가 돼요. 끊임없이 추가가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의 나라가 둘로 쪼개졌지요. 북쪽과 남쪽으로 우리나라 남북처럼 갈라졌잖아요. 쪼개졌고 나중에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했고, BC586에 남쪽 유다고 멸망하거든요.

그럴 때 그들이 아주 곱게 망했습니까, 아니면 무수한 사람이 죽어서 망했습니까? 무수한 사람이 죽어서 망했지요. 그 죽음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은 내가 죽인다. 나라 전체가 나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죽인다고 했어요. 그걸 한 사람, 한 사람 다 끄집어내서 저울 달아서 “너, 바알 섬겼지? 죽어라.” “넌 여호와 섬겼나? 그럼 합격.” 이랬습니까? 집단적으로 죽였지요.

이스라엘은 내가 손대서, 바벨론이라든지 앗수르는 몽둥이라 했어요. 이사야에. 몽둥이로 패서 남쪽, 북쪽 나라 멸망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러내서 착한 것, 빼주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단체로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이 우리가 뭐가 잘못해서 죽이느냐고 나오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돼있다는 하나님의 처벌이 먼저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처벌하겠다는 예언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위해서 그들은 주변에 많은 이방민족들이 포진해 있다가 그들이 이방민족의 잘 사는 면면을 보고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유혹을 허락하신 거예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 했지요. 창세기 2장에 있거든요.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어요, 안 따먹었어요?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을 때에 유혹을 한 피조물, 뱀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뱀을 에덴동산에 들어오도록 허락을 했습니까? 이미 따먹도록 돼있는 프로그램에 의해서 인간은 따먹을 수밖에 없어야 돼요. 그게 피조물의 운명이에요. 안 오십 년 버텼다고 해서 선악과 치워주는 그런 배려 없습니다. 오십 년 버텼으니까 인간답구나. 선악과 뽑아버릴게. 이런 것 없어요. 백년 버텼다고 선악과 치워버리지 않습니다.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우리가 칠십 평생 동안 하나님을 모독 안 해도 이 레위기 24장 15절, 16절 말씀은 우리 코앞에서 없어지지 않아요. 여전합니다. 여전히 작요해야 돼요. 그것은 이 모든 성경은 우릴 구원해주는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돼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을, 그게 복음이거든요.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실 때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로 보시면 안 되고 도대체 예수님은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출발을 그것부터 해야 돼요. 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누가 죽어 달라 했습니까, 누가 고생하라 했습니까? 본인이 알아서 죽어놓고 네 책임이라고 하실 때에 그게 하나님의 일이거든요.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운전할 때 차가 없고 시원하게 달리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요.

주의 일은 복음이 주의 일이에요. 나머지는 다 삭제당해야 돼요. 왜 복음만을 생각 못하느냐 하면, 주님의 죽음 앞에 실은 다른 문제는 문젯거리도 안 되거든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복음 앞에서, 아까 뭐라 했어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죠. 최 죽음, 박 죽음, 김 죽음 이미 죽은 자거든요. 주님의 죽음 앞에 이미 죽은 자라는 그 사실 그 유일한 현실 빼놓고 나머진 다 꿈같은 거예요. 헛방이고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읽었던 디모데후서 3장 같은 그런 경우를 보게 되면, 사람이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니까 자기 문제가 예수님 죽음 문제보다 더 급한 문제고 더 심각한 문제라고 오인하는 겁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잘난 체하니까 자기가 남에게 못나고 창피하게 되는 것이 아주 중차대한 자살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착각들 하는 거예요. 시작을 예수님 죽음부터 안 하니까.

교통사고 나서 내가 다리가 부러졌다. 그게 문제돼요? 죽은 사람 공동묘지 파헤쳐서 다리 하나 부러뜨렸다고 해서 시체가 뿔따구 나서, “누구야. 내 다리 부러뜨린 사람.” 이래서 일어섭니까? 죽은 인간 다리 하나 부러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되고 눈물 흘릴 일입니까. 내가 남의 돈을 훔쳐서 교도소 갔다. 그게 뭐가 중요한 문제에요. 배고프면 훔칠 수도 있지. 애가 성적이 내려간다든지, 수능 잘못해서 혼자 고민하다 4수한다든지, 4수를 하던 5수를 하던지 그러다가 백수 해서 나이 팔십 돼서 수능 치라 해라. 그게 뭐 그리 문젯거리가 됩니까.

성경이 무거워야 되는데 본인이 너무 무거워. 본인 문제에 시달려 본인이 눌려서 어디서 돌이 굴러왔는지 여러분 옆이 공사 중이었습니까? 자는데 돌이 와서 여러분을 뭉개버리듯이 우리는 매일 삶이 본인이 본인 지키려고 본인 생명 있고 목숨 있다고 우기고 그걸 지키려 하니까 개미 같이 바퀴벌레 같이 기도 못 피고 기어가고 있어요.

골프장에서 캐디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복음을 알게 되면, 복음을 모를 때는 오늘도 어떤 단골 고객이 나를 성추행하고 얼마나 놀리고 내 신세를 무시할지 그게 고민이 돼서 출근하는 것이 어두워요. 암울해요. 내가 돈만 있으면 이런 짓 안 할 텐데. 돈 때문에. 또 돈타령. 그런데 복음을 아는 캐디 같으면 골프채를 들고 다닙니다.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라. 머리 부셔버릴 테니. 그게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남한테 왕따 당한다고 하는데 그게 남 문제 아니에요. 전부 다 본인 문제에요. 본인이 주관이 없어서 그래요. 본인이 인생관이 없어서 그래요. 부모가 자식한테 인생관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어요. 부모부터 돈에 벌벌 떠는 그것만 보여줬거든요.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돈에 벌벌 떠는 거예요. 돈에 벌벌 떨면서 그 탓은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났다. 내 부모가 재벌이었다면 이런 모욕을 안 당할 텐데. 부모가 나한테 변변치 않아서 이런 모독을 당했다는 겁니다.

내가 결혼하는데 엄마, 아빠는 아파트 안 사주노. 또 돈 문제. 자식과 부모가 돈 문제 빼놓고 나눌 이야기 있던가요? “아이고, 이놈의 자식, 어디서 나왔노?” 어디서 나오긴 본인에게서 나왔지요. 자식은 결혼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그마한 빌라로 만족합니다. 자식이 오히려 빌라라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 되지요.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거는 아버지, 엄마가 나대서 공장 대출 받아서 집 사줄게. 이래서 광산 김 씨 대출 받아서 집 해줬다는 것 아닙니까. “너는 나의 명예야. 네가 못 살면 내가 못 참아.” 그따위 사고방식으론 안 되는 거예요. 그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에 찌들어 평생을 살아오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요? 대상화. 남을 앞에 두고 자기 옆에 두고 거리를 띄우면서 너희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란 말이야. 나 이정도야. 누가 뭐라 했어요? 본인이 거기에 굉장히 예민해있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그 의미를 여러분 잘 아셔야 돼요. 대놓고 하나님 욕하고, 물론 그것도 모독이죠. 난 하나님 안 믿는다. 하나님 앞에 욕설을 퍼붓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신 일을 훼방하는 거예요. 하신 일을 거부하는 거예요.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자리 만들기. 네가 지금 있는 자리 누가 만들어줬느냐? 자리 만들기에요.

이스라엘 자리를 누가 만드십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럼 하나님이 만든 자리는 어떤 자리에요? 인간이 우선입니까, 말씀이 우선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에게만 이렇게 계속해서 벌칙을 내리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특별한 민족이다. 특별하다는 말은, 다른 민족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인 줄을 꿈에도 몰라. 하지만 너희들은 알아.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새롭게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너희들만 경험한 거잖아. 그럼 경험에 담긴 의미가 뭐냐?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렇게 나와 있지요. 그리고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뭐냐?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는 무조건 산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라는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내 몸은 이미 죽은 몸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활용당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죠. 죽고 싶어도 이 몸은 못 죽어요.

주께서 활용하는 몸이기 때문에 몸이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돈이 있든 없든 간에 그거는 내 문제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거든요. 하나님이 적절하게 필요해서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건강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고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예언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이상 하나가 된 이상은 하나님을 대상화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대상화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여기 내 자리가 마련돼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 것이 되겠지요. 아까 거리가 있다고 했지요. 거리를 띄워야 대상화된다. 화가가 그림 그릴 때 그림판과 화가가 거리를 두고 있잖아요. 손대서 그리잖아요. 화가가 정물화 그릴 때는 정물과 화가의 눈이 떨어져 있잖아요. 그게 대상화란 말이죠.

대상화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으면 이건 하나님의 것이 되겠지요.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돼있는 이상은 이미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공통의 자리가 아니잖아요.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그냥 이스라엘 속에 있는 박물관을 하나님을 모셔두는 거죠.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왔다. 예수님의 마음이 온 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두 자로 ‘은혜’라고 하거든요. 은혜란 말은 항상 목표가 뭐냐 하면, 너는 죽었고, 이것을 확인해주는 게 은혜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상 나만 생각하게 되면 나한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고민거리고 걱정거리에요. 돈이 많더라도 더 갖고 싶은 내 욕망이 있고 이미 가질 때는 좋아하지만 이건 며칠 안 가요. 새 집 입주할 때 두 달간은 기쁘겠지요. 석 달 이후에는 이게 마땅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고요. 감사의 폭이 휘발성이 있어서 감사가 날아가 버렸어요. 마치 새 집 들어올 때 무슨 냄새 나던 것이 삼 개월 지나면 그 냄새 다 날아가는 것처럼. 은혜를 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 다시 한 번 주께서 은혜를 줘버리면 이 집이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명의로 돼있다는 사실, 주님이 주님 닮기 위해서 이 집에서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계획, 나의 스케줄, 나의 시나리오, 나의 모든 어떤 목표 같은 것을 주께서는 완전히 개 무시하고 없애버리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사람이 계획이 있으면 그 계획 때문에 조마조마하고 가슴 졸이고 그래요. 어쩔 줄 몰라서 벌벌 떨고. 벌벌 떨고 가슴 졸이고 걱정된다는 말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이미 날아가 버린 거예요. 감사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은 이 집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거예요. 내 것이 되면, 내 것 앞에 있는 모든 것은 대상화되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를 모독하게 되고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뭐라 했습니까? 주의 이름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경우에 인간이 잘난 체하는 것을 주께서 죽은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함께 나타나신 그분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하나님이 죽일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 대신 이 땅에 와서 죽은 분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만나면 죽여 버려요.

죽어야 되는데 죽은 자를 주께서 거둬줄 때 그때 그냥 거둬주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 주의 이름과 함께 사는 조건 하에 우리를 살려주시는 겁니다. 그냥 죽을 때 혼자 죽고 살 때도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죽을 때 혼자 죽더라도 살 때는 주의 이름과 함께 죽으면 그게 함께 살리라가 돼요.

아까 처음에 질문이 뭡니까? 당신의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목숨이 어디 있습니까? 주 안에 있지요, 뭐. 주님 안에 있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에 있어요. 하늘나라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어요. 주님 안에 있으니까 내 안에 생명 있다고 자꾸 묻지 말라. 짜증난다, 정말. 주님 안에 있어.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생명이다, 라고 답변하게 되지요.

그러면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 아니고 중차대한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죽으셨고 다시 살았다는 그 복음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한 걸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제가 임의로 나눠봤어요. 인간 삶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는, 악착같이 살려는 자. 99.999%에요. 두 번째는, 살려고 애쓰지 않는 자. 겉으로는 이런 사람이 많은데 건드려보면 2번에서 1번으로 가버려요. 겉으로는 빈 말로 요양병원에 가면 이런 사람들 많아요. “나, 나이 95이다. 죽으란다.” “오늘부로 어머니 밥은 없습니다.” “너, 죽을래.”

세 번째는, 죽음을 목표로 사는 사람. 이 더러운 세상, 너무 괴로워서 못 살겠다. 콱 죽었으면 좋겠다.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죠. 네 번째는 뭐냐? 이미 죽은 자. 1번부터 3번까지는 사는 게 힘들어요. 왜? 3번 같은 경우엔 목표가 있으니까. 살려고 애써봤자 2번이 되려고 해도 몸은 자꾸 1번을 추구하니까 이건 또 갭이 있어서 힘들어요. 그러나 이미 죽은 자는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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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3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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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