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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12월 13일 강의 교회를 넘어서 11, 학개와 스가랴 성전 2강의스가랴

대구 12월 13일 강의 교회를 넘어서 11, 학개와 스가랴 성전 2

이름 : 이근호(IP:)

021 2004121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4대구/대구041213교회를넘어서11성전2.hwp

관리자(IP:220.♡.176.169)

09-06-14 20:34

대구041213교회를넘어서11성전2

[04 대구강의 22] - 교회를 넘어서 11 - 학개와 스가랴 성전 2

04,12,1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먼저 ‘주의 이름’에 대해서 !!

오늘은 교재 267페이지에 나오는, ‘학개와 스가랴에서의 성전’을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겠는데, 먼저 우리가 에스겔서를 지나오면서 그 에스겔 전체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즉 에스겔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취지를 말이다. 그것을 먼저 살펴보고 나서 진도를 나가자는 것이다.

먼저 에스겔 36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자.

(겔 36: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겔 36: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겔 36: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 성경의 중심테마는?

여기 20절에 보면,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라고 하고, 21절에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22절에서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관심사가 오직 한 군데로 쏠리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거룩성,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의 핵심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고 하니, 성경의 흘러가는 중심테마를 말이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데, 즉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이 우주는 창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그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데 말이다. 즉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이름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이름으로 인해서 주님의 이름이 그만 더럽힘을 당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이름 때문에 그만 주님의 이름이 !!

어떻게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고 하니, 주의 이름으로 벌려놓은 일들이 있는데, 즉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고유 기능을 가지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그만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가지고 그것을 모멸하고 무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다윗이 왕으로 선택되었다” 라고 할 때, 그렇게 다윗이 왕으로 선택이 된 것은 누구의 이름으로 된 것인가? 만군의 주 여호와 이름으로 그렇게 왕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누가 반대했는가? 바로 앞선 왕인 사울인데, 이 사울은 자기 이름으로 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발적으로 우리 인간이 전혀 예상치를 못하게 하나님은 일을 벌려나가시는데, 그래서 사무엘이 “제사가 순종보다도 낫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제사는 인간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 주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 !!

하지만 주의 이름이 하는 일에는 인간의 이름은 가담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런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만 일을 벌리는 것이지, 일을 하다가 능력이 모자라서 인간의 이름을 차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는 전혀 별개로 일을 하니, 우리 인간은 자기 노동력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일이 터졌을 때는,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나란히 역사 속에서 흘러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을 항상 대적하고 반발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에 대해서 반발하고 공격하는가? 왜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 인간의 이름은 그 배후에 !!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름에는 그 배후에 다른 이름이 있는데, 즉 주님의 이름에 대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어떤 세력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세력이 인간의 이름을 걸치고 와서는, 마음껏 자기의 음흉한 위력을 발산함으로서, 그래서 인간의 이름이 있는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고, 또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주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있는 자격자가 되지 못한다” 라는 것을 보다 더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힘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라는 것이 성립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이름은 음흉한 흑암 세력의 대변인으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악마의 세력으로부터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구원된 자에 국한해서 비로소 제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주의 이름은 자기 백성에 의해서 ‘거룩함’을 !!

그렇게 될 때 주의 이름은 그냥 주님의 이름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거룩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놀랍게도(?) 인간의 이름에 의해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작업에 나서고 일을 벌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업에 나서는 이유는 자기 백성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즉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서로 대비되면서 !!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성경말씀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것은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서로 대비가 되면서, 그런 상태가 계속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이다. 바로 그러한 와중에서 에스겔과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말씀들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파견된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에스겔과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이름의 대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그 당시의 남쪽 유다나라가 될 것이고, 물론 북쪽 이스라엘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주의 이름을 떼어내고 또한 악마의 이름을 떼어내게 되면, 역사 속에서 실제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는 선지자들과 유다나라와 이스라엘의 기본 그룹들의, 즉 그들의 내부의 갈등으로만 보여진다는 것이다.

◈ 그분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스라엘 아닌 다른 이방 민족들은 이 성경말씀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까, 성경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것이기에, 그래서 인류의 보편적인 의미까지 둘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성경은 너거들 민족끼리의 너거들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 않는가?

이것이 유다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지 않을 때는 어느 정도 말이 되었는데, 그러나 유다나라가 그만 망하고 난 다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다나라가 이방 나라의 대변자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면서부터는, 그 뒤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단순히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그런 신이 아니라, 그야말로 만유의 주이며, 모든 신 위에 뛰어난 진짜 신이라고 하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기 사직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위대한 바벨론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만 쩔쩔매니 말이다.

◈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언약대로’ !!

이렇게 되면, 이방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까, 이것이 참 중요한데, 언약대로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도 언약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언약대로 심판하고 정죄한다고 하면, 언약이 아예 주어지지도 않는 이방인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학생들이 기말고사 시험을 치는데, 그런데 문제를 풀기는커녕 시험지도 제대로 받지를 못했는데, 그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야, 너는 이번 시험은 빵점이야” 라고 하면서, 그래서 마구 야단을 치고 벌을 주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척이나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 과연 언약의 하나님인지, 아닌지?

하지만 과연 그렇게 언약대로 하시는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로부터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물론 언약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비록 언약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이 없다고 해서 불평할 문제가 아닌데.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조차도 이방나라들과 크게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마치 교회에 다니는 것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교회에 다니더라도 그것이 천국에 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는 것이다.

◈ 구원은, 주의 이름의 일방적인 활동에 의해서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이 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성경공부를 하던 불경공부를 하던 상관이 없이 말이다. 주의 이름의 일방적인 활동에 의해서 택정함을 받은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의 글은 예정론에 치우쳐 ??

대전에서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이 저의 글을 보고는, 물론 단편적인 글들을 몇 개 본 것 같은데, 저의 글을 평가하기를, 글들이 상당히 어려운데 너무 예정론에 많이 치우친 것이 아니냐고 하더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제 글에서 무엇을 끄집어내었는고 하니, 주의 이름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을 떠올리면서 그것은 언급했다는 것이다. 저는 주의 이름을 끄집어내는지, 그것을 보고자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양반은 예정론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가지 교리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내었다는 것이다. 물론 단편적으로 보아서 그렇다고 좋게(?) 말하고 싶은데 말이다.

◈ 아니, 총신에서 그런 일이 ??

이전에 총신에서 김지찬 교수가 자기 신학을 반대하는 학생 5명을 과감하게 제적을 시켰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5명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렇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교수를 쫓아내려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 정도의 실력은 학생들에게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학생들이 제적을 당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학비를 내지 않고 장기적으로 결석을 하면 몰라도 말이다. 아니면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어느 특정 교수를 인신공격을 공개적으로 한다든지 말이다.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면, 학생들의 사상을 심사해서 잘라야만 되는 굉장히 다급한 일이 있었던 같은데, 물론 그 내막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생들의 경우는 배우는 입장이기에 여러 가지 신학을 많이 접해보아야 하는데, 당연히 학교에서는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뭔가 취약점이 노출되지 않았는가 하고 짐작을 해보는데, 그것도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신학적인 문제로 말이다.

◈ 주의 이름이 아니라면, 인간의 이름뿐 !!

아무튼 그건 그렇고, 주의 이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선택된 자들만 구원을 받는데, 이 주의 이름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함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면 구원이 될 자가 없다는 것이고, 또한 제 아무리 인간들이 자기 이름으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신학체제에 어떤 도전이라든지, 위기로서 주어졌다고 하면, 그들은 무엇을 의지하지 않은 것인가? 주의 이름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위기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갖다 버리면 인간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기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바르게 살 것인지, 바로 그런 인간의 이름으로만 볶아대는 신학을 하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에스겔을 보든지, 학개나 스가랴를 보든지 간에, 이것을 무엇으로 전환을 시키는고 하니까,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이름으로 어떤 종교를 하나 만들어보자는 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대중들에게 흥미를 끌 수 있는 종교를 한번 만들어보려는 작업에 돌입한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주의 이름이든, 예정론이든, 그런 것들을 다 떼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들이 선지자가 외치는 그 현장에서, 지금도 동일하게 되풀이되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말이다.

이것이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만약 우리가 강물에 빠지게 되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되는가? 그냥 세포로서 빠진 채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그냥 그렇게 빠져 있어도 급류가 자꾸만 하류도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 말씀이 떨어지면 주위에 급류가 발생 !!

그러니 선지자는 이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변화시켜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단지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거기서 본 것을 증거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선지자가 그렇게 떨어진 하나님의 전하기만 하면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만 급류가 되어서 선지자를 마구 휘몰아 부쳐서, 결국은 선지자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즉 자기는 아무런 짓도 하지를 않았는데 남들이 자기를 보고 군지렁 군지렁거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는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지만, 말씀이 그렇게 만드는데, 즉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취약점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건드리라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주신 것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나는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할까?” 라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데, 그러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증거해야 하는가?” 라는 것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문제는 주위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는 말이다.

◈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 !!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는, 악한 놈들이 그를 공회에 세워서 “니가 여기에서도 그 따위 소리를 할 수 있나?” 라고 하니, “당연하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라고 해서, 구약성경부터 소위 구속사(?)를 완벽하게 강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약성경을 예수님과 결부시켜서, 성전을 신봉하는 놈들을 모두 이단으로 간주하니, 그쪽에서 돌을 던져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증거할 뿐인데, 자기가 죽으려고 몸부림을 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만 주위에서 급류가 몰려와서는 그렇게 몰고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성경말씀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267페이지를 살펴보자.

** [9. 학개와 스가랴에서의 성전] - 무너진 성전을 놓고 볼 때에, 성전의 원상을 역사적인 계기를 통해서 되돌리는 시도를 전적으로 배제된다. 그래야만 성전의 본질이 계속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성전의 무너짐은 단순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진정한 성전을 감싸고 있던 옛 계시의 껍질이 깨어진 것을 의미한다.

◈ 학개와 스가랴에서의 성전 !!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계기를 되돌릴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 ‘역사’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끌어 가시는데, 즉 악마의 정체를 밝히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우리의 힘으로 이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린다는 것은,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니 말이다.

◈ 아인쉬타인 - 시간은 비가역적(非可逆的)이다 !!

자기의 과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런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학에서는 “시간은 비가역적이다” 라고 하는데, 아인쉬타인이 그런 말을 했지 싶은데 말이다. 즉 시간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끌리고 있다는 의미인데, 즉 당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의 경우에, 이 성전은 줄기차게 당겨지고 있는데, 신약시대의 메시야를 향해서 말이다. 마치 렉카에 체인을 걸어서 줄기차게 좍좍 당기듯이 말이다. 그렇게 당기면서 긁힌 흔적을 역사 속에 남기는데, 그렇게 긁히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죄들이 팍팍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스라엘은 이 깨어짐에 동참된 나라이기에, 정치적 차원에서의 국가에서 제대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보여주게 되는 국가로 전환되는 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경우에, 정치적 차원의 국가는 이제 그만 하라는 것인데, 그런 엉터리 왕들이 나와 봐야, 그러한 왕들 자체가 너무나 어설프다는 말이다. 여기서 호세아 8장 3절을 한번 살펴보자.

(호 8:4)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 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 참된 왕은 죄를 끄집어내어야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왕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세우지 않았다는 것인데, 사실상 왕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니 자기들 식으로라도 한번 해보자는 뜻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에, 즉 언약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즉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왕이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서 왕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하면 민주주의인데, 하지만 그런 왕들은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왕들은 죄가 무엇인지 긁어낼 수가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할 여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왕이 와야만 인간의 표층에 깔려있는 것을 걷어내고, 그 안에 숨어있는 악마의 정체를 들추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시한 왕들이 오게 되면, 같이 악에 합류가 되어버리니, 전혀 죄가 드러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자는 어떤 목회자이겠는가? 그냥 밥이나 먹으면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그러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사명자를 세우는 의미에서의 목회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설교를 잘해서 사람들을 천당에 데리고 가려는 목회자는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설교를 잘한다고 천당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한 목회자는 인간들은 좋아할지 몰라도, 그러나 주님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얼마나 신랄하게 하는지, “우리교회가 최고다” 라는 식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천국이 있는데, 왜 굳이 인간의 나라를?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때문에 인간의 나라가 굳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천국이 없다고 하면 인간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약속된 언약의 왕을 통해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꾸역꾸역 옆에 나라를 세우서 살림을 차릴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 교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주님이 이미 천국을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그런 나라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기가 왕이 되고 돗대가 되는, 그러한 나라를 더욱 더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분명히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들이 만든 세계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결단코 ‘주 안’에서가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연히 추방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 주님으로 기뻐할 사람, 여기 여기 모여라 !!

만약에 “주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끼리 한번 모이자” 라고 했다면, 자기 잘난 맛으로 살겠다는 것은 포기한 사람들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인다고 하면, 그 모임의 취지에 위배가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님만으로 즐거워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그런 곳에 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쫓아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어떠한가? 자기 주위에 그러한 사람들이 태반이니,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핍박을 당하고, 또한 고난을 당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 나라는 곧 인간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성령과 천사들에게 의해서 표출되는 나라이다. 여기서 죄 용서를 둘러 싼 천사의 활동과 이 점에 못마땅하여, 그 죄 용서함을 권력적 체계로 다져서 국가적으로 소유화해보려는 인간의 죄성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역사적 측면에서 고발하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예언서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부분인데, 특히 스가랴서에는 천사들의 활동이 많이 나오는데, 거기서 천사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 성전이 불타고 멸망한 상태에서, 왜 이렇게 성전이 망해야만 했는지, 바로 그러한 근거를 천사들이 땅 끝까지 전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거기에 대항해서 어떻게 하는가? 여기 교재는 “죄 용서함을 권력적 체계로 다져서” 라고 하는데, 즉 인간들은 죄를 용서해주는 전문기관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그것을 한번 해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 체제 속에 들어오면 당연히 죄를 용서함 받는, 그러한 자동기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소위 ‘성만찬’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잠시 ‘성만찬’에 대해서 !!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주님은 “나를 기념하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고린도전서에서, 즉 아직까지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이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대로 살아있고 말이다. 사도가 살아있는 시대에서 성만찬이라는 것은, 다른 방언과 통역과 같은 기능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니 말이다. 진리와 복음을 전달하는 말이다. 즉 성만찬이 방언과 통역과 등과 함께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 성만찬을 잘못 행했을 때는 거기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죽는 자도 생기고 또 아픈 자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고 아프고 하는 것은 불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자라는 의미인데, 불신자의 경우는 전혀 멀쩡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아버지의 첩과 간통하다가 죽은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신자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택한 신자이니, 몸은 죽이고 영은 살리는 조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무엇으로 대체가 되는고 하니, 말씀의 유일한 통로인 성경으로 대체가 되는데, 즉 확정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이다.

성령께서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의 죄를 지적하는고 하니까,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까지는 아직까지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방언과 통역과 그리고 성만찬을 통해서 죄를 지적하고, 그런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징계를 받게 됨을 은밀하게(?) 보여주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지금도 이러한 성만찬이 계시의 수단이 된다고 하면, 이 성만찬을 잘못 하게 되면 죽거나 아프거나 하는 징계를 받는 일들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만찬을 주관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떡을 하나 잘못 먹어도 죽는데, 이 성만찬을 주관하는 인간이 엉터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그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 천주교의 이단성 - 계시를 역사로 !!

천주교의 이단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확정성을 포기하고, 그 성경을 대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완전한 사도 밑에 완전한 속사도(후사도), 또한 그 밑에 완전한 목회자, 즉 주교나 신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전한’ 이라는 것을 누가 어디서 결정을 하겠는가? 일단 성경을 포기한 상태에서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완전한’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장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이 한스큉의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것이 곧 ‘역사(歷史)’ 라는 것이다.

지금 총신이나 합신이나, 물론 장신도 그러한데, 개신교의 모든 신학이 성경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고 하니, 실제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역사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요즘 교인들이 워낙 믿음이 없으니 무엇을 믿는가? 자기의 미래를, 즉 역사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믿을 만한 것을 가지고서 땜질을 하는데, 즉 역사땜질(?)을 말이다.

◈ 전도사님, 우리교회를 역사를 아십니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경우인데,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를 처음 개척하신 초대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 이러한 기적을 받으신 분이기에 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처음에 교회를 개척한 초대 목사와 후대 목사들의 체험이 모이고 모아져서 무엇을 구성하는고 하니까, 그 교회 나름대로의 역사를 구성하게 되는데, 즉 교회역사를 말이다. 그러니 지금도 성령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 밀쳐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양립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어떤 철없는 부교역자가 와서 말씀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설교를 했다고 하면, 예배를 마치고 종용히 장로가 부른다는 것이다. 어디 설교를 잘했다고 칭찬을 하겠는가? 천만의 말씀인데, “당신이 우리 교회의 역사를 아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헌신을 했는지 아느냐고 따진다는 말이다. 부교역자는 성경으로 나름대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허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민중들은 ‘소유성’으로 !!

이것이 바로 민중들의 기본인식인데, 사람들은 이렇게 사물을 역사관로 본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 보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지적함에 있어서, 결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가 아닌데, 인간들의 기본 인식자체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했기에, 성경말씀을 배격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성’ 이라는 말이다.

◈ 천사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아 !!

학개와 스가랴에 있어서 천사들이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천사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데, 즉 천사는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사와는 달리 인간들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국가’ 라는 집단의 과거부터 이어져오는 장구한 역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말이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보면, 처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노아홍수가 일어나면 동해물과 백두산도 한 순간에 모두 마르고 뒤집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 것이 아주 장구한 시간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긴 시간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아무 혜택도 주지 않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만년을 산다고 과연 행복하겠는가? 그러니 일찍 죽는다고 해서 그것이 불행이 아니고 말이다. 일찍 죽던, 늦게 죽던 간에, 인간은 죽는 순간이 되면 지나간 시간은 다 날아가 버리고, 결국에 남는 것은 자기 몸뚱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 년을 장수해도 여전히 아쉽고 말이다.

◈ 역사에 몸을 숨기는 인간들 !!

성경은 인간을 공격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 성경말씀의 공격에 대해서 역사 속으로 도피를 한다는 것이다. 즉 장구한 역사 속으로 자기 몸을 숨겨버린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역사를 민중들이 원하니, 천주교에서는 사도니 속사도니 하면서 역사적인 흔적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 라는 것은 마르크스 이론에 의하면, 인간노동의 열매이고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 아무튼 성만찬의 경우에 !!

이러한 식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인간인데, 그러니 성만찬을 집례할 수 있는 신부를 뽑을 때는 사도가 후사도를 지목하는 그 법칙을 그대로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호세아 8장 4절에서처럼, 그들이 왕을 세웠지만, 그러나 그 왕은 자기들의 역사와 전통에 의해서 세운 것이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세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성만찬을 집례하는 순간에, 그렇게 집례하는 목사나 신부 본인은, 자기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성만찬의 집례를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뭔가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만약에 집사가 성만찬을 집례한다면?

그런데 만약에 성만찬을 집례하는 사람이 굳이 목사가 아니고 집사가 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그렇게 해서 성만찬을 집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코 자기가 자격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성령께서 시켜서 임시적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말이다.

얼른 들어보면 겸손하고 믿음이 참 좋아 보이는데, 집사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심지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도 가능하다고 하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성만찬이라고 일부러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평소에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결국에는 성만찬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니는 밥을 먹지 마라. 그런 꼴에 니가 무슨 신자이고? 웃기네” 라고 하면서 형제를 욕하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한 자도 역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점심 성만찬을 함부로 참석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 성만찬을 하면서, 떡의 크기는 어떻고, 또 포도주는 알콜도수가 몇 도이고 하는, 그런 것들이 일일이 다 정해지지 않았다면, 결국에는 주의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된 그 자체가 곧 성만찬을 대신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왜 성만찬에 매달리는가?

그런데도 왜 굳이 성만찬을 하고자 하느냐는 말이다. 신부가 하든, 목사가 하든, 또 집사가 하든 간에 말이다. 또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하든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 배후에 무엇인가가 있는데, 이것은 루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라고 하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라는 인식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천사에게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천사는 전혀 융통성이 없이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곧이곧대로 하는 분들이기에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역사가 뭉쳐지게 되면, 그것이 죄를 용서하는 권력체제가 되는데, 아까 교재에서도 말했지만 말이다.

◈ 행함을 위한 행함 ??

이것을 천주교의 성만찬에서는 ‘행함을 위한 행함’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은혜를 주기 위한 행함이 바로 성만찬이라고 그들은 규정한다는 것이다. 즉 은혜를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 행함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학개에서의 성전은 ‘추억의 성전’이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이유는(1:8), 성전 건축을 통한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 수행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학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 아, 추억의 성전 !!

여기에 보면, 학개의 성전을 ‘추억의 성전’ 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과 비슷한 영화제목도 있었지 싶은데, ‘추억의 살인’ 이라고 말이다. 아닌가? ‘살인의 추억’ 인가? 아무튼 추억의 성전이라는 것은, 지금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런 것은 이제 귀찮고, 과거의 아스라히 아름답게 여겨졌던 그 성전을 자기 손으로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것이다. (녹취자 - 인간이 추억하는 것이 아니고,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추억하라고 한 것 같은데요? 무너진 성전을 말입니다.)

왜 우리도 가끔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이 그립고 그 책걸상에 앉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에도 가보고, 그리운 친구도 만나고 싶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보면 1980년도의 먼지가 아니고, 2004년 현재 생산된 먼지가 거기에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데, 그러니 추억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 그것을 재탕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마나 허무한 짓인지 모르니 말이다. 옛날의 애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냥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배나온 아줌마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늘이 이슬을 그쳤고, 땅에는 한재가 임하여 모든 농산물에 재앙이 덮친 것은(1:11), 그들의 귀환이 ‘하나님의 집’을 영속하는 귀환이었음을 모르고, 그저 약속의 땅에서의 생존에 급급한 것에 대한 회개 촉구 차원에서이다. 비록 왕이 없다할지라도, 그 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성전마저 존재치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다윗언약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학 1:11)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 학개를 통해서 무너지는 성전을 !!

그러니 새로운 성전에 대한 과거 성전에 대한 추억의 성전은 무엇인고 하니, 그 추억의 성전에서는 자신의 잘남과 멋있음이 있었을 것인데, 즉 거기에는 자가 자신의 거룩함과 순수함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서 새로운 성전을 짓도록 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망가지고 비참해졌는가를 확인해줄 수 있는 성전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개가 짓는 그 성전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하는 성전이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바램대로 영구적으로 장구하게 이어지는 성전을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결국에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성전을 세우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니엘 9장 25절과 26절 말씀을 한번 보자.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단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 왜 다시 무너져야 할 성전을?

여기에 보면, 26절에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라고 하는데, 즉 7이레와 62이레가 지나서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루는데, 여기서 ‘거리’는 중심지역을 의미하고, ‘해자(垓字)’는 외곽지역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도시의 내외부가 완전히 복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62이레 후에 다시 부수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어졌다가 다시 부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스케줄이고, 인간들은 그 스케줄을 따라가야 하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대로 밀고 나가겠다는데 무슨 인간들이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것이다. 성도는 거기에 동원된 일종의 노역자인데,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동원된 노역자임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 성도는, 주의 이름에 동원된 노역자임을 감사해야 !!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양을 치는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두려워 말라.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라고 했을 때, 목자가 “에이, 오늘은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특혜를 받았으면, 지금 자기 수입이 어떻고 하는 것이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원이 전혀 달라지는데, 즉 영적인 차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차원에 들어가는 것이 어디 아무에게도 주어지는 혜택인가? 그야말로 로또복권 중에서도 로또인데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어라” 라고 하는 자체가 “나는 아직도 너희를 사랑한다” 라는 의미인데,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완벽히 하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끈을 잊지 않으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에 의롭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함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관계’가 의롭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스라엘은 왕은 여전히 하늘의 여호와뿐이시다. 성전이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계속적으로 알리는 기능을 위해서 재 건축되어야 한다.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언약성도 지속되어야 한다. 더러운 이스라엘을 이 약속의 땅으로 되돌려주신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이스라엘은 변함없는 품고 있어야 한다.

(학 2:11)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학 2: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 2: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학 2: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학 2:15)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러니 이렇게 추억의 성전인데, 즉 성전을 다시 지음으로 우리는 왜 이렇게 더러운 나라에 더러운 백성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통해서, 자신들의 어떠한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얄미운 하나님인데, “참 잘했어요. 이제 상을 줄게” 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이런 이런 잘못을 한 못난 족속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를 269페이지를 보자.

** 학개에서의 성전의 의미는, 다윗 언약에 담긴 거룩성 유지에 있었다. 이스라엘과 범 세계는 어느 한시라도 다윗언약의 심판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개판이라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어떠한가? 그 어떤 경우에라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성을 포기하지 않고, 초지일관 자기의 계획대로 계속해서 밀고 나가는, 그런 분이라는 말이다.

그만 지나가고 말았는데, 교재 269페이지 앞부분을 보자.

**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져서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로 추방시킨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더러운 나라로부터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약속의 땅에다 심으셨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모든 땅이 저주를 받아 열매를 맺지 못했던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기 위해서 초라한 추억의 성전이 재 건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안에서 하나님은 다른 영광을 준비하셨다. 다시 언약을 회복하고 진행시키는 그 취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스룹바벨 총독에게 부탁했다. 스룹바벨의 역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 언약의 일관성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래야 여전히 새 성전의 거룩성을 근거로 해서 세상 모든 나라와 만물에 대한 심판이 실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하나님의 계획이다.

◈ 거룩은, 곧 관계성 !!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즉 성전은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거룩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성전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거룩이 볼록(?) 튀어나온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즉 예수님이 거룩한 분이기에, 거룩한 예수님의 터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성도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행동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성도가 되게 하는 그 관계성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거룩한 예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성도가, 즉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떠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관계성으로 인해서 거룩하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스가랴의 새 성전 건축의 의의는 ‘기존 이스라엘 무너뜨리기’와 연관되어 있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언약 유지를 지속한다는 증거물이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세워졌던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언약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참된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옛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아니 된다.

◈ 참된 성전은, 거룩한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

그러니 스가랴에서는 성전이 없는데, 있어도 그것은 성전으로 간주하지 않고 말이다. 물론 참된 성전은 신약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하지만 현재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전혀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지자 스가랴가 나서서 “너희들은 망한다” 라고 외치는데, 그리고 덧붙여서 이야기하기를, “나중에 거룩한 백성이 있을 때 참된 성전이 세워지는데, 하지만 그렇게 세워지는 힘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망할 자는 망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은총의 관계도 절단되어야 한다. 목자도 사라져야 하고 양도 버림받아야 한다. 이런 일련의 조치를 통해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데, 값으로 치면 고작 은 30냥이다. 하나님을 미워해서 책정된 값이다.

(슥 11:8)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슥 11: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슥 11: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페하려 하였음이라
(슥 11: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
(슥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슥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슥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 아니, 십자가를 모르고 어떻게 스가랴서를?

물론 우리는 이미 가롯유다에 의해서 팔려서 가는 예수님의 입장을 그래도 알고 있으니,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이런 성경구절이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짐작이 되는데, 즉 스가랴서의 예언된 말씀이 말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이 스가랴서의 말씀을 본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도대체 이해가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13절과 14절에 나오는,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라고 하는 말씀이 말이다.

이러한 스가랴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의해서 성취가 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생각이고 동시에 사도들의 생각인데, 그러니 구약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구약성경의 해석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학자들의 약점인데, 물론 그들은 처음부터 약점 투성이지만 말이다. 즉 십자가부터 출발을 하려면 어차피 신약에서부터 봐야 하는데, 그들은 구약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보니, 이 스가랴서의 해석조차도 그들은 난감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의 신학자들이 이 스가랴 말씀을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느꼈겠는가? 분명히 문자 그대로 했을 것인데, 즉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라고 하면, “아니, 세 목자가 누구이지?” 라고 하고, 또한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라고 하면, “이 토기장이가 누구이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힘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바로 이러한 성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의의를 파기시키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성전을 하나님은 새로 지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이다. 70년 포로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어 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총독을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낸다.

◈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역할은?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시금 긍휼을 베풀어서, 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총독을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인가? 거룩이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하는데, 즉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표상으로서 말이다. 여호수아는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스룹바벨은 총독으로, 즉 왕으로서 말이다.

이러한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즉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미리 보여주는 의미에서 앞당겨서 하게 되는데, 이들이 거룩한 것은 바로 ‘피’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존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 위에 거룩한 성전이 세워지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사명이 있다.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특히 다윗 언약에 준해서 유다 지파 선택에 집착을 보이신다.

(슥 2:11)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슥 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슥 13: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슥 13: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 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

여기에 보면, 이렇게 스가랴서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 2장 12절에서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라고 하는 것은 기존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은 결국 인간의 혈육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들은 이미 한물 갔고, 여기서 말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의해서 뽑힘을 받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도 괜찮고 이방인들도 괜찮다는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뽑아내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기 약속성취에 있어서 새로운 예루살렘이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하나님은 왜 유독 유다지파를?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볼 점은 하나님께서는 이 유다지파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왜 그러한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 유다지파 중심으로 일을 하시는가? 특히 스가랴서에서는 다윗언약을 계속해서 고집하고 있는데, 그래서 다윗언약에 속한 유다지파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그 약속에 한정되어서, 그것만 고집하면서 계속해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 1장을 잠시 살펴보자.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여기 3절에 보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라고 되어 있는데, 그런데 이 ‘다윗의 혈통’ 이라는 말은 구약을 밑바탕에 깔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구약 전체를 제대로 관통하지 않으면 전혀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성경을 보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사도바울의 관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사도바울이 어쩌고저쩌고” 라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전혀 사도바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다윗언약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한국교회 -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끝 ??

그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으니, 그래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필요해서 인간을 만들었으니, 메시야가 오더라도 그 메시야는 곧 인간을 위한 메시야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전부인데,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냈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없는가? 전혀 언약이 없는데, 그래서 “왜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는 것이다. 즉 왜 유다지파이냐는 것이다. 제사장이 있는 레위지파는 왜 안 되고, 그리고 장자인 르우벤 지파는 왜 안 되느냐는 말이다. 즉 유다지파 말고 다른 지파들은 왜 안 되는지, 그들은 그것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는가?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니 생략하고, 아무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메시야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라고 얼버무린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주장은 그것밖에 없지만 말이다.

◈ 사도바울도 과연 그러한가?

하지만 사도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로마서 1장 3절에도 나오지만, 유다지파, 즉 다윗의 혈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머지 지파들은 철저하게 잘라내는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가지고 있는 배제성, 즉 배타성을 빈틈없이 수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다” 라고 하는 것이 비록 성경에 있어도, 그것은 성경말씀을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의 종교성에 부합하는 성경구절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다” 라고 해버리면 전혀 배타성이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 언약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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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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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