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강-YouTube강의(슬픔의 이유)20191203-이 근호 목사
297강-YouTube강의(슬픔의 이유)20191203-이 근호 목사
제297강, 제목은 ‘슬픔의 이유’. 사람의 정서는 아주 호들갑을 떨죠. 좋을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방금 울었는데 방금 또 웃고.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지금 장례식에 앉아 있는데 TV는 ‘웃으면 복이 와요’ 방영하고 있으니까 온 장례식장의 유족들이 깔깔깔 웃고. 제가 그거 목격했습니다, 현장에 있었으니까.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신 분이고 웃기는 것은 구봉서, 배삼룡 웃기는 것은 웃는 거고요.
인간 정서의 특징은 자기가 주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웃을 때는 웃을 수밖에 없고 슬플 때는 자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 자제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요. 슬픈데 뭘 자제를 하고 뭘 절제를 합니까? 슬픔은, 슬프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보다도 이런 인간의 정서가 더 강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해도 수 십년동안 신앙생활 제대로 해가지고 난 하나님에게 늘 감사한다고 우겨도 갑자기 돌발적으로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엉엉 대성통곡하고 울 일이 얼마나 많이 남은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는 세상을 초월하고 하늘나라 쳐다본다고 그렇게 장담하다가 갑자기 돈이 많이 들어온다든지 하면 돈 보따리 들고 좋아가지고 숨길 수가 없어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경우 생기잖아요. 우연히 길에서 로또복권 주웠는데 그게 20억짜리다 이러면 뭐 예수님 십자가보다도 돈이 더 좋아가지고 히죽히죽거리면서 갑자기 선한 사람되고. 갑자기 남한테 베풀고 싶고요,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사람되는 거는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의 정서를 통해서,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인간으로 다짐한다든지 결정짓는다는 것이 무의미한거다 이거에요. 그게 사실은 소용없는 거예요.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려야지 하지만 정신 바짝 차린다고 슬픈 일, 기쁜 일이 그렇게 평정스러운 마음으로 정돈되는 게 아니에요.
슬플 때는 그 슬픔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도에게도 세상살이에 슬프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대성통곡하는 경우가 여러 경우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신명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 보내놓고 모세가 너희들이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못들어간다고 할 때, 그들이 대성통곡하죠. 그러면 모세 말 안 듣고 우리끼리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시비 걸다가 오히려 본토인들에게 된통 패배를 해가지고 오도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죠.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광야에서 죽을 수도 없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라 하죠. 어떻게 인간으로서 행할 도리가 없을 때 그 때 그들은 슬퍼했습니다.
자, 슬픔의 이유가 뭐냐. 내 쪽에서 내가 스케쥴 짜거나 마음 먹은 모든 것이 좌절될 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내가 앞으로 더 살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그러한 어떤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때, 나의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릴 때, 이기고 싶은데 자기가 무너질 때 자기가 슬퍼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왜 내가, 내가 무너지는게 왜 슬프죠? 묻는 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와장창 무너지는데 그게 기쁜 일이 아니고 왜 슬픈 일이냐 하는 거예요. 이 물음이 무의미한게 아니에요.
창세기 21장에 보면 여기에 크게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하갈이 주인 사라한테 밉보여가지고 쫓겨나죠. 사라한테만 쫓겨나는 게 아니고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에게도 쫓겨납니다. 시키는 대로 애 낳아줬더니만 애와 더불어서 같이 쫓겨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의 모든 계획이 다 좌절되죠. 그 집안의 사람으로서 추방되는 거예요. 자기가 평생 마음먹고 내가 이 자리에서 미래까지 내가 살아보겠다 하는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하갈이 쫓겨나가지고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14절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 엄마는 본인이 죽는 것은 슬프지 않아요. 뭐가 슬프냐 하면 나보다 더 귀한, 내가 죽더라도 제발 너만큼은 살아달라고 했던 그 대상자, 자식이죠. 이 어미 잘못 만나서 자식까지 함께 죽을 때 엄마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슬픈 게 아니고 내 잘못으로, 내 탓으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죽을 때, 슬퍼서 방성대곡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하갈의 심정은 내가 죽더라도 자식만큼은 살려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 있죠. 그래서 하갈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존재해도 자기 존재는 돌아보지 않고 자식만은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는 어미의 본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떨어지고 다 떨어지니까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자기가 할 게 없잖아요. 그래서 슬픈 거예요.
자, 슬픔의 이유가 뭐냐? 내가 할 게 없을 때 슬퍼지는 거예요. 내가 할 게 없을 때. 이 말은 오늘날 성도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도의 슬픔은 뭐냐 하면 주님의 지시가 없을 때 슬퍼해야 돼요. 주님의 뜻과 지시가 끊어졌을 때 꼭 끈 떨어진 사람처럼 진짜 슬퍼하는 거예요. 집이 부자고 자식들이 잘 돼도 그것에 성도는 마음 두고 살지 않기 때문에 그게 성도의 존재 이유가 되지 않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자기를 다루어준다는 그러한 의식이 없을 때 성도는 슬퍼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하거든요. 그 신랑집에 신랑이 있을 때는 니가 슬퍼하지 마라, 너희들은. 혼인식에 신랑 있으면 됐지 뭐 더 필요합니까? 뭐 음식이 문젭니까? 주인공이 신랑이잖아요. 그러나 너희들이 신랑을 잃어버릴 때가 올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랑을 잃어버릴 때 너희들은 금식하고 울어 버려라. 너라는 존재는 신랑과 결부된 존재인 것을 니가 안다면. 신랑이 우선적이고 나는 신랑을 위해서 존재하는 신랑의 종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인정한다면.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웃어야 된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 잃어버릴 때 울고 다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는 그 때는 잃어버린 이상으로 보상을 받아서 크게 기뻐하겠죠. 잃었다가 얻었으니까. 그만큼 우리 성도의 마음은 어디에 뺏겨 있다? 몽땅 다 주님한테 빼앗기고 주님 하나만 바라보는, 아주 주님 때문에 혼이 나간, 주님만이 소중하고 나는 안 소중한 그 관계가 바로 성도의 모습인 겁니다.
때로는 슬퍼할 때 슬픔의 이유는 주님 때문에 슬퍼하고 따라서 주님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거뜬히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성도의 기쁨이어야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