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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요한복음 총정리(4)-요한복음 9장부터 (사이)191015a-이근호 목사
자, 첫째 시간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부터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는 성경 말씀에 집중하라고 제시한거죠. 성경 말씀에. 성경 말씀에 집중하고 싶어도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상황을 끌고 성경 말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냥 성경 말씀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지금 내가 처한 입장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바라보게 되거든요. 그 바라보는 방법은 그 시대를 이해하자 라든지 그 때 그 당시의 마음가짐을 생각하자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성경 말씀의 해석은 어디서 나와야 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에서 나와야 되거든요. 그럼 십자가 사건에서 뭔가 십자가가 저수지라면 저수지에 댐이 좀 터졌다고 봅시다.
그러면 거기서 물이 흘러오겠지요. 시냇물이 아니고 댐에 있던 원래의 물, 물이 아래로 흐른다 말이죠. 그러면 그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있고 그 죽음이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했기 때문에 이제 이 성경 말씀은 그 십자가의 완성의 의미를 담고 도로 지상에서 흘러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십자가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을 우리가 9장 같은 곳을 본다면 이미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은 네가 설쳐도 별 의미 없다는 거에요. 네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아무리 설쳐봐야 거기에는 어떤 구원에 대한 특효약이 특효 효력이 거기 없어요. 약 효력이 없어요. 우리 설치는 것은 약 효력이 없다고요. 우리가 조심히 사는 것도 효력이 없어요. 죽은 자로서 편입되어야 되겠죠. 이 말씀 속에.
그러면 이 성경 말씀 자체가 우리가 말씀을 지키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하면 도로 성경 말씀이 너는 왜 죽어야 되며 왜 죽은 자며 왜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홀로 성취해야 되는가를 그 이유를 도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 출발점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삼고 있는 우리의 입장과 계속해서 우리 입장에 대해서 삭감하는 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성경에 이거 해석자체가 근원적이다 또는 다른 말로 근본적이다. 또는 출발점, 뭐 다같은 뜻이라고 합시다. 근원적, 근본적, 출발점 이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집이 이명직 목사님 집이라고 칩시다. 이 집에 내가 들어오게 되면 "어! 목사님 우리 집에 들어왔네."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어딜 봐서 이 집이 목사님 집입니까?"
그 이런 질문 자체가 황당하지요? 딱 보면 모릅니까? 문패보고 딱 보면 몰라요. 요새는 문패 없지만 딱 보면 이해하겠지요. 왜 이 집이 그 다음에 들어가는 단어가 있지요. 내 집이다라고 할 수 있느냐 이거에요. '내'가 들어가요. 이게 내 집이다.
당신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할 때 이게 내 집이라는게 과연 이게 근원적인가 하는 거에요. 이게 출발점이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 내 집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내 집 없지요? 벌써 출발점이 성경적이 아니에요. 세상에 모든 것은 누구 것입니까? 주님 것이지 내 것은 없잖아요.
그러면 이미 성경 자체가 내 집이다라고 평소에 우리가 내 집이니까 당신은 손님으로 왔습니다라는 이 생활 태도 이 마음 자세부터 어떻게 하느냐? 더 근원적으로 더 원천적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말씀이 바로 성경 말씀이고 그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9장이 되는 겁니다.
뻔한 이건 누가 봐도 뻔하다고 하는데 그 뻔한 것을 더 내려가게 하는 거에요. 뻔하다고 여기는 그 출발점 자체를 문제 삼으시는 거에요. 네가 왜 건방지게 남의 집에 왔어. 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뭐냐? 이집은 내 집이고 너는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그 의식 자체가 이게 과연 옳은 것이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내 집이 아닌데 그 사람이 들어왔고 나는 내 집도 아닌 곳에 그 사람과 만났다라는 이런 생각을 왜 못하느냐 말이죠. 이런 생각을. 내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게 우리는 흔한 이야기잖아요. 과연 이게 성경 어느 대목에서 네 자식이라는 것이 어느 대목에서 나오느냐? 성경에는 내 자식이라는게 없어요.
성경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내 자식이라는 것부터 출발합시다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라는 것도 심지어 내 자식이라고 하면 내가 있어야 되잖아요. 내가 과연 있을까를 자문해야 돼요. 내가 과연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제자들이 소경된 자를 봤을 때 소경된 자가 하나님께서 소경된 자를 제자들 앞에 이렇게 내보낼 때에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떤 소경에 대해서 평을 하는데 그 평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평소에 제자들이 어떤 출발점을 가지고 어떤 근원점을 가지고 모든 일상을 살았는가가 다 들통나게 만드는 거에요.
소경 보고 하는 말이 저 소경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자기 조상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제자들 자체에서 질문을 할 자격이 권한이 본인한테 정당하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정당하게.
그러면 주님께서 여기서 답변을 할 때 그들의 답변을 할 때 그들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질문의 출발점 자체를 엘리베이터 태워가지고 지하 5층으로 더 꼴아박게 만들어요. 지하 5층으로. 너는 본래 네 자리가 아닌 곳에서부터 붕 떠서 지금 일방적으로 네가 설정한 그러한 위치에서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는 더 내려갈 필요가 있어.
그 질문 자체가 그 질문 자체에서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해도 너희들이 얻고자 하는 해답으로 너희의 질문한 그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어. 내가 하는 그 답변은 네가 질문한 자리마저 무너지게 만드는 거에요. 그게 원래 네 자리가 아니야. 왜 그래. 네 자리 아닌 거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질문의 오류에요. 질문의 오류는 이게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반성의 오류와 서로 통합니다. 사람이 반성을 한다는 것은 반성하기 전의 모습이 맘에 안 들어서 꼭 반성을 하고 싶은 거에요. 회개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싶어요.
그러면 반성하고 반성했다는 그 의식, 그 의식은 그 의식이 달라붙어야 될 그걸 이제 임신했을 때에 수정란이 착상이라는 말을 하죠. 그걸 착상할 수 있는 새로운 몸이 필요한 거에요. 새로운 몸이. 그 몸은 누구의 상상력에서 나왔어요?
기존의 내 몸의 반성하기 이전의 몸에서 상상해서 그런 인간을 상정하지요. 반성이 착상이 되지 않는 '나'가 이제는 반성하고 난 뒤에 반성이라는 장점이 달라붙어있는 새로운 자아를 염두해두면서 “나 회개합니다. 나 반성합니다.”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출발점은 그거는 자기가 조종한 거죠. 그래가지고 신앙생활 10년 20년 해도 무슨 소용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거에요. 뻔한 이거는 옳다고 여기는 뻔한 이야기 그 뻔한 게 누가 일방적으로 뻔하다고 이야기했는가.
나는 내 집이 있다. 내 집이 있으니까 이 집은 나의 것이다 하면 나는 집이 있고 집이 있음은 이게 곧 너의 집이 아니고 나의 집이다 함으로써 ‘나’라는 이것을 할 때 집과 ‘나’라는 것이 먼저 근원이 되고 집은 부수적으로 나한테 속하여있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나를 상정하는게 문제가 있다면 이 집은 내 집이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내 집은 영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본 적 있어요? 없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 9장에서 아주 난해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는 겁니다.
여기에 소경된 자 있지요. 소경된 자. 여기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죠. 제자를 보고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할 때는 이 소경된 자 이쪽에 하나의 물체라고 봅시다. 물체. 또는 사물 어려운 말로 하면 객체이지만 이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사물, 대상. 대상이 있고. 여기 소경이 볼 때는 이 제자들도 하나의 뭡니까? 대상이 되지요.
질문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일방적으로 평을 하면서 저 사람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어딜 주목하느냐 하면 의도적으로 소경된 자를 제자들 앞에 지나가게 함으로써 이러한 대상과 대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없는게 새롭게 발생되는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이에요. 간격입니다. 간격. 사이.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이’라는게 돼요. 사이 그 노래 강남스타일 싸이 말고. 둘 사이의 빈 공백에서 관계성이 등장하는거에요. 주님께서는 뭘 주목하느냐 하면 네가 오느냐 네가 오느냐가 아니라 둘 만남으로 없었던 새로은 사이, 새로운 관계를 주께서는 주목을 하는 겁니다. 새로운 사이에.
이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제가 어렵다고 미리 당부했습니다. 어렵게 갑니다. 이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의미가 나와요 의미가. 사람은 만나지 않으면 의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누굴 만나야 의미가 생겨요.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의미가 누구하고 만나는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이 둘 사이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두 가지 종류밖에 없어요. 저 사람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가? 연속성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둘 밖에 없으니까 하나는 뭐냐? 대립 또는 대치입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는가? 연속성이겠죠.
그러면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르지 이거는 반복성 또는 대립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이 신체, 신체를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걸 매질, 어떤 것을 흐르게 하는 매질 있지요. 소리가 흐르려고 하면 파동이 있어야 되고 공기가 매질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나의 그 중간 통과하게 하는 매질같은 것으로 신체가 있는 겁니다.
주님의 주목은 여기에 그들 사이에 있다고 보는 거에요. 인간의 주목은 뭐냐 하면 사이에 있지 않고 본인에게 있어요. 본인에게. 본인에게 있기 때문에 나는 저 사람과 사귈 것이냐? 연속성. 이제는 관계를 끊을 것인가? 대립성. 그렇게 되지요.
그렇다면 내가 저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의미가 각자 갖고 갈 거죠. 지금 여러번 이야기 합니다만은 주님께서는 각자 저 사람 만나고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보는게 아니고 진짜 의미는 뭐냐 하면 너희 둘을 마주치게 해서 너희들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이, 새로운 의미를 따로 뽑아내시려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 거에요. 두 사람을.
사람들은 사이에 주님께서 여기서 강조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뭐냐 하면 사이에 강조점이 있는게 아니고 나는 저 사람보고 내가 더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소경이 아니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 의롭다는 것을 알았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의미의 보유, 갖고 가는 거에요. ‘의미의 보유’. "야 나 저 사람 만나니까 나 신자 맞아. 나 저 사람 만나니까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지금 천국가고 있는게 맞아." 다시 사물인 신체에 오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신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간격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매질인데 인간은 매질으로 보지 않고 중간, 매질, 중간으로 보는게 아니고 오히려 내가 챙길 거 챙겼다고 우기는 거에요.
이게 인간이 악마의 앞잡이 되어가지고 선악과 챙기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선악지식을 나는 챙겼다고 보는 겁니다. 보유했다고 보는 겁니다. 나는 소유했다고 보는 거에요. 제자들은 지금 자부합니다. 주님과 우리가 한패라고 여기는 거에요.
한패라고 여기는데 주님께서 소경된 자를 지나가게 하니까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의 의견이 아마 주님 보시기에도 옳은 출발선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매질이 되어야 돼요. 중간 매질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야 될 우리가 하나의 대상처럼 최종 목적이 되고 마는 거에요.
인간이 어떤 목적이 있어버리면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기의 자기 자신이 목적으로 되는 그러한 줄을 세워요. 정렬을 해요. 배열을 한다니까요. 내가 이렇게 나답게 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들 다들 모여라가 돼요. 다들 모여라.
동창회 할 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10년 뒤 어디서 만나자 해서 나무 밑에다가 캡슐집어넣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만나냐 해가지고 엽기적 그녀하고 비슷한 거 해가지고 상수리 나무 밑에다 이렇게 캡슐 해가지고 10년 뒤에 어디서 만나자 해봐야 동창들 다 안 만납니다.
꼭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자들만 오던지 아니면 정수기 파는 보험 하는 애들만 와요. 다른 사람은 오지도 않아요. 온다고요. 그러면 60명중에서 모인사람이 10명이라면 연락해서 10년 뒤에 만나자하는 약속대로 왔다고 한다면 그 10명 중에 꼭 대장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일 잘 된 사람. 제일 잘 된 사람. 치과의사라든지 이런 거. 변호사 됐다든지 이런 사람. 특히 여자 같으면 좋은 집에 시집갔다든지. 그런 것. 꼭 잘 된 사람들만 이렇게 오면 이게 정렬이 돼요. 정렬이 된다고요. 왜? 빨대 꽂고 얻을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주 뭐 붕붕 띄워주지요. 한잔 받아라 하면서 하지요. 나 보험 하는데 하나 넣어줘 이런 식으로 하고 하겠지요. 인간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그 앞에 열중쉬어 차렷 줄을 세워버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패라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 소경된 자가 우리 선배에 합류할거냐 말거냐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본부니까 아지트니까. 자기가 중심이니까.
그러나 주님은 어디를 주목한다고요? 제자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 소경이 만남으로써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이 출발선을 더 바닥을 치게 만들어요. 더 내려가게 만들어요. 쉽게 말해서 어딜 봐서 너가 너냐 이 말입니다. 어딜 봐서.
네가 너라고 보고 인식하고 규정하고 있는 그 규정 그거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를 매질로 보지 않고 어떤 실체로 보기 때문에 실체는 뭘 갖는다? 목적을 가져요. 인간은 목적을 갖는 순간 모든 일어난 일을 내 중심의 목적에 부합되려고 적재적소에 전부 다 정렬을 해버린다고요.
이런 일은 나를 위해서, 저런 일도 나를 위해서, 이런 일도 나를 위해서, 나 천당가기, 나 구원받기 위해서 다 일어난 일로 간주해 버린다고요. 주님은 그 사이를 본다고요. 두 사람 만남 가운데서.
연속성을 갖는다든지 대립을 갖는다는 것은 두 물체가 두 인간이 만났을 때 둘 중에 하나 밖에 없어요. 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내 적으로 여길 것인가? 이 두개 밖에 없지요. 둘 다 엉터리에요. 둘 다. 둘 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내가 필요한 사람, 저 사람은 나의 원수, 두 번 다시 만날 필요도 없는 사람, 이것밖에 안된다고.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이거는 뭐냐? 엉터리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지만 모든 말씀은 저수지죠. 완성되어 있지요. 십자가지요.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물이 흐른다 했지요? 댐이 터지듯이.
물이 흘러버리면 요한복음 9장이고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인간은 이미 뭐가 된다? 인간은 죄인이 되는게 돼요. 그러나 지금 십자가 하기 전에 제자들의 모습은 자기가 "아이고 주님이여 제가 소경 되야 돼요." 라고 손들고 나서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쯧쯧쯧.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조상 죄 때문입니까? 쯧쯧쯧. 우리는 건전한데. 우리는 괜찮지요?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이들의 그렇게 생각하는 출발점을 낮추어서 어디에 합류시키냐 하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로 합류시킵니다. 합류시키는 그 전에 어디 나오느냐?
그들이 기피했던 소경의 출발점에 집어넣습니다. 소경 출발점에다가. 제자들아 너희들이 한번 소경 한번 되어 볼래? 바로 이 소경은 제자들 앞에 서기 전에 이 소경은 누구하고 섰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하고 서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소경을 붙들어서 제자들 앞에 보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보이기 이전에 예수님 앞에 소경, 여기서 예수님과 소경 사이에 무엇이 등장하겠습니까? 사이가 등장하지요 사이. 오늘 제목은 '사이'로 하면 간단한데.
왜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이렇게 거론시키느냐? 왜 소경을? 소경 자체가 아무 볼 품 없어요. 소경이 이런 소리 합니까? "예수님 감사해요. 이 소경된 이 몸은 내 몸이에요." 이렇게 합니까? 아니죠. "주님 좀 바꿔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눈을 뜬 제자들은 눈 뜨고 있는 제자들은 이 제자인 자기의 몸을 대단히 자기한테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어느 쪽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줍니까? 어느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