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1010b 베드로전서3장 8절(적체와 총체)-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91010b 베드로전서3장 8절(적체와 총체)-이 근호 목사
존재가 되면 그 존재를 존재가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걸 사수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존재가 되려면 사건으로 전환되어야 되죠. 그러면 복은 뭐냐? 복이란 존재를 뭐로 바꾸는 거예요? 사건으로. 그걸 이제 언약 사건.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하죠.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이죠.
이삭 언약 같은 경우에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식이 없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이 계시를 해서 자식이 나오죠. 그것도 쌍둥이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쌍둥이로 나온다면, 자식이 있고자 하는 이삭의 의도를 이삭의 자손이 박살내 버립니다. 쌍둥이를 언제 원했습니까? 하나를 원했지, 갑자기 1+1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는 거예요?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사건에 있음으로써 무엇을 공격하고 박살낸다? 내 존재가 자식이 있음으로써 가치가 있을 것이다는 그 의도를 미리 아시고 그 존재의 가치를 박살내고 사건이 덮쳐 버리는 겁니다.
그냥 사건하니까 어렵죠. 그러면 수학에서 하는 점을 봅시다. 위치는 있는데 크기는 없는 것. 이게 점이라는 겁니다. 왜 크기가 없어요? 여기 있는데. 그런데 상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수학이 어디부터 출발하는가? 억지부터 출발해요. 이게 공리이기 때문에. 점이라는 것은 위치는 있지만 크기는 없는 것. 그리고 수학에서 0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1,2,3,4 이것은 다 대응이 되지만 없는 것이 대응되는 게 없잖아요. 그러면 숫자가 없어야 되잖아요. 0이 없어야 되는데 0을 만들어놓고 없다는 거예요, 수학에서. 그래서 0이라는 것은 1,2,3,4와 나온 게 아니고 후대에 나타났어요. 인도에서 0이 나타났다. 0이라는 것은 1,2,3,4,5,6,7,8,9에서 또 10까지 올라가는데 0을 집어넣어가지고 9다음이라고 치자. 이렇게 해서 0이 만들어졌거든요.
이런 수학적 논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생각하고 사색하고 그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단절된 것을, 없는 것을 자꾸 만들어 내는 거예요. 점이라는 것도. 어떤 사람이 있다. 그걸 축소해 봅시다. 축소하면 작게 되겠죠. 더 축소해 봐요. 더 작게 되겠죠. 그러면 나중에 뭐가 됩니까? 하나의 점이 되죠. 그럼 이 쪽 사람들도 축소해보면 점이 되겠죠.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결국 점과 점과의 만남이고 점은 위치는 있지 크기는 없기 때문에, 어떤 용량이 없기 때문에 여기 나의 가치도 없어진 거예요. 있는 것은 뭐냐? 너와 나 사이에 길다란 관계성.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점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계시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없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강의를 처음부터 할까요? 피 뿌림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피 뿌리는 사람만 있으면 되죠? 그렇죠? 우리가 따로 있을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점 같은 존재만 되면 되는 거예요. 왜? 점은 자기 고유의 분량이 없기 때문에. 양이 없기 때문에 뭐만 보여줍니까?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된 그 고리만 보여주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점에 불과한 인간을 부풀려 놓는 거예요. 네 고유의 것을 가져야 돼. 인간은 점이기 때문에 선악을 알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선악을 알 필요가 없잖아요. 말씀이 있고 말씀으로 사는 점으로 충분한데,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게 말씀이잖아요. 그러면 말씀은 그냥 점으로써 보여주면 되는데 점이라는 것은 고유의 것이 없다 이 말이죠. 내 것이 없으니까 주어진 것만 도로 100% 반사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고유의 지식이 있고 내 고유의 안목이 있고 내 분량이 있다면, 들어온 것에다가 그대로 내 것 보태서 보내잖아요. 그러면 보내준 분이 그것은 인간 피조물로써 할, 본래의 일을 훼손하기 때문에 그 인간 받아주겠어요, 안받아주겠어요? 안받아주죠. 아브라함의 언약에 첫 번째 의가 나온다 했죠. 그러면 의에 적합한 사람은, 상대방은 뭐해야 됩니까? 의를 훼손하지 않을 조건이 갖춰져야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은 뭐에요? 제공될 자기만의 의가 없어야 돼요,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죠. 그게 죄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하나님의 의의 관점으로 볼 때에. 다윗은 신난 거예요. 다윗은 밧세바하고 간음해서 신났고 남편 죽여서 신이 났어. 물론 그것을 취미로 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것은 자기가 의도한 게 아니니까. 사건이니까.
세상 만사가, 저 인간 죽어라, 죽어라 해서 번개 맞아 죽어버리면 내가 죽으라 해서 죽은 겁니까, 내가 말한 것과 관계없이 주께서 죽이신 거예요? 어떤 사람이 옆집에 담배 피워서 저 담배 피는 인간 안죽나? 이렇게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니까 심장마비로 죽었대요. 그러면 내가 저주해서 죽은 거예요, 주께서 죽인 것입니까? 주께서 죽이신 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내가 저주한 것은 소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등 소용이 없어요. 그렇죠? 저 사람 복 받아라 복 받아라 했는데 부자 되었어요. 그러면 내가 복 받으라고 해서 부자 된 거예요, 아니면 주께서 부자되게 한 겁니까? 주께서 부자 되게 한 거잖아요. 내가 복 받으라고 해서 복이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세상에 자식 보고 저주받으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이름도 복동이, 복만이. 전부 다 ‘복’자를 붙여가지고 간절함이 그 안에 녹아져 있다 이 말이죠, 간절함이. 그러면 ‘복’자 들어간 복만이부터 복동이 전부 다 복 받았습니까? 부모의 저주를 유업으로 받았지. 저주를 유업으로 받은 거예요, 저주를.
아브라함의 언약이, 약속이 오지 않았다면 인간이 자기 것 지키고 그냥 밥 먹고 건강히 잘 살면 그게 인간의 복이다 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해서 거기에 이의를 걸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복이라고 친 동시에 그 전에 복 없이, 약속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졸지에 전부 다 복이 아니고 그 자체가 저주가 되는 거예요. 지금 이런 상황이에요.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면서 외친 거예요. 이 저주받을 인간들아. 누가 너희를 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더냐. 세례요한이 그런 이야기했죠?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참, 돌멩이가 구원을 받겠다. 이 돌멩이보다 못한 인간들아. 왜 그렇게 세례요한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까? 이게 총체적이기 때문에. 집체가 아니고. 나쁜 사람 모아서 나쁜 사람 하는 게 아니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합해서 다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복의 유업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의 관계성, 주께서 주신 약속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끝자락에 복이 온다, 끝자락에. 볼펜이 있으면 볼펜은 두껍지만 글씨 쓰는 이 끝은 점이죠. 점이 모이니까 선이 되잖아요. 그것처럼 아브라함은 이 끝에 있죠. 위에는 뭐가 있고? 위에는 하나님의 창세 전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아브라함 안에 집약된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육신은 어디서 왔다? 저주를 유업으로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뭐를 이긴다? 저주를 복이 이기는 겁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거예요. 대단한 복을 받은 거죠, 정말. 죄 밖에 없는데 거기서 뭐가 나왔다? 의가 나온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잖아요. 아브라함은 아기 없는데 그 아브라함의 씨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라요 (히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나오죠. 히브리서 11장 14-16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분명히 나온다고요. 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였다.
그냥 남들 보기에는 보통 사람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의 약속이 따로 움직이는 점 같은 존재에요. 이제 점과 존재, 본체, 맏아들,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댔잖아요. 유업을 주신 그 처음 맏이하고 아브라함하고 연결된 연결통이 믿음이란 말이에요, 관계가. 믿음이 있으니까 믿음 이만큼 갖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고 당신 등짝에 하늘나라와 이렇게 연결된 고무줄이 있느냐 묻는 거예요.
그 파이프를 통해서 하나님의 죽으심과 부활, 피 뿌림이 계속 여러분의 행동과 말씨를 통해서 흘러나오십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파이프 같은 기능으로 끝자락에 있는 모니터 같은 기능이라 이 말이죠. 모니터 아무리 해부해봐야 거기에 가수 안들어있고 그 안에 김완선 없고 그 안에 영화배우 안나와요. 모니터라고 하는 것은 단말기로, 방송국 따로 있고 모니터 따로 있고 거기에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잖아요. 유선이든 무선이든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이죠.
하늘나라와 연결되어 있는 게 성령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게 선지자 아닙니까? 이 땅에 마지막 선지자가 성도거든요. 성도는 뭐냐? 성도의 가치는 본인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난 못났는데 주님은 이렇게 잘났다. 그거 하면 되는데 그거 못합니까? 그게 잘 안돼요? 그게 그렇게 우사스러운 일이에요? 그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아니면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첫째 강의에 얘기했죠. “수고했다. 공 잘 던졌으니까 쉬라”고. 이미 우리는 승리투수가 된 겁니다. 매일 승리투수죠. 도대체 몇 승이에요? 1일만 해도 365번째 승리투수에요. 류현진이처럼 14승한 게 아니고 365승한 겁니다. 승리투수가 다른 게 아니고, 성도의 승리가 다른 게 아니고 나는 점이라는 겁니다, 나는 점! 위치로만 이야기할 뿐이지 내 고유의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 나는 못났다, 잘났다, 못났다. 이걸 따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내가 행한 성과가 아니라 주께서 나한테 불어넣어준 성과거든요. 오늘 강의 제목을 자꾸 ‘깔때기’로 하고 싶은 유혹을 자꾸 느끼는데. 아까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주의 유업’. 이것도 괜찮은데...깔때기 있고 여기 병이 있고 병을 여기다가 딱 부어버리면 콸콸콸콸 하면서 잘 들어가잖아요, 여기. 잘 들어간다고요. 우리는 단말기다, 모니터란 말이죠. 하나의 점 같은 존재. 내 고유의 분량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는 이렇게 착실했습니다. 이렇게 착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 이 말이죠.
죄라고 하는 것은 총체지, 집체가 아니거든요. 모아놓은 게 아니에요. 죄라는 것은 죄다 모아 놓은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죄에요, 우리 자체가. 죄에 무엇이 들어간다? 의가 들어간다. 나는 죄인데 내 속에 의 있다. 그러면 되잖아요. 그 의가 누군데? 주님인데, 아브라함 자손이고. 그 분이 있는 곳이 바로 약속의 땅, 천국이고.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의와 씨와 메시아와 약속의 땅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나한테 물어보면 안되죠. ‘당신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도 몰라요.’이럴 수밖에 없죠. 이것은 받은 사람만 아는 거죠. 받을 자만 받았기 때문에 고개 끄떡이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간 왜 그런 기쁨을 못 느꼈을까? 아, 나의 덩치가, 나의 가치가 완전히 골키퍼도 아니고 핸드볼하는 것처럼 다 막아놨어’ 다 막아 놔가지고 나 혼자 울고불고. 나 혼자 춤을 추고 나 혼자 밥을 먹고. 지 혼자 울고불고 평생을.
자식 망한 사람은 자식 붙들고 ‘니 내하고 같이 죽자’해가지고 지는 소화제 먹고. 니 이렇게 공부 못하면 나 죽을란다, 너하고. 엄마 다시는 안그럴게. 같이 울자. 흐흑...기도... 주여. 주님께서 이게 뭔...둘 다 쇼하고 있네. 이 코스프레, 뭐하고 있냐 이 말이죠. 도대체 뭘 증거하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애 공부 잘 시켰다 그거 증거할 거예요? 복의 유업을 증거합니다.
자, 진도 한 번 나가봅시다. 다시 베드로전서 들어가 봅시다. 3장 8절에,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나와 있죠. 여러분, 형제가 없습니다. 누굴 형제라고 해요? 아래층에 산다고 형제에요? 형제가 없어요, 형제가. 3층에 언니 살고 아래층에 동생살고, 형제입니까? 뭘 보고 형제에요? 같은 덩치끼리 형제 성립 안됩니다. 형제란 예수님의 형제를 말합니다. 이제 감 오죠? 아, 점과 점의 만남이구나. 자기 분량의 덩치를 가지고 형제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구나.
자기 분량을 점으로 바꾸기 위해서 다 내놓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 걸 내놔요, 강도맞은 사람에게. 자기 걸 내놓으면 자기 고유의 분량이 있어요, 없어요? 점점 더 점이 되지요. 더 필요하거든 달라고 하세요, 다 줄게. 이 모습이 누구 모습이냐 하면 예수님의 모습이잖아요.
예수님이 존재이면서도 돌아가실 때는 하나의 사건으로 돌아가셨어요, 사건으로. 어떤 강도가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이 사건 자체가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했다는 말이죠. 그 사건에서는 내가 강도냐 내가 도둑놈이냐 경찰이냐 묻지도 않아요. 다만 예수님과 저 죽으심과 나와 관련성이 있으면 내가 가는 그 곳이 바로 주와 관련성이 있으니까, 같은 패니까,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요. 같은 패밀리거든요.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주와 함께 있지요. 그러니까 낙원 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강도는 자기가 존재로 보는 거예요. 주님의 단말기로 보는 게 아니고 자기 존재로 보기 때문에 너란 존재가 나란 존재를 건져 내버리면 나중에 누가 영광 받겠어요? 나 예수한테 잘 보여 가지고 나 구원받았다고 자기 자랑 할 거다 이 말이죠. 오늘날 교회처럼. 그건 뭐 지옥가지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복이라는 것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뭉개버리는 거예요. 빈 깡통 밟으면 어떻게 돼요? 찌그러지죠? 우리가 찌그러져야 돼요. 주님은 군화가 되어 밟아버려야 돼요. 지난 수요일부터 왜그리 과격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밟아버려야 돼요. 찌그러지면 존재가 뭐가 된다? 점이 되는 거예요. 점이 되면 그것은 사건이 되는 거예요. 위치만 있을 뿐이고 내 분량의, 내가 이건 아끼고 싶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없는 거예요. 지키고 싶은 것도 박살내놨으니까.
‘아이고, 아까워라’ 하지 말고 내가 지킬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내 거 내가 지키면 나만 피곤해지죠. 아니 남자들이 담배를 왜 핍니까? 지킬 게 있기 때문에 담배 피우는 거예요. 아이고, 속 터져 속 터져. 담배 끊었는데 또 피워야 되겠다. 애들이 담배 피우는 건 어른 되고 싶어하는 거고. 그 어른 되서는 담배가 습관이 되어서 담배 계속 피우는 거예요. 자기 거 깨질 때, 미리 예상하면서 속상한 거. 깨지고 난 뒤에 담배 피우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치 손상 났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 거예요. 자기가 남한테 웃음거리 됐다고요.
그러나 없어진다는 말은 뭐도 없어져요? 선도 없어지고 악도 없어지고 웃음거리 될 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남이 나한테 지적하더라도 뭐 덩치가 있어야 지적하지, 점인데. 사건인데 뭘 지적해요? 없는 존재를 가지고 뭘 지적해요? 내가 자꾸 나의 가치가 아까워서, 가치를 위장하기 위해서 나의 역사를 동원시키니까, 갑자기 내가 덩치가 커지니까. 덩치가 커진다는 말은 남들이 공격할 수 있는 표적이 커졌다는 뜻이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민감하고 예민해버리면 그 사람 잘 사는 게 아니라 자살합니다. 아유,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면 난 못살아, 못살아. 난 욕얻어먹고는 못살아. 지가 자기를 자해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 있잖아요. 본인을 너무 크게 키워놨어. 남들이 나에게 화살을 쏘는데 표적지 크기가 이만해요(작은 원). 100m에서 한 번 쏘아 보라고 해요. 맞출 리가 없지요. 100m아니고 1m에서도 못 맞춰요, 화살로. 그런데 인간은 지 잘난 맛에 살다 보니까 자꾸 표적지를 이만하게 만들어놨어요(큰 원). 여기서 아무나 쏴도 다 맞아요. 이거는 멀쩡한데 이거 맞으니까 아프고.
자식이 10명이다. 9자식 잘 돼도 한 자식 아프니까 엄마는 고민에 빠지는 거예요. 가지가 많아. 가지 많을 때는 바람 잘 날 없다. 이쪽 가지가 아니면 이쪽 가지가 바람 부니까 ‘아이고, 너무 서늘해’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원래 가진 게 많은 재벌들은 고민도 많은 법이에요.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여기세요. 가진 게 없어가지고 천만다행입니다.
존재가 점으로 되게 되면 관계만 남죠. 그 관계가 복입니다. 복이 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원래 덩치, 덩어리가 있었는데 다윗처럼 자기 잘난 맛에 있었는데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아주 점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너는 너의 가치를 위함이 아니고 총체적으로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대표자로서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네가 밧세바를 보고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이 이스라엘이라는 죄인을 대표해서 인간은 누구든지 아름다움을 보고 거기에 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다윗 네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니까 대표해서 시범조로 보여준 거예요. 간음을 했고 시범조로 살인을 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보여준 겁니다. 왜? 다윗은 다윗언약으로서의 왕 위치에 있으니까. 오늘 제목 다시 수정합니다, ‘점’.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고 언약이 오게 되면 이 점을 더 확대시켜 나가게 되는 거예요. 복이 왔다는 것은 그 복이 옴으로써 그 주변에 없었던 죄가 새롭게 발생된다는 점입니다. 형제는 없어요. 형제는 없는데 내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순간 형제가 비로소 그 때 보입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의 앞에서, 아브라함 언약이니까 하나님의 의, 우리는 죄. 그 분 앞에서 우리는 죄밖에 없다는, 죄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동기로 나타난 사건으로서의 의. 의 앞에서 내가 죄인 것을 알 때 나만 죄를 아는 게 아니고 같이 다른 사람도 죄인임을 알 때 그 둘 사이에는 뭐가 성립됐습니까? 형제죠. 형제라 할 때는 반드시 복음이 나와야 되죠.
두 사람이 이렇게 있을 때 두 사람 전부다 시커먼 죄인 되었다는 말이죠, 십자가 앞에서. 그러면 이쪽이 이쪽을 사랑할 때는 그냥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못돼요. 왜?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다 죄가 되기 때문에, 사랑하면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몹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보고싶고 잠도 못잘 정도로 사랑할 때 주의해야 될 것은 그쪽이 나만큼,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쪽을 사랑하는 것이 감사하고 고맙다 할지라도 상대는 나에게 내가 아는 감사와 고마움만큼 전혀 고맙고 감사하지 않을 때는 이것은 아직까지 사랑으로 주께서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자칫하면 데이트폭력 나올 수 있어요. 내가 너 사랑해서 모든 걸 줬는데 너는 나한테 뭘 해줬는데? 이렇게 된단 말이죠.
어떤 사람이 저를 보고 목사님은 페미니즘 같다고 하거든요. 자꾸 여자 편만 들고 남자 편 안들고 여자 편든다는데. 지난 오후 설교 때 그게 깨졌죠. 빚 갚아달라고 결혼해달라고 하는, 세상에 여자가 그렇게 악할 수 없다. 남자의 순정을 돈으로 바꾸려하는 여자들. 그 때부터 여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여자가 남자를 이용할 때 지 빚 갚기 위해서 이용하는구나. 아 이거 독한 여자들... 형제가 아니죠, 핑계대면서. 교회에서 주의하세요. 돈관계 성립될 수 있습니다. 돈 있는데 무슨 형제겠어요? 자기 가치를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한 거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감사하고 고마운만큼 상대방이 감사하고 고맙지 않을 때는 이것은 주께서 허락하지 않는 관계에요. 그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주님 앞에서 내가 감사하고 고맙다 한다면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나서면 안되죠. 그러면 내가 먼저 있고 주님은 내 짝사랑을 키우기 위해서 완성하시는, 나보다 후행조치가 되는 거예요. 선행조치가 있고 후행조치가 있거든요. 첫 번째 행동이 있고 두 번째 행동이 있는데 나중 것이 앞에 것을 지키기 위해서 동원된 셈이 되니까 내가 우선이고 하나님은 내 소원 들어주는 것밖에 안돼요. 내 사랑을 만족시켜주시옵소서, 주여. 소원들어달라고 하면 이건 주님을 이용한 것밖에 안돼요. 이건 바알종교에요.
얼마든지 둘이, ‘사랑합니다’하면 예의상 ‘사랑합니다’할 수 있어요. ‘사랑합니다’해서 사랑이 아니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걸 봐야 돼요.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요. 고마워하고 감사하게 되면 성령의 일이고 억지로 하게 되면 악령의 일이고. 고맙고 감사한다는 말은 그 사람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어야 되지 ‘왜 내 사랑 안받아줘?’ 이렇게 되면 이게 뭐에요? 거래하자는 이야기밖에 안되잖아요.
남편이 아내보고 ‘난 당신을 사랑해’ 그 말을 뭐라고 이해한다고 했게요? ‘난 당신 앞에 있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앞에 서면 난 왜이리 작아지는지. 등 뒤에 있으면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러면 작아지면 계속 쭈그려있으란 말이죠. 깡통 되어 있으란 말이죠. 그런데 어느새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왜 사랑안하나?’ 이건 뭐냐? 너 요새 많이 컸네. 갑자기 사랑할 때는 작아지다가 자꾸 뭔가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저쪽에서 사랑한다고 하겠지, 뭔가 지가 바둑두는 것도 아니고 한 수놓으면 저쪽에서 한 수 두고. 지금 어떤 전략적인 시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백날 사랑한다 신호를 보내도 꿈쩍도 안해. 그런데 갑자기 화가 막 치밀면서... 데이트 폭력이죠. ‘니는 왜 나 사랑 안하는데?’ 돈 준 거, 시계 사준 거, 가방 사준 거 다 뺏어버리고. ‘남자가 쫀쫀하기는. 준 걸 뺏나?’ 이러면 ‘그래, 나 남자아니다. 치사한 건 치사한 거고 돈은 돈이다. 돌려줘.’ 못주겠다고 하면 패버리고. 쭈그려졌으면 계속 쭈그려져야죠.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과 만나 행복하다면 나도 그걸 감사하겠어.’ 이렇게 되야 될거 아닙니까? 나 놔두고 다른 남자한테 가면 죽여버린다.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이게?
사랑의 뒷면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의 뒷면은 증오에요, 증오. 이 말은 증오인데 사실은 사랑이라고 티를 내는 거예요. 위장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사랑은 증오에서 나왔습니다. 왜? 인간은 죄의 총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남자는 그 여자를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요. 너 내 밑에서 불행한 삶을, 비극적 삶을 살아보라고. 뭐 이거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 못해준다’ 이런 거요. ‘니 행복한 꼴 나 못보겠다.’ 뭐 태양의 계절인가. 갑자기 드라마 얘기 또. 아침 드라마 7시50분. KBS2.
다시 정리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은, 고마움과 감사는 성령의 일입니다. 따라서 형제에게 나는 뭘 요구할 수 있느냐. 요구할 수 없어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은 주님이 우리에게 준 고마움과 감사를 이렇게 나눌 수 있는 형제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죠. 여기 형제라는 것도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형제가 발생된 거고. 그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다는 말은 뭐냐? 내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며 내가 형제를 사랑하든 뭘 해도 그 대가를 받을 만큼 나는 그렇게 내 가치를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게 뭐라고요? 이 세상에 없는 거죠. 없는데 복이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되었다면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게. 사랑받는 게 복이 아니고 사랑하는 게 복이 되죠. 내가 잘되는 것이 복이 아니고 상대방이 잘되는 것이 나한테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게 복이에요. 이것은 자기부인이 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베드로전서 3장 10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줄줄 많이 나오죠?
이걸 집체로 보자고 했습니까, 총체로 보자고 했습니까? 이것은 집체로 보지 말고 총체로 봐야 되죠. 그러면 이런 사랑을 하는 것도 어떨 때는 사랑하고 어떨 때는 사랑 안하고 집체적인 사랑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자기부인이 될 경우에는 이게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오는 거예요. 한 쪽면이 사랑스러운 게 아니고 춘향전에 나온 말대로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아장아장 걸어라’ 이렇게 하거든요.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 코푸는 것도 이뻐. 기침하는 것도, 하품하는 것도 이쁘기 짝이 없어요. 밥을 허겁지겁 먹어도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 코 후벼도 그렇게 이뻐. 발톱만 파도 이뻐. 한 번 이쁘니까 모든 게 이뻐요. 손자 갓 태어나가지고 ‘똥싸는 것 봐. 이 얼마나 이뻐’ 하거든요.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그렇게 해봐요. 시아버지 요양하면서 똥싸는 게 그렇게 이쁜가요? 아니죠. 내 자식이니까. 내가 얻어온 자식 아니잖아요. 내가 죽을 뻔해서 낳은 자식 아닙니까? 그 자식이 내가 죽을 뻔해서 낳았다면 ‘자식을 살려, 내가 살려’ 하면 쉽게 금방 나와요. 자식 살리고 어미 나는 죽겠다. 이게 자기부인이잖아요. 나는 없어도 되고 너는 살아야 돼.
예수님의 마음이 이 어머니의 마음이에요. 나 죽을 테니까 너 살아라. 이 죽을 인간아. 이 지옥갈 인간아. 니 천국가고 나 저주 받을께. 그게 주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로마서 9장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우리 백성이 구원받는다면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걸 용납하겠다.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철저하게 사도바울은 단말기에요. 본인이 자기 가치를 발산하지 않습니다. 성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집체적이 아니고, 몸의 컨디션 괜찮아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성령께서 임하게 되면 인간은 구원받은 것 자체가 감사하기 때문에 그 감사가 주체할 수 없이 폭발하면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터져 나온다고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안하거든 기다리세요. 왜냐하면 ‘사랑한다, 감사한다’ 이것이 인력으로 윽박지른다고 나올 일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욕심도 같이 따라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욕심도. 그 말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해야 될텐데 성질이 급해가지고 내가 사랑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니까 나는 내 사랑에 대해서 그만한 가치를 내 쪽으로 소환시키고 싶은 거예요. 내가 손해 보는 장사 안하고 싶은 거예요. 그만큼 내가 저 생각하고 밤새도록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내용은 밋밋해. 자꾸 밀어내는 것 같아. 나하고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인간적으로 억압한다고 해서, 강요한다고 해서 ‘그래, 예의상 만나줄게’ 이건 되지만 그게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진심과 동일한 레벨의 진심입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인간은 평생을 자기가 내뱉은 자기감정과 자기행동에 스스로 지금 올무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주님이 허락하지도 않고 자기 가치, 자기 잘남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가 쇠사슬을 만들어가지고 자기 자신을 꽁꽁 묶어가지고 필히 이렇게 되어야 나는 만족하겠다는 식으로 억지 일변도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아이고, 불쌍한 존재...이게 인간 아닙니까? 불쌍한 존재에요, 인간은. 하나의 점이 되면 되는데 점이 되는 게 아니고 자꾸 존재로서 자기 가치를 자꾸 유지하려고, 그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시편 34편 한번 봅시다. 방금 읽었던 베드로전서의 내용이 시편 34편의 완성이라고 베드로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다 인용한 거거든요. 그러면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시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라는 그러한 모델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겠죠. 왜냐하면 베드로가 시편34편을 인용했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시편 34편 13절부터 나오죠.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똑같죠? 그대로 인용했으니까, 그쵸? 베드로전서 3장에서 똑같이 인용했죠?
그러면 사도가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원리에 의해서 해석했는가를 찾아봐야겠죠. 시편 34편 8절에 봅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뿐 아니라 모든 성경해석은 나한테 착한 사람되라고 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증거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예요.
미국 우주정거장, NASA죠, 휴스턴 본부에서 커다란 덩치가 우주로 가잖아요. 이 덩치가 그대로 궤도에 올라갑니까? 무거워서 안되죠. 가면서 옷을 벗듯이 뭔가 한꺼풀씩 툭툭 떨어지죠. 마지막 올라가는 것은 캡슐만 올라가고 밑에 있는 것은 새턴이라고 하거든요. 로켓이라 해서 캡슐이 올라가도록 밑에 화력을 충전하고 1단, 2단해서 추진력을 발동시키는 그러한 기관들이 밑에 있고 마지막에는 그 궤도에 중력과 원심력과 구심력이 평행을 이루는 그 지점에서 뱅뱅 돌도록 한다 이 말이죠.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구약에 하나님께서 무엇과 동행하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동행한단 말이죠.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새턴 로켓 같은 기능이에요. 이스라엘이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올려놓는 사람이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주니까 그 언약의 내용은 뭐냐? 메시아에 관한 겁니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주님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택한 백성’이라고 규정을 해놔요. 교복을 입혀놓게 되면 얼른 보면 다 같은 학생이지만 같은 학교 학생이라고 지문이 똑같고 얼굴이 똑같습니까? 다 다르죠. 다 다른데 교복 입혀놓으니까 똑같은 학교라고 한 그룹이 되잖아요. 이스라엘이라고 이스라엘과 하나님하고 동행하니까 하나님도 이스라엘 되고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이고 똑같아 보이죠.
그런데 갈수록 이스라엘에서 분리가 일어나죠. 분리가 일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주게 되면 언약하나 줄 때마다 툭툭 떨어져 나가요. 뭐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했다는 그러한 것을 지적하면서 뚝뚝 떨어져 나가요. 이거 자세히 들으시려면 겨울 수련회 참석해야 돼요. 에스더할 거에요. 뚝뚝 떨어져 나간다고요. 나가면서 뭐가 나와요? 언약을 듬뿍 담은 자들이 등장하죠. 그들이 누구냐 하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특징을 가만 보세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지자가 등장할 때 이스라엘 자백성에게 환영을 받아요, 밉상을 받습니까? 밉상 받아야 고난을 받잖아요. 그러니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미움 받아요. 계속 캡슐이 새턴 로켓한테 미움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는 본인 뜻이 아니고 천상회의를 보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천상회의 그런 게 있는 줄 몰라요. 무슨 이야기인지를 몰라요.
미가야 선지자가 몇 명과 붙었습니까? 미가야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참석했고 나머지는 400명이죠 (역대하 18장). 그 많은 사람이 전부다 ‘왕이여, 승리합니다’ 했지요. 그런데 단 한사람, 미가야 선지자가 한 말이 ‘이번 전쟁은 왕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죽일 때 그냥 죽이지 않고 선지자들을 동원시켜서 허황된 꿈에 휘말려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는 누구를 대표해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정신적, 종교적 사상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선지자 집단이지요. 옛날에 선지자들이 있어줘야 백성들에게 말씀 전한다고 일부러 선지자 학교 만들어서 양산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진짜 그 많은 목사들 중에서 천상회의에 초청받은 사람은 누구밖에 없었습니까?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의 추가적인 계획서를 아는 사람은 미가야밖에 없어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냐? 천상회의 말고 그 나라 백성들한테 좋은 소리해서, 복이야기 해가지고 돈이나 빼먹을려고 과거에 출애굽이나 율법 들먹여가면서 지금 현재 주께서 어떻게 일하는가는 모르고 써먹을대로 다 써먹어진 한 물간 어떤 복음 같은 거 있잖아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의 집합체,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나 선지자니까 돈 내놓으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 누구를 미워한단 말입니까?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는 거예요. 왜 미워하느냐 하면 그들은 아는 지식으로 선지자 생활을 하는데, 좀 유리하게 하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의 취지가 뭐냐 하면 추가적인 정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살아있죠. 캡슐은 마지막 때 신약까지 올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 과정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주께서 떨어질 것을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떨어지는데 장차 올 정보를 천상회의를 통해서 미리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 당시에 미가야 선지자거든요. 미가야 선지자를 다른 선지자가 좋아하냐 미워하냐 그걸 제가 물은 겁니다. 좋아합니까, 미워합니까? 미워하죠. 미워하니까 그들은 그대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미워하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 전하면 좋아해요, 미워해요? 미워하니까 그들은 지옥불 들어가는 거예요. 지옥불 들어가기 위해서, 저주의 유업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 부활로 끝났다. 피 뿌림이 우선이지 내 구원받는 게 우선이 아니라는 소리를 해야 된다니까요. 우리는 피 뿌림을 위해서 구원 안받으려고 발버둥쳐도, 내빼도 안돼요. 피 뿌림이 너를 지정했으면 우리는 지구 끝까지 따라와서 피 뿌림으로 입을 거예요. 구원 받을 거예요. 방금 이야기했던 이 사실을 전하는 거예요.
피 뿌림이기 때문에 내가 뭘 착했느냐 악했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피 뿌림 안에서 나는 작아지는 것. 작아지는 게 뭐냐? 그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고 혀를 악에서 금하고 입술을 악에서 떠나고 선에서 거하고 이 모든 것이 뭐냐? 자기부인이 된 상태가 되어야 이게 가능하다. 왜냐면 내가 부인되어야 내 가치가 없잖아요. 내 가치가 없으면 주님 십자가 앞에서 골키퍼 노릇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조그만 바퀴벌레가 이렇게 해봐야 가리워집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깡통인데. 훤하게 다 보이잖아요, 십자가가.
그런데 성령을 안받은 사람은 자기가치를 위해서 예수가 있고 삼위일체가 있는 거예요. 항상 최종 가치는 자기 가치가 훌륭하다고 두니까 이들은 아무리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고 형제를 사랑하자 백날 해도 최종가치가 어디에 모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자기를 높이는데 거기다가 다 모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피 뿌림의 선택은 애초부터 날라가 버린거죠.
그리고 자기가치가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너 사랑했잖아, 악을 떠나서 선을 행했잖아. 왜 너는 나한테 선을 안 행하는데?’ 또 반대급부를 원하고. 하나님한테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시키는 대로 의인을 향하고 선을 행하고 거짓말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복을 달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여’ 하고 막 주님 앞에서 땡깡 부리고. 새벽 제단을 친다 이 말이죠. 새벽잠에서 깨서 이렇게 왔는데, 새벽기도 40일했는데 왜 내가 원하는 애 성적은 안오르고 복 안줍니까? 왜 부도가 납니까? 하고 때려 치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땡깡을 부리는 거죠. 주님께서 ‘니 다이어트하려고 일찍 나왔지, 뭐 나 좋으라고 일찍 나왔나? 아침운동 겸사겸사해서 나왔잖아. 아침운동 하니까 아침 밥맛 돌라고 니 나왔잖아. 그리고 니 가치, 자식 공부 잘하고 뭐 잘된다고? 건강하다고? 그래서 그게 누구 가치인데?’
형제라 하는 것은 감사함이 나와야 되는데, 감사함이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감사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더 내 가치가 땅땅해지고 점점 다치기 싫어하겠죠. 주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겠죠. 내가 돈을 얼마주고 딴 장로인데.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목사되기 위해서 얼마나 했는데, 내가 교인 이만큼 모으기 위해서, 내가 이 예배당 짓기 위해서 얼마나 새벽제단 기도했는데. 이게 뭐에요? 이게 바로 지 자존심 아닙니까? 그게 무슨 피 뿌림이에요? 피는 옆으로 다 샜는데. 없어요. 피가 내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애가 아프다. 그 아픈 거. 우연 아닙니다. 다 이 세상에는 필요 없는 일 없고 소용없는 일 없고 다 필요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성도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이 세상이 지옥이고 악하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다윗처럼. 다윗이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자기가 잘났다 합니까? 아니죠. 나도 그 중에 한통속, 같은 통속이었다. 그걸 안다는 것은 다윗이 다윗을 존재에서 보는 게 아니고, 존재에서 나와서 다른 눈, 다른 눈이 다윗을 비춰보는 사실을, 다윗은 이제 그 사실을 관계에 의해서 알게 된 거예요. ‘다른 눈이 볼 때 나는 이렇게 보인다. 나는 날 때부터 총체적으로 죄인이었다.’ 라고 주님의 안목을 자기가 눈치 챈 거예요. 그게 복 아닙니까?
내가 나를 보고 나를 정당화하는 거 말고 주님 보시기에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걸 아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면 그 다음에 나올 게 뭡니까? 감사와 고마움만 나오는 거예요. 착하게 살아야지. 이게 뭐에요? 이건 감사와 고마움 아니에요. 자기가치 단도리 하는 거예요, 챙기는 겁니다. 나쁜 짓하면 회개 해야지. 이거 뭐에요? 자기 챙기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모든 게 감사가 나오고 복음이 안나오면 어떤 착함도 다 악한 일이 되는 거예요. 마귀 일이 되요, 어떤 착함도. 그리고 어떤 악해 보이는 것도 감사가 나오고 고마움이 나오고, 자기변명이 아니고 이것은 주께서 일으킨 사건으로 인식되고 나는 그 사건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자체가 복음 증거에요, 그 자체가.
만약에 조국이라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알았다. 그런데 법무부장관 못내어 놓는다. 그러면 그 자체가 선한 일이죠. 난 나오고 싶어도 못나가. 왜? 우리 주님이 끝까지 박혀 있어가지고 돌 맞아 죽으라고 시켜서. 그러면 주의 일이죠. 그러나 그 사람이 복음을 알 리가 없지요. 집에 제사 드리는데 무슨 복음을 알아요. 복음과 관계없죠. 관계없으면 누구 가치입니까? 본인의 가치죠. 욕하지 마세요. 내가 만일 권력자, 법무부장관이었으면 데모한다고 물러나겠어요, 주의 뜻인데? 내 아내는 잡혀가도, 내 사촌동생, 오촌조카는 가도 나는 안 물러난다. 이럴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신자가 아니고 내가 이럴 정도로 나는 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법무부장관 되면서 그걸 보여줬다면 그 위치거든요. 그 위치가 나의 죄를 알려주고 주님의 의를 보여주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자리가 법무부장관이고 조국의 자리에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있는 자리가 내 죄를 폭로시키고 그래서 내 죄를 더불어서 아까 이야기한 생명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복의 유업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통해서 이게 전달되는 거예요.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감사와 고마움밖에 안나오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그대로 내비쳐 보이는 성도의 모습이니까. 우리는 말씀이 죄를 통해서 말씀이 드디어 구현되는 운반체로서 우리 역할을 말씀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이 우선이고 십자가 피 뿌림이 우선이고 우리는 나중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가치보다 우선되는 그 가치가 있었음을 왜 진작 몰랐습니까? 피 뿌림을 위해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