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191004
20191004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떡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4장 1절부터 9절까지 하겠습니다. 1절부터 보게 되면 제단 중에서도 성소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성소구조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약간 큰 텐트라고 보면 됩니다. 동쪽으로 입구가 나 있는 큰 텐트.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가서 찍은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지요. 우리교회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동쪽에 문이 나있고 제단이 있고 물두멍이라 해서 손 씻는 데 있고. 성소 입구에서 삼분의 이 지점에 지성소 입구엔 커튼이 쳐져 있고요. 지금 레위기 24장은 성소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체 입구가 동쪽이라면 성소 북쪽에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 떡이 한쪽에 여섯 개씩 두 줄로 모두 열두 개 떡이 있고, 안이 어둡기 때문에 남쪽에 조명시설을 해놨어요. 중앙 가지가 있고 양 옆으로 세 개씩 총 일곱 개의 등잔을 준비하고, 레위기 24장은 등잔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감람유, 기름이죠. 기름 이야기부터 나와 있어요.
지금 레위기 24절 1절에서 9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이야기할 때 유일하게 생물의 가공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떡입니다. 나머지는 생물이 아니지요. 곡물에 인간의 손을 가해서 만든 것이 여기 열두 개의 떡이 있습니다. 이 떡은 칠일마다 교체가 돼요. 이 떡은 누가 먹게 되느냐 하면, 곰팡이 폈다고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들이 먹게 돼있다. 그런 식으로 레위기 24장에 돼있습니다.
오늘 강의 초점은 바로 떡에 관한 문제에요. 논리적으로 길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떡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어디서 근거 되느냐 하면, 여기 떡의 개수가 근거가 되겠지요. 떡이 몇 개지요? 열두 개. 열둘 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떡이라는 개념은, 이걸 누가 먹게 돼있어요? 거룩한 인물의 양식으로 소비가 된단 말이죠.
아론 제사장이 거룩한 존재니까 거룩한 대변자로 이 땅에 나타났으니까 이 떡은 결국 하나님의 음식과 하나님이 잡수시는 음식물(땟거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뭘 먹어야 살듯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계속 산다는 것은 땅에서 계속 공급하는 게 있어야 되겠지요. 그 떡을 계속 하나님이 잡수심으로써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이라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계속 지속시켜 나가겠다는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레위기 24장 당시에 그냥 떡이에요. 곡물을 가공한 떡입니다. 송편 정도는 아니겠지만 호떡도 아니지요. 그냥 떡이지요. 이 떡이 곡물의 가공물이 성소 안에서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특별히 제사장의 용도로 추가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떡의 떡 됨은 성분과 관계없이 어디에 놓였는가? 위치와 관련돼있습니다.
이 떡이 어디에 놓여있기에 하나님이 의미 있게 수용하느냐는 겁니다. 떡 자체가 잘 만들었다, 맛있다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모양이 둥글다, 네모다, 관계없습니다. 이게 어디에 있는 떡이냐? 이 떡이 하나님의 성소 탁자 위에 놓인 떡이에요. 성소라는 거룩한 곳. 이게 왜 거룩하냐 하면, 일반인들이 못 들어가니까 거룩한 곳이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거룩한 거예요.
거룩한 장소에 놓인 떡이니까 이 떡이 성분상 바깥에 나가면 일반인도 먹을 수 있는 떡이에요. 하지만 위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다른 사람들, 비 거룩한 자가 먹을 수 없는 떡으로써 제사장,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잡수시는 떡으로써 규정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드리는 이 떡이 성소라는 위치가 그렇게 떡의 모든 본질 가치를 둔다면, 만약에 성소가 확장된다면 우주까지 성소가 팽창되고 확장된다면 덩달아 뭐도 확장되느냐 하면, 떡이라는 것이 점차 뭐로 바뀌느냐 하면, 떡이 인물 또는 사람들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떡은 그냥 곡물 찐 거죠. 사람일 수 없어요. 떡이 왜 사람입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6장 48절에 가면 이 떡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인물로 바뀌어요(“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 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뀝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나와 있고 여러분들의 너무나 잘 아는 기존 교회에서 일 년에 두 차례씩 하는 정기적 하는 성만찬이 있어요. 이것은 내 떡이요 내 살이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성소의 확장입니다. 성소의 확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거죠. 성소 안에 있는 떡과 성소 바깥의 일반인들이 명절에 먹는 떡과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떡으로 보지 마라. 이는 하나님이 지정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 장소에서는 모든 의미가 거룩한 의미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착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 마시고요 우리가 어디 안에서 살아가는지 봐야 돼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습니다. 기도 제목으로써 인간은 선행으로 구원을 바꿔서는 안 된다. 현찰 주고 상품 얻듯이 선행 주고 구원을 받아내는 그런 방법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장소가 날아가 버려요. 나 있는 장소가 괜찮은 장소라고 스스로 자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장소는 뭐냐?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더러운 장소에요. 장소가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니까. 거룩한 장소가 아닌 데서 아무리 착하게 바르게 살아도 그 인간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장소로부터 어떤 혜택을 입지 못하면 그 인간은 거룩한 떡이 될 수 없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떡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그럼 그 장소가 왜 이스라엘 내에 생겼습니까, 라고 질문을 할 만 한데 원래 그 장소는 어떤 장소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이렇게 보면 쉬워요. 성소, 크게 보면 성막이라 할 수 있는데 성소, 성막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없는 장소에요. 없는 장소가 이미 기존에 있는 장소, 인간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없는 장소가 침범하고 이게 이깁니다. 승리하죠.
장소 싸움에서 기존에 없는 장소가 새로 생기면 그 장소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없는 장소가 있는 장소에 파고 들어왔다는 말은, 기존에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 틈바구니에서 분명히 아담의 자손에서는 이런 인간이 태어날 리가 없어, 라고 하는데 이게 태어난다고요. 그런 특수한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난다고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모세가 성소의 모든 모형이나 성소의 모든 규격이나 성소의 모든 설계도를 지상에서 인간들과 협의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고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애굽에서 경험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괜찮은 곳이라고 여기시겠지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계실만한 장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된 장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만들어져야 돼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대리석 깔고 파이프오르간 설치하고 성가대석 웅장하게 만들고 고딕양식으로, 서양 중세 13~15세기를 대성당의 시대라 하잖아요(뮤지컬 의 대표곡, 대성당의 시대). 대성당의 시대, 절대군주에서 자금이 들어오니까 삼포제로 인하여 잉여 생산물이 나오고 잉여 생산물들이 국가재산으로 모이니까 백성들을 하나의 종교,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해서 저 천국을 내다보는 첨탑의 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게 고딕이에요. 로마네스크가 아니고 고딕이라고요.
건축양식이 바뀌면서 권력구조도 병행해서 표상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성당 짓는데 130년 걸리고 이래요. 유럽에서 제일 높은 성당은 제가 알기론 독일의 퀄른대성당이에요. 가보니까 아직도 수리하고 있어요. 맨날 청소해요, 맨날. 지금은 대단한 관광수입이죠. 인간의 모든 기술과 모든 지혜가 거기에 다 집약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성전이라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왜?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잖아요. 그런데 그 성전을 주께서 인정을 안 했습니다. 이 땅의 성전은 아예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성전의 파괴라고 봅니다. 성전을 폭탄장착해서 파괴되는 걸 인정 안 하고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파괴돼야 돼요.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이 성전은 복 받은 겁니다. 왜? 파괴된 그 폐허에 비로소 성전이 되기 때문에. 왜 이런 원리가 있느냐 하면, 주님 자신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성전이 있고 더 어렵게 말해서 두 종류의 시간의 있습니다. 하나의 시간은 멈춰진 시간이고 또 하나는 불확실성 속으로 끌려가는 시간이 있어요.
인간들은 그 어떤 시간이 있던지 간에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미래는 공허한 동굴 같아. 지금에 대해선 알겠는데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특히 주식투자한 사람들한테는 내일이 늘 조마조마하지요. 주식투자라고 해봐야 쪼는 것과 같은 거니까. 언제 사고 언제 팔면 되느냐. 그게 일종에 도박이고 투기거든요. 말이 투자지 투기잖아요.
지가 그 회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투자합니까? 그냥 판돈 던져놓고 빨리 챙기는 것뿐이죠. 주식이 바로 자본주의의 꽃이고 인간은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중소기업해서 상품 팔아 돈 버는 것보다 부동산 투기나 그것도 옛말이고 주식투자해서 돈 버는 거 버는 거라고 사장들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회사 돈으로 해서 안 되면 말아먹으면 그만이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확실성이에요. 모든 게 투기성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은 뭐냐? 투기, 도박하는 거예요. 나는 뭔가에 도박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도박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에. 매일 한 순간 한 순간이 도박이에요. 여자들은 말리지요. 남자들은 지루하다는 거예요. 교사 때려치우고 장사할까? 맨날 그 생각이에요. 교사보다도 주식투자하자. 셋째 시간 있고 일곱 째 시간 있다면 그 사이에 컴퓨터로 주식 얼마나 올랐는지 보지요. 교감 선생님은 혹시 그런가 하여 지켜보고.
이 세상의 불확실성에 기대를 거는 반면에 이미 멈춰진 시간이 있어요. 멈춰진 시간이 되게 되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자체로서 없다가 됩니다. 없다가 이해 안 되면 앞에 가치라는 걸 집어넣어요. 나는 가치 없다. 나는 무의미하다. 내년 되도 무의미하고 5년 후도 무의미하고 죽어도 무의미하고. 따라서 사전에 가치 있는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홀로 있으면 가치 없어요. 이건 하나님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니까.
기존의 시간에 시달리고 기존의 공간에 시달려요. 계속해서. 여기 살다가 캐나다 갈까? 캐나다 갔다가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캐나다 물가가 우리나라 두 배에요. 이게 살 수가 없어요. 세금 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방법은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파괴하고 친히 파괴시킨 그 장소를 성소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성전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존 성전을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성전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전 파괴인데 개인적으로 하면 자기 몰락입니다. 오늘 제목은 이건 아닌데 이것 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인간은 자기가 몰락하지 않으면 천국이 안 보여요. 주님이 안 보이게 돼있어요. 인간은 아까 투기하는 재미로 산다 했는데 저는 자기가 몰락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나는 없는 존재였어요. 자꾸 있음을 붙들면 안 돼요. 있음은 미래를 기대해서 내가 괴로워서 못 살아요. 내년은 잘 되겠지, 후년에는 잘 되겠지.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걸 기대한다고요.
주머니에 돈 좀 있으면 근질근질해서 가만있질 못해요. 자꾸 도박판을 기웃거리면서 이것 바쳐서 여섯 배, 열 배 따볼까? 자꾸 그런 생각해요. 아예 주머니에 돈이 없어야 쓸데없는 생각 안 한다고요.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의 모든 카드들을 다 조회하고 전화번호까지 조사해서 남편한테 돈 한 푼 안 주잖아요. 특히 퇴직하게 되면. 하나하나 검사 다 받고 현찰 안 주고 카드 쓰게 해서 카드사용내역 다 알도록 만들어요. 쓸데없이 다방 마담한테 쌍화차 몇 잔 사줬는지. 나이 많은 영감들 이야기죠. 해서 쌍화차 사주고 커피 사주고 매일 출근하면 곤란하거든요.
인간은 가지고 있으면 없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자아가 피어납니다. 난 이만큼 있는 이게 나다. 재산이 이만큼 있는 그게 곧 나야. 그러니까 그것은 특별한 나를 계속해서 미래까지 이어지니까 멈춰진 시간이 아니고 이것은 영원히 끌려가 미래로 그것도 불확실한 어두운 미지 동굴 속으로 끌려가는 가련한 영혼이 되는 겁니다. 미리 완전히 멈춰야 돼요. 이미 종결돼야 돼요.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는 미리 확보돼야 되지 가보면 알겠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인생 살면 안 됩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성막의 구조를 다 보고 땅에 없는 곳에다 없는 건축물을 할 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찾아온 줄 알지요. 그게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을 없애기 위해서 온 거예요. 없음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자기 계실 곳이에요. 이게 주님의 자기 처소에요. 이 성막이.
그래서 성막에 있는 모든 구조는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새로 생겼으면, 없는 데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화살표 여기에다 이 관계 주님이 계실만한 곳이라는 취지가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야 돼요. 이어져져야 이스라엘이 되지 몇 번 드리고 그 다음부터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 단박에 관계 자체가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이라 할 때는 한 번 소유하면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이 성전답게 만들어가는 친히 작업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작업의 원칙이 뭐냐? 그것이 바로 오늘 레위기 24장 본문이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 안에서 주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레위기 24장을 봐라. 24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