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공간, 하나님 공간 191001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을 다하고 다시 요한복음이 길기 때문에 계속 요약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시간에 요한복음 1장에서 6장까지 또는 7장 중간까지 했는가 제 기억으로는 그런데요. 오늘 7장 후반부부터 하겠습니다.
7장에 보게 되면 인간의 공간과 예수님의 공간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간. 인간의 공간. 인간의 공간은 대표적으로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거는 바리새인들이 대표로 보여주죠.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이 고맙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생각의 범위를 그들이 미리 앞서서 다 보여주니까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바리새인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한계에, 한계선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7장 49절에서 이런 이야기해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들은 저주받은 자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저주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그들은 지키지 않는다고 그렇게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극한, 그들의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그 목표는 뭐냐 하면 바로 ‘모세율법을 지키자’.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요.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라는 그러한 의도 이게 인간이 만든 정신적인 공간이 되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하는 것.
그러면 이 인간의 공간에는 누가 필히 생생하게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인간+율법이 모세의 율법이 이렇게 이 두개가 인간의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자라고 했을 때 이것은 율법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율법이 인간을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복 받은 상태에요? 저주 받은 상태 입니까? 아니면 중립적인 상태 입니까? 중립적인 상태겠지요.
지키면 복 오니까 안 지키면 저주받고. 저주에도 해당 안 되고 복에도 해당 안 되고. 지키기만 하면 복이 오게 되고 안 지키면 저주 받으니까 안 지켰다 하는 경우에는 회개 반성해가지고 다시 죄를 용서받고 복 쪽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것은 한마디로 뭐냐 하면 ‘조율’이라는 것. 본인의 운명에 대해서 누가 조율한다는 겁니까? 본인이 조율하는 거에요. 본인이. 징계받을지 또는 안 그러면 복을 받을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조정을 하게 되기 때문에 조정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데 집중합니다.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데.
지금 내가 잘못되고 있다 싶으면 대번에 착한 일을 해가지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면 되고 그렇게 해서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조율해서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는 거에요.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는 것.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최종적인 목표가 뭡니까? ‘나 건전하다. 나 괜찮다.’ 이렇게 되게 되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누가 누구를 조율해서? 내가 나를 조율해서 구원받지요? 그러면 내가 조율하는데 남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내 운명 내 팔자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자기가 자기 실력 발휘에 어떻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에요. 혹시 자기가 실수했으면 금방 반성하고 회개하면 되니까. 이걸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바운더리. 범위라고 했지요. 이걸 제가 인간의 공간이라고 한거에요. ‘인간의 공간’.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고맙지요?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살거든요. 자기 조종하는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까 자기가 건전하단 말이에요. 이렇게 하다보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7장 3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그다음에 7장 34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그 다음에 뭐에요? 나를 찾아도 그 다음에 뭡니까?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공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주님의 공간, 천국이죠. 하늘나라와 만납니까? 못 만납니까? 만날 수가 없는 거에요.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으니까 이것은 헛짓한 거에요. 전부다. 뭔가 건전하게 하긴 했는데 거룩하고 경건의 경건을 향하여 열심히 애를 썼는데 결과는 뭐냐 하면 만날 수가 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 주님이 만약에 저 호남선 대전에서 광주 쪽으로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간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노선이 뭐냐 하면 경부선 부산 가는 쪽인 거에요. 제가 여러번 하지만 갈 길이 달라요. 갈 길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방향이 달랐어요. 바리새인하고 예수님 가는 길. 인간들이 가는 길하고 예수님 가는 길이 달라요.
그걸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천국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했어요. 모성애??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착하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이쁘고 굉장히 조심스럽고 그렇게 사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조건을 일체 인정을 하지 않는다. 열심히 고3때 공부는 했는데 대학시험에 한 문제도 안 나왔어요. 공부한거는 한 문제도 안 나왔어요.
안 나온 것을 계속 30년 40년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한 거에요. 천국에서 요구하지도 않는데. 천국에서 요구하지도 않는 것을 인간들은 왜 하느냐? 인간들이 자기가 문제를 낸 거에요. 자기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좀 더 건전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경건한 모습으로 내가 달라질까. 그렇게 되는 것은 무슨 여기에 뭐가 동원됐습니까?
자기 실력으로 할 수 있는 발휘할 수 있는 그 문제를 주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은 "보자 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한번 보자." 이런 내용을 출제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의 실력을 한번 보자는 거에요. 네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고 정신 바짝 차리면서 살았느냐. 이렇게 본다는데 정신 차려도 안돼요. 정신 차려도 못 만나요. 만날 수가 없는데요.
두 친구가 대전에서 차를 탔는데 대전에 있을 때는 둘이 같이 가는 줄 알았죠. 기차가 동시에 들어와가지고 한쪽은 경부선 부산가는 기차타고 한쪽에는 광주 가는 노선을 탔으니까 이게 대전역에 보면 노선이 달라요. 철도. 다르다고요. 부산 가는 것은 12번이라고요. 제가 하도 많이 타서. 11번 12번 둘 중에 가거든요. 광주 가는 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간다 이 말이죠.
처음에는 친구하고 이렇게 있을 때는 기차가 처음 출발할 때는 그 기차도 와 있고 있으니까 눈보고 이야기가 되는데 이게 시간이 5분 10분 지나면 이미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안보여 서로가 서로가 보이지를 않아요. 길이 다르기 때문에. 가는 길이.
경부선 탄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차 안에서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뭐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여기 광주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원한게 아닌데. 열차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네. 자꾸 이상하데. 뭔가 낯설다는 거에요. 풍경이. 내가 예상하지 않은 풍경으로 가버려요. 낯선 풍경 즐기기에 바빠가지고 내가 지금 수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돌볼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에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33절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오지도 못한다라고 잠시 살짝 보여주고 떠나는 거지요. 살짝 보여주고 가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 예수님의 공간이 따로 있다라고 이야기 할 때 이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공간에 속한 인간들은 뭐라고 이해를 했느냐? 이렇게 이해를 해요. 36절부터 유대인들이 서로 이야기하는데 저 사람이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는데 ‘아 이방인들, 헬라인들 가는 곳에 가는 모양이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 사회를 공동체를 떠나서 저 헬라인한테 가니까 우리 유대인들이 안가는 곳이니까 가서 못 만난다. 그렇게 그런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 공간, 인간의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수직이 아니고 수평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여기 유대인 사회인데 유대인 사회를 떠나서 헬라인 사회로 예수님이 자기들 떠나서 갈 모양이다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 사회나 헬라인 사회나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육지, 땅 아닙니까. 땅이니까 이거는 단절입니까? 아니면 연속성입니까?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으로 보는 거에요. 자기도 조금 멀리 외곽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다 헬라인 사람들 만날 수 있으니까 멀리서 안 보인다 뿐이지 가기만 하면 만난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수평적을 말하는게 아니고 못 만난다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수평이 아니고 수직적이죠. 수직적.
이 수직적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초월이라고 하는거에요. ‘초월’. 주 예수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된 존재죠. 그 초월된 존재에서 또 하나의 공간이 있으니까 이걸 초월로 가서 뭐냐 하면 일반화시켜요.
일반화 시킨 것을 더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또 초월이 되고 또 그것이 일반화가 되고 또 초월이 되고 일반화되고 이게 바로 성도의 가는 삶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성령 받아서 예수님을 알 때는 조금 알아놓고 나는 초월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그 초월한 것을 일반화 딱 시켜버리니까 그 일반화된 그 보편화된 그것을 마치 다 알은 것처럼 여긴 거에요.
또 다시 새로운 예수 믿고 한 5년 뒤에 또 다른 비약 또 다른 초월을 줘버려요. “아 그런 뜻이었었어?! 야 이제야 나는 알았다.” 하고 다시 개마고원처럼 일반화되버리는 거에요. 초월해놓고 다시 평평하게 되고 또 초월해놓고 평평하게 되고. 에베소서 사도 바울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에베소서 3장에 보면 3장에 사도 바울이 기도를 해요.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은 3장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방금 배웠으니까 바꾸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초월자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고. 초월자가 우리 마음에 계시니 우리는 누구의 공간입니까?
인간의 공간이 아니고 누구 공간이에요? 예수님의 공간이죠. 왜? 초월이니까. 우리가 만든게 아니고 주님이 와요. 우리 안에 들어와버렸으니까. 초월의 공간이죠. 초월의 공간이니까 끝이에요? 아니죠.
“너희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넓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다음에 19절에 “그 넓이와” 넓이, “길이와” 길이, “높이와” 벌써 3차원이죠. 깊이, 높이 위쪽과 아래쪽에 깊이. 이러한 그야말로 아까 제가 이야기한 공간이죠 ‘공간’.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 기도한다 이 말이죠.
그럼 기도한다는 말은 공간에 구석구석 돌아보게 하옵소서에요. 구석구석 돌아보게 하옵소서. 나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 말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는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구석구석 보는게 전부다 인간의 공간에 예상도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낯선 풍경들이기 때문에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그 낯섦이 주는 기쁨같은 거에요. 아 이런 것이었었어?
그런 것을 늘 새롭게 깨달으면 뭐가 나오겠어요? 감사와 기쁨이 계속 나오겠지요. 아 공간이 이렇게 깊었어? 이렇게 넓었어? 이렇게 높았어? 이렇게 충만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해가지고 여러분이 감을 못 느낄 거에요.
이게 어느 정도 좋은지 감을 못 느낄 거에요. 그걸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인간의 공간과 대비를 시켜서 그걸 확 절감하도록 확 깊이 깨닫게 하는 건데 아까 인간의 공간에서는 제가 아까 강의의 초반에 벌써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공간은 뭐든지 자기의 건전함으로 돌아온다고 했지요?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지요. 건전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자기 실력을 발휘해야 되겠지요. 실력을 발휘할 때 자기 행동을 조율하는 겁니다.
이거 하면 나쁜 일, 이거 하면 좋은 일. 나쁘게 하면 저주 오고 아까 바리새인들 했지요. 좋은 일 하면 복 오고 나쁜 짓하면 징계 받을 각오하고 있고 이게 바로 인간의 공간이거든요. 인간의 공간이 우리 몸 자체가 인간에서 나온 육체로써 있는 이상은 거기에다가 주님의 공간이 같이 겹쳐졌으니까 이게 대비가 되는 거에요.
대비가 되면서 이 몸은 경부선 지옥 가는게 이 몸은 지옥 갈 몸을 가지고 지금 어디 가고 있다? 천국 가고 있으니까 왜 천국 가는 것이 내 아이디어에서는 예상하지 못할 것들만 주어지는지를 깨닫는거에요. 왜? 우리는 항상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래서 벌 안 받기 위해서 내게 행운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행동에 조심하겠지요? 스스로 자기를 늘 테스트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테스트가 쓸모없는 거에요. 초월을 하고 나서 초월을 해놓고 이것을 일반화시키기 위해서는 여기에 인간의 공간에서 습득한 그게 그런 내용들이 여기에 포함이 되면서 주께서 이걸 충분히 이용하면서 초월을 일반화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같은 우리 육체가 필요없는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되는 겁니다. 옛날에 유명한 서부극에 보면 장고라는 사람이 나타나요. 완전히 거지인지. 진짜 모자 다 떨어진 것 쓰고 수염 기르고 망토 이렇게 모자 탁 쓰니까 눈도 안보여. 코만 삐쭉 보이고 망토 이렇게 쓰고 멕시코 망토 쓰고 뒤에 뭘 끌고 가느냐 하면은요. 항상 특징이 뒤에 어떤 관을 끌고 와요 관을. 관을 질질 끌고 와요.
관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빰빰빠바밤~ 서부의 무법자 노래, 장고의 노래 이거 아니지만.. 이렇게 가면서 관을 끌고 온다고요. 이 관에 뭐가 있느냐 하면 기관총이 있어가지고 다 죽이는데. 이 관을 죽은 우리의 육신으로 봅시다. 이 육신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아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 짓거리가 계속 나오겠지요? 바리새인들의 그 짓거리. 그런데 이것은 항상 뭐를 유발하느냐 하면 내가 벌 받으면 안되지. 우리 애도 있고 우리 가정도 있는데 잘 되야지.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조종하면서 계속 조종함을 계속 유발시켜요. 불안불안한 거에요.
다시 말해서 뭐가 없느냐 하면 기쁨도 없고 그 다음에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는 거에요. 어떤 내가 행동을 내 착한 행동을 발휘해서 어떤 결과, 실적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걸 끌고 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초월을 일반화할 때 이걸 집어넣어버려요. 초월에다가 이걸 집어넣게 되게 되면 바로 이러한 의식 때문에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아까 자기 건전함 쉽게 말해서 ‘자기 의’라고 할 수 있지요.
자기 건전함, 자기 의가 결국 뭘 하느냐 하면 기쁨과 감사를 이걸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건전함은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예상되는 결과를 원한다. 내가 이만큼 착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집안에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예상되는 결과를 자꾸 추구하게 되지요.
예상되는 결과를 추구하니까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초조함이 발생되지요. 그거 안 해주면 어떡하지. 그거 때문에 기도 벌써 한달째 빡씨게 기도하고 있는데. 수능은 50일 남았는데 50일 안 남았구나 내가 빡씨게 새벽 기도하는데 수능점수 많이 나와야 하는데 벌써 초조함이 나오겠지요.
초조함이 나온다는 것은 뭘 잃어 버렸어요? 기쁨과 감사 이것이 훼손되는 겁니다. 이게 가짜 기쁨 가짜 감사로 자꾸 가리워지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겠어요? 바로 이것 자체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이것 자체에서 수직적인 초월을 가미해버리는 겁니다.
초월을 가미할 때 어떻게 하느냐? 초조함, 불안 이것을 주님께서 일부러 심화시킵니다. 그러면 이게 나중에 낭패가 되고 좌절이 되겠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초월을 해줄 때는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야 기쁨과 감사냐 하면 우리가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주식 폭락하는걸 뭐라 합니까? 바닥 쳤다 하지요. 바닥 쳤다 하잖아요. 오늘 주식이 2073인가 그래요. 관심 없는 사람은 몰라도 돼요. 그런데 어디까지 내려갔느냐 1900얼마까지 내려갔다고요. 사람들은 바닥을 쳤다 해요. 인간은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치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하고 나하고 별개, 전혀 접촉이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이게 초월이에요. 내가 아는 초월은 내가 위대하게 뛰어넘는 높이뛰기 해가지고 2m20을 넘겠다. 이게 초월이 아니고 오히려 초월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리웠던 우리의 의와 자기 잘남을 우리가 바닥을 쳐버립니다.
바닥을 쳐버리면 비로소 이미 우리가 아무 나의 행함과 성실함과 관계없이 주께서 구원해주심이 새록새록 새삼스럽게 팍 뒷배경에 팍 등장하는 거에요. 뒷배경에. 여러분들이 김정은 있는 궁이 무슨 궁인지 모르겠지만 김일성 주석관. TV에 있는 것 보셨지요? 보셨어요? 김일성 주석관.
저는 기억에 남는게 뭐냐 하면 백두산 그림하고 금강산 그림만 보여요. 얼마나 그 풍경화를 크게 그려놨는지. 북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을거 아닙니까. 그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그것이 그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그 공간은 누구 공간입니까? 김일성 주석 공간이죠.
그럼 지금 우리는 어디 와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어디 와 있습니까? 예수님 공간이잖아요. 예수님 공간에서 왜 우리가 초조하고 불안하고 벌벌 떨고 걱정과 근심은 사서 다 하는 겁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육신, 우리 육신이 자기 관리해서 그런 거에요.
내가 나의 건전함을 자체적으로 도모,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한경애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자꾸 자기 자신을 하늘보고 조율 해 달라고 조율하는 거에요. 하나님 이렇게요? 저렇게요?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저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조율을 왜 해요? 왜? 조율을.
뭐가 그렇게 초조해서 조율하는 거에요? 뭐가 불안해서 조율하는 거에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여 이러면 건전한 겁니까? 이러면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이죠?" 천국에서 출제하지도 않은 문제를 자기가 출제해가지고 자기가 푼다고 끙끙대고 있는 거에요.
3번이 맞습니까? 2번이 맞습니까? 어느 쪽이 맞으면 복 받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꿇어앉아서 기도할까요? 아니면 손 모으고 기도할까요 손 펴고 기도할까요? 자기가 문제를 내. 자기가. 인간의 공간에서 하는 그 짓거리 있잖아요.
요한복음 7장의 주제를 뽑으라 하면 두자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폭로’. 성도가 왜 그러냐. 성도가 구원할려고 성도로 살려주는게 아니고 폭로시키는 겁니다. 네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고 네가 살던 곳은 지옥이라고.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폭로를 시킵니다.
폭로를 시키면서 폭로 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뱀, 악마와 싸우는게 아니고 다윗은 골리앗하고 싸웠잖아요. 우리는 그건 구약식이고 신약식은 그게 아니에요. 아니고 우리가 뱀의 목안에 들어가요. 우리가 폭탄이다. 자살테러 있잖아요.
우리가 폭탄이어가지고 뱀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뱀 안에 들어가면 그걸로 마귀를 이긴 거에요. 마귀하고 한판 붙을 생각하지 마세요. 뭐 태권도 해가지고 하지 말고 아예 뱀의 몸 안에 폭탄을 집어넣듯이 우리가 마귀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요나가 마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들어와 버리면 그 폭탄이 무슨 폭탄이냐 하면은 그 악마한테 일부러 삼킨게 되지요. 일부러 우리는 악마한테 삼킴을 당할 때 우리는 폭탄으로 삼킨거에요. 악마가 잘못 삼킨거죠. 그게 폭탄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쉽게 이야기했는데 지금부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뭐 어렵다 해도 설명하면 쉽던데 쉬운거 아니에요. 진짜 어려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요 제가 예를 한번 들께요. 예를 들테니까 여러분들이 상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자동차 공장에 보면 조립하게 되어있어요. 부속품들을 하청업자가 가져 와가지고 그걸 조립라인에 집어넣어서 처음부터 없는데서부터 하나하나 조립해가지고 나중에 완성품이 저 조립라인 저 끝에 차가 완성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카메라로 찍는다고 봅시다. 처음부터 조립할 때부터. 처음에는 차체에다가 새것이죠. 새 차체에다가 핸들 집어넣고 하는 걸 카메라로 다 찍는 거에요. 쭉 찍어놨습니다. 하나하나 조립해놨습니다. 그래서 긴 조립안을 다 끝내놓고 보니까 완성품이 되었지요?
완성품이 되어가지고 차 한번 타볼까 싶어서 차문을 스윽 여는 순간 거기서 시체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걸 상상할 수 있지요? 시체 하나 떨어졌다고 상상할 수 있지요? 자, 그럼 묻습니다. 그 시체 어떻게 들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하지요.
이것이 히치콕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감독이 이걸 구상을 했어요. 포드 시스템 다시 말해서 포드 자동차에 자동차 라인을 카메라로 다 찍되 마지막 장면은 다 찍었고 다 없는데서 다 하나하나 조립했는데 차 문을 여니까 죽은 남자의 시체가 나왔다까지 촬영을 할 때 그 히치콕이라는 감독이 그걸 촬영을 하고 구상을 다 해봤는데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본인이 그걸 구성해놓고도 시체가 들어가는 논리를 구성할 방법을 모르겠는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