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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190919a 베드로전서3장 6절(놀라지 않기)-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90919a 베드로전서3장 6절(놀라지 않기)-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6절

6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가 남편의 스승이다’ 이런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한테 배워라’ 이 말이에요. 그럼 뭘 배우느냐? 연약함을 보여주는 그 아내의 모습을 보고, 네 자신의 토대를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연약함에 있다는 것을 배워야 된다.

연약한 데에서 우리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 악마와 결탁이 되게 되면 무엇에서 벗어나려고 하느냐 하면 연약함에서 벗어나려고 해요. 연약함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완전함이고 완벽함이죠. 완전함, 완벽함이 되게 좋아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바탕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며 마주 오는데 얼굴이 어둡고 공포에 질리고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못한다. 그 사람은 장담컨대 100% 완전과 완벽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완전과 완벽을. 사람이 대할 때, 눈을 볼 때, 표정을 볼 때 불안하거나 뭔가 공포에 서려 있는 것은 완전하지 못할까봐 벌벌 떨기 때문에 나오는 얼굴이에요.

하나님의 창조성을 가까이 보여 주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거에요. 크게 쓰겠습니다. “겸손”. 겸손하면 마귀도 떠납니다. 겸손하면 마귀도 떠나요. 마귀 떠나면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죠. 두려울 게 없는 거예요. 겸손하겠다는데 뭐. 내가 겸손하겠다는데.

겸손한 사람에게 죄도 고마워요. 죄도 고맙다고. 죄를 아니까 점점 겸비해지고 겸손해지는 겁니다. 죄를 아니까. ‘그래, 내가 죄인이 바탕이지. 당연한 거지. 죄인이 뭐 잘난 체 해.’

죄인인데 겁나는 게 있어요? 죄인은 아무것도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못된 죄인이기 때문에. 베짱도 그런 베짱이 없어요. 대단한 베짱이죠. 못돼 처먹은 인간인 것을 내가 기꺼이, 당연히 내 진모습으로 받아 들이겠다는데 어떻게 해요, 받아 들이겠다는데. 마귀가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너 잘난 존재야’ 하면 오히려 마귀를 나무랍니다. ‘니 자꾸 나한테 구라칠래?’, ‘너 훌륭하게 될 수 있어’ ‘자꾸 거짓말 할래?’, ‘너 지금보다 더 향상될 수 있고 높아질 수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너나 많이 해’

완전을 추구하는 순간부터 공포에 질립니다. 얼굴이 파래져버려요. 날씨도 별로 춥지도 않은데 얼굴이 파래집니다. 바들바들 떤다. 그리고 특히 남 앞에 연설할 때나 사람들 있는데서 이야기 할 때,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내 뜻을 이야기 할 때 남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벌벌 떤다는 것은 얼마나 평소에 우리는 겸손을 모르고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얼마나 평소에 마귀에 농락당하고 살아 왔는가가 아주 티가 나는 거예요. 내가 할 말을 미리 준비하겠다는 것은 완전하고 완벽해서 남한테 지지 않겠다는 그 악마적 심리가 내 안에서 지금 자극받아 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망가지면 안된다는 거예요. 망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런 건방짐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주제파악도 안하고요. 성경에서 자기를 죄인이라고 한다면 죄인값으로, 죄인으로 살아야죠. 겸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뭔가 가졌는데 겸손하면 어려워요. 나는 겸손 안해도 되는데 또 목사님이 겸손하라고 하니까 겸손할께요. 이것은 겸손한 것을 빌미로 해서 겸손마저 장착한 완전추구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교만하기 짝이 없어요. 겸손을 앞장세운 교만의 극치. 극치의 교만입니다. 교만의 종결자. 이게 겸손이에요.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겸손은. 교만의 종결자가 겸손이에요.

겸손하면 얼굴이 편해야죠. 두려움이 없어야죠. 내일 일을 걱정 안해야죠. 겸손한테는 이미 겸손 자체가 망했기 때문에 새로이 망한다는 건덕지가 추가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망해져 있기 때문에요. 지금 걸레거든요, 쓰레기고. 걸레인데 더 찢을 일 있어요?

성경을 보기 전에, 그리고 세상을 우리가 살면서... “목사님, 세상을 인간은 어떻게 삽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공포에 쫓기며 살아 갑니다. 무서움에 쫒기며, 무서움에 휘둘리면서 살아가요. 벌벌 떨면서 살아가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어도 본인이 바이브레이션이야. 벌벌 떨어, 늘. 뭔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살아 갑니다.

한 자 한 자 글 쓸 때마다, 누구한테 전화하고 수다 떨 때마다 그게 전부 다 두려움에 진동한 대화, 그리고 발언, 단어들이 튀어 나옵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고, 교인들이 설교 들을 때도 마찬가지고. “목사님 오늘 너무 심하게 다그치면 안됩니다.” 막 벌써 벌벌 떨어요.

마귀가 그처럼 인간을 너무 높여 놔가지고...너무 높여 놨어요. 그리고 모든 세상의 남자들이 다 그래요. 남자들이 하는 것은 낮아지기 시합이 아니고 누가 더 높으냐의 경쟁에 남자들은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낮아짐의 전쟁터가 아니라 누가 높아질 수 있느냐의 전쟁터에요.

뭐 여자들이야 가정에서 살림만 사니까 남자들이 어떤 세계 속에서 정신적으로 힘드냐를 옛날에는 몰랐었었죠, 옛날에는. 그런데 지금은 여성들도 교육을 받아 가지고 배운 지식과 기술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 세상에 뛰어들거든요. 할 수만 있거든 돈 벌어라, 할 수만 있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벌어라. 왜요? 돈이 있어야 높아지니까.

바보에요. 겸손 쪽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이게 우리의 창조의 원형인데, 겸손 쪽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악마가 자꾸 부추겨서 내 마음이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있는 쪽이 아니고 그것과는 대치가 되는, 반대쪽으로 자꾸 몰아세우는 거예요. 자꾸 몰아세워요.

꼭 천사가 롯의 가정한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말라고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멸하실 때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마귀가 그대로 써먹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최고의 자리를 향하여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보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계속해서 달려가고 달려가고 추구하고 추구하는 거예요.

다시 합시다.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알고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거울을 보라. 사람을 단독적으로 놓고 볼 때에 그 사람의 얼굴에서 편안함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만큼 겸손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어디에도 겸손 배울 데가 없어요. 왜? 모든 자가 원없도록 교만하지 못해서 환장을 한 세상이기 때문에. 높아지는 것을 참이고 선이고 진리로 아는 그 시대에서 어느 누구에게 겸손이 주는 편안함과 감사와 고마움과 행복을 아무도 가르치거나 얼굴로 내비춰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전부 다 잘난 맛에 살아가거든요.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죄 아닌 척하면서, 나 죄 안 지었다.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죠. 아내가 한 것 나 모른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명언 아니겠습니까? 난 모른다 이래요. 안다 했으면 그 사람 얼굴이 참 편할 건데요. 아내 한 것 저도 알아요. 나도 한 통속이고. 하면 얼굴이 굉장히 해같이 빛날 건데. 아내 한 것을 난 모른다고 하니까 햇빛이 핏빛이 되고 말았어요. 우리는 안그렇습니까? 뭐 누구 탓할 것도 없지요.

‘겸손하라’로 가야 되요. ‘높아지라’가 아닙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겸손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어요? 겸손의 반대말은 완전함 또는 완벽함. 흠이 있으면 자기가 돌아 버리고 미쳐 버려요. 내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칫솔을 잃어버리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겸손하라고 잃어버린 거예요, 겸손하라고.

‘너는 덜렁대도 괜찮아’ 이거에요. ‘너는 덜렁대면 안된다’가 아니라. 우리는 항상 세상에서 반대로 배웁니다. 그러나 세상은 악마가 있으니까 악마가 우리의 진짜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과는 다른 길로, 계속 ‘보지 마, 뒤돌아보지 마.’ 계속 그 쪽으로 몰아 넣어요. ‘너는 실수 안할 수 있어. 너는 지금보다 더 향상될 수 있어. 너 지금부터 우수할 수 있다고. 그럼 넌 성공할 수 있어.’

일단 들으면 기분은 좋은데 얼굴은 벌써 시커멓게 되어 가요. 본인도 불편하고 보는 사람도 불편하고. 얼굴에 편안이 없고 안절부절하고 불안불안하고. 말을 해도 막 더듬고. 혹시 내 말의 진위가 상대방에게 들통날까봐 바들바들 떨고. 내 말하는 본색이 노출될까봐. 그 뜻이 누출될까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래서 겸손하지 않은 인간들은 자꾸 사과해요. 용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희한하죠. 왜 자꾸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과합니까?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이 행복하던가요? 살림살이 나아지던가요, 그래서?

이 세상에 어디에도 겸손을 가르쳐주는 데가 없어요. 혹시 신정네거리에 겸손학원 이런 거 있던가요? 그런 거 없죠. 모든 학원들은 앞에 교만이 다 붙어 있어요. 대입학원. 뭡니까? 대학에 들어가면 인간답고 떨어지면 인간답지 않다는 걸 벌써 앞에 뉘앙스를 걸치고 있잖아요. 또 피트니스, 아름다운 몸매를 원하십니까? 학원. 아름다운 몸매가 높아지는 거잖아요. 내 몸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몸이 뚱뚱하면 자기가 용서가 안 돼.

그래서 인간의 삶은 늘 불안한데 왜 불안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하고 자기를 자책해요. 채찍질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같잖치도 않아요. 같잖치도 않죠. 웃기죠. 맹탕이라도 너 괜찮아, 맹탕이 너한테 딱 맞아. 개코도 아무 것도 없는 게 너한테 딱 맞다고, 지금 네 모습에.

그런데 ‘아니야, 이러면 안돼’라고 누가 이야기 해주더냐. 그게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마가. 이 세상이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겸손 자리를 확 빼버리고 겸손 자리에 나의 완벽함과 잘남으로 인테리어를 새로 했어요. 인테리어를 새로 해버린 거예요. ‘나는 낮아져도 마땅하고 죽어도 마땅하고 없어져도 마땅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도 그게 마땅하고 그 마땅함이 나는 너무 행복해’라는 그런 책도 없을뿐더러 그런 책이 있다면 그런 책 읽다가 갑자기 치워 버리고 ‘돈 버는 비법’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책과 바꿔서 독서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나는 겸손하다는 게 이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집 안에 돈이 몇 억 있든 몇천 있든 그건 관계없어요. 사람이 겸손이 좋다는 그런 인식은 정말 이건 성령 아니면 누가 가져다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넣지 아니하면 난 겸손보다 더 좋은 게 없어, 최고야 최고. 정말 이것은 천만, 억만금보다 더 귀한 걸 받아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죠.

지금부터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있느냐, 성도는 왜 있느냐.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말씀의 내용이 어떠냐를 살아 있으면서 보여 주는 기회를 갖고자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겁니다. 나의 우수함이 아니고 말씀이 어떠하냐를 나타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죽으면 그것은 뭘로 교체되느냐 하면 온전히 말씀과 교체되겠죠.

성도는 교체되기 전에 이미 말씀이 내장되어 있고 그 내장된 말씀이 성도를 통해서 표출되고 있고, 죽으면 인간은 풀이기 때문에 죽기 마련인데 죽으면 영원한 것은 뭡니까, 영원한 것이? ‘아 역시 말씀은, 하나님 뜻은 이거였구나’ 하는 것이 그 죽음을 통해서 바깥으로 드러나죠. 살아 있을 때도 드러나고요.

그래서 살아가는 이유는 죽어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주와 함께 있는 그러한 증거들 또는 흔적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여기 성도가 몇 명 나옵니까? 3장 6절~7절에 성도 두 사람 나오죠? 누구하고 누구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오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6절 뒷부분에 보면, ‘아무 두려움 없이’ 그다음 뭐죠? ‘놀라지도 아니함’이죠. 놀라지도 아니함이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속성이란 말입니까, 사라가 보여주는 속성이란 말입니까? 사라가 보여주는 속성이죠. 놀라지도 아니함. 뭐 놀랄 게 있어야 놀라죠. 왜? 겸손하니까.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내 가진 것 다 거덜날까봐 벌벌 떨거든요. 그런데 겸손한 사람 같으면 이 세상에 귀신을 만나도 안 무서워요. “안녕 귀신, 잘 있었어?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너도 존재하는구나. 성경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네가 보이지 않는 거구나. 아우 참 신기하여라. 보이는 나도 주를 위해서 살지만 보이지 않는 악마 너도 주를 위해서 만들어졌구나, 아이 참 신기하여라.”

그렇게 되지 갑자기 십자가 찾아 목걸이 해가지고 ‘사탄아, 물러가거라.’ 말도 안되가지고 말도 막 더듬거리면서 마늘 가져오라고 해서, 요새 마늘 얼마나 비싼데, 마늘 사가지고 던지고 십자가하고 어디 신부 퇴마사 없나, 영화배우 안성기 막 모셔 와가지고... 세상에 라틴어에 맥 못추는 그런 마귀가 어디 있어요? 마귀가 싱긋이 웃으면서 “교만한 네가 내 부류야.” “하나님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러면 “네나 내나 마찬가지야, 마귀의 종이면서.”

아니 귀신을 왜 쫓아야 됩니까? 가만히 놔두지. 아까 그랬죠? 겸손이라는 것은 뭐도 좋아한다? 뭐도 기뻐한다? 죄도 기뻐하죠. 죄가 있으매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으매. 내가 전환하는 순간, 그렇게 안되던 겸손이 내 죄를 아는 순간 한꺼번에 고개가 팍 숙여지네요.

고개 숙어지고 깨지는 그 행복, 그 편안함. 무게중심이 높은 데에 있지 않고 낮은 데에 있으니까 마귀가 와도 무섭지 않아요. 여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놀라지도 않아. 남편된 아브라함이 누구한테 배워야 되느냐면 사라한테 배워야 되요, 사라한테. 놀라지도 않아.

목사님, 성경을 몇 독해야 은혜 받습니까? 기도를 며칠 해야 되고 금식을 얼마나 해야 되고 헌금을 얼마나 해야 되고 목사님 섬겨야 되고 교회를 몇 년간 다녀야 은혜 받습니까? 하는데, 은혜란 그냥 내가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 은혜라는 목표 자체도 날아가 버려야 겸손이에요. 내가 가져야 되고 도달할 목표 자체도 없어져야 되요.

그래야 겸손이죠. 어떤 목표가 있으면 그게 겸손입니까? 도달할 어떤 실적을, 가져야 될 실적을 자꾸 얼쩡거린다면 그게 겸손이겠어요? 미흡함이고 미흡함은 바로 교만이죠. 자책하게 되니까.

아, 딸 하나 낳아야 되는데. 딸 낳았으니까 이번엔 아들 낳아야 되는데.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임신해보니 아들인데요. 처음에는 딸, 이번에는 아들. 내가 그랬죠. “고만 낳으래이. 됐다.” 예상해서 아들이 와버리면 교만입니다. ‘역시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은 존재임이 증명되었어, 확인되었어.’ 이렇게 되잖아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증명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겸손하라. 그걸로 이미 증명이 되어 있어요.

제가 오늘 강의 처음부터 계속 겸손이야기 했고 그 겸손이라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얼굴 딱 보면 안다고요. 불안에 떠는지 눈빛이 뭔가 이상한지. 알 수 없는 정신적 프레스에 의해서 늘 눈알이 피곤한지. 눈빛이 피곤한지. 얼마나 교만했으면 피곤해할까요.

마귀가 우리의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잡아줬어요. 너는 하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쪽으로 겸손이 없는 쪽으로 우리 인생을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마귀적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마귀적 세상은 무슨 세상이냐 하면 남자의 세계에요. 이제부터 슬슬 어려워지는데 또 어려워지고 해서 교만하면 안되는데...

남성의 세계에요, 이 세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신기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이 남자 아니면 여자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 여자, 여자/ 남자를 우리가 나는 남자고 나는 여자고 뭐 이렇게 하겠죠. 그러나 말씀은 남자, 여자를 만들어 놓고 남자 없애고 여자 없애 버립니다. 원형으로 돌아가요, 원형으로. 원형으로 돌아간다고요.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라든지 또는 여자라는 이유는 용납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남자 따로 있고 여자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어차피 말씀에 의해서 이것은 삭제되어야 되고 날라가 버려야 될 개념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5장 21절에 보면 거기부터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여자 하나가 나왔죠. 그 당시는 남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여자 하나가 나왔다는 것은 일단은 여자에 대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볼 때 제일 먼저 여성다움의 잣대는 나대는지 안나대는지를 보는 거예요. 얼마나 여자가 똑똑하냐, 훌륭하냐 그런 잣대로 보는 게 아니고. 집안에서 밥이나 하고 아이나 보지 뭐하려고 운전하고 차몰고 나오냐 이런 잣대거든요, 남자들은. 남성의 세계. 너 때문에 개인택시 영업 수입 오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그러죠. 요새는 안그렇지만 옛날엔 그랬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남성을 내세우는 게 아니고 여성을 딱 내세워서 여성과 직접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여성과 직접. 그리고 하는 말이 마태복음 15장 22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할 때 예수께서 한 말씀도 하지 않았거든요. (마태복음 15장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그런데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그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자, 개라는 것은 일단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 부류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보다 천하고 사람보다 못하고. 개한테는 은혜 줄 건덕지가 없어요. 그래서 이방여인을 뭐로 보느냐 하면 개로 취급해가지고 ‘인간도 아니다’라고 제껴 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뭐를 붙들었냐 하면 주님께서 던져버린, 인간만 남기고 ‘개는 저리가’ 하고 개를 인간부류에서 집어서 인간 세상 자체에서 던져 버렸는데 그 던져진 개의 자리에서 그 여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혹시 주인, 사람들 있던 그 음식상에서 떨어지는 그 음식이 개의 영역에도 혹시 주어질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라고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이것은 ‘개라고 여기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제가 바로 개 맞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람을 보고 개라고 하는 것이 그게 주님의 규정이라면, 그 규정은 흔쾌히 제가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규정했다는 것은 내가 뭐를 요구하고 내가 뭐를 좋아한다는 그것을 깡그리 나는 버리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규정하는 그 규정으로 저는 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저는 감지덕지합니다.’ 하는 뜻이에요. 주님의 규정.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뭡니까? 인간만 살리고 개는 살리지 않는다는 게 주께서 오신 일이거든요. 그렇죠?

그런데 그 개가 떨어져 나가도 행여나 개도 무엇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건데 그것은 주인 상에서 떨어진 음식이 개한테 올 때, 비로소 개지만 주인의 상에서 인간이 먹던 떡을 먹는다는 점에서 그 음식을 통해서 그 집안의 개로 엮일 수 있는 기회는 부여받을 수 있잖아요. 그런 찬스는 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 찬스 쓰시면 안됩니까?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는 뭡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100% 인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그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속에서 개라는 것이 따로 영역이 되어 있으니까 제가 그 개 자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면 주께서 개라고 지칭하는 그러한 본질이 이 ‘개’인 나에게로 덮치게 되면 비로소 나는 주님이 하는 규정에 합류가 될 수가 있죠. 인간이 아니고 개로서 합류가 되죠, 개로서.

그렇다면 자기가 개라고 인정하는 이 규정은 무슨 규정을 완전히 포기한 거예요? 내가 뭐 되야 되겠다는 거. 나는 이래야 만족하겠다는 그 자기 생각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그걸 빼버렸죠? 그걸 제껴 버렸잖아요. 그걸 포기해버렸잖아요. 그럼 그 빈자리에 뭐가 들어오겠습니까? 주님의 규정만 흘러 들어오겠죠?

그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봅시다. 3장 6절.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개라 지칭하는 것은 앞에 뭐가 있다? 주인과 개죠. 마태복음 15장에서 개 맞은 편에 뭐가 있었습니까? 주인이죠. 주인의 상 부스러기니까 주인이 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전서 3장 6절에서 사라가 남편보고 뭐라고 합니까? 주인이라고 하죠, 주인. 이렇게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주인이라니. ‘나에게 주인이 있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옵소서’ 이런 뜻이죠. 이 말은 내가 단독적으로 나의 주인이 되고 싶지를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평가할 때 잘했다, 못했다, 수능 몇점 나왔느냐, 아이큐가 얼마냐, 집은 몇평짜리 사냐? 라는 모든 규정을 저는 안들은 걸로 할래요. 키는 얼마고, 결혼 했고 안했고 하는 이 모든 규정을 나는 일체 안들은 걸로 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주인이 하는 규정만 흔쾌히 내 규정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나이다’ 하는 마음이죠. 이게 뭐냐 하면 겸손이죠. 그러니 겸손은 자기 방어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방어책이 없죠.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잘생겼다 해도 못생겼다 해도 조금만 노래 하나 잘 지었다 해도 모든 이런 평가도 관심이 없죠. 자기에게 해당 사항이 없죠.

주인이 뭐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 주인이 아닌 자가 뭐라고 하는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라는 놀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놀라지 아니함이에요, 놀라지 아니함. 놀라지 아니함이고 그 앞에 있는 건 뭡니까? 두려움 없고 놀라지 아니함이고.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이에요? 겸손. 이게 겸손이죠.

이게 겸손인 거예요. 겸손은 내가 있다, 없다? 내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여자지만 결국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보여주는 것은, 주인과 개의 모습을, 주님은 이방여자를 통해서 주인과 개의 관계성을 드러낸 거죠. 그렇다면 원래 이스라엘이 이 관계여야 한다 이 말이죠, 원래부터.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어야 되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런 관계를 못 내놓고 귀신들린 여자가 주인과 개라는, 주님이 원하는 관계성을 드러내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자에게 귀신들린 딸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겁니까? 고마운 일이죠. 왜? 겸손케 했으니까. 자기 자신의 주제파악을 했으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딸이 귀신들린 것 때문에 내가 더 높아진다던지 완전해진다던지 우수한 그러한 생각 자체를 애초부터 나는 그 쪽으로 가서는 안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느냐? 남자, 여자 날라가고 인간 쪽으로 가서 인간도 날라가 버리죠. 인간도 아닌 거예요. 인간이 아니면 제로가 되겠죠. 그러면 제로는 무슨 존재냐? 나는 무슨 존재냐? 없는 존재에요. 나는 없는 존재.

단독적으로 나는 없는 존재고 ‘내가 있다’하는 것은 그냥 ‘내가 있다’고 하면 안돼요. 누구의 개로 있는 거죠. 주인님의 개로 있지 단독적으로 내가 개라고 하면 안돼요. 또 사라 같으면 남편, 언약의 사람의 아내지 ‘나는 여자로서 있다’하면 안돼요. 여자, 남자 규정이 다 날라가 버려야 되요. 인간이라는 규정도 날라가 버려야 되요.

새로운 관계는 뭐냐 하면 있음 vs 없음으로 묶어지는 관계, 이 관계를 지금 사라가 남편 옆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사라가 보여주지만, 사실은 사라한테 누가 배워야 된다고 했습니까, 제가? 강의 처음에서. 아브라함이 배워야 되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 앞에서 없는 존재로도 충분해요. 아니 없는 걸로 충분한 게 아니라 없는 게 맞아요. 없는 식으로 주님과 관계 지어지는 겁니다, 없는 채로. 어차피 인간은 있다가도 없어져야 되니까.

아까 그랬죠? 죽기 전에 뭔가 보여준다고 했죠? 이제 여러분 아시죠? 우리가 죽기 전에 뭘 보여 줍니까? 우리 주인님을 보여줘야 되요. 아브라함한테는 주님을 보여 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보기를 원했으니까.

어렵다 하지 마세요, 겸손한 사람은 다 되요, 이거. 뭐 새롭게 시도할 필요 자체가 없어요. 겸손 자체가 이 관계를 발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겸손 자체가. 전혀 어렵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닌 걸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그게 뭘 어려워요.

수학 문제 100문제 내놓고 푸세요. 다른 사람은 시간 모자란다고 하는데, 이름만 쓰고 뭐 10초도 안되서 내버려요. 너 100문제 수학문제 왜 안 푸나? 나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런데 그 담임 선생님이 예수님이라면? 참 겸손하구나! 참으로 겸손하구나, 이게 100점이야.

왜? 만약에 시험 문제 풀어서 50점 된다면 미흡하잖아요? 미흡하게 되면 마귀에 쫓기고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버들버들 공포에 휘둘리게 되요. 무서워하고. 놀라버려요. 남들 70점 받았다 하면 그동안 난 뭐했어? 50점 밖에 안됐어.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고 채찍질하고 다음에는 네가 70점 따라 붙여야 돼.

내가 나한테 벌주고 강박하고 겁박하고. 내가 나를 협박하고 그래요. 너 똑바로 안하면 벌받아. 너 쌓은 것, 네 가진 것, 네 위신, 명예 다 하루 아침에 훅 간다. 다 무너진다. 똑바로 살아! 이게 겸손입니까, 이게? 이게 행복이에요, 아니면 지옥의 늪입니까? 지옥의 늪에 빠진거야, 이거.

사람이 늘 이렇게 지옥의 늪에 빠져가지고 잘돼야 될텐데, 살아 남아야 될텐데, 더 우수해야 될텐데, 높아져야 될텐데. 그렇게 사람들이 바짝 벌벌 떨죠? 얼굴 들죠? 그걸 어느 목사님이 한 유명한, 잘 표현된 세 자의 단어가 있습니다. 건어물. 바짝 마른 건어물. 건어물이 뭐에요? 바짝 말랐잖아요. 두께가 없어, 핏기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거리에 있는 남녀노소가 전부 다 건어물이에요, 핏기가 없어. 팽팽하지를 않아.

잘돼야 될텐데. 내가 살아야 자식들이 사는데. 자식들 공부 못하면 안되는데. 겸손할 줄을 몰라 도대체. 겸손할 줄을 몰라. 교만 못해서 아예 환장을 했어. 그래서 또 교회에서 겸손하라고 하니까 이거는 또 아까 그랬죠? 자기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겸손한 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라고요. 아예 겸손하지 마, 그러려면 겸손하지도 마.

그래서 이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배우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배워야 합니까? 오히려 옆에 있는 아내한테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 배우는 거예요. 왜? 사라 안에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사라의 자손입니까? 야, 이거 어려운 문제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브라함은 여자의 후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사라의 자손이 되어야 되겠죠.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의 자손을 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봅니다.

실제로는 아브라함이 낳은 게 아니고 사라가 낳은 거예요. 왜냐면 사라는 어떤 여자이기 때문에? 잉태치 못한 여자이기 때문에. 잉태치 못한 여자에요. 갈라디아서 4장에도 나오고 (갈 4장 27절,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사야(사 54장 1절)에도 나오죠.

잉태치 못한 자. 오늘 강의대로 하면, 다른 말로 하면 겸손한 자죠, 겸손한 자. 겸손한 자여 뭐하라? 기뻐하라. 이 겸손한 자의 복제물이 많음이라. 겸손한 자의 복제물. 사라같은 위상을 가진 자가 복되도다. 잉태치 못한 자에게 이삭이 태어나잖아요.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 태어난 거예요.

약속은 한쪽이 제로가 되어줘야 온전한 약속이 약속대로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됩니다. 이거 제가 안했어요. 제가 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싱글싱글 웃으면서. 제가 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인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거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그게 바로 겸손이죠.

강남강의에서 했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결과물이라고요, 결과물.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제가 두 문장을 서로 비교했는데요.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1번. 2번,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결과물이라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가 겸손이고 결과물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고 뭘로 삽니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라’ 나오죠. 나도 골프치고 싶고. 우리 아들 19살인데 벤츠 타다가 음주운전 해가지고...하고 싶고. 스무살 먹은 애가 벤츠 타고 다니고 싶고, 내 아들. 자꾸 싶다, 싶다, 싶다가 나오고 있어요.

그냥 살면 되는데. 왜? 그게 내 위상에 맞아요, 그게. 하나님의 창조성은 없는 데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있는 것이 창조성이 아니고 자꾸 없음이 어느 쪽 방향을 향하여 달려가야 됩니까? 없는 쪽이 나에게 맞는 거예요. 없는 쪽이 맞거든요. 없는 쪽이 맞다는 말은 그러면 잠시 무대 있다가 없어지면서 뭔가 나와야 된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내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성, 주님의 말씀의 완성과 다 같은 말이에요. 언약의 완성, 언약. 이런 것들이 내비쳐야 된다 이 말이죠.

바로 그 역할, 기능을 누가 했느냐 하면 사라가 했지 아브라함이 안했어요. 아브라함은 지금 자식을 놓을 수 있는 정력이 있어요, 남성 호르몬이 있다는 말이죠. 청춘 팔팔 있잖아요. 그런 약 안먹어도 되요. 아브라함은 아이 계속 낳았어요. 사라 죽고 난 뒤에 자식을 낳았잖아요. 그러니 잉태할 능력이 있잖아요. 그게 창조성의 겸손과 부합되지 않아요.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뭔가 있으니까 잘해 볼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면 되지’가 아니라 ‘이렇게 되고 싶다’가 되는 거예요. 이거 되고 싶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만날 어디가도 자기 아내보고 지 동생이라고 자꾸 속이고 하잖아요. 왜? 안 죽으려고.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실력을 알고, 수준을 알고 그렇게 시켰겠지만. 너 어디가도 정 위험하다 싶으면 네 아내라고 하지 말고 네 동생이라고 해라. 뭐 이런 식으로.

미인을 탐내는 남자야 뭐 모든 남성들의 공통점이니까. 이쁜 것은 용납을 안하잖아요. 가만 두지를 않죠. 이쁜 사람은. 이쁜 사람도 참 힘들죠. 정말 남자는 여자를 왜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남자가 여자한테 꽂혀버리면 그 예쁜 것 차지하기 위해서 남자는 갑자기 목표가 생겨가지고 지구 끝까지 따라와요.

마을에서 남자가 혼자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거든요. 그 짝사랑하는 여자가 어느 날, 짝사랑이니까 어디 간다고 말할 필요 없잖아요. 그 여자가 혼자 서울 취직해가지고 올라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남자가 그 여자를 못잊어서 서울역에 나와 가지고 온 사람을 붙들고 묻는 거예요. 혹시 이런 여자 봤습니까? 갈 때는 살구꽃 피면 온다고 했는데 살구꽃 펴도 안돌아오고 있으니까 내가 기다리다 갑니다. 나이는 18세이고 이름은 순입니다. 살구꽃이 필 때는 돌아온다던, 바람은 불고 꽃냄새는 나는데 오지를 않네. 혼자 가야 해, 가야 해. 순이 찾아 가야한다는 거예요. 이거 나훈아 노래입니다. 혹시 이런 사람 못봤습니까? 온데 다 돌아다니면서 몽타주 들고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집착이죠. 얼굴이 벌써 공포에 질린 겁니다. 못 찾으면 난 죽겠다고. 이 얼마나 교만입니까? 얼마나 교만이에요. 사람들은 그 교만에다가 더 불길을 질러요. 아이고 세상 반이 여자라. 여자가 뭐 순이밖에 없나. 그런 소리는... 차라리 죽으라고 해요. 순이밖에 없어, 순이밖에 없어. 순이한테 싫증날 때까지는 순이밖에 없어요.

인간은 정말 주의 은혜가 오지 않으면, 언약이 오지 않으면 인간은 항상 얼굴이 어둡습니다. 밝지 못해요. 겸손할 줄 모르고. 더더더 계속해서 완전과 완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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