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15"22-29(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
Re..행15:22-29(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
이름 : 이근호(IP:)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
2004년 12월 8일본문 말씀: 사도행전 15:22-29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15: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15: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15:26 25절과 같음
15: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교회라는 것은, 죄로 인해 죽게 된 자들에게 복음이 능력으로 임하여 새 생명을 주게 되어서 모이게 된 무리를 말합니다. 이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일방적인 용서하심이 들어있습니다. 십자가 지심을 근거로해서 이런 용서가 성도된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원칙이 상주하는 곳입니다. 만약에 이런 교회에 세상적인 원칙이 스며들면 단호하게 배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는 그 당시 세상에 대해서 다른 원칙으로 다가서려고 합니다.
교회만이 갖는 원칙, 세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원칙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으로만 새 생명을 얻었다'는 원칙입니다. '죄로 인해 죽게 된 자'라는 표현 안에는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라는 표현 안에는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즉 교회 안의 사람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옮겨진 것입니까? 오직 복음으로 인하여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이 점부터입니다.
즉 복음으로 인하여 새 생명 얻게 되었으니 더 이상 복음이 자기 인생에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복음의 능력이 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말로 복음의 능력이 임한 사람 같으면 절대로 이런 소리를 늘어놓지 않습니다.
참으로 복음의 능력이 임한 사람은, 복음으로 인한 생명이기에 자신의 생명도 이제부터 복음을 위하여 바쳐지게 되어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즉 복음과 무관한 채 자신을 위한 생명이라는 인식은 그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가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의 재정 상태가 풍족해서 목사가 생각해보기에 그 교회에서 나가지 않는 한 자신의 노후까지 그 교회에서 책임질 수 있으리라 여기고 마음이 흡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향으로 목회해 나갑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복음으로 그 교회를 공격해야만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도리어 복음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란 복음으로 살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목사란 복음 때문이 이미 살았기에 복음 이외의 것에 기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소개하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는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겠습니까? 그것은 교회됨의 원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자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살게 된 자들의 모임'이라면 그 복음에 편향된 채로 생명을 사용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즉 교회가 사람들에게 새 생명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복음이 스스로에서 나온 능력으로 인하여 자기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로 살아갈 때의 일입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일에 충실히 한답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직접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시는 말씀의 취지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새 생명을 준 자들을 힘들게 해봤자 소용없다는 겁니다. 힘들게 하는 사울 자신만 힘들게 될 뿐이라는 겁니다.
왜 그러합니까? 사람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결단력으로 복음을 받아드렸으면 외부에서 강한 압박이 들어오면 그 믿음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복음의 스스로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에게는 이미 새 생명을 얻어버린 형편이기에 아무리 인간들이 그 사람에게 그 새 생명을 빼앗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짓이 되어버립니다.
이 원칙이 바로 교회에서 들어있는 원칙입니다. 다른 세상에는 없는 원칙입니다. 지금 교회는 이 원칙대로 사도를 세상에 파견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당시 교회 바깥에는 육적인 관습이나 풍습들이 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그들과는 다른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인간들의 풍습이나 관습은 모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자기 사회 내에서 냉대받지 않고 순응하므로서 버텨내려는 의도에서 전수되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자기 생명을 지탱하는 곳이 아닙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이 없이 교회를 세우게 되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모두다 다 자기가 나중에 죽어 좋은 곳에 가려는 탐욕에서 믿는 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없는 단체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그런 모습을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 너희들이 모시고 계신 목사는 주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 원칙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끌어당겨 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으로만 새 생명'이 아니라 '교회 질서 유지에서 새 생명'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20에 보면,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종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타잎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지배할 만한 그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인들 생각에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이 없으면 새 생명도 유지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즉 '복음으로만 새 생명'이 아니라 '사람으로 새 생명'원칙을 교회 안으로 도입한 겁니다. 거기에 반해 사도는 말하기를 "자신은 복음을 위해서만 죽을 고생도 다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사도는 사도 자신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악마는 복음을 가려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다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오늘날 참 성도들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다 합니다.
그러니까 양쪽도 복음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전쟁의 현장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세상은 이처럼 복음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두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자란, 자신의 목숨을 자기 외에 달리 바칠 곳이 없는 사람을 두고 말합니다. 즉 자기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결국 허사로 끝날 줄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 불신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불신자들의 집단이 되지 않았는지 스스로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복음에 죽고, 복음에 살고, 복음에 웃고, 복음에 우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가라 하면 가고, 복음이 오라 하면 올 수 있는 자가 정말 신앙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으로 인하여 살았기에 더 이상 살고 죽는데 연연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