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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개체와 말씀세계 190909강의-

20190909a 부산강의 : [시편]21(14편)-개체와 말씀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질문, 이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녹음할 거예요.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결정적이죠. 왜냐하면 내 몸 같으면 첫째 사망, 둘째 사망,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없어요. 그런데 내 몸을 다루는 것은 아담의 몸 안에서 다뤄지는 거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분명히 아담의 몸인데 주님의 몸으로 간주해버려요. 그럼 우리의 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낼 거냐를 표현하는데 우리의 육체가 필요한 거죠. 보이지 않는 몸은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지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첫째 부활이 체험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다뤄지는 거죠. 다뤄지고 뒤돌아보면 주께서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그렇게 묘사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이건 첫째 부활이야, 둘째 부활이야, 이거는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그걸 말씀이 세계라 해요. 우리는 인간의 세계에 있거든요. 인간의 세계에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우리의 체험이나 경험으로 뽑아낼 수 없어요. 우리의 체험이란 것은 내 몸이 유지될 경우와 유지되지 않는 경우 딱 두 가지밖에 없거든요. 이 몸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과 아파서 죽는 것, 두 가지 경우밖에 없잖아요.

두 가지밖에 없으면 이 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 그걸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아무리 따져도 죽음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몸을 무슨 몸으로 바꾼다고 했어요? 주의 몸으로 바꾸죠. 주의 몸으로 바꾸면 우리 몸에는 없는 게 주의 몸엔 있어요. 그게 바로 부활이에요.

여기서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몸으로 부활을 이해하려면 경험되지 않습니다. 경험되지 않으면 상상하게 돼있지요. 이 몸이 죽으면 부활된다. 이건 상상이라니까요. 실제가 아니고 우리의 욕망이고 욕심이 되죠. 우리 몸이 생생하게(별로 생생하지도 않지요^^)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경우가 이미 보람상조가 처리한 상태, 관 속에 누워있지요. 자식들이 와서 입관, 하관하고 있는 그런 상태, 우린 다 듣고 있지요. 이 사이를 이걸 죽음이라 하거든요. 숨 끊어진 상태를 죽음이라 한단 말이죠. 우리가 경험하든지 체험하는 건 이것밖에 안 돼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부활이란 게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이나 고린도전서에 부활 나오지요. 부활 나오니까 체험되지 않은 여기서 상상력이 동원되는 거예요. 이건 허구지요. 그냥 욕심이에요, 욕심. 되면 좋겠네. 부활되면 억수로 좋겠다. 그뿐이에요. 실재 아니에요. 난 예수 믿고 교회 다녔으니까 부활되겠지. 누구 마음대로? 지 착각이지.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제가 설명해드렸습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반드시 점선으로 표현해요. 없는 거예요. 없는데 과거와 현재가 경험한 기억으로 자기가 구성을 하지요. 자기가 그냥 정해버려요. 자기가 정하니까 이것은 나만의 부활이에요. 이방인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집단적인 부활이 아니고 나만의 부활이에요. 다니엘에 나오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것이지 개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에서 물 나오지요. 특정 개인을 향합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합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수 없어요. 생명의 물을 받으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 구원받았다고 했어요, 메시아를 알았다고 했습니까? 메시아를 안 거죠. 나만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메시아를 안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이지 나만을 건지는 게 아닙니다.

나부터 출발하는 것은 너무나 이방적 사고방식이에요. 사적구원, 개인구원. 모든 교회가 개혁주의신학 자체가 개인구원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단적입니다. 솔직하게 이단이라 하고 싶은데 ‘적’이라고 하나 붙여주는 거고 그냥 이단이에요. 왜? 나의 구원만 하기 때문에. 거기서 새끼 친 게 뭐냐? 구원파잖아요. 구원론, 구원파. 당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부터해서 기존 교회 전부 다 구원에 관한 거예요. 성경과 관계없어요.

없으니까 허전하잖아요. 그러니까 마저 채우려고 하는데 어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남아있는 미래는 없다. 십자가가 최종성, 마지막 종결이기 때문에 미래가 없어요. 그걸 종말이라 합니다. 미래가 없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미래를 밟고 있는데 미래는 없어요. 모든 미래는 십자가로 다 소환되기 때문에 따로 나만의 미래를 설정할 권한도 없고 설정할 필요도 없어요. 십자가로 끝내기 때문에.

그러면 내 미래가 없어지고 십자가로 소환되려면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돼요? 우리 자신은 죽으면 되지요. 내가 죽으면 나의 미래도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란 말이 나오지요.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시험에 들지 말게. 나에서 우리로 가야 되는데 자꾸 나로 가려하는 거예요. 시험이란 단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광야에서 나온 거예요.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 그게 시험입니다.

그럼 시험이 되려면 이 세상 환경이 광야로 바뀌어야 되겠죠. 광야로 바뀌면 본색이 드러나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시험이란 방향성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미래는 우리가 알던 이미 경험한 상상한 미래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시니까 애굽보다 더 잘 살게 하시겠지. 광야 같은 것을 없을 거야, 아마. 가자마자 멋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그것과 하나님께서 제공한 그 광야란 사막 같은 환경과 대비해볼 때 본색이 본능적으로 톡 튀어나오지요. 내가 이러려고 교회 나왔나, 하는 식으로.

광야란 애굽에 살던 자아를 죽이는 장소에요.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니까. 죽으라고 광야에 집어넣었는데 우리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옛날식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주님은 네가 옛날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영생 얻으라. 우리는 옛날식이 좋습니다. 맨날 싸움이 그 싸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교회 나와서 그냥 성경 알 필요도 없이 하나님 저기 계시고 열심히 빌면 복 받는다. 왜 그렇게 간단한 걸 놔두고 자꾸 성경 봐야 되느냐? 귀찮다.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고 복 받을래. 그쪽으로 갑시다, 라는 생각이 계속 나오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왜 성경 봐야 됩니까? 거기에 광야 나오고 이스라엘 나오거든요. 이스라엘 나오고 집단적으로 어떻게 대들었으며, 이방인 나오잖아요. 이방인들은 얼마나 개인주의냐. 이방인들은 개인적인 지혜를 원하고 개인적인 지식을 원하거든요. 유대인들은 집단적인 기적을 원하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어리석은 십자가지요.

아까 집사님 들어올 때 목사님 장난치며 못 들어오게 했잖아요. 돌아가라 이 말이죠. 여긴 올 데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진정한 시험의 해석은 바로 네가 살던 데로 돌아가라. 거기에 정들었고 몸에 배였잖아. 네가 모르는 하지도 않은 짓을 왜 하려고 하냐는 거죠. 그것은 주께서 이끌어줬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성경을 봐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뭐가 좋으냐? 바로 우리가 알던 세계에서 어느 세계로 들어갑니까? 말씀이 세계로 들어가요.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면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없어요. 이건 주님 몸에 해당되는데 나한테는 그냥 상상의 세계일뿐인데 이게 상상이 아니고 이미 들어온 게 돼버려요. 이미 미래가 나한테 덮쳐버렸어요. 생소한 미래에요. 낯선 미래.

낯선 미래가 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미래는 과거, 현재가 바탕으로 해서 미래가 상상되잖아요. 점선이니까 미래는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억지 부려서 채우는 거죠. 나는 앞으로 이렇게 될 거야. 천당 갈 거야. 그런데 천당은 가는 게 아니고 덮쳐버리면 생생한 천국이 돼버리면 동시에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과거에 나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리죠.

나는 어느 동네 살았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오고, 재산은 얼마 모았고, 아파트 사고, 그것 자체가 그것 한다고 해서 그게 구원과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어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장애자다. 몸이 아프다, 안 아프다. 그게 의미가 없다니까.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해요. 구원받는 것도 십자가만이 아니라 구원되고 난 뒤의 상황도 십자가만 자랑해요.

홀라당 십자가만 이용하지 말고. 천당 가서 나대로 살아야지. 그렇게 되선 안 됩니다. 그건 상상에 불과하고. 실제는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십자가 알고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나에게서 더 이상 자랑할 게 없다는 것이 홀가분해져야 되지요. 내가 자랑할 것 없고 굳이 자랑한다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러면 죄를 자랑하면 과거의 죄냐? 아니지요. 왜냐하면 계속 살게 하시면서 거기서 매일같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죄가 발굴이 돼요. 발굴된 그 죄들을 보게 되면 이건 죄 아닐 거라 한 죄도 목록에 쓰레기처럼 계속 쌓이게 돼요. 내가 죄가 아니란 것도. 그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도 죄로 들어가 버려요. 모든 게.

그러면 죄 아닌 게 뭡니까, 물으면 죄 아닌 걸 찾는 그게 죄에요. 죄 아닌 게 없는데 죄 아닌 걸 찾겠다는 의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뭔가 수상한다 이 말이죠. 만약에 죄 아닌 것을 찾게 되면 우리는 또 그 죄 아닌 것을 담지, 그걸 담아서 유지해야 될 부담을 또 갖게 돼요.

나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됐는데 이것 잃어버리면 주께서 얼마나 섭섭해 할까? 그렇게 돼버리면 계속해서 그 죄 아닌 것이 의인데 그 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써 내 가치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어디까지 잘 나가고 훌륭한지 부질없는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식이냐 하면, 옛날 애굽에 선악으로 나를 따졌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광야에서는 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다시 말해서 시험에 빠진 꼴이 돼버립니다.

그 시험에 빠진 꼴을 그동안 누가 잘 가르쳐왔던가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요. 예수 믿었으면 똑바로 살아야지. 어떻게 세상 사람과 똑같아. 그게 영광되겠어.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영광은 여러분의 행함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얼마나 들었어요. 그리스도 형상을 본받아야 되고 빛과 소금이 돼야 되고.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우리가 모델로 여겼던 해와 달 다 폭파되는데? 요한계시록 안 본 모양이라. 해도 맛이 가고 달도 맛이 가버렸어요. 모델을 죄를 지고 가신 주님 외에는 없어요. 모델을 왜 찾아요. 모델을 찾겠다는 말은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계속 붙들겠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자아를 유지시키는 게 시험입니다. 자아를 놔야 되는데 계속 붙들고 가겠다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의 몸인데 자꾸 내 몸으로 자꾸 빼돌리는 이 악마의 짓을 용서 하옵소서, 라고 해야 되겠지요.

시편 14편과 무관하게 아닙니다. 여전히 시편 14편은 어렵구요. 시편은 스토리가 없어요. 스토리가 없고 남의 체험이거든요. 다윗의 체험 아닙니까. 참 얼마나 어려운지 문장과 단어를 나열할 테니 어느 정도 어려운가 보세요. 우리가 여기 있는데 누가 앞에 있단 말이죠. 묻습니다.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내 눈앞에 나타났느냐, 이런 뜻이거든요. 너는 왜 없어야 될 자리에 네가 앉아 있느냐? 무슨 의미냐? 내 쪽에서 이쪽으로 질문하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하는 거예요. 이건 응용실습하면 돼요. 오늘 집에 가서 남편 앉아 있으면 물으세요. 당신은 왜 없는 존재인데 앉아 있지? 너, 누구한테 배웠나. 오늘 낮에 공부하러 갔더니만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너는 없어야 되는데 왜 있지, 라고 할 때 상대방은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①이렇게 물으면, ②정답이 뭐냐 하면, 너는 나를 왜 관찰하느냐? 지금 이 질문과 답변에서 공통점을 끄집어내보는 거예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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