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여분 190712
서울의존강의20190712a 베드로전서3장 1절(몸의 여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절
1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하나의 인간의 몸을 갖고 있으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이죠. 자기 몸이니까 자기로부터 의미가, 모든 것이 모아지는 겁니다. 내 몸이니까. 그러면 내 몸이 있는 이상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도 자기 몸 중심으로 구조가 되는 겁니다. 가정이라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가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생각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죠.
누구의 아내라고 한다면 갑자기 무엇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느냐 하면, 내 몸이 내 주인이라는 점이 날아가 버리고 ‘누구의 아내입니까’, 그 남편에 종속되었다는 느낌이 들죠. 어떤 입장에서, 아내라는 지위, 위치를 갖고 있으면서 ‘내가 ~에 종속되었다’라고 문장을 쓰게 되면, 이 문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종속되었다’하고 ‘내가’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종속되었으면 ‘내가’라는 말을 구태여 할 이유가 없어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야 돼요. ‘~에게 종속된 나’, ‘남편에게 종속된 나’라고 했을 때 이것이 아내가 되는 겁니다. 아내는 뭐가 앞에 나오면 안돼요? ‘내가’ 누구의 아내라고 말을 하면 곤란하죠? 마치 남편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현대에서 누구의 아내라고 했을 때는, 내가 누구의 아내라고 말하기 싫고 내 남편이 누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해요. 자기는 어떤 경우라도 종속되었다는, 한 수 아래 있다는 의식은 우리 내부에서 용납을 안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는 아예 안따져 보는데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내된 자들아” 이렇게 시작해요. ‘독립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죠. ‘아내된 자들아. 너희들은 너희들의 몸이 있더라도 독자적으로 나를 위한 몸은 아니고 가정이라는 조직에 필요한 몸으로 네가 거기에 살고 있다. 이 점을 놓치면 안된다.’ 그런 뜻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네 몸보다도 뭐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가정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너는 너를 위한 몸이 아니고 가족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너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아내된 자들아” 이렇게 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이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서도 상당히 기분이 별로 안 좋죠. 독자적인 자기의 존재가치를 애초부터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 뒤에 아무리 좋은 이야기해도 별로 달갑지 않은 겁니다. 예를 들면 1절 끝에 보면 “자기 남편의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은 아내로 인하여 남편이 구원을 얻으면 아내된 자로서 기분이 좋지 아니하냐,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조로 기분 좋으라고 이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천당가면 되지 꼴 보기 싫은 거 같이 가서 여기서도 살기 싫은데 천당가도 같이 만나야 되나 해가지고... 남편이 구원 받든 말든 나만 구원 받으면 되지 왜 남편 구원까지 신경을 써야되냐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나는 남편에게 매인 몸이 아니고 종속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고 니는 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초반에 이야기 했죠? 아내라는 그 몸은 독자적인 몸의 의미를 가질 권한이 없다는 말이죠.
이 베드로전서 성경 말씀을 볼 때에 현대인들이 보기에 상당히 거북스러운 거예요. 3장 1절 ,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순복하라” 되어 있어요. 여기 네거리에 보면 열녀비 하나 있거든요. 옛날에 열녀비를 왜 세워놨겠습니까? 아내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튀면 안된다는 것을 그 사회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결혼해야 되고 결혼했으면 반드시 열녀가 네 삶의 표준이 되어야 된다. 열녀냐를 가지고 여성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해가지고 열녀비를 세운 겁니다.
열녀 중에서도 이런 열녀가 있을 거예요. 카메라 위치를 잘 잡아놓고 2살 아이하고 구석에 딱 앉아가지고 남편이 때릴 때 다 찍히도록 하는 열녀, 남편 팔뚝의 문신까지 다 찍혀 나오도록 하는 열녀. 베트남 열녀. 열녀났다 열녀났어, 베트남 열녀. 남편 하나 구원시키겠다고 지는 얻어맞는 열녀... 남편 구원 때문에 자기가 카메라 찍고 했겠습니까? 얻어맞았으면 왜 고소 안하고 왜 신고 안했는지, 그 전부터 그렇게 했으면. 무슨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떠한 자기 노림수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러 가지가 예상될 수 있죠?
그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아내라는 자체를 ‘아내다운 나’가 아니라 ‘내가 한번 아내 해볼까? 아님 말고’ 아내라는 자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사랑이라는 것은 일단 나부터 사랑하고 남는 여력으로 남 사랑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거든요. 지부터 챙겨야지 지 손해 보면서 남 사랑할 거 어딨어요.
구원 받는다 그러면 일단 나부터 구원시키고 남는 시간 있으면 남편 구원시켜볼까 이거거든요. 중요한 것은 나는 어디에 소속되거나 어느 구조의 일부가 되기를 내가 거부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몸은. 그래서 여기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이 “아내된 자들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몸이 아니에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듯이 성령받은 사람들에게만 이해가 되고 무슨 뜻인지 수긍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특히 3장 1절에 보면 “남편에게 순복하라” 하는데 순복이라는 말이 오랜만에 듣지 않습니까? 누구 개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옛날 촌이야 딸이 순복하면 밥이나 먹고 산다고 애 이름을 순복이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순하게 복종하라고. 지금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가지고 집안 꼴이 되겠습니까? 남편이 기고만장하게 설쳐가지고 잘된게 뭐가 있어요? 아내가 단도리 잘해줘서 그나마도 자식하고 밥먹고 살지, 남편 지 혼자 돌아다니면 맨날 나가서 논다, 등산 간다고 해서 자기가 돈 벌었다고 혼자 다 써버리고 나중에 실패하면 아내한테 기어 붙어가지고 살려줘 하고 달려오고...남자나 여자나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기력은 내 사랑에 다 몰입시키고 혹시 남는 거 있으면 그 다음에 남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할 때는 여기서는 그냥 순복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순복할 때도 순복하는 이유가 있어요. 네가 나한테 순복할만한 짓거리를 하게 되면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너한테 재롱부리고 뿌잉뿌잉하든지 할 용의가 있지만 네 하는 행세, 꼬라지가 영 마음에 안든다 하면 재롱이고 뭐고 각방 쓴다, 넌 끝났어, 나 너 용서하지 않아, 내가 너 같은 남자 만나가지고 내 인생 조질 이유가 없어. 내 인생 뜻대로 될 조건 하에 너는 내 남편이고 안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갈라설 준비를 하자. 이런 식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순복이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이죠? 거기에 순복이 왜 튀어나옵니까?
순복이라는 것은 나는 누구에 종속될 존재, 이럴 경우에만 순복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지, 모든 것은 우선 나부터 챙기기, 그런데 거기에 무슨 순복이라는 것이 같이 결합이 될 수 있는 뜻이겠어요? 안되죠. 그리고 순복하는 것도요, 같이 신앙생활 잘하고 아내가 보기에 존경할 만한 어떤 요소가 있으면 순복하죠. 현대인들에게 진짜 이상적인 남편감이란 뭐냐하면 아내가 보기에 날마다 새로운 존경할 것이 새록새록 나오는 사람, 가장 이상적이죠. 존경스러운 게 나온다는 말은 ‘나는 그대 앞에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그거거든요. 내가 못하는 걸 다하는 거예요. 형광등도 어디 고장났나, 착착착 뭐 다 고쳐. 못하는 게 없어요. 개똥 다 갈아주고.
그러니까 현대 여자에게 가장 좋은 남자라고 하는 것은 말하기 전에 아내가 뭘 원하는지 미리 캐치해가지고 두 말 안하더라도 착착착착 내 속을 훤히 꿰뚫어서 미리 딱 해놓으면 저녁에 콩나물밥이고 뭐고 원하는 거 내가 다 해줄게,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알아서 순복할게. 존경스러운데 뭘 못해, 존경스러운데. 내 눈치 착착 챙기고 해야 하는데 이거는 남편이라는 게 눈치가 있나 코치가 있나, 대화가 되나. 복음이야기 하면 절이야기 해버리고...안되잖아요, 이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 말은 뭐냐 하면 말빨 세운다고 남편이 감동받아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야, 네 행위 보니까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 그런 태도를 아내 쪽에서 가져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구원도 바쁜데 남편 구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남편 구원 신경 쓰다가 내 구원에 소홀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되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아내의 특징은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유’. 같은 말은 ‘심리적인 안정성’. 여유와 안정성. 남편되는 당신이 아내되는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당신에게 해주겠다는 것은 아직도 이건 결핍이에요. 미비해요.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나는 내 아내된 도리를 다하겠다. 왜? 나는 이 집안의 구조상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당신한테 아내라는 연결망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내 포지션의 역할은 다 해주겠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인지 그런 것에 나는 신경쓰지 않고. 이게 뭐냐 하면 안정성, 여유잖아요.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어떻게 구원했습니까? 조건보고 구원했습니까? ‘똑바로 하면 구원해주고, 천당가고 안 그러면 지옥간다’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전서에서 제시한 것은 한글로 딱 한 자에요, 뭐겠어요? 뭐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또는 거룩하게 된다, 씻음 받는다. 뭐였습니까, 딱 한 글자로? 빨간 건데. 예수님의 피로!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1장 2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씻어서 영생을 얻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이런 게 참 오늘 강의 어렵게 하려면 정말 어렵게 되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음의 실제성’,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이 허황된 거예요. 손에 안 잡혀요. 그러면 주님께서 ‘나는 복음을 전하러 왔다’ 하면, 사람들이 ‘뭐 내놔봐, 복음이 어딨는데? 어디에 감춰뒀는데? 어느 동굴에 복음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 몸에서 흐르는 피, 내 몸에서 나오는 그 살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것은 허황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어느 특정 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사건과 결과들. 이게 상당히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복음이라는 게.
복음이라는 것이 몸이 존재함으로써 구체화되는 거예요. 몸+복음=구체성, 구체화. 몸에 복음이 결합되게 되면 나오는 것이 여유와 안정성이에요. 그렇다면 여성의 몸이라는 것은 내가 지정한 몸이 아니고 가정이라는 곳에 어떤 포지션, 위치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가정’이라는 포지션을 위해서 이 여성이 있으면 이것은 남편에게 종속된 게 아니고 누구한테 종속된 거예요? 가정이라는 몸으로 표현되어야 될 복음의 실제성에 여성이 종속되는 겁니다. 복음에 종속된다니까요, 복음에.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순복하는 거예요. 남편 볼 거 뭐있다고 순복해요. 자기는 지 좋다고 바깥에 돌아다니는데. 그러니까 복음에 순복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가정이 갖는 특수한 구조에 대해서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여호수아 7장 24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우리가 여호수아, 아간을 보면서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사람, 아간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간 혼자 잡아다가 죽이면 그만이라 생각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뽑고 뽑고 계속 뽑는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유다지파에서 계속 선택하고 또 선택했는데 그 선택이 17절에 나오죠. 여호수아 7장 17절,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지파, 유다지파가 뽑혔고 그 다음에 유다지파 중에서도 세다 족속이 뽑혔고 세다 족속에서 삽디가 뽑혔고 18절,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간이 뽑혔으니까 아간만 죽이면 된다 생각하겠죠. 그러나 아까 24절에 보니까 그의 아들들과 딸들도 죽죠. 가족이 죽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의 최소단위가 가족 단위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라는 것은 없고 네 가정에서 구원의 포지션을 제대로 수행했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의 위치의 구원이지, 내 구원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위치 구원이라고요. 어떤 인간이든 가족 없이는 태어난 사람이 없죠. 흔히 교회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눈에 보이는 아버지나 제사지내지 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