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 190712
안양20190712a야5장12절(맹세)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5장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맹세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왜 맹세를 인간은 하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맹세에 의해서 주어진 게 아니고 주님의 맹세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주님의 맹세에 의해서 세상이 주어진 거예요. 성경이 두껍잖아요. 성경책의 모든 내용은 주님의 맹세를 확인하는 책이 바로 이 성경책입니다.
어느 것 하나가 주님의 맹세 없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건 그 하나의 맹세를 누구보고 맹세했느냐 라고 궁금해 하실 건데, 히브리서 6장에 보게 되면 13절, 14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누구보고 하느냐 하면 자기보고 맹세를 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 또는 맹세할 때,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보고 맹세하는 거예요.
맹세하신 하나님과 맹세 받는 하나님이 따로 있겠지요. 그래야 그 둘 사이에 맹세가 성립되니까. 그 맹세가 그냥 흐지부지로 끝났을까요?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자연 전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게 완료가 되는 식으로 주어졌을까요? 어느 쪽일까요? 하나님의 맹세가 무효화된 겁니까, 아니면 제대로 다 완성이 된 걸까요. 완성이 다 됐겠지요. 그 완성됐다는 증거가 니는 맹세하지 말라, 에요. 니가 이 땅에서 더 추가해서 할 일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사람은 맹세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 맹세는 불안해서 오는 거죠. 불안, 불안해서 오는 겁니다. 사람이 왜 불안하냐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이제 불안이 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맹세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죄 짓는 거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죄 짓는 거고, 죄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거죠.
그래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기 몫에 자기 일을 따로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대드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맹세한다는 게. “비키세요. 이 일은 내가 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맹세를 하고 대들게 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자아성’입니다. 인간의 자아성은 대들면서 생기는 거예요.
군대에서 졸병들이 고참한테 시키는 대로 하다가 언제 자아성이 생기느냐 하면 고참이 한 말을 거부하고 대들 때 그 때 자아성이 생기는 겁니다. 갓 시집온 새댁이 고분고분하다가 언제 자아성이 생기느냐 하면 시어머니한테 대들 때, 시집에 대들 때, 비로소 그동안 미뤄 놓았던 자아성을 되찾는 겁니다. 부딪치고 마주치지 않으면 자아성이 생기지 않아요.
그러면 자아성이 생기게 되면 자아성은 이미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순복, 순종은 이미 물 건너 간 겁니다. 순종을 순복하되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면 순종할 만하면 하고 순종 안하면 나는 순종 안하겠다는 거예요. 순복, 순종은 일종의 믿음의 행동이거든요.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순복, 순종으로 드러나는데 순복, 순종을 내가 알아서 순종하고 순복하겠다는 말은 내가 믿을만하면 믿겠다는 것. 그게 이 믿음은 하나님께 대든 죄의 결과가 뭐다? 믿음이 되는 겁니다.
이 믿음은 자아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게 무슨 믿음이냐 하면 나의 믿음이 되겠지요. 나의 믿음으로 예수 믿어서 천당 가겠다는 것은 이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자아성이 생기게 되면 생겨버린 내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허세, 또는 맹세, 이것을 계속 하게 됩니다. 하늘을 통해서, 땅을 통해서.
그래서 이 맹세와 이런 가짜 믿음에 대해서 거짓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가 있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세상은 누구의 맹세대로 됐다 했지요? 하나님의 맹세대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군데, 군데 반란이 일어난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군데, 군데. 우리도 내 목소리 내고 싶은 거예요.
회사 사장이 노동자들 직원들이 순복하고 순종하게 되면 늘 한결같이 순복, 순종하게 되면 이게 월급이 오를까요? 안 오를까요? 안 오르지요. 오를 리가 없지요. 견딜만하구나! 그 정도로도 견딜만하구나! 그 여분의 돈은 지 골프치고 지 사치하는데 다 쓰고 안 주는 겁니다. 반발하고 반항한다면 약간 인상해주고 그러면 이제 노동자는 이거 대들면 이게 오르는구나! 해가지고 또 대들다 그 다음에는 짤리고. 너무 까불다가 잘리고. 우리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 월급 가지고는 다른 초자 둘 쓰는 게 더 훨씬 낫습니다. 잘려버리고 그렇지요. 막 나갈 때 주의해야 되거든요. 잘된다 싶을 때 주의해야 될 일이에요. 이게.
우리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맹세를 남발하게 됩니다. 남발하면서 이 맹세를 통해서 내 믿음이 그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 믿음인지를 모르지요. 이 진짜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확인하려고 하면 필히 뭐가 생기겠습니까? 불안감생기지요. 확인하면 불안감 생기는 겁니다. 어디까지 왔는지를. 그 애들 놀이에 여러분들이 해봤습니까. 자기는 눈 감고 친구의 손을 잡고 등어리에 푹 숙이고 가고 친구는 자기 손을 잡고 앞서 갑니다. 그럼 뒤에 애가 묻지요. 어디까지 왔나? 묻지요. 어디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자꾸 묻잖아요.
확인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 목표 지점에 다 왔는지를 자꾸 불안해하기 때문에 하게 되고, 그 확인하는 테스트 방법이 맹세를 해보는 거예요. 맹세하는 방법은 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 하면 기도를 통해서 하지요. 이런 기도는 꼭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빠트리지 않습니다. 야무지게. 주문이니까. 주문 같은 거니까 예수 이름으로 빠트리면 새로 다시 해야 돼. 아이~ 귀찮아 죽겠어. 이게. 다시 예수이름으로 해가지고 못을 딱 박고 부적 붙이듯이. 예수 이름으로 부적을 붙이듯이 꼭 해가지고 시험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1장5절,6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서 기도 응답 방법은 뭐냐,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는 주시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러니 이 말씀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왜, 그 말 자체가 인간의 행위에서 이걸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의심하지 말고 구할 때 의심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의심하지 않는 자체가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기도하면 주시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게 하셔서 이미 너에게 응답된 상태에 니가 놓여있음을 주님 쪽에서 알려주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이 말씀을 지키려면 일단은 의심을 안해야 되거든요. 응답을 받으려면 의심을 안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의심을 안 하려면 의심하는 경우와 안 하는 경우를 둘을 본인이 상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이미 뭐냐, 두 마음을 품은 게 돼요. 내가 지금 의심 안하는 것이 의심일까, 의심 아닐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것이 의심이고, 어떤 것이 의심 아니지.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의심이에요.
그래서 성경 말씀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 말씀은 전체가 하나님의 맹세로 된 책입니다. 맹세로 된 책이에요. 맹세로 된 책은 그 말은 오늘 본문과 연관시키면 내가 맹세로 내가 알아서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니가 거기서 니 자아성에 입각한 나의 것을 따로 챙길 이유는 전혀 없다. 맹세하지 마라. 니가 여기서 압력을 가한다던지 어떤 니 뜻을 거기다가 집어넣을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은 자꾸만 맹세하고 기도하고 의심하지요. 거기서 주어지는 것이 붉은 걸로 해야 되겠지요. 이렇게 시험하고 테스트하게 되면 여기서 생긴 게 대자연은 그 인간에게 뭘 주느냐 하면, 위기를 주는 겁니다. 위기. 기도의 응답이 안됐다는 자체가 뭔 뜻이냐 하면 나 지금 위기가운데 있다. 이런 뜻이에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게 의심이거든요.
니가 왜 마음에 불안해하는고? 불안하고 싶어 불안합니까. 불안은 내 자아성에서 나오잖아요. 근심과 내 자아성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꾸준히 내 안에서 자꾸 뭔가 나오고 있어요. 계속해서 뭔가 나오고 있으니까. 그것이 주님의 이루신 맹세와 잘 이게 타협이 안 되고 불화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말씀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그야말로 순복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이거든요.
옛날에 집안에 한 가정이 잘되면 순종, 순복하라고 이름도 순종, 순복이라 이름을 옛날 사람들은 많이 지었다 말이죠. 어디가도 니가 순종하고 순복하면 밥은 먹고 산다는 겁니다. 먹을 게 없을 때는 밥만 먹으면 그게 내 평생 얻은 것 다 얻은 것 같지요. 일단 밥을 먹게 됐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챙기는 것은 뭐냐, 그러면 나는? 내 자아성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늘 이렇게 불안해서 확인하고 확인해 놓고 또 불안하고. 이것은 누구를 테스트하느냐 하면 인간이 날마다 신에게 테스트하는 거예요. 이것은 마태복음4장에서 악마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주 일이 뭐였던가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테스트하지요. 그 악마의 하는 일이 지금 대를 이어서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계속 테스트하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아직도 전봇대다. 어디까지 왔나? 우리 집 언제 오느냐 이 말이지요. 계속해서 확인해가지고 내가 지금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로도 땅으로도 아무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큰 홀 또는 체육관 엑스포같은 그러한 전시회장, 이처럼 거대한 빈 공간에 우리는 거기에 이미 놓아져 있는 인물입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 맹세를 자꾸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는 주님의 맹세로 되어가는 주님의 약속으로 언약으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자꾸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노선, 맹세라는 그걸 테스트하듯이 자꾸 맹세를 해대니까 주님께서 위기를 줬다고 했지요.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맹세하지 말라할 때 그냥 말만 맹세하지 말라하면 안되잖아요. 그럼 맹세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이리 할 때는 반드시 뭐가 온다고 했습니까? 위기가 오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위기가 오는 겁니다. 그럼 이 위기에 대해서 2가지 설명할 수가 있어요.
하나의 위기는 뭐냐 하면, 개인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현대인들이 잘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존적이다. 실존적. 제가 실존적이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실존이란 말은 뭐냐 하면 그냥 돌멩이를 가지고 실존이라 하지 않습니다. 돌멩이는 그냥 존재라 해요. 있다. 선풍기가 있지요. 선풍기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손자가 있다. 그건 손자보고 그냥 있다, 하면 그 며느리나 아들이 싫어해요. 왜냐하면 손자가 그냥 있으면 안돼요. “그럼 우리 애가 돌멩이입니까? 아버님은 돌멩이로 보입니까?” 이런다고요. 손자가 이리 노는데, “야야, 애를 치워라.” 기분 되게 나쁘잖아요. 그렇지요.
손자한테는 치우라하면 안되고 좀 치워줄래, 하는 손자한테 물어야 되잖아요. 대화의 상대가 실존입니다. 아무리 뭐라고 이야기해도 그쪽이 죽은 물체가 아니고 살아있는 거라면 대화를 해야 돼요. 대화를. 그래서 본인의 의사가 따로 존재할 때 그걸 실존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실존이겠습니까? 아니면 존재겠습니까? 실존이지요. 악마는 실존이겠습니까? 존재겠습니까? 실존이지요. 악마가 바보등신 아니거든요. 욥기1장에 보세요. 바보등신 아닙니다.
악마는 지금 하나님과 이야기한다는 말은 하나님도 실존이고, 악마도 실존이에요. 그런데 욥은 뭐냐 하면 본인은 실존이라고 우기지만, 막상 높은 레벨, 높은 단계에서의 악마와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졸지에 욥은 실존이 아니고 뭐가 되었어요? 존재가 되고만 거예요. 돌멩이와 똑같이 되어버린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욥은 강렬하게 반발하지요. 나를 개무시하다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나옵니까. 나도 한 인간입니다. 반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실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존을 내거는 인간 쪽이 아니고 위쪽이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데서 이곳으로 옮겨온 거기 때문에. 다른 데서. 이쪽으로 옮겨온 거예요.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9장에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했고요, 없고요. 지금. 존재가 없어요. 존재가 없는데 실존이 먼저 있어요. 무형의 형태가 없는 실존이 먼저 있어요.
에서는 미움 받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했다. 두 실존 사이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아까 제가 맹세는 누구보고 한다고 했어요? 이 세상을 만든 맹세는 누가 누구보고? 하나님이 누구보고? 자기보고 맹세한다 했지요. 히브리서6장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맹세가운데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만 맹세했지,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데려놓은 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아까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에서는 창세전에 미워하기로 되어있고, 야곱은 사랑하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 예수의 존재는 없어요. 실존은 먼저 있고 나중에 야곱, 에서를 태어나게 하고 존재로 태어나게 하고 준비된 실존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이렇게. 붕어빵 앙꼬 넣듯이. 밀가루 부어놓고 실존을 집어넣는 거예요.
야곱은 이 땅에, 야곱의 몸은 범죄한 아담의 몸을 지니고 왔잖아요. 야곱의 몸은 악마의 몸이기 때문에 이게 자기 독자성, 자아성을 포기를 못하지요. 야곱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내가 얼마나 챙기느냐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생각한다고요. 그게 창세기32장에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의 실존이 자기의 존재를 넘어서는 거예요. 하나님과 결부됐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나를 보기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장차 오실 하나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나는 미리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야곱과 이스라엘 중에서 누구 하나는 죽어야 되지요.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게 지난 수요일 설교한 거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제대로 산다고요.
야곱은 죽을 때 죽은 게 아니에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천사와 만날 때 이미 죽은 거예요. 야곱으로 죽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야곱을 계속 죽이는 그 작용, 그 죽이는 작용이 바로 생명의 작용이에요. 하나님의 맹세의 덤태기를 씌운 거예요. 맹세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덤태기를 씌워지는 겁니다.
야고보서4장 한 번 봅시다. 4장 14절, 이거 20번도 넘게 한 거 싶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물으면서 너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라는 게 말씀과 관련해서 한시적이다. 순간적이고 임시적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말씀과 관련해서.
말씀이 떨어져나가면 우리는 내 인생 내거라고 내가 열심히 살아주지만, 말씀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안개처럼 주님의 반짝 폈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되는 거예요. 있었나? 없네. 없잖아. 아~ 조금 전에 있었는데. 없잖아. 지금. 이리 되는 거예요. 조금 전에 있어야 했었고, 조금 전에 있던 그것이 없어져야 될 운명이 우리 운명이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맹세가 중요하고 말씀이 중요한 겁니다. 말씀이. 인간의 육은 풀이고,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말씀과 맹세의 영원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 일시적인 실체, 또는 일시의 물체, 사물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럼 우리는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지요.
질문이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하지 말고 처음에 우리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몸을 입기 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리 돼요. “예수 안에 있었습니까? 예수 바깥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혜택 안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저주 안에 있었습니까?” 질문이 그리 되어야 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인생을 논하다가 갑자기 확대돼요. 범주가. 확대되어가지고 창세전부터 있었던 계획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럼 그동안 그것을 그러한 숙명의 지혜를 누가 방해했느냐 우리의 육적인 아담의 몸인 내 자아성이 그걸 극구 반발하고 대들었지요. 그 대들은 게 뭐라고 했습니까? 대들은 게 우리가 오늘 본문에 맹세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러면 맹세하지 말라 해도 맹세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하나님께 대들기 위해서.
왜 대든다 했지요? 대들면 무엇이 생긴다 합니까? 자아성이 더욱 더 공고히 되는 겁니다. 나는 나다가 공고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체 하늘이나 땅이나 어느 것도 맹세하지 마라. 니가 권여할 일이 아니다. 니 인생이 니가 권여해서 될 인생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의 맹세가 듬뿍 주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맹세가.
여러분, 빙수 같은 거 한 번 보세요. 빙수를 탑으로 해서 함빡 주지요. 빙수에다가 팥 넣고 여러 가지 떡도 넣고 초코렛하고 연유도 붓고 하는데 그것이 주어진 빨간 주스, 노란 주스, 파란 주스도 전부다 빙수 알갱이 속에 녹아져 나가잖아요. 녹아져 나가지요. 그런데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