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8a 부산강의 : [시편]20(13편)-신앙의 증거
20190708a 부산강의 : [시편]20(13편)-신앙의 증거
시편 13편 할 차례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
시편 13편을 하고 있지만 우린 시편 1편을 항상 잊지 말아야 돼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내가 왜 존재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먼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대로 이 세상에 펼쳐지는 데 있어서 동원된 사람, 그게 복된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은 단독적으로 복되지 않아요. 말씀 완성이 결합된 사람이 복되죠. 혼자서 잘났다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 아니에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 그 다음에,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만나게 돼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안의 그 내용이 세상에 펼쳐지게 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의 등장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는 내용이 율법 안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요구르트 안에 딸기 갖은 것 들어있곤 하잖아요. 그걸 애들 책상에 놔뒀는데 툭 쳐서 요구르트가 쏟아진다면, 표면에선 하얀 요구르트가 덮여있는 것 같았는데 쏟아져서 보니까 딸기도 들어있고, 토마토도 들어있고 안에 내용물들이 나오지요. 툭 쳐서 지나가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과의 싸움의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선행된 율법이 있고 율법을 전재하는 데 동원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죠. 그러면 시편 13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본인이 설치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와 이 세상에서 맞닥뜨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와 맞닥뜨려서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거예요. 현대인들은 적이냐, 아니냐를 본인이 고르고, 그리고 내 출세 길을 막는 걸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길을 막는 것. 그래서 현대인들은 율법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절대성과 함께 있습니다.
본인의 절대성이란 말이 어려우면, 이렇게 말을 적으면 쉽습니다. 나는 무엇과 함께 있는가? 나의 나됨과 나의 고유성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나의 나됨이란 것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어디까지 나이냐? 어느 정도 재산을 가져야 나답냐? 어느 정도로 행복해야 나다움에 부합되고 충족되느냐? 그게 현대인들이에요.
그래서 나에게 실익이 있다 싶으면 나다움에 만족스러우면 사귀고 그렇지 않으면 아낌없이 내치고. 나의 나다움, 자기 절대성이죠. 자기 절대성입니다. 그러면 현대인들에겐 무엇이 적이냐 하면, 이런 나의 맹목적인 목적에 방해될 때 이걸 적이라 하는 겁니다. 나의 절대성, 나의 나됨, 나의 고유성에 방해될 때 적이죠. 적을 물리칠 때 나오는 멘트가 있어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면 가차 없이 내치는 겁니다. 송혜교와 송중기가 뭐 때문에 헤어진 지 모르겠어요. 아마 이것에 때문인 건 확실해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의 절대성에 보탬 되라고 너와 살아줬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의 절대성에 네가 훼손되니까 우리 여기서 갈라서자. 쉽게 말해서 성격차이라고 하는데…
내 성격에 맞을 이 세상은 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유의 성격 때문에 이미 성격차를 지니고 있어요. 같은 성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자기 절대성을 주장하다 무엇을 밀어내느냐 하면, 내가 처한 환경을 밀어내야 곱게 다진 내가 하나의 우상처럼 불상처럼 조각상처럼 우뚝 솟아오르는 겁니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특히 그리스의 조각상들이 있거든요. 조각들이 인체에 대해서 아주 이상적인 비례로 아름답게 비너스상이라든지 인간상, 신상을 만들어놨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그전에 신에게 품어져 있던 인간에서 신이란 환경을 밀어낸 거예요. 먼지 털어내듯이 신이란 환경을 밀어내게 되면 우뚝 솟아오르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의 번뇌, 인간의 슬픔, 인간의 관심사가 신이 아니고 인간에게 집중하던 시대가 그리스 조각들에게 펼쳐져있어요. 신이 아름답다 자연이 아름답다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인간의 인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되면 그리스 사람들에게 목적이 생긴 거예요. 무슨 목적입니까? 우리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자.
혼자서 안 되겠지요. 여럿이 모여야 되겠지요. 그게 아고라, 광장. 신은 산 위에 올려 세우고 그 신도 인간에게 도움 되는 신이지만 일단 신을 섬긴다 하고, 신을 섬기는 시간은 있지만 대부분 시간은 아고라라는 광장에서 토론과 협의에 의해서 인간을 절대화시키고 인간의 가치와 지혜를 높여주는 그런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자. 그리고 그것을 민주주의라 하고. 귀족들만의 모임이에요. 일종에 멤버십 할 수 있는. 캠브리지 멤버십 있잖아요.
그들의 멤버십이 민주주의입니다. 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필요하겠지요. 동물 취급하는 노예들이 노동하고 그 위에서 자기들만의 이상 국가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 같은 사람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철학하는 사람이 왕이 되는 사회. 철학은 인간 지혜에 극점에 놓여있는 사람, 인간의 지혜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마음껏 발휘하는 사람이 국가의 왕이 되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고 성경에선 헬라, 마케도니아. 그 헬라를 다니엘서에선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짐승. 악마의 모습. 인간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창조했는지 누가 우리를 심판할지 그런 것은 토론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또 인간의 내부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치켜세우게 되면 현실, 아까 환경이라 했지요. 현실과 이상이 너무 멀어지잖아요. 그러면 좌절해요. 인생이 무엇인가? 외부의 인간을 찬미하다 다시 자기 내면의 세계를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양극단이 있어요. 그리스 철학이 그렇다는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간이 겪는 갈등 같은 것들을 그들이 미리 다 이야기했어요.
산비탈에서 뾰족한 꼭대기에 돌을 얹어놓으면 그 순간 다시 도로 원상태로 내려가고 그러면 또 밀고. 인생이란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허무가 찾아와서 다시 허무의 바닥에서 새로운 목적을 일부러 일구어내고 정해야 되는 거예요. 스케줄을 자기의 욕망에 의해서 계속 짜야 되는 겁니다.
소포클레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비극적인 세상관을 이야기했는데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나 인간을 비극적으로 봤는지. “가장 최선의 일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안 태어나는 게 최선인데 이왕 태어났으면 차선이 뭐냐? “일단 태어났으면 가능하면 온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차선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나중에 유럽에서 낭만주의라는 문학양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19세기에 낭만주의는 세상은 너무 더럽고 너무 허망하다. 따라서 내면의 자기 자아의 빛을 그것에 매료하고 자연의 품에 안기자. 루소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자연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서 세상을 잊어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아름다움에 몰입하자.
자기 내면에 몰입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같으면 지리산에 들어가는 거지요. 산나물 캐고 없으면 없는 데로 살고 그냥 선비처럼 갓 하나 쓰고 글씨나 쓰고. 글씨 배우러 누가 오면 수수료 받고 밥 먹고 사는 사람들. 또 아줌마들 오게 되면 사주팔자 봐주고. 자식이 이번에 좋은 대학 들어가겠어요, 구라 쳐서 돈 받고. 그게 바로 중들이 하는 일에요. 요새 중들이 암자에서 앱 깔아놓고 사주팔자 봐주는 일을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놀고먹는 것인데 그게 잘 안 되면 놀긴 놀되 아껴서 쓰자. 이런 주의죠. 극단적인 체념 생활.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란 단독적으로 놔두면 양극단이 다 있어요. 세상에서 성공하자고 미친 듯이 설치는 게 있고 세상을 일종의 도박판으로 보는 거예요.
어디에 돈을 걸면, 어디 부동산에 돈 걸면 은행이자보다 높은가, 거기에 미쳐 사는 거예요. 펀드는 포트폴리오, 부챗살처럼 깔아야 손해가 적어진다. 이런 게 발달하는 겁니다. 어느 은행에서 새로운 펀드를 개발했는데 이걸 할까, 말까? 하도 은행이자가 낮으니까. 정기이자가 1.7%밖에 안 되니까. 자꾸 그것 하는 거예요. 그런 반면에 돈은 더럽다 해서 지리산 들어가서 암자에서 수염 기르고 도 닦는 것.
인간이 이렇게 할 때 자칫하면 나는 어느 쪽이 나의 절대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느냐? 그거거든요. 이제 강의 처음과 연결됩니까? 인간의 나의 나됨과 그걸 찾는 과정이거든요. 나의 나됨과 나의 고유성,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나만의 것, 테두리 치고. 그게 절대성이거든요. 선악과 따먹었으니 마귀거든요. 마귀는 누구의 간섭도 안 받고 평가를 해도 내가 평가하고. 이런 식이에요. 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식이에요. 마귀가.
그래서 지금 현대인들의 이런 사고방식, 젊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지만 머리 깎은 청년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사람을 사귄다 할 때는 부동산 투자나 펀드 투자하는 식으로 계산해냅니다. 나의 과거, 흑역사까지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걸 묻는 거죠. 나한테 투자하라는 거예요. 나와 살아서 손해나더라도 아무 소리 안 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여자인 것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고 앞으로 나와 살면서 이런 경우가 생길 때 그러한 나쁜 역사, 검은 역사 되더라도 그걸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간 보고 사귀죠. 남자가 여자 좋다는데 그런 말이 들어옵니까? 예스, 예스 하지요. 은행에서 펀드 넣을 때 손해 볼 수 있습니다, 해도 그런 것 귀에 안 들어와요. 무조건 수익률 20%에 체크 다 해버리는데, 뭐. 그건 그때 문제지요.
나는 어디까지 돈을 벌 수 있느냐, 나는 어디까지 남보다 위에 설 수 있느냐? 지금 본인이 본인에게 돈을 거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두고 도박을 하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도박판이에요. 전부 다. 도박이 싫다면 지리산 들어가야지요. 그래서 지리산에 쓰레기장 다 만들어놓고.
이런 두 양극단, 비극적 인생을 쓰는 것은 자기 절대성과 고유성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비극이 쾌락이 돼요. 에피쿠로스학파가 이거거든요. 쾌락이라면 차라리 굶는 것도 쾌락이다. 금식하는 것도 쾌락이다. 쾌락을 기대한다면 금식도 마다하지 마라. 왜? 사람 행복은 거기 있기 때문에.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도 꼴 보기 싫다. 겸손이 뭐냐 하면, 일종에 쾌락이에요. 자기만족이라니까. 나 무척 겸손하다. 왜 이리 믿음이 좋아. 이거 자기 쾌락이에요. 자기 고유됨이에요. 이 정도로 낮아질 수 있다는 그걸 절대화시키는 겁니다. 혼자서 꼼지락거리는 거예요. 혼자서 펀드 넣었다가 혼자서 여행 갔다가 혼자서 회개했다가. 모든 것이 개인 혼자의 생각에서 나와서 혼자 시도해보고. 어떤 저질러놓고 전부 다 자기 정당성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변명이라 하는데 자기 정당성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시비 걸까 싶어서 전체가 변명의 성채를 세우는 거예요. 변명할 수 방법이 뭐냐 하면, 교회 나가기입니다. 교회는 뭐냐? 나의 변명을 제공하는 제공처. 제가 교회 나가줬잖아요. 헌금 했잖아요. 시키는 대로 전도했잖아요.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것이 교회 열심히 다니기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가 집에 놀면서 동네 아줌마들 불러서 화투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용돈 이만 원 드릴 테니까 노인정에 가세요, 하면 그 사람은 노인정 가요. 돈 이만 원 때문에. 이만 원 있으면 자기 나댐의 가치가 더 강화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나라는 인생을 만들어놓고 거기다 계속해서 꽉꽉 채우는 일만 해요. 돈도 집어넣고 명예도 집어넣고 유력한 아는 사람도 집어넣고 친화력, 내 친구 어떤 사람이라는 것도 집어넣고 내가 이만큼 공부한 것도 집어넣고 내가 이렇게 경험 많은 것도 집어넣고. 군인들 매는 백 하나 마련해놓고 그 배낭에다 온갖 것 다 집어넣어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지 겸손한 것도 집어넣고 개척교회 한 것도 집어넣고 굶어가면서 전도한 것도 집어넣고 배낭에다 온갖 것 다 집어넣어요. 그러면 우리의 창조주 되신 주님 오게 되면 무슨 일부터 하겠어요? 배낭 열고 집어넣은 것 다 끄집어내요. 이 쓰레기들 봐라. 겸손한 것도 쓰레기잖아. 니 절대성을 위하여 이 짓했다고, 네가 바로 나의 적이야. 원래부터 적이었었어. 인간은.
로마서 5장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 했거든. 지금 하나님의 작업은 원수 된 자를 어떻게 천국 백성 만드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수 돼야 돼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란 사실을 자각해야 돼요. 그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채우는 것을 포기 안 하죠. 원수 된 자로 그 값을 하겠다고 매일같이 채우는 거예요.
소포클레스라든지 그리스 철학자들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자기가 비극적인지 그냥 이유가 없어요. 왜 나 하는 일이 안 되지? 안 되면 내 쪽에서 인내하면 되지. 인내가 또 변명이에요. 힘들었지만 일곱 번 쓰러졌지만 그래도 일어났다는 게 자기 고유성 지키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리스 인간의 대표자들, 철학자들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핍박을 안 받았다는 겁니다. 핍박 오기 전에 지가 알아서 핍박받았다는 거예요. 수를 부리는 거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찌하여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하는 이런 핍박은 예상 못한 거예요. 여기 나오는 신앙인은 예상을 못한 거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 단독적으로 자기변명조로 살면서 자기 고유함을 지키는 사람이 교회 와서 성경을 보게 되면 무슨 모방까지 하느냐 하면, 시편 13편까지 모방을 다 하려고 해요. 고난 받아야지. 고난 받는다고 금식해놓고 점심에 두 배, 세 배나 먹고 살 더 찌고.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에게 누군가 찾아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러한 원수 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찾아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떤 인물이 찾아오게 되면 무엇을 몰고 오느냐 하면, 고유의 환경을 몰고 와요.
현대인들은 본인 혼자 산다고 하잖아요. 사실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현대를 둘러 싼 환경 속에 하나의 요소로서 살고 있습니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사방을 둘러봐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인 줄 알았어요. 북한에선 누구한테 굴복하는 게 사는 겁니까? 김정은한테 굴복하는 게 사는 거죠. 월북해서 북한 시민 될 때는 김정은부터 언급해야 김정은한테 순종하겠습니다, 부터 해야 돼요.
인물이 환경을 몰고 온다는 말을 같은 말인데 바꿔하면, 환경 속에는 중심인물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쉬운 예로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나오지요. 이 세상 많은 인간들 중에서 두 명이죠.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한 것은 두 명이 아니고 두 환경으로 기획된다는 겁니다.
우리 눈에 부자로 보이지만 부자를 둘러 친 환경은 뭐냐 하면, 지옥과 연관돼있어요. 지옥이죠. 나사로는 거지로 보이지만 나사로의 환경은 낙원입니다. 천국이죠. 천국과 지옥에 대표하는 중심인물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중심인물이 궁금해요? 천국의 대표자는 이 땅에서 나사로, 거지. 예수님이 거지 아닙니까.
거지의 특징은 이 세상이 마음 둘 곳이 없다. 펀드 할 돈도 없어요. 이 땅에서 펀드 해야 소망이 생기고 화투판에 돈을 걸어야 세 배, 네 배, 딴다는 게 있는데 거지는 투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거지가 이 땅에 보여줄 것은, 나 죽는다. 나, 가거든. 자기 죽는 것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보여줄 것은 나 죽는다는 거예요. 진짜 나의 나됨은 나의 고유성은 자기 죽음으로 보여주는 게 거지 나사로에요.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누굴 예표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살만한 동네가 아니냐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 죽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부자는 이 땅이 좋아. 죽으면 섭섭해요. 왜? 친구도 많지, 여기에 날마다 열락하니까 그만큼 투자를 얼마나 해놨는지 수익률도 높은 모양이라. 수익률 높은 게 축복이 아닙니다. 점점 이 땅을 떠나기 싫게 하는 마음을 줘요.
축복이 뭐라고요? 축복이란 선행된 율법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이란 환경 속에 같이 놓여있는 상태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시, 예언,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환경을 조성해 있는 사람, 그게 복이죠.
거지 나사로 이야기하면서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나와요. 16절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이렇게 돼있지요. 복음이 전파된다 해놓고 복음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거지였습니까? 아니지요. 거지+부자. 복음의 내용은 거지만 아니에요. 거지와 부자가 결부돼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둘로 구획했다. 나누었다는 그 사실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두 중심인물, 거지냐 부자냐, 에서 거지 나사로는 보이지 않는 환경의 대표자로 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런 관점이 장착되었다면 이런 관점으로 주변인들, 가까운 가족들, 친구들, 교인들, 지인들부터 탐사를 해보세요. 조명을 비춰보세요.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 말을 달리하면, 그들은 무엇을 사랑하는지. 같은 말로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당신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뭘 목적으로 열심히 싸대면서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어보세요. 무슨 환경을 위해서, 거지되기 위해서? 다 털어먹기 위해서요? 온 가족, 자식까지 남편 거지 만들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부~자 되세요, 잘 풀리는 집. 휴지 사들고 와서.
이게 자기를 단독자로 생각하는 겁니다. 라이프니치는 단독자를 단자, 모나드라고 이야기했어요. 닫힌 창. 그걸 어제는 제가 그런 표현했지요. 자기 속을 테이프로 밀봉해놨어요. 내부적인 공포와 두려움은 다 감추고 여긴 내 영역이니까 바깥에서 들어오지 말라고 완전히 밀봉해놨어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겁니다. 단자, 자기 개인위주에요. 자기가 돋보이는 거예요. 환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버티면 환경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환경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 여기 나오는 비탄의 사람은 율법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비탄의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환경이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 내가 어떠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 행복과 나의 절대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환경을 주신 게 아니고 네가 정하기 전에 이미 규정된 너를 집어넣은 그런 환경이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환경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사건,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되고 싶어 한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천국은 어떠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거지 나사로는 대표자로 거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천국은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떠나는 성향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이 땅에서 기대할 것도 없고 소망할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걸 극한 대비로 보여주지요. 부자는 이 세상이 전부에요. 이 세상뿐이에요. 오늘날 과학자 같아요. 오늘날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부에 인정된 모든 교과서 내용이 부자 쪽입니다. 어린 딸자식을 서울로 보내면서 엄마가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따라와서 버스에 올라타는 딸에게 쥐어주는 하얀 봉투 하나, 순자야 잘 살아야 돼. 꺼내보면 얼마 되지 않는 고추 판 돈. 이제는 엄마 잊어버리고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아야 돼.
좋은 남자가 그냥 만나집니까? 좋은 남자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좋은 여자 돼야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참. 아르바이트 취직해서 재벌2세와 부딪쳐 커피 쏟고, 그런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이야기고. 자칫하면 근본도 없는 것들 해서 임신해서 애 낳고 쪽 난다니까요. 순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우리 어머니가 이미 이 부자 쪽에 속한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이고 순박하게 산 그 순박이 결국 순박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 시대의 환경을 대변해주고 있어요. 잘 살아야 돼, 부자 돼야 돼. 부잣집 마나님 돼야 된다.
영화 안 봤지요. 봉준호 감독이 상당히 재치 있게 이야기했어요. 저택이 있는데 부잣집 마나님이 마중을 나옵니다. 주인공 아들이 사모님 되십니까? 아닙니다. 저, 일하는 사람입니다. 부잣집에 일하는 사람이 그 정도로 사모님 포스로 나타난다면 안에 있는 사모님은 어떻겠어요? 가난과 부자가 건너 뛸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어지고 단절돼있다는 그걸 보여주는 영화거든요. 두 계급이라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두 계급이 아니고 두 영역이에요. 여기는 두 계급이 눈에 보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두 영역이 눈에 안 보여요. 오직 하나의 영역만 보입니다. 부자가 칭송받고 부자가 사람 대우받는 그 모습만 보이지 가난한 것은 모습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많이 다니고 아시죠. 교회 아무리 오래 다녀도 항상 자기가 되돌아볼 질문이 있어요. 과연 난 영생 얻었는가? 나는 구원 얻었는가? 나는 천국을 얻었는가? 그 질문을 항상 해봐야 돼요. 수십 년 지나도 해봐야 되고 목사 장로가 되도 권사 집사가 되도 그 질문을 해봐야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 환경에서는 얻었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물체를 내 몸이 지녔다는 걸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느 집에 가니까 전자레인지가 있어요. 전자레인지 얼마 줬어요? 얻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외부에 있던 것을 나한테 가져와서 내 눈에 보이는 나의 영역에 자리를 하나 차지할 때 그건 얻었다고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의 한계가 그겁니다. 얻었다는 것은 눈에 보여야 돼요. 손에 쥐어야 되고 만져져야 안심이 돼요. 도마가 생각은 믿음은 보고 안심하는 믿음이었어요. 그게 도마의 한계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믿음 좋다고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고 했거든요.
복이란 것은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일단 탈락이죠. 눈에 보이는 것은 복은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요소와 결합이 돼야 복이니까. 그런데 일단은 교회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지식으로는 받아들입니다. 현실이 그게 증빙이 됩니까? 전혀 안 되는 거예요. 한 이십 년 되면 증명되겠지? 안 돼요. 삼십 년 교회 다니면 되겠지? 안 돼요.
갈수록 의심, 의심이 더 내가 믿는다는 내 믿음조차도 의심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이건 인간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고 실적이 있어야 되고 손에 잡혀야 되고 그래야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안심이 될 때 나는 믿겠다고 지가 그렇게 결정을 한 겁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들리고 손에 잡히고 그래서 안심이 되는 그런 대상들은 전제가 뭐냐 하면, 나의 나됨이 그대로 건재한 효과거든요. 나의 나됨은 인정되면서 믿을 건 믿자, 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의 절대성은 보장되면서 나의 절대성은 더욱 더 절대성 되고 나중에 천국까지 보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판단해서 믿을만한 것을 가리자.
그렇게 하고 싶은데 계속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걸 이야기하니까 나중에 나이 들면 다 떨어지고 남는 게 뭐냐 하면, 나의 예배당만 남아요. 교회 장로들 기도하는 것 보세요. 전부 다 나의 예배당 아닙니까. 그들의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다고 그렇게 비탄하고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예배당 터가 헐값에 넘어가는 것이 제일 괴로워요. 내가 아버지 유산 받아 헌금한 내 지분인데 그게 뜯기게 되고 보상 적게 받게 되면 다 같이 철야합시다, 라고 나와요.
부동산은 눈에 보이잖아요. 말뚝 박으면 된다고요. 여기는 교회 터. 교회 터라 하면 상스러우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플랜카드 걸면 그게 교회 터에요. 교회 터도 인정하고 전도도 될 겸 남한테 고상하게. 교회는 뭐냐? 교회는 □다. 교회는 부동산이다. 이게 정답이에요. 손에 잡히니까. 이 교회가 있음으로 나의 고유성도 사니까, 안 죽으니까. 그게 바로 부자적 사고방식이에요.
여기 누가복음 16장 16절에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완성은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로 온다고 했지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천국을 부자와 결부시켰어요, 나사로와 결부시켰어요? 거지 나사로와 결부시켰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할 때 복음의 대표자로 누굴 제시하고 있어요? 지금 거지 나사로를 제시하잖아요. 바로 뒤의 이야기가 뭡니까? 거지 나사로 이야기 나오지요.
하늘나라 눈에 안 보입니다. 맞아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식으로 나왔지만 사람들이 거부했지요. 부자 되기를 쳐다보고 있는데 거지는 눈에 안 들어오잖아요. 눈을 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안 들어왔지요. 천국이. 거지가 거지되고 싶어 한 게 아니고 천국 때문에 거지된 거예요.
율법과 함께 있기 때문에 율법이란 환경 때문에 지금 이 거지는 비탄에 잠긴 거예요. 어느 때까지이니까. 주여 나를 영영 나를 잊으셨나이까. 모든 세상 사람들은 나를 놀립니다. 실패자라고 망했다고. 신약에 거지 나사로가 있다면 구약에는 시편 13편이 있는 거예요. 이런 요소는 본인이 공부를 못해서 거지된 게 아니에요. 잘못 투자해서 말아먹어서 거지된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주의 말씀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는 것이 바로 1절에 보면,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나에게 숨기겠나이까” 하나님께서 함께 있었는데 왜 지금은 얼굴을 돌리십니까? 그 돌린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인생이란 무대에 하나님의 원수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서러움과 고난을 받게 하시는 거예요. 비탄에 잠기게 하시는 겁니다. 개인 탓이 아니고 환경 탓이에요.
인간의 몸은 아담에게서 나오고 아담은 이미 원리적으로 악마에 정신적으로 지배받고 있어요. 에베소서 2장 1절에 나오지요. 이 세상의 신이 모든 인간을 불순종 가운데 가둬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의 몸이 있는 이상은 몸적인 세상적인 요소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관통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원하는 대로 부자 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뭐냐? 어디서 구원받았는가, 영생 얻었는가? 그 답변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아느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일이 나한테 붕 띄워놓고 그 뜻이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아예 안 띄워놓으면 모르겠는데 희망 품게 해놓고 희망 좌절시키든지 희망대로 됐는데 갑자기 허무가 찾아온다든지. 에게 이것 하려고 내가 그동안 애를 썼나, 공들였나. 이것 하나 얻으려고 수련회 참석도 안 하고 그랬나,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육에 있기 때문에 말씀이 우선순위가 아니에요. 돈이 우선순위에요. 돈이냐, 말씀이냐? 당연히 돈이죠. 심지어 돌잔치에도 그게 나오잖아요. 돌잔치 선택리스트에 성경책이 아예 올라오지도 않아요. 마이크, 실, 돈, 그 다음에 청진기. 청진기는 의사 되라고, 마이크는 아나운서 되라고, 실은 오래 살라고. 돈은 노골적이죠. 그러다 애가 실 잡으면 억지로 돈 쥐라고.
세상 자체가 자연스러워요. 그게. 그게 너무나 악하다 나쁘다는 의식이 없고 마땅히 그러해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전에 어떤 강의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이미 믿음이 있어요. 돈 벌어야 된다는 믿음이 있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믿음은 이론에 불과하고 기존의 믿음을 차고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어요.
교회 가도 돈이라니까. 전부 다. 교회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변명거리에요. 그래도 이 바쁜데도 교회 나와 줬잖아요. 그러니까 내 몸이 추구하는 것 건들지 마세요. 이런 식이에요. 내가 자꾸 이런 이야기하다보니까 아예 교회 나오지도 않아. 우리 교인들. 지 수법 다 들켜서.
루터가 십자가 이야기했다고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하늘나라만 전부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믿음은 없고 그 당시 기독교 세계니까 성경말씀은 옳으니까 군주들이 무슨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느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볼 때 너무 허무하니까 허무한 속에서도 뭔가 숨 쉴 곳은 찾자. 그래서 생긴 것이 세속화라는 거예요. 허무하니까 너무 아쉬운 게 많으니까 허무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세속화로 나간 거예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일단 우리가 받아준다는 겁니다. 세상 허무한 것 알아요. 허무하지만 허무한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제안이 세속화고 이 세속화가 오늘날 현대 행정이에요. 모든 근대국가의 행정입니다. 세속화하다보니까 하나님을 위로 보내버렸어요. 어차피 허무하니까. 정답은 안다는 거예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정답은 아니까 그 다음부터 교인들이 안 나오기 시작했어요. 왜? 아니까. 허무한 걸 내가 받아들인다니까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 세상은 죄뿐이고 결국 멸망한다는 걸 내가 받아들인다니까요. 아니까 더 배울 것 없지요?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합니다. 수긍은 하되 동의는 안 하는 거예요. 내 몸이 동의가 안 된다니까.
그러니까 교회 쪽에서 놀랜 거예요. 교회 안 오니까 돈이 안 나오는 거예요. 운영을 못하지요. 지금도 영국이고 독일이고 교회를 나이트클럽 만들고, 제가 이번에 벨기에 갔는데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점이 뭐냐? 옛날 예배당을 살려서 책 모아놓은 곳에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점이에요. 네덜란드 강가에 있는데 사진 찍고 했어요.
교회가 이제는 신학을 수정하기 시작했어요. 교회는 부동산이고 돈이니까 운영이 안 되니까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세속신학, 세속적인 신학.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겁니다. 우리의 지친 육신을 달랩시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