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8 - 공간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8 - 공간
19,07,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선악구조와 생명구조 !!
오늘은 교재 13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선미 씨가 참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흡족하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미흡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그 전체를, 즉 "이것은 잘 했고, 저것은 잘못했다" 라고 하는 선과 악의 구분자체를 생명구조로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드신 것은 선과 악에 대해서는 몰라도 되는 존재로,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닌, 선과 악을 아는 인간으로 변질을 시켜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인간은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라고 하면서 평생을 거기에 시달리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인생을 살아도, 죽을 때까지 그 시간 시간들이,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라고 하면서, 90평생을 다 보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원래 만든 인간은 선과 악을 고려하지 않는 인간인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오늘밤 천국에 간다 !!
예를 들어서, 자기가 살인강도가 되어서 그만 사람들을 여러 명을 죽이고 그만 체포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사형을 당한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 인생으로 보면 완전히 종친 인생이 되는데,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밤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악적으로 "내가 누구보다도 더 못한가? 아닌가?" 라는 것을 따질 것이 아니라,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바로 그것을 예수님 앞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강도는 천국에 가고 잘난 척을 하는 인간들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면 우리가 예상한 인간은 무엇입니까? 이왕 사는 것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고 칭찬을 받으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 자체가 자기 인생을 전혀 모르는 잘못된 발상이란 말이죠.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생각하면 과연 어떻습니까? 제대로 안다고 여길지 몰라도,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내 인생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교재 134페이지에 전도서 11장 말씀이 나오는데, 5절과 6절입니다.
(전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전 11: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 알지 못한다 !!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알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그 모든 것이 알지 못하는 것에 포위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알려고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스스로가 고민거리를 가지고 온다는 말이죠.
전도서에서는 '이 세상'을 두고 뭐라고 합니까? '해 아래의 삶'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해 아래서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마치 우리의 손과 발목을 묶어놓고는, 이 대자연이 오직 예수님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은, 이 대자연에 숨어있는 창조주를 '희생자의 모습'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교재 134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 다른 것은 생략하고 그 밑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전도서는 이러한 무지함을 책망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알지 못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알았다고 여길 때 다시 생각하라는 것인데, 즉 '알았다' 라는 것이 '알지 못함'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 알지 못한다 > 알았다 !!
그러니 우리가 '알았다' 라는 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는고 하니, 그 전체가 '알지 못함'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알았다' 라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함'을 정복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좀 더 알고, 많이 알면, 그러면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완벽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자부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전도서 11장에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아는가?" 라고 하는데,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안다고 여기면, 알지 못하는 그 범주가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겁니다. 안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더 자기가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함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면 애가 탄다는 말이죠. 그래서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했는데, 자기가 뭔가 알아야 살아가는데 유리하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여기서 전도서 11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찾지 못한다고 여길 때 도로 찾게 되고,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때는 예측하지 못할 재앙이 들이닥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노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하게 되면 도로 찾게 되고,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때는 예측하지 못한 재앙이 들이닥칠 수가 있다는 겁니다.
* 잘난 척을 하지 말라 !!
그러니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정반대인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 위함인데, 이 세상은 우리 인간 위주로 전혀 편성이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우리는 잘난 척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눅이 드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 '알았다' 라는 것이 '알지 못함'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알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수정해야 합니까? 당연히 알지 못함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알았다는 것이 어제 알았던 것이 이어지기 때문에, 오늘 알았다는 것이 알지 못함이 되면, 그러면 방향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 알았다는 것도 역시 알지 못함이 되는데, 물론 그 이전에 알았던 것도 알지 못함이고 말이죠.
그렇다면 왜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알지 못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중심이 있는데, 여기서 '중심' 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하는 코드가 된다는 것인데, 이 세상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코드가 이 세상에 따로 박혀있다는 겁니다.
* 죽음인가? 사라짐인가?
그것이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인데, 자기가 죽는 날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전혀 모르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사라진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가 박사학위를 3개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자기가 죽는다고 하면 박사학위 3개를 품기 위해서 알았던 그 모든 지식도 모두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를 알고, 친척은 어떠하고, 자식은 얼마나 낳고,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가 죽은 순간에는 다 놓고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사람들과는 졸지에 이별을 하게 되는데, 물론 자기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돈과도 작별이란 겁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근원적으로 몽땅 다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방금 중요한 것을 말했는데, 즉 죽는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인데, 그러면 죽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죽는 것을 자기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말이죠.
* 요한복음 11장 !!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ㅋㅋ),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나오는데, 그가 나사로라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평소에 알고 있던 예수님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자기 오빠가 죽어가고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지금 자기 오빠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는다고 했는데,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그래서 연락을 하면 예수님이 곧 바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마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비로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자" 라고 하니, 제자들이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음을 '사라짐'으로 보는데,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도마가 "그러면 깨우면 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과연 그러한지 요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도마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도마는 "같이 죽으러 갑시다" 라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로가 아니라 회당장의 딸을 깨우러 가지고 했을 때, 도마가 깨우러 가지고 했다는 겁니다(ㅋㅋ).
(요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