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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90705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선회자유게시판레위기

20190705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선회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3장 4절부터 봅시다.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여기 ‘절기’라고 나오지요. 절기라고 했을 때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내용과 연관시켜야 됩니다. 2장 16절을 읽어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구애받을 필요 없다는 거죠.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 17절에 보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구약을 무시하고 가야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이 장래 일의 그림자라 한다면 우리는 구약을 뛰어 넘어서 바로 복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구약을 경유해서 그림자를 경유해서 나와야 돼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다면, 골로새서에 의하면 구약은 신약 밑으로 들어가요. 그러면 신약이 실체가 되고, 하늘에 빛이 있다면 신약은 실체가 되고 실체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기에 구약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기획된 계획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의 몸에서 이런 계획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여기 있잖아요. 우리의 몸이 바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몸은 일단은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어서 이렇게 들어가서 구약, 신약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걸 보고 바로 뛰어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그림자가 되는 세계 속에 들어가려면, 그러니까 월삭이나 절기나 안식일 이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려면 우리 몸이 그냥 들어가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가서 이렇게 가야 돼요.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결과기 때문에 업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이 예수의 몸으로 가게 되면 우리가 달라져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행함으로 구원 얻겠다는 이 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면서 포기돼야 됩니다. 이게 없어져야 돼요. 방금 나의 행함으로 되겠다는 그런 의욕, 의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안 받아주는 이유가, 행함이라 돼 있잖아요. 이 행함이 누구의 행함이라 돼 있습니까? 나의 행함이죠. 내가 의도하고 있는 나에게서 나온 행함은 그리스도 몸에서 그대로 인수되질 않아요. 나의 행함을 접어야 돼요.

나의 행함을 접는 것과 골로새서 2장 16절에 나오는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지적받을 필요 없다는 뜻과 연관이 있는데 안식일은 인간의 노동, 행함이죠. 인간의 행함이 정지되는 날이에요. 안식일의 취지가 인간의 행함이 정지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에 인간 자체가 결과물이지 인간의 협조를 통해서 창조가 완성되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완성에 인간의 행함은 조금도 보탠 적이 없어요. 그 완성을 하나님의 안식이라.

안식이란 완성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칠일 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쉬셨다. 그래서 안식인데 칠일 동안 창조할 때 인간의 행함은, 인간의 노동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안식이란 너희들의 노동을 중지하라, 너희들은 일하지 마라,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일하지 마라, 일하지 마라 하시는 그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시고 그 날엔 노동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요.

우리가 교회 와서 성경을 보면서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 이유가 뭘까,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이유를 모르게 되면 이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뜻과 마찬가지거든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에요. 이유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가 누군지를 다시 재조명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진정 내가 누군지를. 남들이 나를 누구라 하는 것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누구라고 할 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안식일이라든지 십계명이라든지 율법이 거기에 게재되는 거예요. 들어가는 거예요.

지난 울산강의에서 율법을 언급하면서 시내 산 올라갔던 모세의 안목과 시내 산 밑에 이스라엘 백성의 안목이 완전히 대비가 되고 서로 대립이 일어나는 걸 말씀드렸지요. 대립이 된다는 것은 평소에 내가 거울 보면서 내 인생 살아오면서 나는 이 정도라는 것은 완전히 오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창조주가 나를 뭐라고 보느냐, 라고 해야지 창조 된 내가 뭐 되고 싶다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욕심입니다. 세상에 모든 불행과 근심걱정은 자기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를 자꾸 거론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문둥병, 앉은뱅이, 그리고 절뚝발이, 귀머거리. 왜 자꾸 예수님께서 그들을 관련시켜서 부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귀머거리, 앉은뱅이, 죽은 자, 귀신 들린 자.

그게 인간이 평소에 내가 이 정도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닐 거라고 빼먹는 그 요소거든요. 나는 소경 아니야, 나는 귀머거리 아니야, 나는 문둥병 아니야, 나는 세리 창기 아니야, 죄인 아니야, 라고 빼먹는 그 자리, 그것을 도로 우리 얼굴에 처발라버리는 거예요. 빼먹기는 뭘 빼먹어. 이게 네 얼굴이야. 이게 네 현주소야.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이 어둠이란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이 세상이 어둡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양이 있다고 밝은 게 아니에요. 빛은 예수님이 빛이고 나머진 다 어두워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장에 그렇게 돼있습니다.

어두움은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면 빛의 세계에 가려면 어두움이 뭐로 바뀌어야 되겠습니까? 빛의 자녀로 바뀌어야 되겠지요. 빛의 자녀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빛의 권세가 아들이 되는 권세가 부여돼야 돼요. 제공돼야 된다고요. 어두움에 빛이 와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두움이 안 되려고 해요. 어두움이란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해서. 앞에 ‘이’ 같으면 ‘이 어두움’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최, 김 이렇게 나가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 전에 미국 갔다 오고 난 뒤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아내가 기념물로 뉴저지 어느 대학의 셔츠 두 개 샀어요. PRINCETON이라고 적혀있는 그 셔츠를 입으면 프린스턴대학과 관련 있는 사람처럼 되잖아요. 프린스턴대학이 뉴저지에 있는데 거기 안 가봤으면 살 수가 없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려면 PRINCETON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크가 찍힌 그런 새로운 피조물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프린스턴대학에서만 파는 거예요. 딴 동네에선 팔지 않아요. 주님이 와서 우리에게 주는 게 있어요. 주님께서 주는 것이, 이 땅에서 내가 얻는 펀드나 은행잔고, 부동산, 자식 공부시키는 것, 그것과는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교회 부흥시키고, 어떻고 그것과 비교 안 돼요.

주님이 주시는 것은 주님의 노동과 그 결과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의 노동과 평생 수고한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에요. 그건 어두움이니까. 질이 나빠요. 질적으로 나빠요. 양이 아무리 우리가 부자 되도 질이 나쁘면 양은 소용없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거짓된 믿음인 것은 자기가 눈치 채야 됩니다.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전부 다 거짓된 것이라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은 다 거짓된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믿음, 소망, 사랑이 좋아도 내 소유가 된 순간 나는 어두움의 인식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믿음, 소망, 사랑은 다 거짓된 겁니다. 거짓된 믿음은 통하질 않지요.

우리가 주님의 자리에 가려면 나의 행함과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전부 다 거부당합니다.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나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내가 소멸되고 나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가 있던 그 자리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차지한 자리가 되었다고 이야기해요. 이걸 사도 바울은 성령이 임한 모습이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성부든 내가 관리하고 내가 관계 맺으려고 내가 수고하고 애쓰고 있는데 성령이 와버리면 주도권이 바꿔요. 내가 주님 것을 가지는 게 용납이 안 되고 주님이 갖고 있는 그것을 우리에게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소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한테 소유당하는 게 됩니다. 나의 것은 소멸되는 거예요.

나의 것은 소멸되지만 내 몸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나의 것이라 할 때 그 ‘나’라는 게 가설이에요. 나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일단은 나라고 해보는 겁니다. 현재 몸이 있는 나를 나라고 해보는 거예요. 그런데 점점 세월 가면 나라는 것이 닳아지지요. 죽게 되면 나라는 것도 없지요. 몸이 없다는 말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몸은 있어요.

이 몸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일단 어두움의 세계에서 나온 가설이라고. 가정해보는 거예요. 네 것 아니잖아. 아버지 것 아니죠? 그러면 내 것 맞네, 라고 주님 오기 전에는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제가 지금 억지 부리는 것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너희를 값을 주고 산 것이니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라도 돼있어요.

하도 요즘 세상이 성경 안 보는 분위기가 돼서 봐도 기억 안 날 정돈데 아예 안 보니까. 왜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가설로 된 내가 자기한테 흡족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아파트, 내 몸, 내 것이라는 것이 별로 이것이 거북스럽질 않아요. 좋아 보이고.

고린도전서 6장 19절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우리 몸은 내 것으로 있는 게 아니고, 그건 나의 가설이고, 성령이 임할 거니까 잘 간수하라고 주신 몸이 주님한테 부여받은 몸이 우리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장차 성령이 오게 되면, 내 자리 여기네, 하고 본인 자리 찾아가게 만드는 그릇이 우리 몸이 되는 겁니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영광을 돌리라는 이 명령은 성령께서 수행하시는 겁니다. 성령 없이 수행을 못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대신 말씀을 받아서 성령께서 기어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되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선 우리가 육적으로 방해 놓는다고 실패할 분이 아니거든요.

강의하면서 중요한 걸 다시 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란 거예요. 나의 믿음은 거짓이에요. 나란 자체가 가설이고 거짓이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믿음도 거짓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거짓된 믿음과 주님이 주신 믿음과 이 몸을 가지고 평생토록 바꿔치기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네 믿음 말고 주님의 믿음, 네 소망 말고 주님의 소망, 네 사랑 말고 주님의 사랑.

그러면 주님의 사랑인지 내 사랑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 내 행함과 공로와 수고와 노동이 들어가면 내 거고, 주님의 수고와 노동이 들어간 결과로써 주어지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면 이거는 우리 몸 자체가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오기 전까지 악이라 하는 것은 내가 판단해서 나쁜 짓을 해서 악이라고 보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악은 뭐냐 하면, 주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 그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했다고 여기는 것이 악이에요. 내가 선하려고 노력해서 선하다. 내가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 이런 게 전부 다 악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만약에 왔다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했던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지요. 특히 나는 거짓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사랑받고 싶다. 인간의 본성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하나로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면, 모든 인간은 사랑받고 싶어요. 아무로 돈을 많이 가지고 친구가 많아도 사랑받는 게 아니거든요.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가 여섯이어도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조건 사랑을 갈구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버림받기 싫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망하기 싫다. 나는 사랑받고 싶다. 같은 말로 버림받기 싫다, 나는 망하기 싫다, 남한테 욕 얻어먹기 싫다, 하는데 이 모습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타락한 모습이에요. 인간은 창세기 3장 딱 그대로 맞다. 벌써 너희들은 타락했구나. 우리의 본성이 창세기 3장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고생하게 돼 있잖아요. 땅에 저주받게 돼 있지요. 왜 고생하게 되느냐 하면, 고생할 만하니까 고생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이, 나라는 게. 평생 낙이란 없고 늘 근심과 탄식과 힘든 인생, 고난, 육체적 아픔, 이걸 겪는 것이 마땅한 존재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마땅함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고 우리는 싫어,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조치에 대해서 그런 상황, 현실을 강력하게 반발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밀어내고 있는 거예요. 난 사랑받고 싶어. 저주받기 싫어, 망하기 싫어. 무슨 권리로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뭔데 버림받기 싫어요?

버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 이런 고백 못해요? 나라는 가설에서는 절대로 그게 나올 수 없어요. 나 자체가 수상하고 나 자체가 꼬였고 나 자체가 거짓된 나로 완전무장 돼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나는 망하면 안 되고 무조건 나는 천국 가야 되고 무조건 나는 행복해야 되고 고통이 없어야 되고 만사형통해야 되고. 이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그 무조건, 누가 가르친 거예요? 그 배후가 누가 일방적으로 뒤에서 부추기는 겁니까? 하나님께 대들라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반발하라고 누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너에겐 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너만 편하고 너만 잘 되면 되잖아. 그게 모든 생각의 일순위입니다.

그래서 일순위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진짜 하나님이 아니란 뜻이에요. 하나님 믿는다 하지만 항상 생각은 내가 일순위에요. 내가 일순위란 말은, 그만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엉터리였고 있지도 않는 거짓된 하나님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지난번에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육일 창조하시고 칠일에 쉬셨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시간 안에는 무슨 내용이 꽉꽉 담겼느냐 하면, 육일 창조했고 하루 쉬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그 내용이 꽉꽉 차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계속 그런 원리를 담고 세상 끝 날까지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에게 시간은 자기가 수고하고 노동하고 애쓴 것을 기록하는 자기의 과거 일기장 같은 거죠.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살아온 기억 속에서 자기의 지난 긴긴 인생이 다 담겨있어요. 경쟁이죠. 주님이 인정하는 시간은 창조와 안식, 그게 내용으로 꽉 차있는데 인간에게는 그런 내용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름다운 나의 추억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두 시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의 시간이란 내가 살아 있는 한 끊어지지 않아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뭐로 그렸느냐 하면, 뱀으로 그렸어요. 날름날름 뱀이에요. 내 인생 자체가 안 끊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시간은 칠일 단위로 끊어져요. 인간의 시간은 길게 늘어졌지만 주님의 시간은 시간의 선회에요. 선회 또는 순환(circle), 뱅뱅 도는 겁니다. 미지의 X가 있고 X 주변을 빙빙 돌아요. 칠일 주기로. 계속 도는 겁니다.

소용돌이는 중심이 있고 주위에 빙빙 도는데 그러면 중심에 뭔가 물을 빙빙 돌게 하는 끄는 힘이 안에 있지요. 주인공이 있을 거란 말이죠. 주님께선 미지의 X, 아까 이야기한 구약에는 그림자고 신약에는 그리스도에요. 모든 시간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님과 함께 있고.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니까 순환구조로 되는 겁니다.

구약에 초기에는 안식일로 칠일 단위로 끊어서 순환했지요. 나중에는 절기 단위로 끊어요. 나중에서는 50년 단위로 끊고. 그 50년을 바로 기쁨의 날, 희년이라 합니다. 희년의 의미는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내가 가난해서 토지나 가옥을 팔아먹었는데 50년만 기다리면 다시 돌아오게 돼있어요. 50년 되기 전에 돌아올 방법이 있어요. 내가 돈을 벌어서 빚진 걸 갚을 때는 다시 내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내 소유를 남한테 팔아서는 안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토지나 모든 가족은 이스라엘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에요. 하나님이 아파트 분양하듯이 분양해준 겁니다. 주께서 빌려준 거예요. 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주께서 빌려준 몸이에요. 내 몸 같으면 이게 내 이름 되는데 이게 주의 것이라면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고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느냐 하면, 원래 주인 되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의 이름이란 뜻은, 주의 영이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정말 그때는 내 몸이 내 소유가 없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원래 주인이 차지하고 난 뒤에는 그동안 나는 무슨 착각, 헛된 망상을 했구나, 라고 알게 돼요.

인간의 시간은 뱀이거든요. 어느 한 순간도 끊어짐이 없어요. 계속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고 있으니까 옛날 초등학교 때 필통도 아까워도 못 버리죠. 왜? 내 거니까. 자식은 물론 내 자식이고요. 손자도 내 거고. 이사 갈 때 벽지에 붙어있는 그것, 물론 뒤에 비자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비자금이 너무 오래 돼서 바꿀 수도 없는 옛날 돈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장판 하나 벽지 하나 전부 다 내 눈물과 한숨과 슬픔과 애씀과 죽을 둥 살 둥 내 목숨 바쳐 만든 돈 주고 산 벽지들이고 장판들이에요. 얼마나 그게 아깝겠어요.

대전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나라 영화 (2013)에서 하얀 나비 불렀던 나이 칠십 다 된 노인네가 행복사진관에서 사진 잘못 찍어서 이십 대 초반이 돼서 다시 옛날 청춘을 살고 싶다고 하는데 애 키운다고 시장바닥에 애쓰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거기에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 나도 60년대 참 어렵게 살았다. 신혼여행이라고 겨우 경주 불국사에 갔고 신혼집에 아무것도 없고 비키니 옷장 하나, 부엌도 없이 방 한쪽에 석유곤로로 밥해 먹고 살았다. 둘이 같이 있는 것만 좋아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겨울 되면 외풍이 있어서 옷으로 막고 살았다. 방 한 칸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았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결혼한다고 하면 2억 대출 받아서 헌집은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새 아파트만 찾고 있으니, 참. 어른들 입장에서는 그 집도 깨끗하구먼, 그냥 살면 되지. 그런 것 없어. 무조건 대출, 빚내서라도 동창생한테 남한테 안 지려고 기 안 죽으려고 허풍과 허세를 떨고 있고. 한심하지요. 이러나저러나 성령 안 받긴 마찬가지에요.

그만큼 애지중지하면서 인생 살아왔던 그게 화근이 되는 거예요. 도리어 너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버릴 수 없어요. 아까워서. 엄마, 아빠 재산 다 날리고 집 나가서 어디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면, 그런 자식은 반갑다 해서 얼른 경찰서 가서 혹시 그 애 생명보험 든 것 없는지 그런 거나 찾고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너무나 애지중지하던 걔가 세월호 타고 가버렸을 때, 그때는 미치는 거예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우상. 우상을 제가 다른 표현으로 하겠습니다. 특화. 특별하게 특화하는 거예요. 야곱은 요셉을 특화했어요. 그 많은 아들 가운데 유난히도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걸 야곱 앞에서 소멸시키죠. 없애버리죠. 그게 야곱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간다는 것,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냥 못 들어가요. 너의 우상을 가져오너라. 그게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너무 사랑했어요. 하나님의 지시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그것에 꽂혀있습니다. 그 아들을 내 앞에 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이야, 네 아들이야? 확실히 하자. 네 아들 믿는 거짓 믿음이야, 하나님 믿는 진짜 믿음인지 확실히 하자.

내게 특화된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이 땅에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망해야하기에 망하는 것을 저는 수긍하겠습니다. 버림받는 것을 수긍하겠습니다. 어떤 사랑도 받지 않는 것이 내 처지에 합당하다고 수긍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어찌 이런 믿음이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와 과거에 뱀 같은 인생 경험에서 지혜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겠어요. 안 나옵니다. 쥐어짜도 안 나와요. 평생을 신학공부해도 안 나와요. 신학이란 하나님은 없음을 제대로 증명해주는 게 신학이에요. 신학은 모든 신은 인간이 염원에서 나온 상상의 대상이다. 그게 신이다. 그게 신학의 결론입니다.

신학교 간 신학생, 졸업한 목사 가운데(서 목사님 빼놓고) 신자 있거든 찾아보세요. 신학을 못 버렸다는 말은, 나는 신자 아니고 인간들이 원하는 우상의 신을 잘 활용할 준비가 돼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원하는 신으로 장사할 준비가 돼있다는 그게 목사나 전도사들이 할 짓이에요. 신학을 해놓고 신학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법학을 하고 난 뒤에 법학박사 되고 난 뒤에 법학이 죄란 걸 모르면 학위 몇 개 가져도 그건 신자 아니에요. 의학을 해놓고 의학이 나를 망하게 하는 죄라는 것을 모르면 그거는 신자 된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지요. 예수님도 병 고쳤다고. 여러분, 예수님이 고친 병은 흔히 의사들이 고치는 병이 아닙니다. 진짜 인간을 치료한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지 못하는 한 그건 치료된 게 아닙니다. 어느 의사가 어느 성형외과가 영생을 주던가요? 어느 산부인과가 영생을 주던가요? 영생 주는 내과 봤습니까? 속 편한 내과야 우리 대구에도 많아요. 한둘이 아닙니다. 같은 상호, 속 편한 내과라고. 그러나 영생 주는 내과 어디 있습니까?

속 편한 게 뭡니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거지요, 뭐. 사랑 받고 싶으면 사랑해주겠다는 거예요. 해독주스가 영생 줍니까? 분명히 성경에서는 이 땅은 우리가 고생하는 곳이에요. 결국 의사가 하는 일은 뭡니까? 고생하는 길에 더 고생하라고 수명 늘려주는 일이 의사가 하는 일이에요. 주님은 서른세 살에 일 다 끝났어요. 의사는 질질 끕니다. 골병이 들도록 질질 끌어요. 무슨 흉한 꼴을 보려고.

칠십에 죽을 사람을 구십까지 살려놓으니까 이십 년 동안 본인도 끔찍스러운 경험들을 하는 거예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망가진 귀신처럼 험한 이십 년을 더 보내게 만들었어요. 왜? 의학의 발달 때문에. 코에 호스 꼽고 있는 돈 다 날리고 보험 있는 것 다 써서 나라 재정까지 말아먹고.

인간은 시간을 자기 시간이고 싶어 합니다. 결국 인간의 자기 사랑은 성경을 안 믿어서 그래요. 영생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죽어도 좋아요. 우리 죽음의 위협보다 능가합니다. 그래서 영생 얻은 기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 놓고 살질 못해요. 영생 얻은 기쁨이 있으면 이 땅에 강도가 되도 괜찮고 창녀 되도 괜찮아요. 마음 놓고 살아요. 왜? 얻을 것 다 얻었으니까.

그럼 영생은 어디 있는가? 바로 내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몸 안에 들어가면 영생 있어요. 그래서 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안식일과 절기와 모든 율법에 대해서 이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율법이 뭐라고 지적하든지 성경말씀이 뭐라고 죄인으로 꽂아주든지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거예요. 마음대로 꽂으라 하세요. 마음대로 죄인 되면 되니까.

마음대로 죄인 되는 즐거움이 있고 자유가 있어요. 왜? 그게 바로 우리 몸 맞으니까. 죄인 맞으니까 죄인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 알라. 그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못 지키는 몸을 갖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 말씀 주신 거예요. 무슨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신발도 좀 좋은 것 신고. 대구까지 걸어가야 돼요? 차비도 해야 되고. 먹는 것 입는 걸 어떻게 족해요? 어딜 나가지 말란 말이에요? 아니거든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는 말은 뭐냐 하면, 참새 같이 살고 들풀 같이 살란 말이죠. 오늘 죽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너무 심통 내지 말란 뜻이에요, 그게. 어차피 니 몸 아닌데 내일까지 버티려고 살려고 애를 쓰느냐 말이죠. 수련회 꼭 해야 됩니까? 영생 얻으면 됐지. 이러면 수련회 참석 안 하면 안 되는데…

희년을 되돌려받는 건데 첫 번째 지가 돈 벌어서 되돌려받을 수 있고, 돈 없으면 유력한 친척이 와서 물어주면 다시 돌려주는 게 있고. 세 번째는, 50년 되면 하나님이 그냥 돌려줘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척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척이에요. 왜? 50년 시간 됐거든. 그래서 이건 우리한테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 것을 되돌려받으면서 너희가 갖고 있어도 결국 내가 모든 걸 빼앗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수고와 노동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성경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그림으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두 개의 선이 나란히 갑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게 있지요. 고속도로와 ktx철로와 나란히 가는 코스 많지요. 하나님의 시간은 안식일의 취지를 담고 갑니다. 구약에서는 그림자, 신약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이 없어요. 완성됐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시간이 스톱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고속도로는 인간들의 역사와 전통, 관습, 관행, 가문의 뼈대 이런 것으로 계속 달리는 거예요. 아까 뱀처럼 계속 가는 겁니다. 여기는 심판, 멸망이죠. 여기에 악마가 동승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말합니다. 최후로 네가 믿을 너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그런 식으로 부추기고 그런 인식을 계속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너한테 도움 될 때나 하나님이지 도움도 안 되는 하나님을 왜 믿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무슨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 신학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없다.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교회 장로들이 그런 결론을 많이 내려요. 목사도 그렇지만 안 그런 척하고.

모든 교회가 신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행복하고 몸 건강한 것, 이게 주 안건이에요. 교회에서 기도하고 주로 그걸 추구하는 거예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왜 사느냐고 물어보면,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당신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내 마음이다, 이러거든요.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느냐.

주님께서는 성도한테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주님의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성도한테는 철도가 고속도로로 달리는 이 몸에다 등에 올라타요. 그러면 성도에겐 두 개의 시간이 중첩되어 달리고 있습니다. 위에 지나가는 인간의 몸, 악마의 사주 받아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그 몸을 주께서 뒤에 들러붙지요. 들러붙으면 내 뜻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줘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기존에 인간의 몸이 성경을 보잖아요. 안식일 나오고 희년 나오고 십계명 나오면 그걸 지키려고 해요. 왜 지킵니까? 누구 좋으라고 지켜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 지키려고 한다 이 말이죠. 내가 지키면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 다 동원하지요. 내가 뭔가 지키게 되면 그게 그대로 기억 속에 추억 속에 누적이 될 게 아니냔 말이죠. 나 이 정도로 착실하게 충실하게 교회 생활 잘했다.

전부 다 앞에 ‘나’가 붙어있지요. 나는 가설이라 했지요.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임시로 붙여보는 거예요. 내 몸은 내 거라고 임시로 붙여보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성령을 받아야 아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모른다 이 말이죠. 그러나 성도는 성령이 와버리면 이 둘 사이에 계속해서 티격태격 투쟁과 갈등과 다툼과 그리고 밀고 당기는 사이가 돼버려요. 그걸 어려운 말로 긴장관계라 하는데,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치게 만들어요.

나이 팔십 먹은 노인이 운전할 때 젊을 땐 운전 잘했는데 아이고 눈이 왜 침침하노, 하고 여기 한 번 박고, 또 고속도로 가보면 역주행하고 있고. 술도 안 먹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 방향을 몰라. 한계에 이른 거죠. 어디 처박는 거예요. 놀이동산에 범퍼카처럼 박아놓고 딴 길로 가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하고 인도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네가 했다는 걸 털어내라고.

안식일 자체가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주님의 공로만 찬양하는 것이 안식일이고 그 안식일의 완성이 안식의 세계, 영원한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천국 간다고 우기면서 자기의 열심을 내세우고 바르게 살았다고 하는 게 있으면 그걸 털어내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필히 조치를 하게 돼있어요.

그 털어내는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단절입니다. 그 단절을 오늘 본문에서는 유월절 단절, 맥추절 단절, 수장절 단절, 그리고 대 속죄일, 절기 때마다 딱딱 끊어주는 거예요. 절기 때마다 끊어주고 절기와 절기 사이에 안식일을 집어넣어요. 이것은 곧 하나님이 너희와 협의하고 의논하려고 한 대상이 아니고 네가 없는 데서 만들어진 안식의 창조의 원리로 또 다시 주께서 끊어진 그 다음부터 창조의 원리를 다시 주입합니다.

인간들의 육일 동안 일하면서 또 자기 쪽으로 온 걸 안식일로 끊어서 창조 될 때 네가 거저 받았다는 거예요. 은혜라는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는 데서 은혜가 안 나오고 네가 얻을 수 없는 다른 곳에서 은혜를 받아놓고 너는 네가 힘들여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우기니까 주님께선 성령을 받은 사람한테는 계속해서 그걸 지적을 해주는 겁니다. 올라타서.

그래서 올라탈 때는 그러니까 주일에 교회 와서 복음 들을 때는 내가 참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라는 가설 자체가 허망한 거고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가 교회 문만 나가면 계단만 내려가면 벌써 내가 아는 주님은 등짝에 있기 때문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니까 눈앞에 것만 보이는 거예요.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애 학원이라도 보낸다고 또 열심히 사는 거예요.

열심히 사는데 성령께서 또 힘들게 하니까 주여,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날 힘들게 하고 아프게 만드십니까? 또 눈을 희번덕대고 뒤집어져서 원망하기 바쁘고. 나는 하나님 잘 섬기려 했는데 하나님 쪽에 나의 섬기는 환경을 허락하지 않았잖아요. 섬기려고 했는데 주님께서 자꾸 막으니까 못 했잖아요. 책임지세요. 주님께서 우리 수고 받지도 않는데 지가 수고하려고 했는데 안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시간 속에 인격이 어떻게 담기는지 그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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