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강-YouTube강의(공로의 위험성)20190702-이 근호 목사
280강-YouTube강의(공로의 위험성)20190702-이 근호 목사
제280강, 제목은 ‘공로의 위험성’. 남이 애쓴 것은 내 공로가 안 되죠. 공로가 되려면 내가 애쓴 게 되요. 내가 애써서 결과가 나올 때 그걸 공로라고 하죠. 남 앞에 보일 수 있는 공과, 공로. 이 말은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공로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결과가 생긴다면 그 결과와 나와 어떤 연결이 되겠느냐. 라는 그 점에 대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당황하고 낯설어 합니다.
내가 안했는데 결과가 주어졌다면, “이거 제가 안했는데요.” 이렇게 나오겠죠. “이거 제가 안 한건데 왜 저한테 이런 게 옵니까?” 라고 이야기 될 거란 말이죠. 그럴 때는 무엇을 본인이 스스로 부정하느냐면 자기 공로를 스스로 부정하는 게 되겠습니다. 그럼 자기 공로를 부정하게 되면 내가 행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받았을 때에, 그 사람이 자랑한다면 무엇이 자랑에서 빠지냐 하면 ‘내가 행해서 이걸 얻었다’ 하는 것은 쏙 다 빠지겠죠. 내가 행해서 얻은 거는 다 빠질거다. 그렇다면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얻었다면 이 공과, 공로는 외부에서 주어진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그냥 하늘에서 뭔가를 주는 것 자체로서의 복음이 아니라 무엇과 연관을 시키냐 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와 결부시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이렇게 될 때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럼 복음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이 세상에 여러 직장, 직업들이 있지만 누가 적절하냐 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저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 아주 적절하죠.
세리가 그렇고 창기가 그렇고 강도가 그렇고 또 죄인들이 그렇고. 그리고 죄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질병을 가진 사람, 또는 귀신 들려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께서 건져냄으로써 비교되는 거예요. 뭔가 하자가 있는 사람을 건지는 것하고-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하고, 소위 본인 스스로 나는 괜찮은 존재, 나는 스스로 나 혼자 있어도 우수한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을 주께서 찾아갔을 때 거기에 나타나는 반응들을 한번 비교해보자 이 말입니다. 어느 쪽이 복음의 반응이겠습니까?
포도원 비유에 아침에 일찍 온 사람과 제일 나중에 온 사람. 품삯을 나눠줄 때 그 반응이 같지가 않았다,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에게 천국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어떤 현상이 계속 일어나느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되는 현상이 되풀이되서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의 심보라 하는 것은 나중된 자, 꼴찌를 싫어해요. 유명세 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줄 세운다고 이야기하죠. 줄 세웠을 때 성적이 상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쳐지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이 안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뒤쪽부분을 만약에 잘라서 구원한다면 앞쪽은 인생 뭐 살았습니까? 헛산 게 되지요, 인생이.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유명한 것이 하나님께 복받은 결과라고 보는 겁니다. 복을 받게 되면 유명하게 되고 복을 안 받게 되면 뭐 판도 별로 안 팔리고 인기도 없고 그렇게 되겠지요. 사람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 어디에 적절하겠어요? 내가 살라고 애쓰고 애써도 아무리 애써도 내 공과는 이 세상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겠죠.
목회도 마찬가지고. 열심히 했는데 교인3명. 그냥 멋있는 인물 들고 큰 교회에서 우아하고 품위있고 품격있게 점잖게 강단에 서기만 했는데, 잘난 얼굴로 멋있는 허우대로 서기만 했는데 한 주에 등록교인 500명. 이거는 아무리 애를 쓰고 설교 준비 많이 해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왜 유명한 것을 부러워하느냐면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 그것 과연 주님이 같이 좋아할까요?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궁극적인 시험거리라고 할까요? 유혹거리가 뭐냐하면 이 세상에서 유명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만 유명하겠지요, 사람들이 알아주겠죠. 문제는 주님이 안 알아준다는 겁니다. 주님이 알아주지를 않아요. 왜냐면 주님이 꼴찌기 때문에. 주님이 퇴학당했잖아요,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잖아요.
그것은 주님 가시는 길과 이 세상이 추구하는 그 길이 방향이 반대가 돼서 그렇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가면서 지금 천국 가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무지 헷갈려요. 교회 오는 것 보니까 천국 가겠다는 마음 같은데 막상 교회에서 기도하고 추구하는 것 보면 이건 지옥 못가서 환장해요.
그래서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저 혼자 유명한 말이지만, 친구따라 지옥간다. 친척따라 교회가서 지옥간다. 보통 친구따라 강남간다 하잖아요. 아는 사람 전도해서 같이 지옥간다. 둘 다 하나님 뜻 입고 세상에서 유명세 떨려는 그 욕구와 욕망을 안 버리고 그것을 오히려 교회에서 장려하고 키우려고 하는 겁니다.
감사헌금 제목들이 뭐에요? ‘망해서 감사합니다’ 그런 것 특이한 사람도 있긴 있겠지만, 대부분의 감사헌금은 그렇지 않죠. 아이고 참 죽을 뻔했다, 큰일날 뻔했다. 이래서 죽을 뻔한걸 살려줘서 감사합니다. 이러잖아요. 주님 가신 길과 반대 길로 가면서 도리어 감사하대.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거 이상한 거 아닙니까? 이게 이상한 짓이 아니고 너도나도 다 그러니까 그게 정답인 줄 알고 있어요. 좀 망했다 하면 부끄러워서 교회 낯짝 들고 나오질 않아요. 좀 됐다 싶으면 낯짝 들고 나온다고요. 자랑거리 어디 경쟁하려고 교회 하는 겁니까.
공로가 왜 이렇게 위험하냐. 그건 일상 속에 인간들이 갇혀서 순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7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예수님에게 “점심 같이 합시다” 해가지고 “오케이” 했다 이 말이죠. 들어가는데 잡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손을 안 씻었어요. 그러니까 38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손을 왜 안씻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하죠. 39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갇혀있는 내부가 탐욕과 악독이 계속해서 순환하면서 바깥에는 깨끗함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뭐냐 하면 어려운 말씀인데 바깥이 깨끗하게 나왔다는 말은 속에 뭐가 순환한다? 탐욕과 악독이 순환하는 그 결과물로 바깥에 ‘나 깨끗하죠’ 하는 결과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중적이죠. 차라리 속을 보여야 될 텐데.
남들이 기대하는 공과에, 공로에 신경을 쓰는 거예요. 남이 나를 인정해줄 때 그걸로 나는 내 자신의 본질로 여기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겉을 보여 달라고 오신 게 아니고 “기다려라. 내가 니 속까지 쳐들어갈게. 니가 얼마나 악독과 탐욕인지”.
따라서 성도라면 자기의 악독과 탐욕이 가득한 것을 주님 앞에 들킨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겠죠. 그러면 천국 가는 데에 자기의 공로가 절대로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