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목자 190702
강남-요한복음 21장 15절(양과 목자)190702a-이근호 목사
자, 요한복음 21장 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내용은 의외로 상당히 난해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에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 내용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왜 어려우냐 하면 이거거든요. 양이 없어요. 그리고 목자도 없습니다. 양이나 목자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있으면 먹이면 되는데 아예 양이라는게 없어요. 그리고 양이 있다면 목자가 먹이면 되는데 목자도 없어요.
있는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은 사람이 있거든요. 사람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은 사람을 먹이라 하지 않고 뭘 먹이라? 양을 먹이라 하잖아요. 그러면 조건이 뭐냐 하면 사람에서 뭐로 변경 시켜야 되요? 사람에서 양이 되야 되는데 사람에서 양되는 방법을 인간은 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법이 아니거든요. 양은 반드시 목자와 병행해서 출몰하게 되어 있어요. 나 양 될래. 목자 오세요 라고 될 수가 없어요. 목자와 양은 동시에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양 된다고 해서 주께서 양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목자는 없는데 자기 혼자 저 양될래요 손들고 나온다고 해서 그래 너 양이야 라고 규정해주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이야기는 이거에요. 사람에서 양과 목자가 되는 것은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주님의 사랑’이 들어가야 되요. 주님의 사랑이 들어가지 않으면 양과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제가 바꿔서 이야기할게요. 사랑이 없다면 양과 목자도 없다 이 말이죠. 사랑이 없다면 그냥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사람으로.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거는 안받아줍니다. 왜냐하면 시스템 자체가 양과 목자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작동을 하거든요. 운영체제라고 하지요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컴퓨터 운영체제. 하늘나라의 운영체제는 양과 목자의 운영체제이기 때문에 거기는 사람이 끼어들지를 못해요. 사람이 안 들어갑니다.
사람이 양이나 목자로 변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이거는 하나님의 편에 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한테 배제당한 그러한 세계가 되는 거에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양과 목자의 체제이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체제를 주님의 체제라고 한다면 여기 사람은 전체는 개인은 없구요 그냥 뭐냐 하면 체제만 남지요. 어떤 체제? 양과 목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집단.
그럼 사람들의 집단의 특징은 뭐가 누락됐겠어요? 예? 사랑이 없지요. 사랑이 없는 거에요. 왜 사람 세계에 왜 사람 시스템에 사랑이 없느냐 하면 사랑은 1이 아니고 반드시 사랑이 되려면 반드시 2가 있어야 돼요. 2가. 1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2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죽어도 2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을 통해서 여자가 생겨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둘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둘이 하나라고 했지요. 그러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슨 요소가 들어가야 이게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유지되고 살아 있어야 이게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의 요소가 빠진 상태에서 인간이 아무리 누구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로 모든 의미가 소환되느냐 하면은 사랑이 나왔던 나에게로 저 상대가 나에게로 이렇게 귀속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둘이 되고 싶어도 결국은 내 중심의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말아요.
특히 부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주일 낮설교했잖아요. 가족이란게 있더라도 세 식구 있더라도 한 식구 한 식구 전부다 그 가족을 누구 중심으로 봅니까? 날 위한 가족이라고 세 명 다 one, two, three 세 명 다 그래요 세 명 다. 심지어 거기 강아지 있으면 강아지도 그럴거에요.
인간은 자기를 포기하거나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나를 부인 못하면 나는 굳건하게 절대적 하나를 포기 못하는게 되요. 예수를 믿던 그것도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것도 나를 위해서 나 천당가기 위해서. 모든 세상의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로 2를 용납하지를 않아요.
내게 필요한 임시적 조치의 2가 되지 그 2는 나에게 결국 종속되고 귀속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각자 자기 자신이 절대화된 상태에서 그러한 인간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에 인간이 양이 된다든지 인간이 목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없습니다. 양도 없고 목자도 없고 오직 인간들만 있는 세계, 그 세계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게 사랑이라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했는데 그러면 주님의 사랑은 주님 사랑이 오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는데 주님의 사랑은요 사랑이라는 주님의 존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에서 와요.
어떤 기능이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날 때 비로소 그 생산되는게 사랑이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안 살아나면 사랑이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혼자 죽었다가 혼자 자살했다가 혼자 깨어나면 되지 않느냐? 그러면 사랑이 안돼요.
사랑은 죽는 장소가 또 중요해요. 어디서 죽느냐 하면 죄 없는 하늘나라에서 죽으면 안돼요. 어디서 죽어야 되느냐? 주님께서 죄 있는 죄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돌아가셔야 사랑이 사랑으로서의 본 내용을 다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서.
꼭 이 땅에서 돌아가셔야 되요. 이 땅에서 주님이 하나님이 죽으시고 죽으신 하나님이 살아나셔야 이 땅에 유효적절한 사랑, 이 땅에서의 효력을 발휘하는 사랑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양과 목자가 안 되더라도 그냥 사람끼리 서로 마음 정 나누고 힘 모아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에 의하면요 여러분 방금 제 논리를 따라왔지요? 그럼 논리를 안다고 치고 봅시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늘에서 혼자 자살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죄 많은 죄 뿐인 이 세상에서 돌아가셔야 사랑이 나온다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죄의, 다시 말해서 심판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정 나누고 싶어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뭐만? 고통과 저주만 올 뿐이에요.
이 땅에서 우리 인간끼리 마음 맞추고 산다 할지라도 언제 배신 때릴지를 모르고 언제 뒤통수 칠 줄 모르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서로 정 나누고 해도 언제 나몰라라 하고 항상 자기 의미로 되돌아갈 가능성들이 전부다 다 갖고 있어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마찬가지고요.
자식 믿는 것 같이 어리석은게 어디 있어요. 자식은 부모 생각 안 하는데 부모는 일방적으로 자식만 생각하니 이거는 짝사랑도 그런 짝사랑이 없지요. 그래서 소위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고통의 세계에요. 그건 어떻게 아느냐?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와보니까 비로소 아는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이 땅은 험악하기 짝이 없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산 자들이 서로 마음 맞춰서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 우리끼리. 결혼해서 살든지 동업자 되든지 공동체 협동조합 하든지 한번 살아보자. 교회라는 공동체로 살아보자 백날해도 살아있는 것은요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더 힘들어요. 여러분들 이제 조금 인생 살아보니 느끼지 않습니까? 살면 살수록 힘들어요.
기침 나지요 사탕 잡수셔야 되지요. 수련회 참석하고 싶어도 남한테 피해줘서 참석 못하고. 이게 허리 아프지요. 마음은 청춘인데 허리가 말을 안 듣는데. 맘 같으면 날라다니고 싶지만 몸이 안되지요. 아무리 옛날에 왕년에 권투 좀 해도 나이 40넘으면 권투 되던가요? 20대만큼 안되지요? 전반전 4분 뛰고 난 뒤에 헥헥헥. 조기축구 5분 뛰고 난 뒤에 헥헥헥 자기가 뻗어가지고. 안된다니까요.
중계방송 볼 때는 뭐 자기가 박지성이라. 다 알아요. 빨리 패스해라! 자기가 한번 해보지. 몇 발자국 가다가 주저앉아 버리는데. 몸이 마음대로 안돼요. 꿈속의 내 모습은 항상 30대에요. 그러나 꿈 깨고 보면 귀신인지 분간이 안돼요. 앞으로 점점 더 그럴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게 죽은 것보다 훨씬 못하다는 겁니다.
그럼 빨리 죽여주세요 하잖아요. 무슨 자격으로 죽어요? 사랑이 없이 인간으로 죽어버리면 이 땅의 저주가 죽고 난 뒤에는 그대로 이어지는데요. 고통과 저주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죄 때문에 주어지는 거에요. 죄가 있는 곳에 필히 저주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죄가 있다는 말을 오늘 식으로 하면 사랑이 없다는 거에요.
그럼 사랑이 없으면 뭐가 되느냐 하면 사랑이 없는걸 보통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 하잖아요. 미움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좀 더 이게 현실적으로 맞게 표현한다면 뭐냐? 대듦이에요 ‘대듦’. 하나님 앞에 대드는 거에요.
이게 더 구체화돼요. 왜냐하면 악마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악마는 반항자거든요. 이사야에 보면 거기 나와요. 하늘에 있던 반항자가 땅에 내려와서 내가 이대로는 못 죽지 이래가지고 인간들을 인질로 삼아가지고 싸움한다 되어 있어요. 하늘에서 쫓겨났거든요. 쫓겨나니까 땅에 내려와가지고 하와와 아담을 인질로 삼아가지고 나를 공격하려거든 하나님 당신이 만든 인간을 공격하고 나를 공격하라 이런 식으로 하는거에요.
인간들은 인질로 잘 키우는 것도 모르죠. 원래 인간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된 줄로 알지만 사실은 인간은 악마의 인질입니다. 인질이라서 그 인질의 특징은 보통 인질은 자기가 옛날 인질되기 전에 있던 일을 기억을 하잖아요. 그런데 악마의 인질인 인간은 자기의 출처를 몰라요. 내가 무슨 자리가 원래 내 자리인가를 완전히 거기 차단되었기 때문에 그냥 힘들게 살면 너나 나나 다 그렇게 사니까 이게 인간이고 그게 정답의 전부라고 그렇게 그냥 자포자기하고 말아요.
뭐 살다보면 천당인지 지옥인지 알겠지 살 때까지 가보자 이런 식이에요. 살 때까지 가보자 맨날 그런 식으로 살면서 자랑거리는 뭐냐? 오래 살았다 이런거나 기껏 자랑하는거에요. 나 90까지 전국노래자랑 MC한다 이런거요. 소주 먹어가면서 송해. 전국 노래자랑 하면서 90까지 계속 가는거에요 지금. 지옥가는 것도 모르고.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으니까 자꾸 인간이고 싶어요. 누구의 양이고 싶지를 않는다니까요. 그냥 인간이고 싶어. 인간인데 어디가? 천국가는 인간이고 싶어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시스템은 천국에서 운영하는 시스템이 아니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악마가 지어낸게 인간이고 성경적으로 인간은 없고 죄인밖에 없어요.
죄인이 어딜 가요. 어딜 넘봐요. 왜 천국을 넘봐요 죄인인데. 죄인이라면 이게 죄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가지고 죄인에서 뭐로 바뀌느냐? 어떤 시스템 안에 들어가야 돼요.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돼요. 그 자리가 뭐냐 하면은 양이 되는 겁니다. 그럼 양은 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양을 관리하는 누구의 등장을 보게 된다? 목자의 등장을 동시에 엮이게 되어 있어요. 그 양과 목자의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
다시 말해서 신분, 질적인 신분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질적인 신분 변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오늘 첫째 강의 좀 약간 난해하더라도 제가 친절하려고 애를 씁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또 우리에 들지 않은 또 다른 양들이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양들.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
그리고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양으로 볼 때는 조건이 있어요. 주님이 자기 목숨을 집어넣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양.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집어넣지 않으면 양이 될 수가 없어요. 누가 누구를 대신한다는 것은요 누가 누구를 대신한다는 것은 저쪽에 없는 것을 대신하는 쪽이 있어줘야 대신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어요.
저쪽 인간 쪽에는 죄가 있고 의는 없는데 이쪽에는 죄가 없어야 되고 예수님은 죄가 없고 의만 있으면 비로소 대신이라는 것이 효력을 발휘하는거에요. 왜? 저 죄 대신 의를 박아넣으니까 효과가 있잖아요.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인간을 대신할 수가 없어요. 왜? 둘 다 죄를 갖고있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사귄다는 이것은 사귀어 봤자 그거는 둘 다 친구따라 지옥간다니까요. 친척따라 교회와서 지옥간다니까요. 지옥가는 아내가 남편 전도해서 교회 다니다 둘 다 지옥가는 거에요. 거기서 지옥 안가고 천국 가려면 무슨 의미가 빠져야 돼요? 내가 너를 전도했다는 의미가 이게 빠져야 돼요.
왜냐하면 죄인은 남을 구원 전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전도든지 율법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의라든지 모든 개념은 대신한 분에서 새롭게 구성되어서 거기서 규정된 개념으로 이렇게 실처럼 뽑혀나와야지요. 그렇게 되야지 우리가 얻고자 하는 천국주시옵소서 우리가 이미 천국을 자기 맘대로 정해놓고 천국 달래.
그럼 그 천국 개념 누가 만든거에요? 죄인끼리 죄인의 욕망으로 만든거에요. 종교적 욕망 구원의 욕망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니에요. 특히 교회라는 개념도 마찬가지고. 인간들끼리 모여있는게 교회래. 대한예수교 장로회 붙여놓고. 누가 그걸 교회라고 누가 이야기했는데? 인간들 시스템에서 만든 교회에요. 인간들 시스템에서.
사는게 힘드니까 죽어서는 호강해야 되겠다 싶어서 교회 하나 만든거에요. 모방해가지고. 가게 하나 차린거에요. 교회가 뭔지를 규정도 안 해놓고 그냥 교회래. 교회고 거기서 예배드렸으니까 교회의 4대 요소. 신학교 나오면 다 배웠죠? 교회의 4대 요소 뭡니까? 예배, 교육, 교제, 봉사 뭐 이런거? 그거 하면 교회 됩니까?
사도행전 봐가지고 교제한다 양육한다 예배드린다 선교한다 뭐 이렇게 하는데 교제 예배 양육 선교 여덟자 되잖아요. 그걸 내가 한자로 줄여줄게요 한자로. 돈입니다. 돈이에요 ‘돈’. 제가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생선 살점 다 발라내면 뭐 나온다고 했습니까? 생선 살점 발라내면 뼈대가 뭐로 구성되어 있어요? 돈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가족 뼈대 발라내면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돈 나오지요. 돈 없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나쁜 아버지에요. 자식에게 줄 거 없는 엄마는 나쁜 엄마라니까요. 그래서 병든 엄마는 다 나쁜 엄마에요. 그러고 보니까 오늘 안 오셨구나. 안 온 분 두 분 계시네. 어느 누구도 인간은 자기 절대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악마의 인질이기 때문에 악마를 닮았어요.
엄마가 뭔데 나를 괴롭게 하느냐 이 말이죠. 엄마 인생이 뭔데. 왜 남들처럼 좀 운동 다니고 자식 애먹이기 전에 알아서 건강하지. 지금 와서 돈 없다 치료비 내라 돌봐달라. 나는 지금 막 살라고 2억 대출받아서 아파트 대출금 갚기도 바쁜데 엄마 줄 돈이 어디 있다고. 또 안 주면 불효자라고 해가지고 동네방네 자식들 욕하고. 진작에 좀 돈 좀 모아놓고 쓸데없이 해주지 말지 왜 맏이한테 왜 대출자금 다 줘가지고 둘째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형제간에 또 싸우고 막.
세상은 누가 옳고 그른게 아니고 내가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나는 옳아요. 무조건 나는 옳다고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제 어렵게 합니다. 더 이상 쉽게 할 수가 없다 이런 거는. 이걸 가지고 뭐냐? 존재론. 선행적 존재론이라고 합니다. ‘선행적 존재론’.
성경에는 인간의 존재를 존재로 보지를 않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일체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다루는 것은 뭐냐 하면 존재론, 누구 존재만 존재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만 존재해요.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만 있는 거에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존재론 박살나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인식론으로 바뀝니다.
인식론은 뭐냐 하면 비로소 알게 되었다거든요. 이 인식론을 위하여 누가 오시느냐 하면 바로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충만한 것까지.. 그 다음에 뭡니까? ‘안다’가 되는 거에요. 그럼 성령 오기 전까지는 뭡니까? 모른다가 되지요. 그런데 인간은 성령 오기 전에 모른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대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행적 존재론은 주장해요. 내가 여기 있다고 해요.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여기 있음을 나는 부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개념의 출발이 뭡니까? 천국개념이 뭐에요? 천국이 있다가 아닙니다. 내가 천국에 있는 그 천국은 있다가 돼요. 어렵지요? 지옥은 뭐냐 하면 내가 없는 지옥이 지옥이에요. 왜? 나는 무조건 무조건 나는 천국가야 되니까. 이게 존재론 선행적 존재론. 선행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겁니다. 무조건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참 중요하다. 무조건 나는 정당해요 무조건. 강도를 하던 전 남편을 죽이던 말던 무조건 나는 정당해요. 연예인이 마약해가지고 마약 안했다고 했다가 마약 걸려가지고 고개 푹 숙이고 앞으로 봉사한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뭡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서 10장에 의하면 나는 의롭다. 나는 의롭다. 여기에서는 토를 달지마. 이거는 이유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뭔가 이유를 물을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나는 정당하고 무조건 의로워요. 왜? 나는 악마니까. 사람이 신에게 대들 때는요 그냥 대드는게 아니에요. 나름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신이라 할지라도 내 정당함에 흠집 내면 본능적으로 와락 달려들게 되어있어요.
10년 키운 개가 언제 달려듭니까? 자기 밥그릇 찰 때. 그것도 실수로 찼는데 와락 달려들잖아요. 10년 키워준거 소용없습니다. 30년 키워준 자식. 언제 달려듭니까? 자기 돈 안 빌려줄 때 부모한테 달려들잖아요. 왜 당신은 나쁜 아버지냐. 왜 돈 없는 아버지냐.
지금 어려운거 하려고 준비하는데 아 진짜 너무 어려운데 그래도 해봅시다. 물동이에다가 물양동이에다가 물을 담고 흔들어 봅니다. 회전을 시켜 봅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빨리. 나중에는 더 빨리. 빨리 합니다. 그러면 물 표면이 안쪽에는 오목하게 들어가고 바깥에 양동이 표면에 물이 쫙 붙어서 삭 올라가게되겠지요.
그 다음부터는 양동이를 회전하던 양동이를 스톱을 시켜요. 스톱을 시키면 짧은 순간이지만 물은 오목하고 아직까지 뾰족해가지고 옆에 붙어 있는 물들은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 실험을 누가 했느냐 하면은 뉴턴이 실험을 했어요. 왜 무슨 실험을 했느냐 하면은 절대기준점은 이 세상에 미지의 장소에 따로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미지의 X장소에 절대 기준점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양동이는 양동이가 스톱될 때 물이 동시에 이렇게 평평해지는 것이 아니고 양동이는 스톱되고 물은 그대로 오목하게 올라가는 것은 물은 다른 기준에 의해서 힘의 원리에 의해서 그쪽 절대기준의 관계성 때문에 계속 움직인다고 보는 거에요. 절대 기준계라고 이야기 하는 물리학에서 절대 기준계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게 나중에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상대성 기준계로 바뀝니다.
그 이야기를 왜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인간이 아까 2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1이죠. 1은 반드시 그 모델이 있어요. 모델이 있는데 미지의 X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닮았는지를 인간이 모르고 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유도 없이 공포스러워요.
매일 하루 사는데 뭔가 돈도 벌고 사랑도 받고 다하는데 뭔가 쫓기고 있는 것 같고 자꾸 어떤 두려움 어떤 내가 알 수도 없는 요인에 의해서 자꾸 쫓기고 겁이 나는 그런 기분을 평생토록 지울 길이 없어요. 이만하면 온 가족이 웃고 행복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행복한 순간 웃는 순간 끝나게 되면 다시 뭔가 걱정거리가 밀려오는데 구체적으로 너 뭐가 걱정인데? 몰라요. 뭐가 근심이야? 몰라요. 그냥 쫓겨요. 그냥 이유 없이 쫓긴다니까요. 평생토록.
어디서 나를 그렇게 자꾸 추격하는지 나를 겁주는지 그쪽이 어딘지를 몰라요. 자기의 원천적인 모델과 미지의 연관성이 있는데 그 연관성의 출처를 인간은 모릅니다. 왜? 악마는 숨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숨어있는 존재거든요.
완전한 사랑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내가 금식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아이고 얼굴이 너무 안됐다. 떡 좀 잡수시고 힘내서 또 기도하세요. 어떤 사람이 우연히 지나가면서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아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 광경을 마태복음 3장의 광야로 옮겨봅시다.
그러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게 악마에요. 그게 악마라고요. 그러니까 악마가 우리는 서로 우리가 생각도 못 한 가운데 계속 주고 받고 주고 받고 토하고 있었던 겁니다. 잘 되야 될텐데. 그런데 잘됐다는 그곳에 도달했을 때 그게 다가 아니라니까요. 잘됐는데 또 그 잘됐기 때문에 없어질 것 같은 걱정 근심이 그 자리에 왔기 때문에 비로소 새로 생겨요.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나쁜 것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진게 나쁜게 아니고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그것이 사람에게 더 강렬한 허물을 줍니다. 에게 이게 다냐 이 말이죠. 내 인생이 여기에 목숨 걸었냐. 이거 이길라고 기껏 이거 이길라고 그토록 죽기살기로 싸워왔냐 이 말이죠. 이게 전부야? 그 뒤에 또 뭐가 있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욕망은 자꾸 손가락 가지고 더더더더~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절대 기준점을 우리가 모르면서 지금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 절대 기준점에. 왜 절대 기준점이냐 이유를 했습니다. 2가 아니고 뭐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