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0629b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초과)-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190629b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초과)-이 근호 목사 동일한 물 컵이라도, 예수님의 포도주, 예수님의 빵, 누가 봐도 빵이고 포도주죠. 예수님은 그걸 다른 자리에서 봅니다. 이미 십자가 지신 자리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살이고 피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에서 또는 기독교에서 하는 성만찬은 장난이에요. 이거는 어떻게 변화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이 달라져야 돼요. 본인들이. 본인들이 살았다고 생각 안 하고. 죽어있을 때에 비로소 그 잔과 떡이 주님의 살과 피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바뀐다는 거예요.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곧 바로 나의 적, 나의 적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야 돼요. 나의 적. 나의 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나의 적이 아니고 누구 적이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게 한 예수님의 적이 보이는 자리에 가서야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모든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무엇의 영이냐 하면은 십자가의 영이에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러한 세력에 의해서 돌아가셨잖아요. 이거는 뭡니까? 적이죠. 전쟁이다 이 말이죠. 전쟁. 적. 이 적이 등장하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저거는 내 원수고 내 적이다, 라는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에, 본다는 것은 비로소 성령이 받은 안목을 갖췄다고 할 수 있어요. 성령의 안목을. 왜? 십자가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안 받으면 누구 적이 보입니까? 예수님의 적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적만 보이는 거예요. 심지어 나의 적만 보이다보니까 누가 나의 적이 돼요? 예수님, 하나님이 나의 적이 돼요. “아니, 주님 너무 밀고 들어오십니다. 이것까지 하면 내가 곤란하죠. 내가 헌금 할 만큼 했잖아요.” 맨날 이런 식이라. 자꾸 주춤주춤 물러가면서, 더 쳐들어오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이런 식이 돼버려요. 그렇게 되게 되면, 주님께서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두지 않겠죠. 더 밀어붙이죠. 끝까지. 더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이게 되게 되면 나중에는 나라는 자체가 이게 의미가 없다는 것. 내가 지키고자 한 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조선시대의 빗소리하고 고려시대의 빗소리하고 신라시대의 빗소리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죠. 오늘날 빗소리하고 일제시대 빗소리하고 똑같죠. 다를 바 없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죽는 이상은 인간 대 인간끼리 비교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그런데 안 똑같으려면 인간은 뭘 해야 돼요? 선을 해야 돼요. 내가 있으면 선을 그어서 선 밖에 있는 너와 나는 다르다고 고집을 부려야 됩니다. 이걸 제가 선이라고 했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나를 지켜주는 장벽 또는 요새. 아지트. 공고한 여리고 성 같은 나만을 위한 궁궐, 성전, 이게 있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어떤 벽을 쌓는데, 진정한 우리 자신 같으면 이 벽까지 뚫어야 돼요. 벽까지 뚫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은 벽을 뚫지 못하고 그냥 튕겨져 나옵니다. 내 벽이 오늘도 단단한지, 단단하게 되면 나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구나, 하고 편히 잠을 자게 되죠. 밤에 잘 때 내 것은 잘들 있느냐, 굿 이브닝good evening 잘들 있어, 이렇게 하죠. 노래 있잖아요. 생일 축하합니다. 해피벌스데이투유Happy Birthday To You! 당신에게 생일을 축하해! 이게 뭐냐 하면은 내 생일을 축하할 사람이 이정도 나의 벽을 단단하게 채워주는구나. 나에게 저 사람이 있는 이상은 나는 살만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 특히, 산업시대 이전에는 뭐냐 하면은 농경시대라고 하거든요. 농경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산업은 가족을 위함입니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농사,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어업. 이게 전부다 가족이 하는 거예요. 가족이. 농사짓기 위해서 가족이 모인 것이 아니고, 가족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다보니까 농사가 되고 어업이 되고 살림하게 되고 뭐 사냥도 하게 되고. 가족이 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의 마지막은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은 가족으로 돌아와요. 가족이 유일한 버팀목이고 이게 피난처입니다. 가족이. 그리고 동시에 가족이 나의 벽이 되고. 가족을 뚫을 수가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가족을 지키려고 하겠죠. 그런데 산업사회가 되게 되면, 이게 가족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산업에 맞추어서 내가 가족을 위해서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가족중심에서 산업을 할 때에는 이 농사, 어장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은 결혼을 해야 되고 제사를 지내야 되고 해야 돼요. 왜냐하면 지킬 게 가족이기 때문에. 가문을 잇는다는 그 중차대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가정에 헌신하기 위해서 장가가야 되고 시집가야 되는 거예요. 이 시대에서는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근데 산업의 구조가 바뀌어버리면 가족이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이에요? 내가 우선이 돼요. 내가 우선이 되게 되면 내가 꼭 결혼할 필요가 있어요? 없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억지로 결혼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가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굴 위해서 살아요? 나를 위해서 살아요. 나를 위해서 산다는 말은 결국 뭐다? 나 꾸미기에요. 나 꾸미기. 나를 꾸미는데, 내 장벽, 성을 만들고 내 성을 어떻게 장식하고 꾸미느냐. 내가 보기에 이 성에서 사는 삶이 계속 만족스럽기를 원하면서 계속 나 꾸미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자, 그러면 결혼을 한다는 말은, 나 꾸미기에 당신이 동조한다면 이 성문을, 그것도 작은 문을 열어줘 가지고 당신을 넣어줄 용의가 있다. 그래서 하나의 부부가 될 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지난 금요일에 교토통신, 아사히신문, 싱가폴, 그리고 말레이시아, 중국, 긴급뉴스로 타진한 뉴스가 한 게 있어요. 지난 금요일에. 송혜교, 송중기 별거. 교토통신, 아사히신문까지 났다니까요. 왜 거기에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까요? 저 송혜교와 송중기 그들이 꾸며 사는 그게 자기들이 꾸며 사는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델이 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의 이상적인 모델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잘생긴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만나서 둘 다 돈이 많아서 100억 저택에서 사는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미리 해주니까, 사람들에게 자기의 목표가 있고 기대가 있는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이렇게 사니까. 근데 그게 깨졌다고 하니까, 그리고 거기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공통적인 요소로서, 송중기 송혜교가 이미 담겨져 있다는 것이 튀어나온 거예요. 담겨져 있다는 것이. 관심사가 어디에 있다? 내가 원하는, 행복한 나만을 위한 성 쌓기. 나만의 세계를 구성하기에 그들이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좀 일반화시켜봅시다. 일반화시키면 이렇게 돼요.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간은 늘 새로운 현실 틀을 재구성하고 정리하고 정진하고 구축하는, 이게 바로 삶의 핵심이 되고 말았어요. 시간이 흘러갈수록 인간은 늘 새로운 현실 틀. 현실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시선을 바꿔야 하는데 안 바꿔요. 내 중심으로 세상을 계속 나한테 유리하게, 내가 이만큼 온전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차원에서 늘 정립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정립을 하는데, 근데 이것이 나중에 행복해하는 수준까지 만족하겠어요? 만족 안 하겠습니까? 아무리해도 새로운 것이 나오면 또 재정립을 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김치냉장고가 나온 지가 몇 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김치냉장고가 처음에 나왔을 때는 별로 안 팔렸어요. 왜? 그거 없이도 사니까. 근데 어느 때부터 김치냉장고가 온 집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만큼 재조정한 거예요. 자기 현실의 틀을. 하나의 드라마가 있다면, 10대 때 그 드라마를 보는 거, 20대에 그 드라마를 보는 거, 30대에 그 드라마를 보는 거, 60대에 그 드라마를 보는 거, 이 드라마 내용이 다 달라요. 이 드라마는 동일한 드라마에요. 드라마는 안 변했어요. 안 변했는데 뭐가 변했어요. 10대, 20대, 30대, 40대... 시간이 흘러갈수록 뭐가 달라져요? 나라는 것을 재규정하고 재의미를 하는 거예요. 인간은 날마다 같은 인간이 아니고 계속 본인이 달라져요. 무엇에 따라서? 자기가 속해 있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일어나는 일들에 따라서. 내가 날마다 다른 내가 돼버려요. 현실꾸미기가 어디에서 완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이 말은 결국은 정답이 없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출발점’입니다. 출발점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뭔가 변화가 있더라도, 진짜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그 출발점. 그 출발점이 누구냐 하면은 향수를 부었던 이름 없는 여자. 다른 본문에서는 마리아로, 막달라 마리아로 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이름이 없어요. 어떤 여자. 어떤 여자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진짜 모습은 이 여자의 모습. 여자의 행동, 태도, 여자의 모습이에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금 바로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깨어져도 상관없는, 상관없는 그런 존재죠. 그러면 현재 이 출발점으로 가려면, 오늘 여자 같은 경우에는 뭘 해야 돼요? 나의 것이 깨어져야 한다. 깨어져야 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깨어질 때 억지로 깼어요? 감사함으로 깼어요? 감사함으로. 이게 주께서 오시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맙고 감사함으로. 깨어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보는 내 자리를 이동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자리로 이동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는 거예요. 죽음의 자리에서. 돌아보게 되면, 주께서 주의 일에 참여시켜주신 것에 대해서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며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감사하면서 우리는 아낌없이 버려야 될 게 있겠죠. 오늘 본문에서 여자는 뭘 버렸습니까? 향수를 버렸죠. 향수. 향수는 뭐냐 하면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입니다. 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분 얼마나 많은 비용을, 대가를 치렀습니까? 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비용을 들여서 남는 게 뭐냐 하면은, “지금 나는 살았다.”입니다. 우리 가족이. 그 비용. 목적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족 비용인데, 그 비용이 뭐냐, 죽음을 위한 비용이 아니고 무엇의 비용? 생존에 필요한 비용입니다. “향수-생존에 필요한 비용”, 이 자체를 몽땅 버리지 마시고 이것을 몽땅 가져오세요. 몽땅 가져오셔서 주님의 죽음에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참여하는 거예요. 참여해버리면 생존에 필요한 이 비용이 뭐로 관점이 달라지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필요한 비용’으로 우리가 참여한 셈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 있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가 어느 정도 고급적인 가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한 푼, 두 푼 아끼잖아요. 왜? 내 생명이, 내 생존이 그만큼 고급지고 귀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실 쓰레기인데. 쓰레기 같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드렸지만, 한꺼번에 선악체계를 생명의 망치로 때려버리니까, 이게 나의 생존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고, 이 자체가 그대로 주님의 죽음의 비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홀로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강의 처음부터 여기까지가. 홀로 죽는 죽음이 아니에요. 껴안고 죽는 거예요. 같이 껴안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이 구멍이 성사되는 겁니다. 장례식이 예수님의 혼자 장례식이 아니고 장례 치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 장례식이 주님의 복음이고. 거기에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가지고 참여한 겁니다. 나의 죽음을 가지고 주님의 죽음에 참여한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에게 왔죠.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뭘 요구했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해 여기소서. 우리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했어요. 문둥병자가. 문둥병 이거는 불가능이죠. 이거는 본인도 인정하고 남들도 인정하듯이 이거는 저주받은 거예요. 조상이 뭘 잘못해서 삼사 대까지 벌을 받는지, 안 그러면 어떻게 됐든지, 무조건 문둥병은 못 고치는 것이고 주님의 저주의 증거다. 따라서 이거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우리의 병은 못 고친다 해서, 주님이 지나간다는 것을 듣고 고쳐달라고 했을 때에 그중에서 몇 명이 나았습니까? 열 명 몽땅 다 몸이 나았죠. 끝입니까? 이게 끝이에요? 병 나았으니까 자기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잖아요. 자, 이것을 첫째 시간에 강의한 선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선을 긋고 내가 선 안,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나는 나 자신을 꾸미고 싶어요. 그러면 여기서 소망이 생기고 기대심을 갖겠죠. 내가 내 생각한 만큼 괜찮아지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들이 문둥병자라면 문둥병자로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철이 나고 시건(철의 방언)나고 보니까, 멀쩡한 사람들이 더 많더라 이 말이죠. 문둥병 들린 우리는 마치 저주받은 거 같아. 저 사람들은 멀쩡한데 자기들은 문둥병에 걸렸으니까, 그 다음부터 뭐가 발생됩니까? 그 소망으로 자기를 재구성하고 싶죠. 아까 이야기한 거잖아요. 인간은 날마다 새로운 상황에 맞춰서 자기를 항상 재조립하고 재정리하는 거예요. 기대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 기대가 뭐냐 하면은 멀쩡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멀쩡했으면 좋겠다. 촌에 못 사는 사람들끼리 살게 되면 그 패션은 볼품도 없어요. 광주패션하고 무안패션하고 같을까요? 촌 할머니들 패션하고 광주 혁신도시 패션하고 좀 다르죠. 광주 토박이 말고. 몸빼 하고 다르죠. 그러면 이사를 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애들 유치원에 갔다. 학부모 모임에 갈 때 애들도 보지만 자기 옷차림하고 저쪽 학부모 옷차림하고도 비교할 게 아닙니까? 자기가 보기에도 참 한심스러울 게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수정에 들어가는 거예요. 관심사가 나 꾸미기거든요. 항상 나 꾸미잖아요. 꾸밀 때, 선을 그어놓고 저쪽에서 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소망이 뭐냐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예수님 지나간다. 그럼 예수님을 뭐로 본다? 내가 건강해서 예수님에게 기도하고 간구하는 거예요. 뭐 철야하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열 명을 전부다 건강하게 해줬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죠. 딱 한명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왜 돌아왔겠느냐 하는 거죠. 자기 볼일 봤으면 가지 왜 돌아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거예요. 본인의 자리에서. 본인의 자리에서 내 꾸미기에 급급한 그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은 뭐냐 나의 필요한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일 뿐이에요. 예수님이 중요할까요? 내가 중요할까요? 내가 더 중요하죠. 예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니까 날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리가 어떻게 됩니까? 자리가 계속 자기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니가 건강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니는 건강하면 안 되고 니는 뭐한다? 니는 죽어야 한다. 이게 바로 첫 출발자리에요. 사람이 자꾸 주변의 같은 사람을 보니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남들처럼 되려고 해요. 남들처럼. 남들처럼 항상 되려고 하다 보니까, 출발점이 없고 지금 내가 출발점인줄 알고 있어요. 자꾸. 이 정도라도 건졌으니까 남는 장사라고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에 몰두하고 있어요. 신앙은 개코나 신앙? 그거는 신앙이 아니죠. 자기 지키기에 열중한 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딱 한 사람이 돌아왔어요. 돌아온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병 낫게 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적은 누구다? 내가 적이다. 그럼 나를 뭐로 봐야 해요? 적으로 봐야죠. 나를 깨야죠. 내가 건강하겠다고 하는 내가 누구의 가치를 훼손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그 가치를 완전히 모독한 거예요. 누가? 내가.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한테 찾아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십니까? 라고 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그리고 사울은 눈이 완전히 갔어요. 그 따위 눈가지고 어디 세상을 안다고? 안목을 바꿔! 세례 받고 난 뒤에 눈 떴어요. 눈이 감겼다가 떴다는 말은 뭡니까? 이거는 세상 보는 눈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하는 존재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거예요. 세상을 다시 보게 한 겁니다. 예수님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막아서는 마귀 같은 짓거리의 나, 그 나의 입장에서 나를 보고 주님을 보고. 세상보고. 그럴 때 나오는 것은 오직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움 외에는 나올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챙기기, 나 꾸미기를 한다는 이 자체가 잘못인 것을 알기 때문에.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대목을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왜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은, 뒤의 6,7,8절의 말씀을 우리가 안 들었다 치고요. 예수님께서 그런 발언을 안 했다고 치고. 현장에 지금 어떤 여자가 있는데 예수님에게 향수를 뿌렸다고 할 때에, 그때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는 그 의견이 우리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똑같아요. “저걸 그냥 허비하다니!” 만약에 요새 버전으로 한다면 “저걸 팔아서 선교헌금해서 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걸 왜 땅에다가 다 버리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은 주님의 원수, 주님의 적의 관점, 또는 적의 생각을 지금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적이 누구냐? 어떤 관점이 예수님을 죽게 했느냐? 어떤 관점이 예수님을 죽게 했느냐 하면은, 바로 내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면, 살아있는 내가 하나님 쪽으로 점차점차 말씀을 지킴으로써 접근해나가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시도. 이게 무슨 방식이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수의 방식이에요. 이게 원수의 방식이면서, 주님께서는 이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여자로 하여금 향수 붓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이도록 하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대해서 비난이 쏟아졌죠. 누구를 보고 비난합니까? 그 여자를 보고 비난하죠. 그럼 여자가 나서서 그걸 변호했습니까? 주님이 나서서 변호한 거예요. 주님이 나서서 변호했다는 말은 이 여자의 일이 여자의 단독행위가 아니고, 누가 그렇게 일을 꾸몄는가 하면은, 주님께서 꾸미는 주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책임 있는 당사자인 주님이 나와서 여기 이 여자를 대신해서 반격을 가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내가 거기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가 없어요.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면 구태여 우리가 변명할 하등의 근거나 이유가 없습니다. 주의 일이라면. 그러면 목사님 주의 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이게 감사와 고마움으로 되면 그게 주의 일이에요. 그게 어떤 일이든. 애를 줘 패는 것도 감사와 고마움으로 기쁨으로 하면, “공부 좀 하란 말이야! 밥 먹지 마!” 주의 일이 돼요. 자, 감사와 고마움은 뭐가 삭제된 겁니까? 뭐가 삭제되었어요? 삭제된 것이 뭐예요? 나의 가치, 나의 의미가 삭제되어 나온 것이 감사와 고마움이거든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올까? 지금 그런 계산이 전혀 안 된 상태에서 나온 게 바로 고마움과 감사함이라는 거예요. 돌이켜 보면, 소급해서 보면. 제가 일어설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은 앞으로 제가 전개한 내용을 감당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있습니다. 환경이 있죠. 세상환경입니다. 인간인 내가 있는 이상 세상환경을 보게 되어 있죠. 볼 때, 누가 보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보죠. 나는 지금 뭐한다? 나 꾸미기에 지금 열중하고 있어요. 좋은 옷, 좋은 가구, 좋은 집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나도 되고 싶다고요. 그럼 나는 아무리 꾸미고 뭘 해도, 예를 들어서 내가 여기에 있는데 어떤 여자가 향수를 뿌려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했는데 예수님이 칭찬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나도 그대로 하고 싶어요. 나도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 칭찬받고 싶죠. 어떤 경우라도 나라는 이 절대자를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나로서는 없어요. 나로서는 없다 이 말이에요.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나로서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뭐냐 하면 항상 최선을 다했느냐? 혹시 내가 나쁜 짓은 하지 않았느냐? 내가. 내가 최선이죠. 또 나죠. 내가 나쁜 짓이죠. 또 나죠. 내가 또 오버하지 않았을까? 내가 과도히 행동하지 않았을까? 항상 나가 붙죠. 나가 붙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나를 이게 주의 일로 변경시켜버립니다. 주의 일로. 주의 일로 변경시켜버리면, 뭐부터 잃어야 되느냐 하느냐 하면은, 나 자신이 내가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일이 진행돼버려야 돼요. 내가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차를 조신하게 몰고 있는데, 만약에 뒤차가 쌩~와가지고 그야말로 위협하듯이 왔다. 그럼 충동적으로 뭡니까? 에이씨가 나오죠. 그 순간 갑자기 뭐가 없어집니까? 내가 지금 욕을 할까 말까, 욕을 하고 난 뒤에 해결할까, 이런 계산이 없이 그냥 쑥, 불쑥 튀어나오잖아요. 불쑥 튀어나오죠. 주의 일입니다. 주께서 하신 거예요. 왜? 자기가 의식되지 않으니까. 내가 의식되지 않으니까. 내가 저 사람에게 욕하면 성도로서, 하나님이 CCTV로 다 지켜보고 있는데, 니가 그만한 일로 욕했구나, 라고 이러면 여전히 나에게는 선이, 벽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벽을 뚫고 들어와야 돼요. 그 벽이 여리고성 같아요. 그 벽을 뚫고 들어와야 돼요. 뚫고, 나를 기생 라합으로 봐가지고, 벽을 뚫고 기생 라합인 나를 건지려면, 나는 그냥 뭐 내 쪽에서 할 건 없죠. 다만 어떤 결과로서 이미 주님 일의 사람이 됐다는 것은 감사와 고마움이 되는 거예요. 그 감사와 고마움이 된다는 것은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한 거죠.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을. 소급해서. 그럼 그 일이 뭐냐, 그 일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장례와 관련된 일을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니까. 중요한 것을 다시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관점은 전에는 내가 있던 자리인데 이게 아니라 내가 없는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전에 내가 있던 자리도 볼 수 있고 남들도 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저쪽 자리에서 못 빠져나왔었는데 주께서 찾아오셔서 이제는 내가 어떤 인간인 것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자리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에. 그렇게 해놓고 처음 강의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어린양이 죽었다. 어린양이 피 흘려 죽었다. 그런데 누가 구원받았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 이 연관성. 이 연관성이 과연 성립이 될 수 있느냐, 어떻게 성립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어린양이 죽었는데 우리가 왜 사느냐 이 말이죠. 죽으면 죽은 거지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느냐? 그것은 바로 주님의 반복성으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처음자리, 처음자리를 알리시기 위한 작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반복성’입니다. 반복성. 자, 이게 왜 중요한지,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저한테 질문을 어떤 분이 했었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자체적으로 성화가 있지 않습니까? 성화, 성장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예수 믿기 전에 성화가 안 되는 것은 아는데, 예수 믿기 전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는 것이 안 되는 것은 이건 아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자체적으로 점점 더 예수를 알아가게 되면 그자체로 성장이나 성화가 아닙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여러분은 답변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때려죽여버려요. 근본적으로 왜 자꾸자꾸 그걸 생각을 하는가 하면은 개인구원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그 다음에 성장한 것을 내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확인이 될 때 나는 기쁘겠다는 겁니다. 그러한 생각의 잘못은 다시 제가 반복하고 되풀이합니다마는, 인간이 주변에 어떤 누가 신앙생활이 좋으면 그걸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쪽이 나보다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면 그만큼 나도 성숙하고 성장하고 싶은 거예요. 저 사람처럼 해서 날마다 나를 재구성하고 싶은 거예요. 나 자아를. 더 이쁘게. 흠집을 더 줄이는 방향으로. 완전한 방향으로 줄이고 싶어요. 줄여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줄여나가면 그 다음이 뭡니까? 그 줄여나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흐뭇해하고 싶어요. 아, 내가 이제 신앙생활 맞는 모양이다. 날마다 이제는 죄를 점점 줄이고 있으니까.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했으니까, 물론 성령 받기 전에는 성화론이 잘못된 줄 알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해도 되잖아, 라는 이런 생각이 또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답변을 해줬죠. 뭐냐 하면은 ‘충만이 반복성’입니다. 충만의 반복성. 반복성이 되려면, 이게 늘 우리를 패대기칠 수 있는 데까지 키워요. 반복이라는 것은 뭡니까? 왔다 갔다 하는 거잖아요.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내 꾸미기에 나서게 허용을 해요. ‘나 이제 복음 들었고, 나 이제 이 정도까지 되었으니까 어지간한 질문은 답변 다 할 수 있다. 복음적으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노.’ 갑자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보고 흐뭇해하는 거예요. 관점이 주님 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관점에서 다시 기어 나와 가지고, 죽어있는 상태에서 나 구원받았다는 관점으로 딱 이동해버려요. 나 이정도로 구원받았다, 라는 것으로 이동해버린다고요. 이동하죠. 그걸 다시 반복해서 육적인 것이 나오게 해가지고, 육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육적인 것이 나오게 해가지고 다시 쳐버립니다. 그 차이. 성령 받아놓고 다시 스멀스멀 육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나올 때의 요 차이. 요 차이가 있잖아요. 요 차이가 없으면 여기서 감사가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감사는 반복적으로 내 주제파악에서 오는 그 차이, 그게 감사로 이어져야 한다니까요. 차이의 반복성입니다.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차이가 계속, 내가 얼마나 내가 살아오면서 성도로 나는 주님만 원해, 라고 해놓고 백화점에 갔다가 신상이 나오면 또 생각이 확 다르거든요. 이왕 예수 믿는데 이것 좀 사면 어떻노. 뭐 이근호 목사님 말대로 막살라고 했으니까 막살자. 또 막사는 것을 정당화해서 또 쓰고 오거든요. 다시 원상태로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은 그 차이를 통해서 주님의 공로에만 감사케 하는 일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목사님, 이미 은혜 받고 구원받았으면 다시 육적인 것이 안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안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시 나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 차이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또 새로움을 줘가지고 또 이렇게 휑하게 또 세상에 빠지게 만들어요. 가스펠송에, 복음성가에 이런 것이 있잖아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라는 노래가 있죠. 나 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노래를 윤형주가 불렀어요. 불러놓고 자기가 사기 쳐서 고발당하고.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집은 어디에 있다? 내 집은 천국에 있네. 저 모든 귀한 것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 노래를 부를 때 나름 진심이었어요? 진심이 아니었어요? 진심이었죠. 그런데 본인이 어떤 줄도 모르고, 내일 일도 모르고, 하여튼 그 순간은 진심이에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점에 대해서 감사한 거예요. 그 다음에 그 입에서 쏟아내는 그 뜻을 위하여, 윤형주 장로가 불렀던 이 세상은 내 집 아니고 내 집은 하늘나라에 있네. 한번 틀어줘야 하는데. 이 노래 다 알죠? 그 노래 가사에 맞도록 주께서는 그냥 정신 차려서 똑바로 하라고 우리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고, 친히 주께서 새로운 세상재미에 푹 젖어들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또 새로운 단계에서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하고 또 노래 부르게 만드는 거예요. 새로운 차원에서 감사가 더 무르익게 만들어버려요. 감사가. 그게 제가 주일 낮에 했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그게 내가 세상과 맞닿지 않으면, 그 차이가 없으면 안 나타나요. 혼자 자기가 절대화돼서 절대로 감사가 안 나옵니다. 사랑이 안 나와요. 자기가 더 쇠해지고 망가지고 나는 개보다 더 못해가 절실하게 자기 자신을 증오할 때, 주께서 은혜를 줬지만 그 은혜를 가로막는 당사자가 나라는 것을, 매일같이 그 차이점 있잖아요? 그 차이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누가 영광이 됩니까?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찬미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죠. 찬미가 뭐냐 하면은 노래입니다. 노래죠. 자, 노래를 한번 불러보자 말이죠. 눈물 흘리면서 노래를 불러봅시다. 불러보면, 1절노래 부를 때는 그렇게 감격스러워요. 2절노래 부를 때는 4절이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회할 때 제일 미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노래가 이제 끝났어.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끝났는데, 한 번 더!! 정말 죽이고 싶어. 그럼 한 번 더 하면 약속대로 한 번 더 해야 될 거 아니에요. 한 번 더 해서 끝났는데, 또 한 번 더 나가는 거예요. 시간 때우려고. 강사 시간이 8시인데 아직 안 나오니까 앞에서 선창해가지고 시간 좀 때우려고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찬미가 아니고 고역이에요. 고역. 고역입니다. 전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국외는 방탄소년단이고 국내는 송가인이라고요. 송가인이 미스트롯 할 때 노래 부르면서 눈물로 진짜 감격하며 불렀어요. 대동강아~♬ 용두산아~♬ 부를 때는 감격스러워했다고요. 근데 송가인이 그 노래를 계속 불러요. 미스트롯 노래 부를 때, 그때는 본선만 통과해도 감사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돈 받고 빨리 끝내고 싶어 해요. 다른 데 또 한 탕 뛰어야하니까. 하루에 두 탕, 세 탕씩 뛰어야 하니까. 그것도 매일같이. 돈 빨리 끌어 모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벌써 노래 부르는 태도가 동일한 노래를 불러도, 기독교로 말하면 동일한 찬미를 해도 그 맛이 안나요. 감사가 아니고, “하나님! 오늘도 찬송 4절까지 불러줬심더.” 이거에요. “벌 내리기만 해봐라. 찬송 다 불러줬는데.” 이런 식이라. 그럼 주님께서 “니가 정신을 또 못 차렸구나. 걱정하지 마라. 내일되면 또 일 하나 준비할 테니까 내일 한 번 당해봐라.” 또 계속해서 주께서 일을 벌여가지고. “주여, 내가 이렇게 착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 주 앞에 항의를 하네요. “이만큼 찬미해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선을 긋는 거예요. “찬미는 감당할 수 있는데, 찬미한 나를 이렇게 망치는 것까지는 감당이 안 되니까, 이 선까지는 쳐들어오지 마세요.” 분명히 없어졌다던 선이 또 나왔어요. 반복해서, 매일같이 또 나온다고요. 특히 큰일을 앞두고. 이게 큰 애가 군대도 갔다 왔겠다. 취직도 했겠다. 장가를 보내야 되는데, 장가를 딱 보내야 하는데, 저쪽 신부 쪽에서 하는 말이, “상견례 만납시다.” “언제요?” “주일 낮 11시에.” 아, 이거 미치겠네. 주일 낮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11시에 만나겠다는 거예요. 그럼 11시 안 된다고 하면, “아, 그럼 우리 쪽에서는 곤란한데요. 이 혼사 없는 걸로 합시다.” 이래 나온다면? 어떡해? 이거 어떡해요? 복음 안다며? 모든 것을 버렸다면서요? 버린 게 아니죠. 주여, 우리 아들 장가보낼 때까지만 재림을 보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새로운 사건, 난처하게, 그거는 감당 못하겠습니다. 그럼 주님은 뭡니까? 주의 뜻은 뭐예요? 11시에 상견례 미루고 오후 2시에 하라는 것이 주의 뜻일까요? 억지로. “아이고, 제가 교회라고 하는데, 목사가정인데, 어떻게 오후 2시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아유,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긴 어떡해요? 지금 자기 본심이 뭡니까? 애 장가가 중요하지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장가가. 2시에 해주는 거예요. 2시에 하면서 맛있는 거 얻어먹는 겁니다. 이제 2시까지 해가지고. 2시까지 해놓고. 2시에 상견례하고 주일이고 뭐고 없애는 거예요. 애 장가 다 해놓고. 뭡니까? 그 차이.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통해서 주께 감사하는 거죠. 말도 안 되는 나를 이렇게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의 죽음을, 주께서 나를 죽게 하셔서 주의 죽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이 왜 죽었는가? 내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람은, “11시에는 예배드리고 파토되면 그것도 순교다.” 이게 뭐냐 하면은 그런 것을 팔아가지고, 향수를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게 되면 얼마나 주께 영광이 되는가? 이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오만이에요. 그게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짓이에요.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뭐냐, 자기 승리를 구가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목숨까지 바쳤다고 하는, 그거는 사랑입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거는 사랑이 아니에요. 그거는 자기 일이에요. 자기 잘남의 증거입니다. 자, 끝으로 마지막입니다. 7절 봅시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했죠. 방금 이야기한 게 그거에요. 가난한 사람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의로움을 증명해줄 자료들. 항상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교만해질 그러한 여건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항상 있는 거예요. 내 잘남을 증명하는 것. 먼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이런 것을 말하죠. 그런 것은 항상 있다. 그러나 그거 한다고 해서 그게 바로 주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의 일은 뭐냐 하면 내가 이미 주의 장례식에 합류했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 사는 거예요. 죽은 자로. 뭣에 죽은 자로? 죄로 인해서 죽은 자로. 따라서 우리는 죄짓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뭐냐, 죽는 이유에요. 죽음+알파. 죽기 때문에, 죽어야 비로소 나오는 여분의 것. 초과적인 것. 그것은 우리가 죽는 이유를 평생 동안 깨달아야 돼요. 죽는 이유는 뭡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이유. 주님이 왜 죽었습니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거. 따라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아는 겁니다. 죄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지을 필요는 없죠. 그런데 우리가 한통속이 됐는데 어떻게 해요. 한통속이 됐는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 나가나 집구석에 있나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항상 세상과 공통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요. 유감없이. 이거는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차이. 차이남. 죽은 후의 초과적인 것. 죽는 이유. 죽는 의미, 그것을 끄집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한껏 사용하시는 거예요. 자, 마지막으로 총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자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장례식의 자리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리에 있는데, 그 자리를 우리의 옛 속성이 뭘 자랑하느냐 하면, 내가 멀쩡하게 잘난 존재로, 내가 살아있는 자리로 이걸 자꾸 옮기게 돼요. 이건 착각이죠. 비현실이고. 실제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남들 보기에 다 살아있으니까, 나도 같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내가 나를 꾸면서 다시 멋있는 나로 재조정하고 싶은 그러한 자리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가, 이 차이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이 차이 때문에. 이 차이가 없으면 주님이 죽을 이유가 나타나지 않아요.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죽을 이유를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행세, 본성의 행세, 이 사이를 주님이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이 죽으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려고 하는 이 본성을 계속 발휘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영광은 주의 뜻대로 되어 지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만 영광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 8절 봅시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께서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그런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지금도 주께서 부여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여인이 이렇게 칭찬을 받고 복음에 합류되어서 주께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은 자를 아느냐, 우리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그 자리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보는 그 자리가, 그 차이가 있으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 차이가 없으면 그거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가 없으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주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그 차이 있잖아요. 나를 근사하고 멋있게 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 십자가 앞에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특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있는 자리가 복음 전파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잘남을 증거 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못난 존재며 죄 짓고 있는 존재며 이기주의인가를 드러내는 그 자리가, 도리어 주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자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