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 190610
20190610a 부산강의 : [시편]19(12편)-중첩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2편입니다. 시편 12편은 성경의 중앙에 있다는 것, 구약에도 중심에 있는 글입니다. 앞에 뭔가 있었었고 뒤에 또 뭔가 있겠지요. 신약이 있겠지요. 중간이니까. 시편의 내용을 알려면 앞에 뭐가 있었는가, 뒤에 뭐가 올 것인가? 그 양쪽을 다 뽑아내야 돼요.
학교 운동회 알 때 사람 위에 올라가고 사람 위에 올라가는 피라미드 쌓기 있지요. 그럴 때는 제일 위에 돋보이는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해서 양쪽에서 받쳐줘야 되듯이 시편에 담긴 내용을 알려면 현대인인 우리가 직접 들어가선 안 되고 양쪽에 걸쳐있는 것을 타고 올라가야 돼요. 그림으로 그리면 피라미드 있잖아요. 밑에 사람들이 있고 제일 위에 한 사람이 올라갔듯이 밑받침이 없으면 위에 있는 사람이 돋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시편 12편 하는데 여기 창세기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예수님 있다면, 시편은 중간에 있거든요. 시편 12편의 내용을 우뚝 솟아나게 알려면 이쪽 내용과 이쪽 내용을 거쳐서 올라와야 이 내용이 뽑혀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이야기를 이 시간에 다 할 순 없고 시편 12편에 나오는 내용이 악이에요. 선이 아닌 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악의 이야기를 하려면 창세기 3장에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치마를 벗기고 가죽옷을 만들어줬지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오늘 이것과 악을 연관시킵니다. 가죽옷을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개입의 흔적이죠. 가죽옷을 만들었다 칩시다. 여기 하나님이 개입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인간을, 아담이 하와를, 하와가 아담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됩니다. 내 영향력을 타인에게 직접 가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그러질 못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이미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개입하려면 가죽옷을 강제로 벗기고 개입해야 돼요. 그러나 가죽옷을 강제로 벗길 입장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집어넣었기 때문에.
가죽옷은 뭘 대체하느냐 하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인간이 수치스러움이 없다고 해서 옷을 만든 그걸 대체해서 하나님이 개입했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 나왔지요. 하나님의 개입은 반드시 뭘 겨냥한다? 인간의 수치스러움, 인간의 약점을 겨냥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과 결합한다는 것은 장점과 결합하지 않고 대단한 강점과 결합하지 않고 뭐와 결합하겠어요? 인간이 숨겨놓고 싶은 은밀하게 감추고 싶은 것과 하나님은 개입하는 거예요. 약점이 구원하는 거예요. 나의 약점이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교회처럼 장점 내세우지 말고, 기도 자랑, 헌금 자랑하지 마시고. 약점과 결부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시편에 오기까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개입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약점이 있음을 뭐로 티를 내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장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 약점은 뒤에 꽁꽁 숨겨놨다는 것을 티를 내는 겁니다. 영웅주의지요. 바벨탑도 그중에 하나고. 대단한 것.
이 가죽옷의 원리가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에 대해서 자식들이 두 패로 나눠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노아는 영웅이다, 아니다. 이 싸움이죠. 노아가 술을 먹고 하체를 드러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개입이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그걸 덮어주는 식이죠.
첫 번째 단계, 수치를 노출시키고 그것을 덮어줌으로써 네가 하나님이 없이는 네가 의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쪽입니다. 셈과 야벳을 그 일을 했어요. 자식이 두 패로 나눠집니다. 그 반면에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은 그것에 대해 얼레리꼴레리 한 거예요. 상대적으로 아버지는 나보다 못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셈과 야벳은 인간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나 사이에 집어넣을 게 있는 거예요. 똑같은 죄인이지만 주께서 덮어주는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의미다. 그래서 야벳과 셈은 그 정신을 계속해서 확장시킨다고 해서 축복을 하는 거예요. 축복의 의미는 동일한 질의 확장입니다.
이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만들면서 축복하시매 새들이 늘어났고 축복하시매 짐승들이 늘어났다고 돼있지요. 축복이란 확장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꾸 번식하고 커지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아기를 못 낳으면 저주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아기가 있으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확장됐다고 보는 겁니다. 질적으로 인정받는 질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그것의 확장이죠. 아무나 확장되면 안 되고요.
셈과 야벳을 복을 받았는데 반면에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어요. 저주를 받는 것도 똑같습니다. 너 같은 성질의 것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종착점에 이르게 되면 지옥 되지요. 축복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격과 성질을 조성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환경이 결정하지 본인의 행함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느 소속이냐, 로 구원되지 네가 얼마나 개인적으로 잘났느냐, 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제가 울산강의하고 ‘하나님의 호주머니’라고 제목을 붙인 적이 있습니다. 좀 친근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의 호주머니. 할아버지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전 몇 개.
그처럼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호주머니 안에서 달랑달랑 소리 나면서 그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의인되고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고층 건물로 올려주듯이 예수님이 엘리베이터가 되고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을 뿐이죠. 예수 안에서. 예수 안이라는 그 내용이 조금씩, 조금씩 이 땅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그냥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서 잡아당기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구원해주시는 구원의 구조는 하늘에서 성사되는 게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죄가 없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아요. 원래 하늘나라가 악마가 있었는데 전투에서 져서 악마가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내려왔어요. 땅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악마를 붙들고 싸우지 아니하면 악마에서의 구원도 무의미하기 때문에 악마 따라서 주님도 오신 거예요.
하늘에서 밧줄로 뜰채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장점이 아니고 약점이에요. 잃어버린 그리고 좁은 길, 자기 부인,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위대하고 성공하고 크고 승리하는 이런 게 아니고 정반대로 가거든요. 크고 위대하고 잘난 것 같으면 예수님을 누군들 안 믿겠어요. 다 믿지요.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는 다 떠났다는 사실. 기껏 옆에 강도 하나 붙어있고 열두 제자마저 다 떠난 거죠. 외롭죠. 나를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아무도 없었다 말은 누구도 내 구원의 일은 보탬 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이 성사되는 데 도움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이게 십자가에요.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돌 판을 깨는 것과 똑같아요. 산에 올라가서 만나야 될 하나님을 아는 산 밑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가져온 황소 금신상을 금가락지 팔아서 형상화시켜놓은 거예요. 금가락지 던졌더니만 나오는 것은 바로 금소였어요.
금소를 오늘날 말로 하면 교회지요. 그들이 재산 바치고 시간 바쳐서 나오는 것은 멀쩡한 고딕 식 건물의 교회였던 거예요. 그게 우상이 돼버린 거예요. 이 교횐 우상 될 요소가, 뭘 바쳐야 수리가 되지. 목사님 전략은 이렇습니다. 믿을 걸 믿어야지, 이런 전략이에요. 믿지 말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계약이 깨져요. 돌 판이 깨졌다는 말은 계약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보세요. 계약이 성사될 수 없다. 인간 쪽에서 성사될 생각은 아예 없다. 그러니까 깨어진 돌 판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리 돌 판에 십계명이 있더라도 산 밑의 너희들은 지킬 수 없는 조항이란 뜻이에요. 지켜서 계약이 성사되는 법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사례는 천국에서 아예 없는 거예요.
예수님 변화산에 있을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대표로 천국이 어떤지 구경하러 갔지요. 그때 모세 엘리야 갑자기 등장했고요. 베드로가 속내를 그대로 보여줬어요. 여기가 좋다는 겁니다. 초막 셋을 지어 분양해드리고 우리는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해도 그걸로 족합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천국이란 것을 베드로가 엄청나게 오해한 겁니다.
그 엘리야 모세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하신 일을 마저 해야 했어야 해요. 뭐냐 하면, 해같이 빛난 얼굴의 신분 자가 산 밑을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어야 돼요. 그걸 누가 기다리느냐 하면, 엘리야 모세가 기다린다고요. 엘리야 모세가 함께 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엘리야 모세는 예수님의 일이 마저 이뤄져야 엘리야 모세가 영원히 살 수 있어요.
그것은 엘리야 모세가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게 되고 그들의 죄를 다 해결해주는 조건 하에 그들은 함께 있은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은 그것도 모르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엘리야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한 내용이 나와요. 누가복음 9장에 보면. 그게 뭐냐 하면, 주님 빨리 죽으셔야 됩니다. 밑에 베드로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세분 사이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죽으셔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라 예수님 죽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해야 돼요. 이미 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기 전에 주께서 먼저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뜻이에요. 아무도 주님의 구원에 관여한 바가 없다.
그처럼 가죽옷이란 의미가 언약 속에 들어가서 언약이 가면 같이 타고 계속해서 이동하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동하면서 우리는 시편 12편에 도달돼있어요. 여기서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1,2절)
이 세상이 별로 좋은 세상이 아니라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걸 보고 오해하기를, 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처처에, 곳곳에 있다고 돼있어요.
우리가 시편 12편을 보고 오해하는 것은, 이 성경대로 세상에 악들이 참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악이 없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이 악을 없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의 보편성 또는 악의 평범성이라 합니다.
유대인을 육백만 학살했을 때 지시는 히틀러가 했지만 그 일의 수행은 밑에 있는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다 했어요. 그 사람이 전범재판을 받을 때 뉴욕타임스 기자로 참석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한나 아렌트인데 그 유대인 여기자가 그 재판을 참관하면서 뭐라고 썼느냐 하면, 악은 없었다는 겁니다.
아주 제대로 봤어요. 왜냐하면 육백만을 죽이든 팔백만을 죽이든 그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가정에 충실했고 공무원으로써 아주 착실한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 보면 굉장히 평범해요.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그 자리에 갔을 때 우리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나 우리나 다를 게 없이 똑같은 거예요. 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