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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나를 넘어선 의미 190604강의요한복음

강남-요한복음 21장 1절(나를 넘어선 의미)190604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1장 하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세 번째 나타나신 거에요 세 번째.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총 7명인가 아마 그럴거에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시고 제자들은 현재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에 거기에 계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 뒤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육지에서 거기서 불과 50칸 한 칸이 3m니까 150m쯤 되는데요. 150m 상당히 멀지요? 남자가 100m 빨리 달리면 15초. 빠른 사람 15초요. 여자들 100m 달리기하면 25초 내지 30초. 그러면 150m 달릴거 같으면 상당히 오래 걸리네요. 적어도 1분 이상 달려야 되는데. 해가지고 뭐 이렇게 달렸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21장 이 내용이 왜 등장해야 되는가? 지금 요한복음 21장의 이 내용은 고기 잡으러 갔다는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을 누가 만들었느냐? 일을 누가 유발하느냐? 일을 주님이 유발하지요. 유발하신다. 일은 세상 일은 주님이 유발하세요.

제자들은 그냥 소극적으로 고기 잡으러 갔을 뿐이고 그러면 예수님이 일을 유발하시는데 이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이미 죽으셨던 예수님이에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냥 부활하면 안 되고 ‘죽음 + 부활’이죠. 죽었다가 부활하셨다 이 말은 지금 제자들은 안 죽었지요? 안 죽었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은 여기에 안 죽었다.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 그러면 예수님 사이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장벽, 차단막이 형성되어 있지요. 차단막이. 장벽, 차단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이쪽은 죽었다가 산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와 달라요. 이것은 죽기 전에 버티는 세계거든요. 그냥 육신의 목숨 버티는 세계고 이미 이쪽 예수님 세계는 죽었는데 다시 사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렇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에 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차단막이 있을 때에 제자들이 기껏 하는 것은 여기서 상상력이 동원되는 겁니다. 과거에 자기의 추억이라든지 이런걸 생각해서 옛날에 함께 있었던 그때 좋았던 시절의 예수님의 모습을 내가 그때를 연상시키면서 “믿습니다 따릅니다 기다립니다 어서오시옵소서” 뭐 온갖 생각들을 다 하겠지요. 이게 과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냐 하는 겁니다.

그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아니에요. 그건 상상하고 조작하는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복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이 되려면 보고 믿었던 사람이 누굽니까? 도마지요. 도마가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도마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보고 믿는다는 이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변화가 있다면 이 변화를 그대로 이 차단막 이쪽에 인간들 사는 열한 제자가 사는 이곳에 끌어당겨 봅시다. 그러면 이 열한 제자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믿음이라고 자꾸 상상하려고 할 때에 여기는 “보지 않고 믿겠습니다 저 상상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하겠습니다 회상하겠습니다” 하는 그러한 자세는 변화된 자세에요? 변화 안 된 자세에요? 변화 안 된 자세지요? 변화 안 된 자세에요.

자기가 변화가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예! 안보고 믿겠습니다” 해도 그 믿음은 주께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쳐주지를 않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되려면 이 차단막, 이 장벽을 뚫고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주님 쪽에서 이쪽에 찾아와야 되는 거에요. 찾아오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 예수님 일하시는 것을 봤다 해서 나는 믿음이다. 이렇게 하면 안돼요. 왜냐? 그럼 보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보여주기는 보여줬는데 그 보여준 것을 뭐로 전환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그 보여준 것을 통해서 나는 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로 전환되는 변화가 제자들 내부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무지무지하게 복잡하지요. 무지하게 복잡한거에요. 그 이유가 있어요. 이 장벽, 이 차단막, 이 장벽이 이 장벽에 대한 두 세계가 나뉘어졌을 때 이 장벽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조차도 죽지 않고서는 이쪽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그럼 제자들이 “뭐 믿습니다 상상합니다 주님 좋아했잖아요 그때가 그리워요” 해도 그렇게 말을 내뱉는 그 자신이 어떻게 돼요? 죽어줘야 돼요 그게. 그럼 죽은 자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고 말해봐야 소용도 없어요. 끽하고 죽는데 뭐 옛날이 좋았습니다 그리웠습니다 주님이 풍랑일 때 주께서 도와주셔서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백날 해봐야 그렇게 그런 기억을 품고 죽어야 돼요. 그게 없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죽지 않고서는 주님조차도 죽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갈 수 없다면 제자들도 죽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으로서 보여줬다는 말은 이 보여줌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멀쩡한 제자들도 죽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겁니다. ‘죽게 하는 효과’.

그러면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죽는 장소가 있어요. 오늘 제목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그게 소실점이죠. ‘소실점’. 르네상스에 원근법에서 보면 그림에 보면 소실점이 있어요. 원근법 최초로 나올 때. 이태리에서 나올 때. 그림 속에 소실점을 넣고 해버리면 그림이 입체적이 되는 겁니다.

그림이 입체적이 됐다는 말은 보는 시각이 인간 중심이에요. 내가 보기에 이차원 평면 속에 삼차원의 입체감을 인간이 그렇게 보고 싶다 해서 원근법을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그 전까지는 뭐냐 하면 인간이 건방지게 뭘 세상을 봐. 세상 해석은 주님이 보는 관점이라야 세상의 정답이다 해서 중세신학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그 그림들이 전부다 의도적으로 인간 보는 관점을 적용해버리고 주인공만 이렇게 평면적으로 원근감 없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있어요. 삼위일체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우리 시각은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우리 시각은. 그렇게 르네상스가 되고 무역이 발달하고 십자가전쟁 이후에 교회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으로 넘어오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그런 사람이지요. 넘어 오면서 핑계가 이런 핑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계를 맘껏 고백해서 주님께 찬미 드리세 핑계는 그런 핑계죠.

그런데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과 감정과 욕구를 화폭에다 담겠다는 노골화가 된거에요. 그게 ‘노골화’. 그림은 사람이 좋아야하지 뭐 하나님이 좋은지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사람이 좋아야 된다는 것을 은근슬쩍 이제 끼워넣기 시작합니다. 슬슬 눈치봐가면서 슬슬 끄집어 내는 거에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품고 있는 그거거든요. 예수님을 품고 있을 때에 남들 보기에는 참 믿음 좋은 마리아가 예수님 슬퍼하는 모습이죠. 중세는 그런 인간의 감정을 노출시키는 것을 굉장히 억제해왔어요. 인간의 감정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시로 구원받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 서서히 교회에 돈 많은 자본가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섞어 넣기 시작해서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접근하겠다 그게 르네상스의 새로운 세계관의 시작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극대를 표현하는 것이 주께 영광이다 그렇게 보는거죠. 모나리자도 마찬가지고.

예수님께서 장벽을 죽음을 통해서 부활했기 때문에 다시 이 장벽을 통해서 오신다면 예수님 다시 오신다면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해당 안 되지만 이 사람들에게 이 장벽을 통과해서 주와 함께 있으려면 이 사람들에게 뭘 제공해야 됩니까? 예수님이 겪었던 그 노선 따라 죽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그냥 자살하면 안돼요.

주님이 겪었던 주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 길, 죽음의 길 아닙니까. 그 죽음의 길을 그대로 적용시켜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제자들이 자기 힘으로 죽어요? 못 죽어요? 죽으면 안돼요. 주께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데 주님의 방식으로 죽어줘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겁니다.

자,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간단하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예 받았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일하겠네요? 네 일하십니다. 그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십니까? 물으면 방금 우리가 이렇게 공부한 이론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시려고 이제 팔 걷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되야지요?! 죽이시려고.

죽이시려고 팔 걷고 나서는데 죽이는 방법은 이거는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방법은 안돼요. 주님이 유발하시는 일로 우리가 죽어야 돼요. 주님이 유발하시는 일로. 왜냐하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완성이란 말이죠. 완성. 그 완성된 코스가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져야 돼요. 덮쳐지면 이 제자들로 하여금 소실점, 다시 말해서 구멍이라고 보면 돼요. 또는 블랙홀 그쪽에서 전부다 몰아넣는 겁니다.

어떤 범죄영화 같은데 범인이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치우려고 하지요. 어떤 집에 아파트에 범인이 들어와서 자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거실에서 죽였다고 합시다. 그럼 이 사람은 이제 피 흘리고 뻗어있겠지요? 그럼 이 사람은 들키지않기 위해서 여기에 안 보이는 창고에다가 할 때 창고가 소실점입니다 소실점. 할 때 시체는 뻗어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보고 빨리 일어나서 걸어가 이렇게 합니까? 아니지요. 이 사람이 두 다리는 잡고 질질 끌고 가지요. 질질. 질질 끌고 소실점으로 끌고 가겠지요. 요한복음 21장 18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원치 않는 것은 사람이 생사람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버리는 겁니다. 죽음의 길로 가는 거에요. 죽음의 길로. 아까 일은 누가 유발합니까? 주님이 유발하지요. 주님이 유발해요. 성도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이 유발하는 일입니다. 그 유발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 살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이미 십자가가 확실했다면 십자가로 가야 돼요. 그럼 그 질질 끌고 갈 때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플러스되는 거에요. 플러스되게 되면 제자들로 죽이는데 어떻게 죽느냐 하면 늙어죽게 하는게 아닙니다. 늙어죽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처음 태어났던 태생에 근원, 태생의 자리로 끌고 가서 죽이게 하는 겁니다. ‘태생의 자리’.

그러면 살아왔던 그들의 생애를 리마인드하는 거에요. 동영상을 거꾸로 반복 돌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기 전에 그들의 직업이 뭐였습니까? 어부였잖아요. 어부라는 그 기억을 이제는 그냥 기억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러한 기억으로서 재편을 해주는 겁니다. 편집을 해버려요. 우리가 살아왔던 것을.

늙어봐야 우리에게 나올거 뻔해요. 차라리 과거로 과거로 되돌려서 처음 네가 시작했던 그 지점, 그 지점은 출생의 지점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처음 만났던 그 지점. 예수님과 처음 만났던 그 지점. 예수님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그 지점. 어부로 살 때는 별로 의미 없지요. 그러나 어부가 되었는데 예수님 찾아와서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때 그때 의미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 의미를 주님 손에서 편집을 해요. 그때 그 만남은 내가 의도했던 만남이라는 것. 무엇을 의도했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 모든 믿음은 보지 않아야 된다는 것.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고기 잡게 해가지고 고기 숫자가 나와요. 153마리.

거기 숫자도 세는데 11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얼맙니까? 153마리죠. 153마리.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 만날 때 그물에 가득 찼지만 그때는 숫자 셀 겨를도 없었어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라고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거꾸로 회상하면서 분명히 확실하게 고기 숫자가 얼마인 것까지도 기억나게 만들어 버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가 무심코 지나간 나의 과거를 근원부터 새로 따지면서 근원부터 따지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베드로가 예수님 만날 때부터 이미 자기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으로 만난 거에요.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으로. 그동안 너무 까불었어. 주의 일 하겠다고. 그냥 죽으면 되는데 안 죽고 주의 일 하겠다고 계속 까부는 거에요. 주의 일 하겠다고 수제자 되겠다고.

그래서 네가 까부는 그 모든 것, 그 까분다는 것은 뭐냐? 보고 믿겠다는 것도 포함되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찾아와서 내가 살아온 과거를 아무리 깨어있는 상태에서 보고서도 아무리 해석해도 해석해서 ‘내가 죽어야 마땅합니다’를 뽑아낼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 과거라고 하면서 ‘이런 인간은 죽어야 마땅합니다’를 뽑아낼 수가 없어요. 이만큼 열심히 살았으니까 나는 살아야 마땅하다 이게 튀어나오는 거에요.

주님께서 죽어야 마땅함을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어요. 죽는 놈이 뭘 보고 들어요. 그냥 죽어줘.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까불지도 말고 죽어줘. 죽어줬을 때 비로소 그 관계가 보지 않고 믿은 믿음이에요 그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구원받는 것. 그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고요.

자기가 펄펄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보탬 기여해야 되는데 행위를 착한건 해야되잖아 이렇게 나대게 되면 아무리 해도 그건 보고 믿는 믿음이에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고 믿는 믿음이에요. 보지 않고 믿어 버리면 그 사람은 죽을 수가 없어요.

왜? 괜찮은 것이 자기 기억에 섞였기 때문에 그걸 차마 부정할 수가 없고 부인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만큼 착했고 이만큼 성실했는데 그걸 죄라고 모른척하면 저는 곤란하죠 이렇게 나오죠. 여전히 자기가 벌떡벌떡 살아가지고 자기가 잘난 척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자들 다 도망갔지요. 사도 요한도 도망갔지 다 도망갔어요. 일종의 뭐냐? 수치스러운 겁니다.

자, 인간의 수치가 어디 있느냐? 인간들은 자기 하체에 수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지난 오후설교인가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수치는 하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올라온다고요. 하나님과 얼굴을 맞댈 때 가장 수치스러워요.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피해버려요. 모세의 얼굴은 영광스럽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그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요. 이게 이사야에 나옵니다. 저 사람의 얼굴은 왜저리 흉측하지? 라고 예언해놓고 그 흉측해진 얼굴이 누구 때문인데?! 라고 이야기해요.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자기가 망쳐놓고 엉망진창 만들어놓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지적하면서 다가서는 것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맞았잖아. 채찍 맞았잖아. 그게 사도 바울에게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다”와 같은 원리에요. 너는 네가 한 짓을 모른다. 네가 한 짓을 몰라요. 왜? 우리는 너무 아름다운 자기의 과거에 사로잡혀가지고. 지난날 내가 잘났던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서 거기에 완전히 빠져가지고 자기가 훌륭한줄 알고 있어요. 훌륭하니까 예수 믿고 더 훌륭하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여러분 아시지만 다시 한번 정리할께요. 주님께서 인간 세계에다가 홀로 장벽을 뚫고 주님 세계에 갔을 때 이 장벽 뚫을 때 그냥 어디 카퍼필드 마술하듯이 멀쩡하게 통과한게 아니고 일그러지고 채찍 맞고 그야말로 흉하게 돌아가셨잖아요. 그 흉하게 돌아가신 그 흉한 모습 그대로 여기 다시 등장하신거에요.

물론 지금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흉측하지 않지만 이제는 그 모습을 누가 재현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제자, 열한 제자들이 복사판으로 뒤집어씌여야 되는 거에요. 자기 고생만큼 흉측한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고 누구 얼굴인가? 주님의 의해서 재편된 이제는 내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사람화된 주님의 사람이 된 그러한 증거물로써 주님 가신 길 그 희망길을 가는 거에요.

여러분 주님 십자가 달릴 때 발가벗었지요? 그게 그렇게 수치스럽습니까? 수치가 어디있느냐 하는 거에요 수치가. 주님을 만나지 못한 그것이 수치에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 그 자체가 수치입니다. 교만한 것이고 뻔뻔스러운 것이에요. 자기 쪽에서 뭐 해보겠다 하는 것이 이게 수치에요. 그거는 진정 죽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잠시 여기서 제가 죽음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인간의 죽음 뭐냐? 이거는 성경 아니면 인간의 죽음을 몰라요. 인간의 죽음이 뭐냐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예언하기를 20세 이상 애들 다 죽인다고 했어요. 20세 이상 애들. 그 논리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홍해 건너와서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다 죽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40일 동안 뺑뺑이 돌리게 한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돌리게 한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면 죽음은 뭐냐 하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살고 싶다고 안 죽고 뭐 죽고 싶다고 죽는게 아니고 죽음은 의도적으로 주와 함께 있다는 조건이 나를 압박해줘야 죽어요.

주님한테는 납득이 되는데 우리한테는 납득이 안 될 때 그게 죽음이에요. 죽음과 함께 동행하는 광야 동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환경이 여전히 자기 위해서 존재하는 환경이라고 아직도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방해돼요? 주의 일이 계속 방해되는 거에요.

주님이여 왜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마실 것을 것을 주지 않습니까? 고기 먹고 싶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을 위한 환경인데 고집을 부리기를 무슨 고집을 부리느냐 하면 내가 나를 위한 환경이여야 참된 주님이잖아요 우기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죽음이 뭐냐 하면 주의 뜻을 모르는게 죽음이죠.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 중심주의가 죽음이에요 그게.

특히 다 죽는다는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열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 나오지요. 걸어서 저 끝까지 올라가기도 많이 올라갔어. 지금은 저 시리아 북부까지 터키까지는 안 갔지만 그 정도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내려와서 참 살기 좋았더라 하지만 우리는 못 들어간다. 사람들 엉엉 울었지요. 그 울고 난 뒤에 너희들 믿지 않으니까 다 죽인다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자기 생각한거에요.

자, 그게 죽음입니다. 죽음부터 먼저 설명했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한 조성된 환경 속에서 이게 자기가 살아야 될 환경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음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죽음을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죽음은 주님이 조성된 환경이 죽음을 이야기하지 주님이 주신 환경을 모르면 자기 죽는 것도 모르고 죽어요.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는다고요.

자, 그러면 죽음이 정리되었으니까 생명은 뭐냐? 거기서 면제되는 사람이 생명이에요. 누구냐 하면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환경을 통해서만 생명이 나와요. 그 외에는 생명이 안 나와요. 왜 나는 왜 살지? 의아해해야 이게 생명이다. 의아해해야 생명이다 이 말이죠.

물론 이런 이야기를 로마서 5장에서는 아주 포괄적으로 다뤄놨어요. 그래서 로마서가 구약보다 어려워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거는 주님이 주관이 되는 주님이 주인이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장벽이 있고 가나안 땅 사람이 등치가 크고 뭐 어떤 강력한 무기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죽은 자는 거기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죽은 자답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어차피 함께 있는게 주님과 함께 있잖아요. 그러면 그쪽 세계도 누가 보장하고 누가 책임지는 겁니까? 주님이 자기 약속대로 보장할 뿐이지 우리가 거기서 가타부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구원될 때는 선악의 가치를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기를 선악 때문에 범죄했잖아요.

그럼 구원받은 사람은 뭐에서 탈피해야 돼요? 나 행동 잘했나, 못했나에 대해서 탈피하라고 구원한겁니다. 구원해놓고 자기 선악을 논한다는 것은 이게 뭐에요? 도대체. 도대체 구원받은거 맞아요? 목사님 보고 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선악이 그대로 있다고 하면 그건 구원이 안 된 상태잖아요.

창세기 3장 이야기가 왜 있습니까? 2장 이야기가 왜 있습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지옥갔잖아요. 그러면 천국갔다는 말은 뭐에 구애를 안 받는다? 상관없다? 신경 쓸 필요없다? 죄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에요 죄. 선과 악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에요. 선하면 내 인생 피고, 악하면 내 인생 꼴아박는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에요.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이 중요한 거.

자, 요한복음 21장 왜 썼다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은 분명히 요한복음 20장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이야기 끝나버렸어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그래 상상해서 예수님 그때 좋았던 시절 상상하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아니에요. 이미 장벽을 쳤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시고 지금 부활한 상태고 제자들은 뭐냐 하면 뚱한 상태에 있단 말이죠. 예수님 잡힐 때 도망쳤잖아요. 도망치고 뻔한 상태에 있는 거에요. 이거는 장벽을 못 뚫었어요. 그러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그 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 장벽을 뚫고 도로 이쪽에 온 겁니다.

도로 이쪽에 와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보지 않고 믿게 하는 그러한 자를 되게 하는데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시던 인생길이 예수님 인생길이 아버지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노선이었던거에요. 그렇다면 그 제자들에게 가는 곳마다 사태를 유발시켜줘야 되는 거에요.

그들은 고기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불러냈습니까? 누가 찾아갔어요? 예수님이 알아서 찾아갔잖아요. 예수님이 알아서. 알아서 찾아갈 때에 그때는 자기가 예수 믿었던 좋은 시절을 추억하는게 아니에요. 실제로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겁니다. 재현하면서 뭘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동안 예수님을 버렸던 이유가 이게 옛날에 광야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기 잘 먹고 잘 살라고 자기 위주로 하나님을 거론했던 그러한 오류 있잖아요. 그러한 오류를 제자들이 똑같이 하는거에요.

그런데 그게 아무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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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53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7,342 강의 시간의 의미 190607 레위기 최고관리자 19-06-07
17,341 자유게시판 190강-창 49장 16-18절(단에 대한 예언)190605-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9-06-06
17,340 자유게시판 277강-YouTube강의(고민거리)20190604-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9-06-05
17,339 자유게시판 276강-YouTube강의(자랑)20190604-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9-06-05
열람 ➜ 강의 나를 넘어선 의미 190604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9-06-04
17,337 강의 유튜브 강의 (276강, 277강), 자랑, 고민거리 190604 - 최고관리자 19-06-04
17,336 자유게시판 26강-엡 3장 10-11절(예정하신 뜻)190602-이 근호 목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19-06-03
17,335 자유게시판 237강-여호수아 19장 49~51절(땅과 백성)20190602-이 근호 목사 여호수아 최고관리자 19-06-02
17,334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190531b 마가복음13장 28-37절(상호주관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9-06-02
17,333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190531a 마가복음13장 28-37절(상호주관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9-06-02
17,332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성전세 / 190602 - 최고관리자 19-06-02
17,331 묻고답하기 담대함 - 최고관리자 19-06-02
17,330 자유게시판 형상 지우기 (마 26:14- ) 대전-110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9-05-31
17,329 자유게시판 버림받은 자 (삼상 16:10-12) 대전-48강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19-05-31
17,328 자유게시판 대전-111강 마태복음26장 21-25절(약점과 십자가)201905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9-05-30
17,327 자유게시판 대전-49강 사무엘상16장13-14절(성신과 악신)20190528-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19-05-30
17,326 묻고답하기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작품 - 최고관리자 19-05-30
17,325 묻고답하기 영화 [기생충]평-봉준호 감독 작품 - 최고관리자 19-05-30
17,324 자유게시판 189강-창 49장 13-15절(스불론, 잇사갈에 대한 예언)190529-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9-05-30
17,323 강의 사무엘상49강( 성신과 악신), 마태복음 111강(약점과 십자가) 190528 - 최고관리자 19-05-28
17,322 자유게시판 25강-엡 3장 7-9절(출생의 비밀)190526-이 근호 목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19-05-27
17,321 자유게시판 236강-여호수아 19장 1절(시므온의 땅)20190526-이 근호 목사 여호수아 최고관리자 19-05-26
17,320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변화산 / 190526 - 최고관리자 19-05-26
17,319 묻고답하기 예정하신 뜻 - 최고관리자 19-05-26
17,318 묻고답하기 감추어진 것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19-05-2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