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 받는 돌의 믿음
버림 받는 돌의 믿음지난 시간에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했습니다.큰계명은 큰 법에서 도출된 큰 법을 지키는 큰 자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낮아진 분만이 끝까지 섬기심으로 말미암아 계명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인간 중에는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앞으로도요? 네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오로지 낮아지기는커녕 섬기면서 높아지고, 낮아지면서 높아지는 자기 중심의 믿음으로 일관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철없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 바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아니 정말 우리 믿는 자 중에 섬기고 낮아지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까? 제자훈련을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성화의 삶을 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새생명의 삶을 살면 분명히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낮아지는 연습 훈련 노력 행함을 일관있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성경에 나온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 일관성들은 늘 무너졌고 주님이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제가 믿음에 대해 어떤 분이랑 대화를 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이왕 줄 믿음 한번도 변하지 않는 그모습 그대로의 믿음, 대끼리의 믿음주면 안되냐 라고 어떤 분이 말을 했습니다만 욕심입니다.과연 그런 믿음 받으면 낮아질까요? 끝까지 섬길까요? 선한목자처럼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칠까요? 오히려 올타구나 이제 아무도 날 건드리면 안돼, 왜?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 이래 나오지요. 그래서 믿음을 허락 받은 자를 수없이 정신 못차릴 정도로 붙이십니다. 무엇을요? 죄를 붙이십니다. 이것이 붙이시는 전쟁입니다. 붙이심으로 인해 믿음을 가졌다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내가 믿음의 원수노릇을 했구나 라고 탄복케 만듭니다. 누가요? 믿음이요.(믿음은 나를 향해 늘 싸움 걸어온 겁니다=얍복강가)그럼 내가 믿는 믿음은요? 내가 믿는다 라는게 말이 안됩니다. 믿음이 나의 허락도 없이 온겁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과 전혀 다르게 나를 인도합니다. 그 믿음은 내가 원치도 않는 믿음이요 그 믿음을 통해 나는 죄인이구 나는 원수였구나 라고 내가 원치도 않는 고백을 하게끔 합니다.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라고만 고백하며 살고픈데 그런데 왠걸 원치도 않는 나야말로 주님의 원수요 죄인 중의 괴수로소이다 라고만 고백케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양자는 불러주신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게 되는 둘만의 비밀입니다. (심판 속의 구원)내가 원수 짓을 했어야 원수라고 고백할 것 아니냐고 따지고픈데 성경을, 드디어 성경을 보니, 비로소 성경말씀을 보니, 비로소 예수님의 활동을 보니, 마침내 예수님의 믿음을 보니,그만 입이 다물어 집니다. 그 예수님은 마치 창녀처럼 변한 다말이(유다 가문을 망하게 한) 유다의 믿음 행함(산 족보)을 극복하고 다말의 믿음(살려주는 족보)에 의해 없는데서 생겨난 믿음으로 유다의 계보 즉 예수님의 족보를 잇게하는 것처럼. 거룩(긍휼,이내,자비-마 9:13/호 6:6)이란 인간에게서 없는데 있다고 착각한 유다의 믿음이 고발 당함으로 비로소 마침내 니가 옳도다 라고, 아니 더 정확하게 너는 나보다 옳도다 라고 고백으로인간의 죄악성을 반드시 끝까지 돌출 시키므로 인해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겁니다.(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우리의 믿음은 틀렸고, 예수님의 믿음은 옳습니다 라고, 아니 예수님의 믿음은 나 보다 옳은 믿음입니다 라고,믿음은 우리 속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인간의 신앙 족보(곧 역사)는 틀렸고 아니 원수였고 예수님의 족보만 남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고백을 믿음이 반드시 이끌어 내더라입니다.묵시에서는 믿냐 안믿냐 믿었으니 대단한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그럼 낮아지자가 아니라 섬기자가 아니라 [낮아진 자가 누구냐? 섬기는 자가 누구냐] 라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믿음의 세계라는 겁니다. 성령은 바로 그 누구에게만 모든 초점을 두도록 하지, 자기 믿음 생활 관리에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그럼 성령의 소욕이 그렇다면 마귀의 활동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일 반대겠죠. 그저 자기 신앙 관리, 믿음 생활 콘트롤입니다. 그 믿음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나타나고 모든 인간의 믿음으로 예수님께 시험한 내용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의 시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마귀의 활동을 그동안 어떻게 알고 있었나요? 못믿도록 하는 것 아니엇나요? 아닙니다. 더 잘믿도록 하는 것이란 것을 마귀의 활동을 통해 알게됩니다. 어느정도로 더 잘 믿도록 입니까? 크게 믿도록 남들보다 더 믿음 크도록 오늘날 한국교회의 싸움은 큰 믿음 갖기입니다. 이 경쟁을 교인들에게 목사가 붙여놓으면 목사는 그저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갑자기 안성기 배우의 투캅스가 생각 나네요. 정의감을 불태우도록 사건을 붙여줍니다. 그러면 안성기는 뒤에서 열심히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면서 자기 믿음을 더욱더 열심히 하겠죠.그렇다면 낮아지는 믿음이란 인간에게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모든 인간의 믿음은 크도록 다른 사람이 아닌 나 만은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그 큰 믿음에 집착토록 만듭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믿음이요 선택이요 사랑입니다.광신도 맹신도들이 모든 종교에서마다 유별나게 나타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나올수록 권좌에 앉아계신 목사는 종교 교주들은 그저 기쁨의 탄성을 지릅니다. 가끔씩 나눠주기도 하지요 오른팔 왼팔인 장로들과 실세들 그들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기쁨이 만만치 않게 작용 됩니다. 그래서 상좌 오르기 큰 자리 큰 믿음 작은 믿음으로는 도저히 쪽팔려서 천국에 갈 수 없으니 미리 큰 자리 다툼을 이 땅에서 하는 겁니다.(성화도 따지고 보면 이런 노골적인 유치성을 철저히 가면을 쓴고급엘리트적 합리화 입니다)열심 큰 믿음을 갖자 큰 생각 큰 비젼 큰 꿈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한결같이 교회에서 내거는 슬로건이 다 마귀의 작품인 겁니다.또 반대로 자기 성격에 맞게 나는 큰 거 안 좋아해, 아기자기 작은 것으로 족하는 자는 나름대로의 신앙으로 자기 성격에 맞게 믿음생활 하겠다고 합니다. 상좌에 오른 목사도 너무 설치는 인간이 있는 것도 좋지만 너무 많은 것도 싫어하겠죠!(서로 니 잘났다 내 잘났다 하니 시끄럽죠) 가끔은 드물겠지만 아기자기하게 자기를 안 알아줘도 묵묵히 말없이 일하는 그런 속내음이 깊은 자들이 자기 주변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 역시 낮아짐을 흉내내는 섬김을 충성 봉사를 유도하는 작은 예수 만들기 운동입니다. 이것이 정치입니다. 정치란 한마디로 말해 조화입니다. 조화. 양성 음성이 적절히 조화 되면서, 음양의 조화한마디로 퍼팩트한 믿음 만들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탈락 된 겁니다. 버린 돌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도 인간의 믿음 속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전혀 조화로울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묵시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입니다. 묵시의 믿음은 역사 속의 믿음에게서 배척받는 버림 받는 돌의 믿음인 예수님입니다.오늘은 인간의 믿음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버림 받는 돌의 믿음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 마 23:8- 24: 2 )사람의 신앙이란 선택 받은 자 속에서도 큰 자가 되기 위한 믿음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율법사의 큰 계명 질문은 자신들이 큰 계명을 지키는 자이기에 이꼬르 곧 나도 큰 자 이다 큰 자로 대해주질 않으면 섭섭하다 라는 것이 인간이 예수님에게 낮아진 하나님에게 들이내미는 믿음의 주장입니다. 요즘 많은 자들의 질문도 다 그런 의미입니다.크신 하나님을 믿어주는 나 이꼬르 큰 자, 곧 큰 믿음이 있는자 라는 그 크나큰 자 앞에 아주 처참하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받은 모습으로 피흘리시면서 등장합니다. 아주 엽기적입니다. 그래놓고도 우리는 그 피비린내 진동하는 십자가 앞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강퍅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 일관적인 믿음은 어느 구석에서 나오는 것일까요?여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인간의 일관적인 모든 행동, 믿음이든 생각이든 언어든 그 근원에 대해서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곧 외식입니다.외식이란 의도된 계산이 있다는 겁니다. 의도된 계산이 무엇일까요? 사실 없습니다.이 없다는 말에 반감을 가지는 분이 계시겠지만 저는 없다가 정답이라고 봅니다. 즉 그말은 모두다 진심이다는 겁니다. 이처럼 순수하기 짝이 없고 진심어린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 혼자만 왜 돗대처럼 외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까?예수님 자기 혼자만 성경이고 하나님이고 자기만 잘났고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다 외식입니까? 그게 사랑의 하나님인가요? 독불 김일성이지?그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왜 하시는 것입니까? 억측 아닙니까? 질문 속에서 대답할 생각은 아니하고 왜 회피하면서 엉뚱한 소리만 주장하는 것일까요?그 이유가 간단합니다. 그 질문 속에서 예수님은 외식을 발견 했습니다. 즉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는 진심어린 질문이요 진짜로 너무너무 궁금해서 알고파서 아무 가식없는 질문인대 왜 외식이라고 하지요? 누가 보이려고 한답디까 궁금해서 질문하면 다 보이려고 한다라고 몰아 붙이면 아무도 질문하는 자 없지 않을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어허 참 말이 디기 안통하네요 왜 뒤집어 씌웁니까? 답을 회피하고 답을 못하면 못했지 핑계를 댑니까?바로 그것이 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예수님은 보이려고 한다는 그 답변 속에 모든 인간의 행동과 언어와 믿음 속에 이것이 담겨져 있기에 그 보이려고 하는 외식에 감염된 이상 너의 아무리 선한 말 이웃 사랑 큰 계명 지키고자하는 그 믿음 이 모든 것이 감염 상태다 라는 겁니다.그러니 단절이지요 (단절임을 직시하라는 겁니다)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상 접근 불가입니다. 격리 대상입니다.즉 단절입니다.자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그런 생각 곧단절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 감염된 마당에 감염된 자들끼리 외식이라는 것은 있을수 없는 겁니다. 오직 믿음이요 오직 거룩입니다. 문제는 외부에서 나타난 광야의 사나이 예수입니다. 그 자 만이 외치고 다닙니다. 넌 감염되었어 라고요. 다 감염된 마당에 아무도 감염되었다고 외치는자 없거늘 무슨 돗대라고 된 양 혼자 감염되었다고 외치고 다니니 감염된 입장에서 보면 무지 기분 나쁩니다. 아니 감염 안되었습니다 내 믿음으로 이미 감염 해결 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자가 십자가를 대신 지어서 감염을 해결 단번에 해결 했거든요 그런데 왜 또 감염을 외치고 다닐까요? 그 얼마나 믿기 어려운 믿음을 겨우 믿었었는데 ......그 이유는 니가 죄사함을 믿은게 아니라 내 소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려내겠다고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는 보이러 오는도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 말 듣고 가만히 있던가요?족 쳐 버리지요. 감히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를 감히 어디서 감히 외식하는 자요 누룩이다는 둥 소경이다는 둥 바리새인 이다는 둥 제일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 하는데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사단이 아닐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과 믿음의 충돌에 예수님이 멋지게 당해버린 겁니다.인간의 믿음을 아무도 꺽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믿음 마저도 꺽어버리는 믿음이걸랑요.자 이제 더 무서운 주님의 결심이 진행됩니다, 주님의 믿음이 어떻게 진행 되느냐? 그것은 곧 냅뚜는 겁니다.(롬 1:24) 저거들 멋대로 믿도록 그냥 믿~~쑵니다. 지 믿음대로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냅뚜고, 반대로 그 속에서 빼내어서 자기 믿음을 심은 자에게만 믿음을 선물로 준 자에게만 얄밉기 짝이 없도록 독선적으로 독단적으로 알콩달콩 사랑을 옆에서 보면 닭살이 온 몸에 퍼지도록 나누는 겁니다. 이것에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이제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때려서라도 고쳐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그 말씀에 믿음을 건 자들은 주님의 믿음과 충돌 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 얼마나 헷깔리게 하는 우리 마음 우리 믿음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영의 장로님이 전화로 하시는 말씀이 그럼 뭐냐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단 말이냐? 라는 질문에 저는 있는 것 마저도 빼앗는 분입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있는 믿음 빼앗아야 지금 주시는 믿음 받을 것 아닙니까 라고 말이죠.주님은 구원도 빼앗는 분입니다. 심지어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은 예수님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마저도 유대인에게서 빼앗았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요 취하실 이도 여호와입니다. 그 빈자리를 원가지를 꺽어 버리고 버린 가지를 접붙임 하는 겁니다. 그 앞에 구원의 확신이란 웃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 믿음에 기대 걸지 않고 주님의 믿음 곧 십자가에 기대한 겁니다 믿음은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처럼 든든한게 없는 확증된 사건은 없습니다.오늘 우리 구원을 빼앗으러 온 예수님이 자기 구원을 주시고자 어제 믿음 어제 예수님 무너뜨리고 지금 예수님의 믿음으로 채우시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입니다. 이것을 지켜보라는 겁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우리의 믿음에 의해 버림 받은 그 돌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 극복하고 인간의 자기 선택 때문에 예수님의 믿음을 버린 그 현장에서 긍휼과 용서로 다가오는 그 낮아지심 그 섬기심에 그저 입이 있어도 할 말 없는 입이 딱 다물어지는 그 믿음 앞에 그저 살려만 주세요 당신만 옳습니다 감히 우리는 그것두 모르고 아는채고 하고 믿는 채 했던 모습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예수님.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홀라당 벗기시러 오신 그 믿음 앞에 우리 믿음의 허상을 남도 살리지도 못하는 그 믿음의 허상을 폭로하여 주시고 (십자가와 나와의 싸움 앞에서) 오로지 주님의 믿음만 바라보고 간 믿음의 선배들처럼 예수님의 믿음에 무릎 꿇는 날마다 처참하게 지는 실패하는 기쁨 정복 당하는 기쁨 날마다 죽는 기쁨 날마다 죄인의 괴수임을 아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소서. 내 믿음대로 마옵시고 예수님 믿음대로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ttp://hompy.sayclub.com/hompy.nwz?targetmsrl=20078551&pop=p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