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3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예수님의 호주머니
20190503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예수님의 호주머니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레위기 22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열납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레위기도 마찬가지고 율법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걸 제시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법을 대하면 인간이 거북스러워요. 평소에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거든요. 내가 하고 싶다는 스케줄은 누가 정하느냐? 본인이 정한단 말이죠.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정하고 그 일을 내가 함으로써 사는 즐거움과 보람을 얻겠다.
그런 생각이 투철한데 그 생각에는 무엇이 끼어들 수 없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식으로 살 테니까 제삼자는 좀 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라는 그러한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어요. 내 인생은 즐거운 데로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일종에 하나님이 갑질하는 느낌이 들지요.
내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강제하듯이 아랫사람 지시하듯이 하게 되면 뭐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을 주관하고 마지막에 심판까지 관장한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주기는 해주지만 썩 내켜서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겁니다. 속으로 어이 더러워서 해주자, 이런 식으로. 안 해주면 삐져서 내 인생 가로막고 나설 게 뻔하기 때문에 해주자, 해주자.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주지, 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별로 감사하고 아주 좋은 기분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기껏 인간 쪽에서 내세우는 협상이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해줄 테니까 그 일이 성사되고 난 뒤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님께서 들어줄 거요, 말 거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죠.
일해 주는데 공짜는 없다.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억지로 해줄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우리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원하는 게 뭐냐? 우리 가정 행복하고 건강하고 사업 잘 되는 거죠, 뭐.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제시한 이유는 이미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버린 자식이거든요. 버린 자식인데 하나님은 아는데 인간은 본인이 망가졌다는 것을 인정 안 하려고 합니다. 먼 나라로 선교 나갈 생각은 하지 선교사로 나가는 자신이 정상이 아닌 것을 선교사 본인이 인정을 안 하려고 해요. 신학교 나와서 목사 할 생각 말고 목사 하겠다는 내가 정상이 아니고 망가졌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게 문제란 말이죠.
근본적으로 어디 있느냐 하면, 이 몸이 몸을 하나 두고 나의 몸이라고 앞에 붙여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쓰겠다는 겁니다. 고집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그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하나님에 속한 몸이라고 가져가는 거예요. 중간에 이 몸이 죽을 지경입니다. 양쪽 다 고집이 세지요.
내 몸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쓰겠습니다. 주님은 이 몸은 쓰일 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너의 만족과 너의 편함을 위해서 네 몸이 있는 게 아니고 네 몸은 달리 쓰일 용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 몸의 용도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쓴다고 주께서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네 몸을 네 원대로 썼더니만 나온 결과가 개판 아니냐, 엉망 아니냐?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고 들어오시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이 탑을 하나 쌓게 되지요. 시날 땅. 그 탑 이름이 바벨탑이에요. 그 탑을 쌓으면서 인간들은 즐거워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의도를 보는 겁니다. 그 탑을 쌓는 목적이 있을 것 아니냐. 그 목적이 뭔지 이미 하나님은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까지 닿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 이름이 어중간하게 하나님께 닿지 않고 어중간하게 땅에 왔다가 땅에서 멈추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의욕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라갈 때까지 올라가보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할 의도로 바벨탑을 쌓는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 몸, 육신을 자기들 뜻대로 사용하겠다고 할 때 이것은 인간 전체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뜻이 뭔지 완전히 들통 났지요. 우리 이름을 갈 때까지 가겠다, 높아질 때까지 높아지겠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인간의 목적은 결국 자기 이름의 영광성이죠. 자기 몸으로 자기 육신을 가지고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들겠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의로움을 끝까지 하늘까지 뻗혀 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가치 있고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나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하늘 끝까지 땅 끝까지 펼쳐보겠다는 의욕을 모든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공통된 마음으로 공유하고 있더라는 것이 바벨탑 쌓는 것을 통해서 들통 나버린 거예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의 뜻은 뭐냐고 직접 아는 게 아니에요. 너희 뜻은 이거였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문제 거야, 라고 지적하는 형식으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겁니다.
제가 인간의 뜻이 뭔지 먼저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뜻은 뭡니까? 자기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바벨탑이 완공되지 못했지요. 중간에 흐지부지 됐지요. 그 말은 바벨탑 쌓는 걸 누가 방해했습니까? 하나님이 방해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태여 물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물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정답 나오지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저지하는 겁니까? 내 이름이 높아지는 걸 저지하는 그것이 곧 뭐다?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별로 어려운 것도 없어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몸으로 내가 잘 되는 식으로 나가는 것을 저지하고 그걸 용납하지 않는 그것이 뭐나고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내 교회가 잘 되는 것은 그 교회 교인들이 이구동성 다 원하는 거예요. 그럼 그 교회에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제가 기본문제 이야기했으니까 응용문제에 답변할 차례지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그 뜻을 저지하는 게 하나님 뜻이죠. 교회 백날 커도 그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그 교회 교인들의 자존감과 자기 이름이 들어있지요. 일종의 바벨탑이잖아요. 그걸 저지하는 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죄인인데 인간은 자꾸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해요. 이미 하나님께서 규정했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규정했는데 인간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세밀하게 우리에게 계속 추가적으로 준다는 이 말은, 계속 찾아온다는 이 말은 근원적으로 우리가 무엇이 죄인 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본인이 혼자서 끙끙 앓아 대면서 죄가 무엇인지 알아낸다고 죄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때 비로소 죄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분석해서 죄를 아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타인에 대해서 소홀히 한다든지 관심 없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바벨탑이 창세기 11장이죠. 창세기 12장에는 누구 이야기 나올까요? 아브라함 이야기 나오지요.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 나온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결국 누구 이름을 들고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 이름이 아니고 인간의 몸, 육이죠. 육을 긍정하는 자기 이름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이것은, 인간의 이름과 반대되는 게 누구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죠. 언약의 이름, 또는 여호와지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처음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육의 이름이에요. 아브람은 본인의 이름입니다.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아브람은 상상도 못했고 예상도 못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 주의 이름, 약속이 오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아브람이 육적인 이름이라면 아브라함은 누구의 이름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인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람이란 육체를 하나님의 원대로 사용했단 말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가볼게요. 인간의 몸은 하나인데 서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태어난 내 몸이니까 내가 사용하겠다고 우기는 반면에, 이 몸은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있는 몸이라고 자기 몸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브람 몸은 하나에요. 둘이 아닙니다. 하난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보겠다는 거고, 아브람은 우리 아버지가 지어준 아브람으로 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가 니 아버지라는 거예요. 나타난 하나님이 진짜 네 몸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생뚱맞은 이야기죠.
단순히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곱게, 곱게 이전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아브람 자신의 고집과 죄성과 불신앙이 거기서 도출되는 거예요. 생산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서 나온 이스마엘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약속된 자식은 네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함이 분명해졌을 때 이제 자식을 낳을 기미가 전혀 없을 때 그걸 몸이 죽었다고 해요. 태가 죽은 것이 확실해졌을 때에 죽은 태에서 임신되어 생산되는 그 자식이 하나님이 아브람 네 몸을 사용하고 네 아내 몸을 사용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고 나오는 겁니다.
들어보면 어렵지 않지만 이게 현실에서 그런 사례를 찾는다는 것이 상당히 불가능하고 난해하지요. 이론상 어렵지 않은데 현실적으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의아해할 정도로 특이한 거예요. 여러분, 신앙은 특이한 겁니다. 개나 소나 교회에서 세례 받는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에요. 내가 미쳤나 할 정도로 특이해야 돼요.
제가 특이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꾸준히 내 몸으로 내 편한 데로 내 행복 위해 살고 내 가정 잘 되고 돈 잘 벌면 그만이지. 그게 하나님 믿는 뜻이지, 뭐. 이런 식으로 평소에 거기에 너무 몸이 젖어 있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평생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제가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진짜 신앙인이라는.
지금까지 강의한 걸 요약하게 되면, 몸은 분명히 하난데 각자 쓰시겠다는 양쪽에서 이 몸을 서로 가져가겠다는 그런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어요. 그러면 몸을 어떻게 쓰시는가? 오늘 본문 레위기에 나오듯이 율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가 강의 처음에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원하는 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아까 누누이 이야기했잖아요. 원하는 것은 내 몸이니까 내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테니까 손대지 마세요. 이게 우리가 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거는 하나님의 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한 원칙들이 제시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주는 원칙이 아니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나를 붙드는 손모가지를 떨어트리는 거예요. 손 떼라. 네 인생에서 네가 손 떼라. 이게 주의 법이에요.
내가 내 몸에서 손 떼는 걸 신약에서는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죽음이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릴 텐데 이 죽음이란 게 왜 필요한지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해서 자기 육체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썩어진 걸 거둔다. 이건 뭐냐 하면,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네 육체를 네 원대로 사용한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란 말이죠. 따라서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기 육체를 자기가 관리해봐야 그것이 생명이 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란 말이죠.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는 것은 육체를 넘겨주는 거예요. 제 육체가 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하고 주님한테 자기 육체를 인수인계하고 넘겨주는 거예요. 넘겨주게 되면 우리란 뭐냐 하면, 내가 저돌적으로 들이대고 설쳐대는 게 아니고 우리는 내 육체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애쓰고 그 결과물을 따먹는 식이에요. 하나님이 이 몸을 다뤘고 우리는 이 몸에 의해서 얻어진 것을 그냥 누릴 뿐입니다. 가게 열어놨는데 손님 오고 안 오고는 우리가 애썼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 손님 보내주면 그 덕으로 밥 먹고 사는 거고 손님 안 보내주면 못 사는 거죠.
그럴 때 오늘 하루도 육체를 위해 했는지 성령을 위해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장사든 뭐든 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덕분에 오늘도 수입이 짭짤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 몸을 하루 종일 움직였던 모든 움직임에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얼굴들 보니까 평소에 매일같이 그렇게 사신 것 같은데……
평소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걱정 되면 자기 육체를 위해 심은 거고 걱정 안 하고 살면 그건 성령께서 하신 거죠. 걱정한다는 건 뭡니까? 내 뜻대로 고집을 부린다는 뜻이거든요. 고집 부린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다시 본문 돌아와서 정리하게 되면, 몸은 하나인데 서로 사용하겠다는 분이 양쪽에 따로 계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몸을 사용하실 때 어떻게 하시느냐? 율법을 주신다. 그런데 그 율법 내용은 내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내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전혀 그것과 일치되는 점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위해서 이 몸을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 19절에 보면, “열납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라고 돼있지요. 보통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물을 되게 좋아하시는구나. 역시 하나님도 뇌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로 인간과 똑같네. 소나 양이나 드리자. 드리면 복 받겠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건 구약이니까 신약에 교회에선 뭘 하냐 하면, 하나님께 돈 바치면 하나님이 돈 받으시고 여러분께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줍니다. 이런 식으로 교인들의 은근히 원하고 있어요. 작은 돈을 드렸는데 큰 게 나왔다. 조금 드렸는데 30배, 60배, 100배로 크게 들어왔다. 이건 세상 말로 뭡니까? 돈 놓고 돈 먹기 아닙니까. 앞에 뭘 태우란 말이죠. 태우면 아다리 된다는 거예요.
마중물이라 하지요. 뭐든지 바쳐야 그 바친 걸 보고 최소 30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서영춘이란 코미디언이 잘 이야기했어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뭐 없이는? 컵이 아닙니다. 꼽뿌 없으면 못 마신다 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있지 말고 뭔가 천 원이라도 하게 되면 아다리 되면 30배니까 3만원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도박판이에요. 주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네가 복을 못 받는 것은 안 바쳐서 못 받는다는 겁니다. 성급하게 그런 식으로 해석해버려요. 이걸.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뭘 바쳐도 내 몸은 내가 관리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돼버려요.
하나님 이용해서 나는 원래 잘 되길 원하는데 내가 힘이 모자라니까 하나님께 뇌물을 주게 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내 뇌물 받으시고 양심적으로 섭섭하게 하실 분은 아실 거고, 네 정성이 갸륵하구나, 해서 30배, 60배 주신다. 이 약속을 믿어라. 믿습니다, 하고 안 믿으면 안 돼. 믿으면 그만큼 실제로 살아 계신 증거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기 뜻에 놀아나는 거죠.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몸은 누구 것이 됩니까? 자기 것이 유지되고 이것은 곧 뭘 뜻하느냐 하면,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뭘 원해요? 자기 이름이 잘 되는 것, 자기 자신이 잘 되는 것을 원한다는 인간이 자기 이름에 대해서 못 돌아서요. 돌아설 수 없어요. 자기 잘 되는 것에 대해서 발을 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것으로 드리되 반드시 수컷으로 드려라. 암컷이 아니고 수컷으로 드려라. 그러니까 하나님, 암컷이고 수컷이고 간에 인간이 주는 대로 받으시면 안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니 생각이고 네가 네 몸을 생각할 때 그렇게 안일하게 한 거고 하나님께선 네 몸으로 반드시 제물 드릴 때는 수컷으로 드려라. 네 몸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수컷이어야 한다는 뜻과 관련성 있어야 한다는 걸 하나님이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수컷이야 하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왜 암컷은 안 되고 수컷이냐 말이죠. 좀 더 어렵게 말해서 암컷, 수컷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따지십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어떤 구조로 짜여 있기에 굳이 수컷이어야 됩니까, 라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면 안 되지요. 알고 있어야 되겠지요.
창세기 15장 8절에서 9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오는 대목이 있는데 유독 거기서 암컷과 수컷을 예리하게 구분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물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물이란 하나님의 반영이에요. 제물이 거울이라면 그 거울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담기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담겨있고 본질이 담겨있어요.
그런데 반드시 어떤 제물이든 항상 어디에 놓습니까? 제단 위에 놓지요. 제단 위에 얹어놓기만 합니까? 여기에 불이 들어가지요. 제단 위에 불이 가미된다는 것은 이 제물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예쁘게 화장하겠다는 뜻이에요, 뭐예요? 제물이 분명히 있잖아요. 있는데 홀라당 다 태우겠다는 겁니다.
제물 태우는 것, 이게 죽음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본 얼굴, 본성, 본질은 어디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죽는 사건 안에서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새 언약이라 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린 양이라 보지요. 요한복음 1장에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죠. 자기를 어린 양으로 보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도 새끼 양이라고 예수님을 양으로 보는데.
양으로 본다는 것은 예쁘다, 참하다, 토실토실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이것은 바로 죽기 위한 제물이란 뜻이에요. 누가요? 예수님이. 그런데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거예요. 아들은 아버지의 내부입니다. 아버지 안에 아들 들어있어요.
그런데 아들이 그냥 멀쩡하게 신장 얼마, 체중 얼마, 이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고 그 아들이 우리에게 보여줄 때 아들을 휘감고 있는 아버지의 짊어진 뜻이 있어요. 그 뜻이 사건인데 그 뜻을 하나님의 원리원칙이거든요.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어떤 사건화 되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다 보여준 겁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죽는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죽는 하나님이에요. 너희들 뜻을 살고 싶지. 아버지 뜻은 죽는 거다. 너희 뜻과 정반대되는 거예요. 너희들은 살아서 너희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데 하나님은 반대로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죠. 만날 수도 없는 거고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얼마나 엄격하고 두려운 거룩으로 인하여 저주받은 죽음이었어요. 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거예요. 아버지 뜻은 뭐냐? 죄 있는 것은 아들이라도 버리겠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게 아버지 뜻입니다.
그런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가 몰라요. 모르는데 아버지 뜻에 의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또는 아들이 이 땅에 아버지 뜻을 남기기 위해서 그 제물, 수컷으로 드리고 어떻게 드리고 세세히 율법으로 해놓고 그 율법을 제단에서 홀라당 다 태우는 겁니다. 아까 있었던 제물 어디 갔지? 다 태워 없앴어요. 이게 아버지 뜻이에요.
있음은 아버지에 의해서 없음으로 나가야 돼요. 있음이 그대로 있으면 안 돼요. 있다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없어져야 될 대상이다. 없어질 것에 불과한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의 자존감, 자존심, 우리 가정은 어떻고 한 달 수입은 어떻고, 여러 가지 뒤에 줄줄 따라오는 게 많아요.
나는 인물이 예쁘고 잘 생기고 키가 크고 배울 만큼 배웠고. 내가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있단 말이죠. 우리 교회 교인이 몇 명이고. 그런데 주님의 제단 앞에 우리 몸을 던진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긴 꼬리 같은 있잖아요. 난 이렇게 배웠고 어느 대학 출신이고 이 모든 것도 제단에서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다 타는 거죠. 없는 거예요.
옛날 유명한 단편에 그런 것 있잖아요.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시장에서 제일 비싼 머리빗을 사줬는데 막상 아내는 머리를 홀라당 다 깎았어요. 남편 시곗줄 사준다고 있을 머리칼 다 잘라서. 하여튼 부부가 사고가 안 맞아. 좀 의논해보고 사야지. 이 땅에서 우리가 영생 얻고자 천당 가고자 준비한 모든 것은 일방적인 내 뜻이지 아버지 뜻은 그게 아니에요.
십일조를 삼십년간 빠짐없이 다 했고 적금 넣듯이 주일헌금 다 했고 개척교회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이슬비 전도지 해서 교회 데려오고 온갖 것 해서 준비 다 했어요. 경건하게 살고 파출소 한 번 안 가고 부부싸움, 누구한테 욕 한 번 안 하고 과속도 안 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이만큼 준비하면 절 받아주시겠지요? 뒤에 구구절절하게 되도 않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많이 하게 되면, 니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딴 게 아무 소용없어요.
살아서 뭘 하겠단 말입니까? 그냥 죽이는 대로 죽어 가면 그만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제물을 바치란 말은, 너는 제물처럼 같은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제물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합류되는 메시아가 오게 되는데 그 메시아도 너와 똑같이 이 땅에서 죽어야 될 운명이다.
그러면 구원받아야 될 너도 죽고 구원시켜주려 온 메시아 죽고 따라서 그 둘이 합쳐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란 그 제물에 예수님도 계시지만 사도 바울도 거기에 함께 죽는 겁니다.
자, 그런데 같이 죽으면 합동 자살이 되잖아요. 우리는 죽는 게 마땅하지만 죽지 않아야 될 분, 죄가 없으신 분이 죄를 위해서 함께 죽었다면, 함께 죽었던 그분이 그분의 의거든요. 그분은 그 의는 부활로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죽을 때 두 사람이 죽었는데 한 사람이 먼저 부활되고 난 뒤에, 그걸 부활의 첫 열매라 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죽음에 참석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석한 사람에게만 두 번째 부활이 주어지는 겁니다. 부활절 지킨다고 부활을 믿습니다, 해서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해야 돼요. 같이 죽고 난 뒤에 한 사람이 살아나서 그분이 죽은 사람을 살려주는 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참 쉽지요. 구원이. 억수로 쉬워요.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 어려우냐 하면, 나는 이미 죽은 자다, 라는 이 서술 이 문장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겁니다. 왜? 죽기에는 너무 잘 생겼기 때문에, 죽기에는 너무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죽기에는 너무 성실한 가장이라. 성실한 주부고 훌륭한 어머니고. 나 죽으면 자식들 걱정 돼서 죽은 자 되기 싫어. 아직도 내 친구들은 낚시로 놀러가고 그러는데 나 죽어버리면 죽은 자한테 아무도 안 오잖아요.
우리는 내가 죽었다는 이 현실을 계속 피하고 돌아다닙니다. 계속 기피해요. 안 들은 걸로 칩시다, 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얼마나 내가 잘났는지를 뽐내면서 평생을 살고 싶어 해요. 나 이렇게 살아왔고 보상받고 잘 되고 있다고 그것 떠벌이고 사는 거예요, 계속.
그렇다면 여기서 아까 배운 것 다시 해봅시다. 같이 죽을 때 예수님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아버지 이름으로 죽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죽을 때 누구 이름입니까? 고집스런 내 이름으로 하지요. 그러면 내 이름은 죽고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를 교체해야 되겠지요.
살아날 때 다시 내 이름으로 살아나는 일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지요. 그 자체가 죄니까 그게 바벨탑이니까. 내 자체가 탑 아닙니까? 우리는 거울 앞에 하나의 탑으로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거예요. 난 왜 이리 예쁜 탑이지, 이런 식으로. 오늘 화장 잘된 탑이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하늘까지 하나님이 알아주기까지 하나님이 내 잘남을 공유해서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게 매일같이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우리의 기본적인 탐욕이거든요. 오늘도 기도했으니까 응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거요. 착한 일했으니까 우리 가정에 복을 듬뿍 주시옵소서. 이런 식이에요. 자기 이름을 포기할 줄 몰라요. 포기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또 배워서 될 문제도 아니고. 본능이니까.
따라서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교체가 되겠지요. 주의 이름으로 부활되잖아요. 부활하신 분이 찾아오게 되면 성령으로 오시거든요.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인간의 몸을 나의 이름에 포박되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모든 일되신 주를 위한 몸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가만있지 않고 계속해서 활동을 하겠지요.
그러면 죽을 때는 수컷으로 들어가요. 나올 때는 암컷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15장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 이렇게 돼있지요. 처음에 삼년 된 암소, 암염소라 해서 이게 암컷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여자를 먼저 창조한 게 아니고 남자를 먼저 창조한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순서가 남자가 먼저가 아니고 여자가 먼저입니다. 이미 범죄 한 인간을 구원할 때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인질로 잡힌 자기 백성을 구해요.
뱀의 후손과 싸우는 자가 남자에요, 여자에요? 남자라니까요. 처음에 창조할 때는 수컷이 먼저고 수컷 때문에 뒤에 암컷이 만들어졌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3장 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약속을 할 때는 그 약속에서 주인공은 수컷입니까, 암컷입니까? 남자에요, 여자에요? 여자 아닙니까, 여자.
남자의 이름이 흙이에요. 그런데 하와란 이름의 뜻이 뭐예요? 생명이잖아요. 이 말은 남자는 생명이 아니란 말이죠. 생명이 어느 쪽에서 시작한다? 여자 쪽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여자가 흙에 죽음에 불과한 남자에게 생명을 부여하게 되면 죽은 남자가 여자 덕분에 사는 겁니다. 페미니즘인가. 그게 여자의 후손이에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마리아가 여자라나 말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여성성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조는 후손이 갖고 있는 내용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성질이 뭐냐 하면, 이 땅에 지상에 어떤 인간의 뜻이 포함되지 않아요. 하늘의 뜻이에요.
하늘의 뜻이 있다는 말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럼 약속이 뭐냐?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약속이라면 예수님의 예수님 됨은 인간에 포함되지 않는 그것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세상은 범죄 하고 난 뒤에 남자의 세계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 복속해야 되고 남자를 사모해야 되고 남자 없이 못 사는 그런 식으로 됐어요. 이 세상은.
따라서 여성이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칙으로 여성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제가 괜히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고 갈라디아서 4장에 있는 말씀인데 전에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지상을 대표하는 남자와 하늘을 대표하는 여자에서 남자에 속한 자식은 육에 속한 자식이지만 하늘에 속한 자식은 영에 속한 구원에 속한 자식인데 그것으로 어머니가 이 지상에 없다고 본 거예요.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로 표현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성이란 마리아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란 걸 표현하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아닌 것 같은데 하는 표정이라서 자꾸 설명이 가해지는 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창세기 15장 8절과 9절에서 제물이 높은 단계가 있어요. 소나 염소는 높은 단계에요. 양은 낮은 단계에요. 높은 단계의 제물의 암수 구분은 뭐냐? 암컷이에요. 낮은 단계는 수컷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모습이죠. 하나님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사건들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에서 땅에 있는 자를 건져내는 거예요. 건져내는 데 그게 함축되어서 바로 제물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언약이거든요. 그런데 레위기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언약의 전개과정에서 세밀화 된 모세언약에 속한 것을 오늘 레위기를 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 보면 소나 염소나 양이라 할 때 반드시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는 말은 암수를 구분하겠다는 내 의지가 제물 속에 수컷이라는 말 속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암수를 구별하겠다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을 구별하겠다. 그 뜻이에요.
성경에 창세기에 여자의 후손 나오지요. 거기에 남자의 후손은 안 나와요. 여자의 후손과 대결하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뱀의 후손이에요. 왜 뱀의 후손이냐? 인간 전체가 남자든 여자든 마귀에 속한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하늘에 속한 겁니다.
지상에서 제사 드릴 때 수컷으로 제사 드린다는 말은 수컷으로 드리는 이 제물은 보다 상위 높은 위치 위상의 차이에 의해서 이들의 운명이 바꿔지는 예비단계에서 반드시 수컷으로 드려야 된다. 수컷에서 결국 어디까지 가요? 암컷으로 가야 된다. 이거는 땅에서 드리는 제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땅에 속하지 않는 분의 제사로써 완성이 된다는 걸 뜻하는 겁니다. 나타내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듯해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좀 아재 개그 같은 유치한 거지만 잘 들으세요. 어떤 사람이 편의점에서 주머니에 빵을 집어넣었어요. 동네 한 바퀴 돌고 30분 뒤에 빵을 주머니에 넣었던 그 자리에 아저씨가 서있다고 한다면, 빵의 위치가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지요. 뺑 돌다 그 자리에 왔기 때문에.
그런데 위상은 어떻게 돼요? 선반 위의 빵이 어디에 있어요? 그 사람 주머니에 있지요. 그게 위상의 변화잖아요. 신약에 보면 구원받을 때 예수 안에서 구원받거든요. 예수님 주머니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아저씨 빵 좀 봅시다. 보니까 단팥빵이라. 처음에 선반 위에 무슨 빵? 단팥빵. 주머니에서 꺼내놓은 것도 단팥빵. 전혀 달라질 게 없어요. 성령 받기 전에 단팥빵, 성령 받은 후에 단팥빵. 남들은 위상의 변화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을 때고 세끼 먹고 예수 믿기 전에도 세끼 먹고. 달라질 게 전혀 없어요.
그러나 예수 안이라면 위상이 바뀌는 겁니다. 전에는 누구 안이라는 게 없어요. 누구 호주머니 안에 들어있지 않았어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갈취했어요. 나를 강탈해서 자기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죽는 것은 똑같이 죽는데 죽는 모습 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별 다른 게 없는데 위상이 달라요, 위상이. 한쪽에선 수컷이었는데 나중에 암컷으로 바뀐 여자의 후손에 속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부부가 날 태어나게 했는데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단 말이죠.
주님이 손댄 거예요. 주님이 위상이 바뀌게 한 겁니다. 그 위상변화가 레위기에 율법 안에 그 내용이 담겨있는데 보다 자세한 것은 10분 쉬고 둘째 시간에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