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호주머니 190503
20190503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예수님의 호주머니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레위기 22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열납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레위기도 마찬가지고 율법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걸 제시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법을 대하면 인간이 거북스러워요. 평소에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거든요. 내가 하고 싶다는 스케줄은 누가 정하느냐? 본인이 정한단 말이죠.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정하고 그 일을 내가 함으로써 사는 즐거움과 보람을 얻겠다.
그런 생각이 투철한데 그 생각에는 무엇이 끼어들 수 없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식으로 살 테니까 제삼자는 좀 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라는 그러한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어요. 내 인생은 즐거운 데로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일종에 하나님이 갑질하는 느낌이 들지요.
내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강제하듯이 아랫사람 지시하듯이 하게 되면 뭐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을 주관하고 마지막에 심판까지 관장한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주기는 해주지만 썩 내켜서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겁니다. 속으로 어이 더러워서 해주자, 이런 식으로. 안 해주면 삐져서 내 인생 가로막고 나설 게 뻔하기 때문에 해주자, 해주자.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주지, 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별로 감사하고 아주 좋은 기분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기껏 인간 쪽에서 내세우는 협상이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해줄 테니까 그 일이 성사되고 난 뒤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님께서 들어줄 거요, 말 거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죠.
일해 주는데 공짜는 없다.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억지로 해줄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우리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원하는 게 뭐냐? 우리 가정 행복하고 건강하고 사업 잘 되는 거죠, 뭐.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제시한 이유는 이미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버린 자식이거든요. 버린 자식인데 하나님은 아는데 인간은 본인이 망가졌다는 것을 인정 안 하려고 합니다. 먼 나라로 선교 나갈 생각은 하지 선교사로 나가는 자신이 정상이 아닌 것을 선교사 본인이 인정을 안 하려고 해요. 신학교 나와서 목사 할 생각 말고 목사 하겠다는 내가 정상이 아니고 망가졌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게 문제란 말이죠.
근본적으로 어디 있느냐 하면, 이 몸이 몸을 하나 두고 나의 몸이라고 앞에 붙여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쓰겠다는 겁니다. 고집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그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하나님에 속한 몸이라고 가져가는 거예요. 중간에 이 몸이 죽을 지경입니다. 양쪽 다 고집이 세지요.
내 몸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쓰겠습니다. 주님은 이 몸은 쓰일 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너의 만족과 너의 편함을 위해서 네 몸이 있는 게 아니고 네 몸은 달리 쓰일 용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 몸의 용도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쓴다고 주께서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네 몸을 네 원대로 썼더니만 나온 결과가 개판 아니냐, 엉망 아니냐?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고 들어오시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이 탑을 하나 쌓게 되지요. 시날 땅. 그 탑 이름이 바벨탑이에요. 그 탑을 쌓으면서 인간들은 즐거워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의도를 보는 겁니다. 그 탑을 쌓는 목적이 있을 것 아니냐. 그 목적이 뭔지 이미 하나님은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까지 닿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 이름이 어중간하게 하나님께 닿지 않고 어중간하게 땅에 왔다가 땅에서 멈추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의욕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라갈 때까지 올라가보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할 의도로 바벨탑을 쌓는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 몸, 육신을 자기들 뜻대로 사용하겠다고 할 때 이것은 인간 전체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뜻이 뭔지 완전히 들통 났지요. 우리 이름을 갈 때까지 가겠다, 높아질 때까지 높아지겠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인간의 목적은 결국 자기 이름의 영광성이죠. 자기 몸으로 자기 육신을 가지고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들겠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의로움을 끝까지 하늘까지 뻗혀 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가치 있고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나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하늘 끝까지 땅 끝까지 펼쳐보겠다는 의욕을 모든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공통된 마음으로 공유하고 있더라는 것이 바벨탑 쌓는 것을 통해서 들통 나버린 거예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의 뜻은 뭐냐고 직접 아는 게 아니에요. 너희 뜻은 이거였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문제 거야, 라고 지적하는 형식으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겁니다.
제가 인간의 뜻이 뭔지 먼저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뜻은 뭡니까? 자기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바벨탑이 완공되지 못했지요. 중간에 흐지부지 됐지요. 그 말은 바벨탑 쌓는 걸 누가 방해했습니까? 하나님이 방해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태여 물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물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정답 나오지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저지하는 겁니까? 내 이름이 높아지는 걸 저지하는 그것이 곧 뭐다?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별로 어려운 것도 없어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몸으로 내가 잘 되는 식으로 나가는 것을 저지하고 그걸 용납하지 않는 그것이 뭐나고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내 교회가 잘 되는 것은 그 교회 교인들이 이구동성 다 원하는 거예요. 그럼 그 교회에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제가 기본문제 이야기했으니까 응용문제에 답변할 차례지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그 뜻을 저지하는 게 하나님 뜻이죠. 교회 백날 커도 그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그 교회 교인들의 자존감과 자기 이름이 들어있지요. 일종의 바벨탑이잖아요. 그걸 저지하는 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죄인인데 인간은 자꾸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해요. 이미 하나님께서 규정했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규정했는데 인간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세밀하게 우리에게 계속 추가적으로 준다는 이 말은, 계속 찾아온다는 이 말은 근원적으로 우리가 무엇이 죄인 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본인이 혼자서 끙끙 앓아 대면서 죄가 무엇인지 알아낸다고 죄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때 비로소 죄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분석해서 죄를 아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타인에 대해서 소홀히 한다든지 관심 없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바벨탑이 창세기 11장이죠. 창세기 12장에는 누구 이야기 나올까요? 아브라함 이야기 나오지요.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 나온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결국 누구 이름을 들고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 이름이 아니고 인간의 몸, 육이죠. 육을 긍정하는 자기 이름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이것은, 인간의 이름과 반대되는 게 누구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죠. 언약의 이름, 또는 여호와지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처음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육의 이름이에요. 아브람은 본인의 이름입니다.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아브람은 상상도 못했고 예상도 못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 주의 이름, 약속이 오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아브람이 육적인 이름이라면 아브라함은 누구의 이름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인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람이란 육체를 하나님의 원대로 사용했단 말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가볼게요. 인간의 몸은 하나인데 서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태어난 내 몸이니까 내가 사용하겠다고 우기는 반면에, 이 몸은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있는 몸이라고 자기 몸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브람 몸은 하나에요. 둘이 아닙니다. 하난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보겠다는 거고, 아브람은 우리 아버지가 지어준 아브람으로 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가 니 아버지라는 거예요. 나타난 하나님이 진짜 네 몸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생뚱맞은 이야기죠.
단순히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곱게, 곱게 이전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아브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