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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요한복음 20장 28절(자아정립의 세월)190416a-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강남-요한복음 20장 28절(자아정립의 세월)190416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대목을 푸는데 있어서 도마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우리가 책을 보면서 우리가 도마처럼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요? 그런 충동 또는 흉내내기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그 모습이 29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도마의 고백을 놀랍게도 도마의 고백을 뭐라고 하느냐. ‘믿음 없음’으로 간주해버려요. 도마의 이 고백을. 도마처럼 고백하는 것을 흉내내도 소용없는 거에요. 도마가 고백을 할 때에 도마의 본 뜻은 모르고 도마처럼 이렇게 흉내내고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죠 사람들은.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믿음이 없음이 돼요. 놀랍게도.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보통으로 생각하면 누가 이렇게 바르게 정답을 내리면 칭찬이 따라오는게 정상이죠. 아이고 훌륭하구나 아이고 대단하다 하는데. 믿음이라는 것을 내가 추가적으로 제시하지 아니하면 이런 고백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러한 도마의 고백을 주님께서 믿음이라고 규정을 지으려면 반드시 뭐를 거쳐야 되느냐하면 보고서 믿는 믿음을 경유하면서 그것이 부정당하면서 믿음에 도달되는 겁니다. 보고서 믿는 것. 그러면 우리는 안 보고 믿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하지만 안 보고 믿는 경우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해당이 안돼요. 모든 인간은 믿음 없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도마로부터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에 이 믿음을 도마는 그냥 고백을 했을 뿐이죠. 고백을 했으면 너는 보고서 믿으니까 믿음 없다는 규정을 이렇게 따로이 제시했다면 제시하면서 예수님께 믿음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제시하면서 이렇게 한바퀴 도는 겁니다. 한바퀴 돌고 오거든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규정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도마가 어떤 고백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걸 자기가 예수님 자신이 정의하는 믿음의 정의, 믿음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도마를 한껏 이용하신거에요. 나는 믿습니다 하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나는 믿습니다를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불신으로 보는 겁니다. 그럼 나는 안믿습니다 하는 것을 불신으로 보는거에요.

규정을, 믿음 규정을 네가 낼 자격이 없다는 거에요. 믿음 규정을. 도마를 통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철저히 일방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만 이렇게 정립을 하시려고 도마와 상대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의 소위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면 그럼 그것은 뭐냐?

인간이 내뱉은 모든 행동과 태도 그런 자세 그런 행함은 전부 다 자기정립이에요. 인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정립의 세월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기억한 것 자기가 체험한 것 이 모든 것을 다 될 수 있는대로 버리지 않고 다 끌어모아서 무슨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 그래서 나는 이런 존재다라고 자기정립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아담에게 악마의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악마가 이런 짓을 하고 있거든요 악마가. 악마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대적하는 자거든요. 또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고 대적하는 자. 대적을 하려면 독자적인 세계가 필히 구축되는 것을 전제로 해야 돼요. 누가? 대적하려면.

남자애들 장난치면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 한판 붙을까? 이렇게 하지요? 이 주먹 쥔 이것은 자기만의 영역이에요. 저쪽도 그래 한판 붙자 하면 저쪽의 영역이죠. 각자의 고유의 영역이 따로 있는 거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리될거에요. 행동은 한판 붙을까? 이게 인간이 밥먹고 세수하고 잠자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긁어모아서 한번 붙어볼까?의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행위들입니다. 행위들.

이것보다 더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어요. 존재에 대해서 아주 쉬운 방법은 지난 모임에서 예를 들면 아주 쉽게 할 수 있는데 보람상조 직원의 청색 유니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아직 참석 안하셨는데. 남자의 그 정장이 청색이 된다는 것은 유니폼이거든요. 유니폼이 된다는 말은 내가 어디 가서 어떤 짓을 해도 내 존재는 보람상조다. 고정화시키는 겁니다. 왜냐? 유니폼이 청색 그 정장이 그걸 말해주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 나에 대한 신분정립이에요. 나는 이거다. 나의 정립은 뭐냐? 나는 뭐다. 나는 뭐뭐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모든 사건과 사실도 인간에게는 전부다 다 긁어모아서 최종적으로 뭐냐 하면 나는 보람상조다 라든지 나는 무엇이다에 다 모이게 되어 있어요. 거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기의 집약이 되고 움추려지는 것이지 자기 포기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눈에 보인다? 그 보이는 것은 내가 주님의 믿는 자 되게 한 자기정립의 일환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든 정보라든지 지식을 긁어모으는 것은.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예수님 앞에 이게 뭐냐 하면 ‘믿음 없음’이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는 내편 아니라는 뜻이에요. 너는 나의 원수라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께서 무슨 개념을 만들어내고 무슨 말을 하실 때는 이것은 오늘 31절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되어 있지요?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뭐가 없다는 말이에요? 생명이 없다는 말이에요. 상당히 엄중하고 진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 만약에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면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 나온 도마같은 사람이죠. 도마같은 사람에게 약점이란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약점. 생명을 얻었다면 도마에게 생명을 얻었다면 그 생명을 얻은 믿음이 있는 도마에게 남들이 도마의 너의 약점은 이런거야 라고 질책하거나 지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에요.

약점이 없으면 위협받거나 공격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걸 두자로 ‘자유’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자유. 그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이유도 없는거에요. 왜? 챙길거 챙겼고 얻을거 다 얻었으니까요. 사람이 자유를 얻게 되게 되면 못할 짓이 없습니다. 주저할 일도 없고 못할 일도 없어요.

평소에 남편이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어요. 영생을 얻었어요. 생명을 얻었어요. 아내가 “여보 형광등 갈아줄래?” 못할거 없는거에요. 의자가지고 형광등 가는 거에요. 왜? 못할게 없기 때문에. 형광등 가는 것도 “너 이거 처음하지? 나보다 못하네” 라고 무슨 비난을 들어도 상관없어요.

더 중요한 것은 나의 행동과 나의 결과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 행동과 나에게 도출된 나에게 주어진 결과가 전혀 무관한거에요. 어떤 생각 어떤 말 어떤 태도를 해도 생명을 얻었으면 이것은 자유고 특히 나로부터의 자유가 되야 돼요. 나로부터. 나한테 구애되지 않아야 돼요. 이러한 그 생명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

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필히 뭐냐 하면은 인간의 자아정립의 세계 불신의 세계를 거론하지요.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은 곧 자유가 주어지는 기쁨이거든요.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면 이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되어 있거든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생명으로 옮겼다면 생명을 얻었다면 이제는 남아있는 것은 신나는 빰빠라 빰빰만 남아있는거에요. 빰빠라 빰빰만 남아있든 빠라빠라 빠라밤만 남아있든 하여튼간에 어떤 것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영생을 얻지를 못하고 구원을 받지를 못하게 되면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람을 찾아요. 나 좀 위로해 달라고. 나 외로워서 못살겠다 이런 식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여전히 자기정립의 세월에서 발을 못 빼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믿음은 뭐와 같으냐? 보람상조의 유니폼과 같아서 그 옷을 입는 순간 빰빠라 빠빠빰이 뽀빠이는 아니지만 뭐 그거 입는 순간 더 이상 내 행동에 의해서도 어떤 것도 우리는 구애받을 필요없이 자유를 얻은 거에요.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너는 믿음이 없다 너는 믿음이 있다라는 통보 자체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주님의 규정 자체에 우리가 놓여져버리기 때문에 따로이 나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자체를 이제는 우리가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님이 생각한대로 이미 주님은 생각한 그대로 하는 순간 이미 그대로 되어버리는 거에요.

“빛이 있으라” 하는 그 순간 2.5초 뒤에 빛이 있는게 아니에요. 빛이 있으라 하는 순간 그게 시작과 동시에 이미 결말이 지어져 버리는 거에요. 네가 믿는다 네가 영생을 얻는다고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창조적 행위에요. 빛이 있으라나 네가 믿는다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믿음에서 발을 못 뺍니다. 우리가 영생있다하는 순간부터 영생에서 못 벗어나요. 생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개차반 같이 행동해도 그게 생명이고 그게 자유고 그게 주의 일이 돼요.

그래서 뒤에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해드리면 도마가 고백을 했다 했지요.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을 했을 때에 우리는 이 고백을 막 흉내내고 싶지요. 나도 그런 고백을 해서 그런 원인을 해서 주님 앞에 칭찬받고 너는 믿는 자다 이런 칭찬을 우리는 따라하고 싶지요.

주님의 이 고백은 불신앙입니다. 왜 불신앙이냐 하면은 보는데서 나왔기 때문에. 보는데서 나왔기 때문에 불신앙이에요. 그럼 안보고 믿는 것은 뭐냐? 안보고 믿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보고 믿는 것도 불신앙이고 안보고 믿는 것도 불신앙이에요. 망상이죠 망상. 상상한 것을 믿는 것. 이래도 저래도 불신앙인데. 뭐냐? 신앙은 뭐냐 하면 신앙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없고 신앙은 주님께서 신앙이라고 규정을 해주는, 해 줄 때 비로소 신앙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 = 신앙’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개념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신앙이고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에요. 이것을 성경에 실제로 이걸 적용시킨 대목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는 거니까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게 되면 바라던 것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믿음이라는 그 자체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러니까 믿음을 뭐로 집어넣어야 되느냐 하면은 믿음을 예수님으로 바꿔넣으면 되요. 예수님이 바로 실상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예수님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벨이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아벨 속에 예수님 계셨고 노아가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노아라는 형태로 예수님이 일하신거에요.

아브라함이 믿는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들어가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을 증거한거에요. 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까. 바라는 것은 허구거든요. 인간이 바라는 것은 다 허구에요. 인간에게서 나온 허구에요. 실상에 접근하고 실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건 뭐냐? 예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라게 한거에요.

그래서 도마라는 이 존재, 도마의 있음 이거는 파괴됩니다. 파괴되고 도마는 예수님이란 존재에 합류가 돼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앙에 도마가 이용당하면서 합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앙을 자기 자신이 실상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믿음 없는 도마를 한껏 이용하신 거에요. 이용하시고 뭐가 남느냐 하면 결국 그 근거만 남아요. 그 과정만 남아요. 어디서부터 어디로 왔느냐를 그 흔적을 딱 만들어내지요.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게 되면 도마라는 존재, 이 존재와 예수님의 존재가 둘이 됐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그 일을 발생시켜서 존재는 완전히 깨지죠. 분해가 되지요. 존재는 소멸되고 여기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사건화돼요. 사건화. 사건화되면서 예수님의 존재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합류하게 되면 이 사건화가 뭐냐? 이 세상에서는 어떤 식이냐? 돌발성. 돌발적으로 일어나요. 돌발적이라는 것은 비연속적이에요 비연속적.

내가 내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면 그건 실패합니다. 세상에서는 보람상조 유니폼만 입으면 돼요. 오늘 보람상조 이야기 너무 많이 나온다. 청색 유니폼만 입으면 뭘 해도 보람상조가 되지만 우리 이 세상에는 걸칠 수 있는게 없어요. 어떻게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 붙잡으려면 내가 존재가 해체되는게 아니고 내가 존재로 유지해야 자아정립하는 그 평소의 버릇에 그대로 그게 계속 지속되거든요.

그럼 평소에 해서 자기 존재가 있으면 존재가 둘 되어버리면 아무리 예수 믿는다고 해도 이건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의 위대함과 장함과 멋짐과 대견함을 증거하는 용도의 예수님이 되어버려요. 내 잘남을 빛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있어버리게 되고 평소의 나는 죽도록 나만 사랑하는데 주께서 나의 사랑에 편드는 것밖에 안돼요. 잘한다. 그래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이것밖에 안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게 성립이 안돼요. 자기를 부정하라. 나를 부정하라는 말이 이게 얼마나 말이 모순되는지 몰라요 이게. 나를 부정하라는게. 나를 부정하려면 결국은 그게 뭐가 없어져야 돼요? 나 자체가 없어져야 돼요. 나를 부정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존재에서 또다시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그 사이에 전혀 부정이 안되어 있어요. 그 존재가 그 존재거든요. 이게 불교의 딜레마에요. 불교의 딜레마. 불교의 딜레마가 철학의 딜레마고 과학의 딜레마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딜레마가 이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딜레마이기도 하고. 자기 낮추고 또 낮추고 또 낮추고 하는데 몇 번 낮췄습니까? 3번 낮췄어요. 4번 안됩니까? 4번 낮췄으니까 됐습니까? 7번 낮춰야지요. 7번 낮췄으면 됐지요? 7번의 7번 더 낮춰야되는데. 백날 낮춰봐야 지하실 또 있는데요. 결국 그렇게 낮춘 세월이 25년 이라면 그 25년의 세월은 무엇의 세월이라고 했습니까? 아까?

자기정립의 세월이죠. ‘나 잘났다’를 뽐내는 세월. 나 잘남을 부인하고 잊어버린 그것도 나 잘남의 하나의 요소로서 기억이 돼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나 그때 부정했다 하는 그것도 기억에 남는다니까. 그게 안 없어져요. 달아나질 않는다니까요. 노틀담의 곱추에 나오는 그 성당있지요? 성당 불났지요? 파리 시민들 울고 기도하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그 성당이 멀쩡할 때는 생각이 안나요. 불탈 때 생각난다고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잊었다 하지만 나와 유관한 관련된 뭔가 어떤 갑자기 동창생을 만날 때는 내가 잊어버렸던 그 때 그 시절에 교복입고 놀았던 그 시절이 한꺼번에 확 다가와요. 한꺼번에 확 다가온다고. 옛날에는 가수였지만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다. 015B에 어떤 사람이 있다. 불타는 청춘에 보면 목사된 친구 또 까불면서 춤추고 있다고요. 특별공연 하면서. 옛날 놀던 가닥 없어지지 않아요.

주님께서는 도마가 믿는 자로 보지를 않습니다. 믿는 자는 오직 믿는 자라고 할 사람은 예수님뿐이어야 돼요. 다른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믿는 자가 된다는 절차가 필요한 존재들 대상자에요. 절차가. 그렇다면 인간에 있어서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경유하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사건 그 다음에 사건 그 다음 사건 유발되기 때문에 이 사건을 하나로 통으로 이렇게 꿰뚫는 나의 존재를 따로 설정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용납을 하지를 않습니다.

나는 2년 전에 예수 믿었다. 지금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지금은 내가 바르게 산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2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를 계속 이어져가요 이 존재를 계속 이어져가야 된다고요. 그러면 뭘 믿느냐 하면은 예수를 믿는게 아니고 내가 예수 믿었다는 나 자신을 또다시 그 존재를 보든지 안 보든지 그걸 보고 믿는 거에요. 다시 뇌 순환구조, 뇌폐쇄순환구조로 돌아가게 되요. 뺑뺑이. 내 안에서 뺑뺑 돌고있는 거에요.

예수님을 경유해버리면 나는 믿는 자가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신 자가 되어 버려요. 주께서 믿게 하신 자는 주님이 믿음의 실상이기 때문에 주님이 믿음의 실상인 것을 증거하는 그냥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바로 아벨이고 노아고 에녹이고 그런 사람이에요. 에녹 붙들고 당신 구세주하면 안돼요. 노아 붙들고 구세주하면 안돼요. 마찬가지로 믿을 것은 주님이지 노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습니까? 이거는 분명히 악마의 악마가 그동안 기독교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믿음을 훼손하기 위해서 방해하기 위해서 교회를 앞장세워가지고 그 짓하고 있었던거에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해가지고 자꾸 우리 존재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당신은 위로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죠.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그분이 있는데 은사 또 도사들이 왜 그리 많은지 은사 몸이 아파서 있으니까 또 암을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우리한테 기도 받으셔야 되고 봉투 돌리고 헌금하시고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 주께서 당신의 죄가 어디서 죄 짓는가 기억하게해서 그걸 회개하게 되면 당신의 병을 주께서 일어나게 해주십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는데 초대교회가 어디 있어? 지금.

초대교회가 어디 있어요 지금 교회는 하나밖에 없지 무슨 초대교회가 따로 있어요? 그때는 그때고.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아요. 무슨 초대교회가 있어요? 왜 자꾸 뭔가 낭만을 자꾸 부추기는 겁니까? 그래서 저한테 이런거 고자질 하길래 그랬어요. 그 사람한테 가서 나는 저주받고 천벌 받겠다고. 좀 내버려둬 천벌 받게. 주님 주신 천벌이라면 나는 그것도 감사할 일이죠. 주님을 증거하는 용도이기 때문에.

아까 그랬잖아요. 도마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도마는 영생을 얻고난 뒤 뭐가 없다? 약점이 없어요. 약점이. 여러분이 수사 드라마나 스릴러 드라마 보세요. 꼭 누구 뭐 이렇게 형사가 바르게하려고 하면 형사 뒤에 또 약점 잡아가지고 “너 애 몸 아프잖아. 입원비 모자라지” 뭐 이래가지고 돈 주고 해가지고 비리 못 캐게 만들고. 그것도 안 되면 “너 지금 아이가 미국에 지금 유학 가있지? 걔가 지금 아마 일주일 뒤에 죽어서 나올걸” 해가지고 또 사진 조작하고 이렇게 하지요.

사람이 악마한테 잡힐 때는 꼭 약점이 있어요. 약점을 누가 쥐고 있어요? 본인이 쥐고 있는 거에요. 본인이. 왜 본인이 쥐고 있습니까? 악마한테 배운 가락이 뭡니까? 나는 근사한 자아가 되어야 된다는 자리정립의 세월을 보내게 되다 보니까 마귀가 바보입니까? 자기한테 배운 수법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어요? 악마의 약점을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나 다른 인간한테는 겁 안내는데 누구한테 겁냅니까? 주님한테는 벌벌 떠는 거에요. 따라서 악마가 겁내는 자는 주님의 붙잡힌바 다시 말해서 존재로 다가서는게 아니고 주님의 존재를 알리는 돌발적인 사태로서 사건으로서의 나서게 되면 악마는 재미없다고 안놀아줘요. 약점이 있어야 뭐 협박 공갈을 할 수 있는데 “너 이러면 지옥간다” 그러면 “갈게 갈게” 이러고 끝나잖아요. “갈게 갈게”

왜냐하면 성도는 지옥가도 괜찮은 것이 성도라는 존재는 이미 십자가와 함께 지옥 갔다 다녀온 사람들이에요. 죄와 저주를 받고 온 사람들이에요. 나의 존재는 저주받고 심판받고 그 다음의 존재는 뭐냐? 그리스도의 존재에 합류한거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이에요. 전에는 어느 안? 아담 안이었어요. 아담 안에 있는 존재는 저주 받고 심판받고 미리 당겨서. 미리 당겨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은 겁니다.

영생에서 영자 빼면 뭐가 되지요? 생. 그냥 생까는거죠. 우리는 생으로 살아 그냥. 그냥 생으로 사는 거에요. 사람이 약점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 뭐가 보이냐 하면 모든 인간의 약점이 다 보이는 거에요. 마귀처럼 영안이 열려버렸어. 모든 사람이 살고자하는 자체가 약점이에요. 살고자하는 자체가. 전부 다 악마로부터 공갈 협박 받고있어요. 아무리 뭐 재벌이고 소용없어요. 유명인사고 뭐고 소용없어요. 전부 다 지금 당하고 악마한테 당하고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인간들의 악마에 속한 존재들의 소위 믿는 자 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의 자기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맨날 하는 것이 전진. 전진 전진 삽으로 우물을 파는 것처럼. 전진하지요. 계속 그들은 전진하지요. 더 높은 단계. 용두산 계단 올라가듯이 더 높은 단계로 밟고 끝까지 가보자. 계속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더 높은 곳 더 전진 더 질적으로 변화 더 성화된 모습.

그러나 주님이 우리 성도를 인도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거에요. 빽 도. 빽 도 예요. 인간은 주님 보시기에 방향성 때문에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인간이란. ‘방향성’. 너는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느냐? 네가 추구하는 방향과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 됨을 포기하고 영광을 포기하고 십자가 달리는 방향과 같은 방향을 견주어 보는 겁니다. 천벌 받아도 괜찮고 지옥 가도 괜찮고 나 지옥 갈래 이 방향이 십자가로 가는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이에요.

어차피 우리 존재는 심판받을 존재가 없거든요. 내가 산다는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은 살 이유가 없는데 살게 하신 것은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살렸다는 것을 현재 있게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은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아주 주님한테 된통 얻어터질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전에 우리 강의할 때 했지요.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도를 5장에 보면 누구든지 5장 10절에 보면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이거는 마치 천주교에서는 마치 사제들 건드리면 죄사함을 받는다. 그런데 그게 확대되었어요. 사제가 아니고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우리 대단하라고 가르치는게 아니고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시시하게 보는 우리를 건드렸는데 주님 자신이 시시하지 않은 분이에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고 그 기준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소자한테 하지 않는 것이 곧 네가 지옥 갈 자라는 것을 완전히 티를 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이 사건이라는 것이 결국 주께서 주신 사건화된 존재죠. 사건이라는 것은 벌써 심판을 개시했다는 뜻입니다.

‘사건화’. 이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믿음’. 믿음 사건이에요. 믿음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돌발성’이죠. 돌발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소유대상이 안돼요 믿음은. 소유대상이 되려면 믿음을 가져야 될 존재를 따로 설정해야 됩니다. 인간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건과 사건을 연결할 수 있는 그러한 몸이 제공받지 못합니다.

사건과 사건을 내 몸이 했다면 이것은 나를 증거하기 때문에 이것은 탈락이죠.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고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몸이에요. 그럼 예수님의 몸이 어디 있는데? 키는 몇 센치냐? 체중은 얼마냐? 꿈에 봤는데 예수님이 허옇게 영감처럼 나왔다. 전부 다 구라고요. 그런건 믿지 마시고 예수님은 몸은 이것은 사건과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으로 등장하는 이것을 제가 주일 낮설교에서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전류 이야기해가지고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저항체라고 했지요 ‘저항체’. 눈에 보이는 탁탁 마주치는 저항체를 통해서 바깥에 보이지 않는 흐름의 역선 힘의 필드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그 수요일 설교하면 마태복음 28장 이야기했잖아요. 세상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땅 끝까지 내 제자를 삼고 하라. 정작 그러면서 본인은 안 보여요. 안 보인다는 말은 보이는 존재가 가짜고 보이는 존재는 그냥 가짜요 그냥 사건일 뿐이고 진짜 몸은 이런 사건을 유발시키는 진짜 몸은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이런 행동을 하신 진짜 분은 안 보이시는 쪽으로 따로 계시는 거에요. 이게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인생은 뭐냐? 자기정립의 세월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자기 존재 자기정립이 있다는 그 자체가 성도의 눈에 또 악마의 눈에 주님의 눈에 그게 약점인거에요 그게.

아이고 참 영생도 없는 인간들이 자기 지키기 위해서 아주 몸부림 몸부림치고 있어요. 나를 무시하지마라고. 나를 무시하지마. 어릴 때부터 우리는 그걸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백설공주 그러하고 신데렐라 전부 다. 두 살 때 네 살 때 만화영화부터 전부 해가지고 전부 다 자기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안 그런게 어디 있어요?

뽀빠이 한번 보세요. 뽀빠이 보면 브루터스 짐승같이 생긴. 꼭 연약한 빼빼마른 야윈 영어로 thin 바짝 마른 이름은 올리브입니까? 올리브 또 목은 얼마나 긴지 목잡고 돌리고 목잡으면 하체가 흔들흔들 빨래가 바람에 날리듯 흔들려요. 꼭 약한거 하나 있는데. 이게 견디고 견디다가 “뽀빠이 도와줘요” 하잖아요. 뽀빠이 도와줘요 도와줘요 하면 이제 그냥 못 도와주고 시금치 먹고 하면 갑자기 근육질 돼서 이상용 나와서 한방 치고. 그런데 브루터스 인간 안돼요. 그 다음날 또 달려들지요.

존재와 존재의 싸움 이걸 가지고 우리가 성경에서 그 이긴 편 다윗, 우리를 다윗으로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는 아니에요. 이길 때만 다윗이지 그럼 쫓겨날 때도 다윗 할래요? 진짜 빌어먹고 미친 짓까지 한 그것도 한번 해 보실래요? 인생에서. 구태여 우리가 그러한 억지스러운 순교를 흉내내거나 연기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도는 사는 것 자체가 주의 앞의 고난에 참여한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어떤 널널하고 할 일없고 백수처럼 살더라도 그게 고난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선교사로 가서 고생고생해도 자기 존재에 대해서 어떤 미련을 갖고 있으면 그건 순교 아닙니다. 그거는 고난이 아니고 뭐냐 하면 고생이죠. 천하의 딱한 사람입니다. 살아서 고생하고 죽어서 지옥가고 이게 무슨. 참 가련하기 짝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네 맘대로 살아라” 왜? 결코 네 맘대로 살되 어느 한순간도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네가 알기 때문에. 그 어느 순간도. 윤리 도덕이 왜 이단적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누구신가가 빠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누구신가? 윤리 도덕을 행할 때마다 사람은 항상 윤리 도덕의 주체자로서의 자기를 상장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잊어버리고 윤리 도덕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게 함으로써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실제 이익은? 내가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참고 견디면 주께서는 어느 정도 보상해줄겁니까? 주여.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기도 열심히 하면 독해. 그 형상 꼭 마귀같애. 악바리 같이 달려들어. 꼭 세월호 유족같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어요. 전 국민을 상대로.

그동안 살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주님께 감사했습니까? 아니거든요. 본전 내놓으라는 거에요 본전. 아이 키우는데 3억 들었는데 3억 내놓으라. 고등학교까지 키워놨는데. 거기에 온 국민이 편승한다는 자체가 이 세상은 곧 지옥인 것을 증명한거에요. 인간은 물에 빠진 적이 없어요. 이미 빠졌기 때문에. 이미 지옥에 푹 빠졌어요. 물에 빠진거 하고 지옥 빠진거하고 지옥 빠진거 물에 빠진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옥 빠진게 더 심각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너 애 물에 빠졌다고 깜놀 깜짝 놀라게 만들어요. 정작 자기가 지옥에 빠져있다는 것 그것도 헤어나지 못하는 것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심각한 것을 대체안으로 대체해놓고 성경말씀을 자꾸 주의 살아있음을 훼방질하려고 해요 훼방질. 교회 나오는 교회 목사부터 노란리본 있잖아요 이거. 노란리본이 꼭 그거 같애. 목매어 자살한 사람 같애.

이런거 달고 와가지고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듯이 주께서 하신 그 고난을 보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게 살아가는지 깨달읍시다 이 짓하고 있는 거에요. 이거는 뭐냐? 보이는 거잖아요 이게. 이게 보이는거란 말이죠. 보여서 뭘 정립하느냐? 나는 이것을 애통해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나는 뭐가 된다? 나는 무엇무엇이다. 역시 뭐로 끝나요? 자기정립으로 끝나는 겁니다. 나 잘났다 이 말입니다.

결국은 이 세상의 교회든 절이든 이 세상 뜻이 하나가 되어서 외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결국은 믿는 자 없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 점에 동의해야 됩니다. 맞아요. 믿는 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 속한 자는 자기 자력으로 아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굴레에서 벗어날거 같으면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왜 도마에게 창자국 왜 보여줬겠습니까? 네가 알아서 노력하면 천당간다고 일곱번에 일흔번씩 용서하게 되면 베드로 네가 천당 간다고 왜 그런 윤리 도덕적인 이야기를 그걸로 왜 끝나지 않고 왜 그런 이야기하시면서 왜 자기의 창자국 못자국을 왜 보여줬습니까? 시작은 너부터 시작하는게 아니라는 거죠. 시작은 누구부터?

진짜 원천 마지막 시작점 중심점 구심점은 이 세상에 오직 믿음이라는 것도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이 믿음이라고 할 경우에만 믿음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전의 인간은 뭐냐? 믿음 없음이 되야 돼요. 어떤 고백을 하든 믿음 없음이 되야 돼요. 베드로가 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해도 결국 베드로 얼마 안 가서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 듣지요.

사람은 뭐 고백을 하고 칭찬을 받으면 다시 어디를 붙잡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어요. ‘야~~내가 이정도로 대단하구나.’ 자기 자신에게 종속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연속성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떠한 원리도 어떠한 능력도 없어요. 왜냐하면 매 순간순간마다 주께서는 사건화시켜서 회 치듯이 잘라버려요.

밤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 날이 있다는 말은 Day by Day 날마다 날마다. 날이 있다는 말은 Week by Week 주마다 있다는 말은 이게 마디가 있다는 거에요. 이게 창조의 원리에요. 창세기 1장에 마디를 왜 줬습니까? 불연속성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다음에 살리지 않으면 오늘 너는 오늘 밤으로서 인생 끝이다라는 거에요.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는 거에요.

이걸 날, 달이라고 하지 말고 초단위로 나눠 봅시다. 우리는 매순간 나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할 권한도 없고 그러한 자격도 없고 그러한 이유도 없는 자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계속 칸막이를 지음으로서 그 칸막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믿음, 칸막이 자체에서 주께서 사건화시켰죠. 사건화시키면 사건화시키고 그 다음 사건 올 때까지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믿음 없는 자가 되어버려요 어느새.

왜? 다시 내 중심으로 돌아섭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믿음의 주인공이 네가 아니고 예수님인 것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기에서 따로 끊어진 것을 이때 우리 믿음 좋아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끊어져야 될 것을 주께서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이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부정적인 것이 누구한테 오게 되느냐 하면은 나라는 존재가 다 떠맡게 돼요. 나라는 존재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입장이 되고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그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 역할이 바로 구약에서 무슨 역할이냐 하면 바로 율법을 위반했을 때에 주어지는 처벌이 뭡니까? 율법을 위반했을 때 뭐가 오지요? 들어가도 뭐 받고? 들어가도 저주 받고 나가도 저주 받고.

이것이 바로 우리한테 해당된 사항이에요. 율법이라는 것이 저주도 있고 복도 있다는 두가지 양상을 우리 자신을 가지고 율법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을 증명해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에요. 우리는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놀아나는 겁니다. 말씀이.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잘났다가 아니라 “아! 말씀이 그대로 되어지네.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치 뜻밖인 것처럼 마치 예전에는 몰랐던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거에요.

이런게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로 가지 말라 나오지요. 넓은 길은 멸망하는 길이다. 이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 알지요. 다 아는데 이게 뜻밖으로 새삼스럽게 새롭게 인식되는 경우는 이거는 사건이 터져야 되지 내 머릿속에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따라서 말씀을 좁은 길로 가거라 그게 영생의 길이다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 우리가 예측 못한 우리에게 일어나는데 그게 꼭 나를 부수고 나를 정죄하는 쪽으로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영생 줬더니만 본전 내놓으라는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살았지? 그게 바로 넓은 길이야 라고 딱 지적할 때 이미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영생에 속한 사람이에요. 거기에서 예상 못할 여분의 기쁨이 나오지요. 이거는 내 고민 갖고 끙끙 앓을 때는 예상 못할 기쁨인데.

“내 고민 해결하면 나는 기쁘겠습니다. 원수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라든지 날 쫓아내다니 발병 나던지 벼락맞아라. 내 속이 다 시원하겠다. 위청수 필요없어. 원수가 망하는거 보면 나는 속이 다 시원하겠어.” 우리가 예상하는거죠. 내 존재가 예상하는거죠.

그래서 인간은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서도 안되고 용서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라는 것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용서해서 우리 앞에 붙여주죠. 그럴 때 내 용서가 아니고 주님이 이미 용서했다는 거에요. 이미 용서한거에요. 여러분들이 대중가요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연희. 우연희가 불렀던 우연히. 나 벌써 용서했다고. 오랜만에 나이트 클럽에서 만났어요. 안아주었지. 그 남자는 또 찔찔찔 울고 있다고 나 벌써 용서했다고. 얼마나 은혜되던지. 네가 용서받지 못함가지고 얼마나 마귀한테 약점 잡혔는지 나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어? 이런 생각한다는 자체가 여전히 자기 존재 걱정하고 있다는거에요.

그러나 사건 터져버리니까 용서받았기 때문에 주의 일에 합류가 된거에요. 용서받은 채로. 다만 우리가 건망증이 심해가지고 또 내 행함에 의해서 어떤 용서가 되는 줄 알고 또 착각을 한거에요. 옛 버릇이 남아서. 그럴 때 이 모든 주체자가 내가 나한테 잘해서 내 조정과 내 절제 잘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주님의 자기 개념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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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5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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