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자 190412
서울의존강의20190412a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2-24절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 나오는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죠. 예수님이 당했던 일들을 보게 되면 그 예수님과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계셨으면 예수님도 괜찮은 분이지만 다른 사람도 괜찮다.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예수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주변으로부터 많이 당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요. 이것은 예수님도 괜찮은 분이지만 우리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라고 할 건덕지를, 사도는 또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거든 니가 예수님에게 어떤 가해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그걸 아예 염두 해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에게 당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간에게 속했어요? 안 속했어요? 우리도 인간에게 속했죠. 그렇다면 성도가 되었던 성도가 되지 않았던 한평생 살아가면서 내보이는 것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당했다는 사실만 자꾸 보여주면 돼요.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뭐 어떻게는 어떻게 해요?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내가 살면 살수록 계속해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그걸 고백해야죠. 예수님은 당하기만 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당하셨는데, 그 뒤에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렸다.”라고 했죠. 자, 나무에 달렸으면 뭐 밑에 있는 세상 관람하고자 달리신 건 아니고, 달렸다는 말 자체가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죽으셨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이야기죠. 나무에 심심풀이로 달리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상대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는 이유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돌아가시게 한 원인제공자로서 우리가 살아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라면 우리가 과연 제대로 살아갔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 의해서 어떤 분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누구 하나 억울하게 죽게 한 그 사람들은, “나는 지금 사는 게 당당해! 정당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는 거야.”라고 주장할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살아도 산 자가 아닌 거예요. 죽음을 유발한 범죄자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 내가 누구냐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악착같이 자꾸 살 생각만 하는 겁니다. 그 살 생각만 하는 그 생각을 그들은 옳다고 하는 거예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옳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옳다.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이 생각은 하자가 없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서 여기에 뭐가 계속 투입이 되느냐 하면은, 투입되는 것들이 뭐냐 하면은 윤리와 도덕이죠. 윤리와 도덕들이 막 드나드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다. 이정도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이런 주장은 옳은 것이라는 겁니다. 가정주부가 애를 키운다. 애를 키울 때 제대로 열심히 키우려고 했다. 이게 윤리 도덕적으로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이것은 옳은 일이다. 가정주부로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이 과정에서 뭔가 빠져버렸죠.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빠졌죠. 주님이 빠져버렸죠. 주님은 그냥 끼어들지 말라고 할 정도로 빠져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죽인 거예요.
주님을 죽였을 때에, 자, 잘 보세요. “나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옳다.”라는 이것이 누굴 죽이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게 했죠. 근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정당하다고 한다면 일괄적으로 누가 정당하지 못합니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정당하지 못하죠. 그러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잘못된 거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죠. 아무리 윤리도덕으로 처발라도 옳지 않죠.
그러면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뭐가 옳지 않다는 겁니까?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이거는 옳은 생각이 아니라 말이죠.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살 이유도 없으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 결과는 예수님을 죽게 한 가해자로 드러날 뿐이죠. 제가 지금 중간에 뭘 집어넣었습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빠져있는 상태라면 내가 살고 싶다, 라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우기게 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그냥 살라고 하느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바른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옳다고 좀 봐줘.” 이래 나오는 거예요. 뭐만 빠지면? 예수님만 빠지면 그렇다 이 말이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살고 싶다, 라는 것이 건강할 때만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살고 싶다는 것의 정당성은 특히 병원에 누워있을 때, 요양병원이나,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몸이 아플 때에 환자들이 이중플레이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오시게 되면 “목사님. 이제 나는 죽어 마땅해요. 나는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해놓고, 자식들이 오게 되면 “애들아, 나는 살고 싶다.” 어느 게 본심인지 모르겠어요. 어느 게. 믿음도 개뿔도 없으면서 목사님 앞에서는 믿음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성도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일관되지를 못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도라고 흉내 내는 이유는 평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나는 이왕 사는데, 그냥 살라고 하니까 미안스러워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내 속에 있는 진짜 본심을, “나는 죽기 싫다. 나는 살고 싶다.”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나는 살고 싶다는 이 생각이 옳다, 라는 생각에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이 말이죠. 여기에 예수님이 중간에 끼어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이 끼어들어버리니까, 여기 베드로전서 2장 22-24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나 예수다.”라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나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당했다.”라는 쪽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죠. 그러니까 그냥 예수님, 예수님, 하지 말고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라고 이해를 하라 이 말이죠. 그리고 그냥 나쁜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24절에 나오죠. 친히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베드로 사도가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것을 왜 강조합니까? 그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완료는 부활이 아니고 바로 나무에 달린 죽음의 사역에, 최종성이 거기에 있다고 본 겁니다. 24절에 보면,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죄라는 말 앞에 뭐가 있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고 바로 앞에 있는 단어가 뭐예요? 우리죠. 우리.
우리가 남한테 죄지은 것 말고 우리가 예수님께 지은 죄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는 예수님 구경도 못했습니다. 만나본적도 없습니다.”라고 이래 나올 거라는 말이죠. 그 문제를 풀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이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시사,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사고사였나? 이 말입니다. 그 시대에 국한된 죽음이었나? 아니면 마지막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 죽음이 적용될 그런 죽음이었나? 그것을 따져봐야 돼요.
어떤 사람이 이순신 장군은 당신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나는 이순신 장군 만나본적도 없고, 나는 이순신 장군 별로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한다고 해서 그 것 때문에 돌아가셨는가? 내가 이순신 장군 죽으라고 총 쏜 그 왜군의 총잡이에게 내가 뒤에서 배후조종했습니까? 아니죠. 그때 저는 안 태어났어요. 비겁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을 때, 저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우리 책임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때 안 태어났으니까. 아까 24절, “죄에 대하여”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우리. 우리라는 말이, 사실상 오늘날 우리라는 말이 없어요. 우리라는 말은 없고 개인들의 집합체밖에는 없어요.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우리라고 할 수 있는 다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슨 수가 틀어지면 다시 도로 뭐로 환원이 됩니까? 개인, 개인으로 환원해버립니다. “나는 거기에 책임 안 졌다. 나한테 거기에 대해서 묻지 마. 나는 그냥 구경만 했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처형할 때 동원되었던 로마군인들이 있죠. 그 사람들은 공직을 수행한 겁니다. 공무원들이잖아요. 공무원들. 경찰이 공무원들 아닙니까?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뭐 의사로서, 판사로서, 가장으로서, 주부로서, 자식으로서, 목사로서, 장로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당하게 보이는 것은 평소에 개인의 가치를 자기가 늘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개인적으로 봐서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세상에서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그 돌아가는 그것이 내 개인의 가치를 높일 것이냐, 낮출 것이냐에 대해서 나는 잘 처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북한의 제 2인자 최룡해(현재 김영남은 91세 고령으로 퇴진)가 있잖아요. 김정은이 도와주는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북한에서는 북한의 국가운영에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기여자죠. 근데 그 사람이 한국에서는 환영을 받을까요? 맞아죽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죠. 왜 똑같은 개인인데 환경이 바뀌니까 평가가 왜 다르죠? 환경이 바뀌니까 평가가 왜 달라요? 동일한 개인이잖아요?
근데 전에 북한 제 2인자였던 김영남이가 집에서 자식 때리고 술 먹고 부인한테 행패부리고 그런 개망나니 짓을 할까요? 적어도 국가의 고위직이라면 안 하죠. 점잖죠. 인자하신 아버지, 훌륭한 남편감입니다. 적어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부 다 교양 있고 배운 사람들이에요. 아내가 자기 일 때문에 바쁘면 남편이 다 알아서 주식투자를 해주는 겁니다. 45억짜리를. 그 정도로 아내를 철저하게 외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판사 일만 해라. 내가 다 알아서 45억 주식투자 해줄게.” 둘이 싸울 일이 별로 없죠. 싸운다고 머리끄덩이 잡아당기고 이러지 않겠죠. 그냥 말로 싸우겠죠. 그리고 말로 싸우는 것도 “여보, 내 의견은 이런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냐?” 뭐 이렇게 재판하는 것처럼 아주 점잖게 했을 거예요.
항상 점잖고 바르게 살고 남한테 해코지 안 하는 그런 누구? 우리가 아니고 누구? 그런 우리가 아니고 누굽니까? 나예요. 나. 그런 나예요. 그런 나.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에 대해서 내 책임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지금 괜찮은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괜찮은 나는 그다지 나쁜 인간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인간은 윤리도덕으로 무장되어 있고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여지를 항상 두기 때문에 개인으로 다가가서 아무리 주님의 십자가 바라봐도 여기서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은 죄인이 성립이 안 돼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고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면 그거는 뭐 구원 못 받죠.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해야 하는데, 성령이 안 오고, 성령이 안 오니까 누가 가는가, 본인이 가는 거예요. 어떤 본인? 괜찮은 가치를 갖고 있는, 괜찮은 인품을 갖고 있는 본인이 가는 거예요.
기존 교회의 장로들 한번 보세요. 복음 압니까? 모르죠. 모르니까 장로가 됐죠. 복음 모르니까 교회운영에 대해 목사에게 조언할 때 뭐라고 합니까? 괜찮은 자아의식으로 접근해요. “목사님, 저는 3대째 이 교회에 새벽제단을 쌓고 충성을 다합니다.” 이게 윤리도덕이 아닙니까? 품위 있고 괜찮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려고 젊은 목사한테 조언한다고요.
“목사님, 천천히, 발걸음은 이렇게 조신하게 내셔야죠. 목사님, 강단에서 그렇게 사투리나 쓰고 쌍스러운 소리를 쓰면 안 되죠.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인품이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나이 들어서 아는데, 젊은 기분은 알지만 이렇게 점잖게 하셔야죠. 목사는 교회에 어른인데, 어른답게 점잖게 해야죠. 아직 목회 경험이 없어 그런가본데, 제가 벌써 열두 명의 목사를 섬기고 있습니다.”이런다고요. 섬기는 건지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은 괜찮은 개별자들의 집합이 그 교회가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죄인은 어디서 찾습니까? 없지요. 무슨 죄인이 있어요. 아니 교회에서 죄인 봤습니까? 교회는 죄인 없어요. 돈 뺏으러 온 교회 앞자리 노숙자가 나쁜 사람이지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없어요. 다들 한 점잔하시는 분들입니다. 은연중에 경쟁하고.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교회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아닌 겁니다. 점잖은 개개인들 딱딱 따져서 질 좋은 사람들인데 무슨 그게 교회겠어요? 주님께서는 피해를 입었다는데 피해자가 아무도 나타나질 않아요. 희한한 현상이에요. 죽으신 분이 있는데 죽을 만큼 나쁜 놈은 예수님 근처에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잘났어. 예수님 죽이는데 가담했어도 잘났고 죽고 난 뒤에도 잘났어. 그 잘남의 역사, 그 잘남의 전통, 이게 오늘날 교회역사가 되고 말았어요. 신학의 역사가 되고.
신학을 한번 보세요. 전부 다 잘난 사람 만들기의 용도로 신학이 흘러가고 있어요. “여러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꾸 어떤 계단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계단을. 더 질 좋은. 진화한다는 것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논리를 인용했습니다마는, 한 계단 딛고 맹세하고 또 한 계단 올려놓고 언약하고. 이 노래 가사는 뭐냐 하면 ‘용두산 엘레지’라는 노래에 보면 나와요. 용두산아~~ 용두산아~~ 일백구십 사계단에~~ 부산 용두산에 있는 공원이거든요. 계단이 많아요. 제가 여러 번 올라가봤거든요. 올라가면서 맹세한 거예요. 점점 더.
인간 머릿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은 신이 되고 싶은, 신에게 연결되는 어떤 계단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착하면 착할수록 자기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마귀의 꼬임에 빠져가지고 정반대쪽으로 갑니까? 주님은 나락에 떨어졌는데, 주님이 떨어진 곳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고 주님이 없는 곳에, 마귀가 유인한, 마귀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잖아요. 세상신이니까. 그 마귀 만나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거예요. 마귀 만나러. 기도해서 만나고, 선교해서 만나고. 주님은 그 잘난 인간들의 발에 차여서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십자가에, 저 용두산 계단 밑에 떨어져있단 말이죠. 쉬는 시간에 용두산 엘레지를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애절한지.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베드로사도가 언급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 해요.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사람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오직 예수님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이야기만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 혼자 잘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겠네, 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죠. 다른 사람은 못나고 죄인이니까 뭐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만이네, 이래 하겠죠.
사도 베드로가 여기 24절에서 드디어 예수님의 효과를 이야기해요. “우리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친히 나무에 달려서”라고 되어 있죠. 이게 세상의 모든 학문을 동원해도 이걸 풀어낼 수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우리가 천국에 갑니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석가모니 죽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죠. 공자 죽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죠. 왜 다른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가 천국 가는 효과가 없고, 왜 예수님이냐 이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죠? 그걸 설명하려면 개별자로부터, 개별자의 자격으로 주님 앞에 나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개별자의 자격으로. 왜냐하면 이 개별자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윤리도덕으로, 항상 점잖은 것으로 자기를 분명히 잡고 스스로 자기를 부추기고 있어요. 아까 처음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정당하니까. 예를 들어서 가정주부라고 합시다. 나는 가정주부로서 살고 싶다. 왜? 가정주부로서 내가 완전치는 않지만 착실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그다지 나쁘지 않는다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스스로 자부한다. 이거거든요.
이렇게 말이 많은 문장 같지만 평소에 사람들이 길에 다니면서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 그거에요. 나는 정당하다 이 말입니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을 장착하고 그냥 무심코 길을 가는 거예요. 길거리에 담배피우면서. 나는 길거리에서 담배는 피우지만 집에 가장으로서는 충실하다 이 말이죠. 따박따박 월급 가져다주니까. 까짓것 길거리에서 담배피우면 어떠냐는 겁니다.
항상 인간은 나는 정당하다가 있어요. 나는 정당하다. 뭐 나는 결백하다까지는 안 나가도 나는 정당하다는 것은 있어요. 그러니까 남들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개별자죠. 개별자가 집단속으로 들어가도 개별자는 안 죽습니다. 개별자는 계속 개별자 의식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뭐 4.11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이라고,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했죠. 기분 좋았죠. 1919년 3.1운동했으니까, 올 2019년 100년이 맞죠. 했는데, 그 사람들 서로 이권을 다투고 서로 양보합니까? 안합니까? 양보 안하죠.
나라가 독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에요.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요. 내 사랑이 깨졌는데 왜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느냐. 왜 파도는 치고 햇빛은 반짝이느냐 하는 노래가 있죠. 왜 새들은 짹짹거리느냐. 나는 사랑이 깨져서 세상종말인데. 왜 세상은 내 사랑 깨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돌아가고 있느냐 이 말이죠. 이런 의식이 뭐냐 하면은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줘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