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20장 24절(표현)190402b-이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20장 24절(표현)190402b-이근호 목사
자, 두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도마는 전형적인 ‘나’ 라는 것이 알게 되었는데 왜 전형적인 ‘나’로 규정되느냐 하면 도마가 예수님의 그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 진입해 들어간거죠. 보통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죽음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내안의 죽음이 벌써 살다보면 언젠가는 죽겠지가 우리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이미 죽었다. 오히려 사는게 이상하네 라는 이러한 발상은 인간으로서는 잘 갖고 있지를 못합니다. 살아있는 내가 중심이고 죽음은 나중에 살다보면 곁가지 사건으로 나중에 꼬리처럼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계속 아직도 버티고 있다고 나 죽은 이미 죽은 자인 것을 애써 아니야 안 죽었어 라고 고개 저으면서 힘들게 비현실적으로 아니야 나 살아있어 그런 몸부림치는 어느 것이 부수적이고 어느 것이 주가 되는지를 새롭게 정립하는 사람이 바로 자아가 누구냐 하면 도마에요.
자, 도마 속에 죽음이 중심에 들어왔지요?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음에 들어왔다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있다고 했어요. 보지않는 것. 죽음. 보지않는 것. 보지않는 것이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합쳐버리면 없는, 없는 것. 없는 것이 있음을 없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계속해서 시간 끄는 식으로 거울 앞에 있는 내 모습이 있는거에요.
있음을 증명하는게 아니고 있음은 곁가지고 있음에 속아넘어가지 말라는 거에요. 내가 내 자아한테 늘 이렇게 부탁하고 가르치기를 너 거기 있잖아요. 거기에 네가 현혹되면 안돼. 너 없는 거야. 이걸 우리한테 가르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왜냐하면 사시다 사시다가 약 한 많이 봐줬습니다. 97세 6개월째 돌아가신다고 하면 내가 97세 6개월 되가지고 내 참 욕심도 많지. 97세 6개월 동안 해가지고 요양병원에 누워가지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나는 이 순간이 없어요.
어느 것이 내 모습답습니까? 있는 것이 내 모습답습니까? 없는 것이 내 모습입니까? 없는 것이 내 모습이에요. 그걸 위해서 보람상조가 있는 것 아닙니까. 걱정하지말고 안심하고 있으면 돼 우리가 뒤처리 다 하겠다 이 말이죠. 걱정하지 말고. 물론 낸 회비만큼 그건 뒷문제고.
어떻게 그런 발상을 사는 것이 희한하게 느껴지는 것. 이게 산다는 것은 내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데. 오히려 살아있는 것을 이상하게 덤으로 여기는 그 태도. 그것은 바로 없음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세계의 부합되는 태도입니다. 왜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없는 식으로 세상을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요. 없는 식으로.
그러면 없는 분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 그게 없는 분이거든요. 보이지않는 분. 여기 나오지요.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보이지 않고 없으신 분이 있음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있음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사람들이에요. 사실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악마의 추종자로 살아온 겁니다.
따라서 악마라는 것은 우리가 안 느끼죠. 인간이 살아있지요. 인간의 있음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이 과학이든 학문이든 철학이든 항상 시작은 있는 것을 어떻게 윤택하게 있을 것인가. 풍족하게 있을 것인가에 모든 역량과 노동을 거기에다가 수고를 거기다 쏟아붓거든요. 나이 느즈막히 텃밭 한 50평 했다. 비용없잖아요. 없으면 거기에다가 종자씨해서 배추씨있게 되면 그게 사는 보람이잖아요. 새싹 막 나오고.
그 나이에 애 키울 수는 없고. 강아지는 똥 싸고 이런거 귀찮아서 안되고 말썽꾸러기 따먹을수 있는 배추잎이나 상추잎이나 키우면서 없는데서 있음을 가지고 그렇게 키우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없음을 부정하는 태도가 되는 거에요. 없음이 있음을 주도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지 않는 분을 위해서 잠시 잠깐 우리는 약간의 보이는 것처럼 안개처럼 잠깐 보일 뿐인데 주객이 바뀌게된 거에요.
결국에 이건 뭐냐 하면 관계망 싸움입니다. 우리가 없는 분 중심이냐? 아니면 있는 사람들 중심이냐의 그 싸움이 영적싸움으로 계속 이어지는 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더 진도를 약간 깊이 있게 나가보겠습니다. 이 정도는 여러분들이 아신다 치고 아신다고 치는 겁니다. 믿는다가 아니고 아신다고 치고.
인간이 있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역사가 나오지요. 인간의 표현은 무엇을 자연을 비워내고 탈탈 비워내고 거기에다가 뭘 채워넣느냐 하면 역사를 채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이렇게 이야기해요. ‘의미’ 또는 ‘의미 있음’으로 채워요. 사람이 한 평생 살게 되면 흔히 어른들 이야기하죠. 아이고 내 인생 산 것 소설로 써도 이거는 10권도 더 쓴다 이렇게 하거든요. 이게 역사에요. 그리고 역사 자체가 존재의 의미고.
제가 어느 작가 이야기했지요. 한강 태백산맥 뭐 이런사람들. 대하소설. 또 뭐 있더라. 토지 말고 태백산맥 쓴 사람이 책을 세권 썼잖아요. 아리랑하고 그게 전부다 뭐냐 하면 민족역사를 이야기하는거에요. 왜 민족역사를 그렇게 대하소설해가지고 유명하느냐 하면 그게 현재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역사 안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요.
믿는거에요. 믿음은 뭐다? 표현이죠. 믿음은 표현이에요. 믿습니다가 믿는게 아니고 평소 하는 태도가 역사가 나오면 그건 불신앙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역사가 나오면 불신앙이고 이미 자기가 살아있는게 산게 이상할 정도로 이건 무슨 내가 계속 살면 안되는데 할 정도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가 되면 신앙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뭐했다고 살아갈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런 정당성도 없고 그런 가치도 없는데 다시 말해서 자기 역사를 본인이 알아서 삭제해나가면 돼요. 없다.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가스펠송에 이런게 있어요. 유명한 여자분이 했던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만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그렇게 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뭔가 안정되어 있으면 또 내가 이 노래해가지고 또 역사가 또 튀어나온다니까요. 역사에 맡기지 말고 자연에 맡깁시다. 자연은 중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연은 누가 중심이냐? 바로 보이지 않는 분이 중심이에요. 따라서 성도라 하는 것은 자기 몸을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 나의 몸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내 몸을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중심이 어디에요? 어디에 모든 이런 물자가 어디에 다 모이고 집중됩니까?
‘나’ 잖아요. 그런데 그 나라와 의라는 것은 어디 있습니까? 뭐를 생각 안하는거에요? 나를 생각하지 않는거에요. 그 나라와 의. 주님 나라를 생각하는 겁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어디에 던져라? 하늘에 쌓아두라. 이 말은 나중에 죽으면 천당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시작을 내 쪽에서 시작해서 천당 갈 생각하지 말고 이미 저쪽에서 이미 개시했다는 겁니다.
그 개시할 때 어떤 그물이 내려온다 고기잡는 그물인데 그 그물이 관계망이고 그걸 제가 아까 믿음이라고 했지요. 그 그물망이 내려오게 되면 내가 생각해도 내 육의 본성과 전혀 다른 표현들이 나와요. 표현들이. 표현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게 해석이 나오는데 그 해석이 항상 역사가 아니고 비역사적에요. 단절되어 있습니다. 딱딱 끊어져 있어요.
이어져있으려면 어제가 원인이 되어서 그것이 오늘의 결과를 낳아야 되는데 이 원인 결과가 이게 성립이 안됩니다. 성립이 안되고 내가 나된 것은 그냥 하나님의 오늘 하루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는 분이 따로 있어요. 은혜를 내가 창고에다 축적하는 것이 아니고 주면 주고 말면 그만이고. 주도권이 그쪽에 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표현은 뭐냐? 주께서 주셨습니다 그것만 하면 되죠. 용서도 그분이 주님이 주셨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주셨고 그래서 네가 먹을거 입는걸로 그 다음에 뭡니까? 족한줄로 알라 하는 거에요. 남양유업 현대3세 SK3세 마약한 애들이 잘못은 뭐냐 하면 밥으로 못사는 모양이라. 꼭 마약을 해야되겠어요. 그 마약하는 재벌 3세만 탓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때요? 우리가 상대적으로 못살면 얼마나 기죽고 삽니까. 내가 나를 용서 못하잖아요. 동서의 적은 동서죠. 여자의 적은 여자인 것처럼. 동서의 적은 동서가 적이에요. 형님 이렇게 나오면 요새 동서는 싸가지가 없더라 이렇게 나오면 문제가 커지잖아요. 게다가 애 SKY 갔느니 뭐 서울대 연고대 갔니 이렇게 나오고 너는 재수하고 이러면 이제 명절에도 못가죠. 기죽어서 못나가죠.
성경에 먹는것 입는걸로 족한줄 알라하는게 뭐냐 하면 너 입힐 가치도 없는데 입혔고 먹을 가치도 없는데 먹인 것은 먹고 입으라고 준게 아니고 그 나라가 어디서 공급되었느냐? 누가 주셨는가? 이 ‘탈자연화’. 자연이 중심되는 인물에게 감사하고 고마워하라고 우리를 성도로 만든거에요. 제가 지금 한시간 넘게 계속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속 하고 있잖아요. 이 현실감 떨어지는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죠. 누가 뭐래도 이 말이 맞아요. 누가 뭐래도.
성령이 오신 이유가 뭐냐? 인간의 힘으로 될 것 같으면 오시지 않았어요. 이거는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겁니다. 이 말을 제대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거에요. 따라서 성령이 왔다면 인간적인 상식으로 산다는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몽땅 죄가 버려요. 이 세상은 죄뿐이에요. 성령이 와서 우리를 건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죄 자체에 대해서 네가 죄를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의, 죄, 심판 그것 자체를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그 자체가.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 자신을 보다 가치있는 인간으로 만들이 위해서 우리는 성실하게 살라고 애를 씁니다.
그럼 자연의 중심화가 누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아니고 누구 되느냐 하면은 주님의 자리를 누가 강탈하느냐 하면은 내가 주님 자리를 앉아있는 거에요. 누구 믿느냐? 나를 믿어요. 천상천하 나를 믿어요. 부처 믿는 나를 믿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다고요. 우리는 여기서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예수 믿어서 나를 부인하겠습니다 해봤자 그건 빈말이에요.
그래 놓고 뒤에 속으로 웃고 있다니까요. 이 정도까지 나는 지금 정답에 근접하는데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기특하시겠습니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혼자 지금 신나있어요. 자기 믿음 좋다고 지금 자기 믿음에 자기가 감상에 도취되어가지고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을 흉내내지 마세요.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흉내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도마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도마 흉내 얼마나 내겠어요. 스스로 경계선을 만들 수는 없어요. 인간이 스스로. 내가 전에는 저기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고. 어릴 때 하는 놀이 있지요. 경계선하는 놀이. 이렇게 해가지고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해가지고 던져넣고 뒤로 던져가지고 밟고 하는 것. 내가 스스로 내 스스로 이거는 구원받은 장소고 이거는 구원 안 받은 장소. 자기가 경계선을 자기가 만들면 이거는 하나의 오락이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늘 낭패에 이르도록 나에 대한 내 살아있음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도록 주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쉬운 말로 천벌 받았다 하지요. 저주 받은거에요. 왜냐하면 이런 일을 당해야 그동안 먹는 것 입는 것이 내 노력에 의해서 받은게 아니고 주께서 주신 선물인 것을 뒤늦게 우리는 뒤늦게 감사하고 뒤늦게 종합해서 또 고마워하는거에요.
그래서 이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고맙고 항상 감사한거에요. 이 말은 내 쪽에서 가치 측정을 하지 않기를 선언해버리는 겁니다 내 쪽에서. 나는 잘했을까 못했을까? 따지지 마세요.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 나를 공격한다. 계속 공격한다. 그렇게 따지지 마세요. 왜냐하면 저 사람이 공격함으로서 공격하면서 내 쪽에서 뭐를 잃어버리는가 한번 계산해보세요.
내 쪽에서 평소에 나는 내가 의가 없다고 여겼는데 공격 들어오니까 갑자기 없는 나의 의가 새롭게 만들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그걸 지킨다고 사력을 다하고 밤잠을 못자요. 그거 지킨다고. 나는 가만 있었는데 주께서 나를 성도라고 사용해주시는 거에요. 내가 잘못한게 아니고 보자 오늘은 또 너를 공장으로 여기고 오늘 내 의를 한번 생산해보까? 생산 재료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집어 넣어놓고 일방적으로 죄 집어 넣어놓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용서 퍼붓고 일방적으로 의를 만들어내 버려요.
우리는 그냥 장소를 제공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의 거처만 제공했을 뿐인데 주님께서 시작하셔서 주님께서 영광 돌려서 주님께서 내 공로로 이렇게 돌아가는 거에요. 우리는 그냥 주님의 일하시는 일터가 되어 버렸어요. 본의 아니게. 그래서 성도들이, 사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느긋하고 뻔뻔해요. 느긋하고 뻔뻔합니다. 세상하고는 아예 상종할 가치도 없는 거죠.
그것을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아까 ‘표현’이라고 했는데 이야기 해보까 너무 어려워. 그럼 쉬운 말로 해보겠습니다. ‘흔들림’. 복음 안에서 흔들림. 우리의 성도의 남은 인생은 복음의 기로 안에서 늘 흔들려요. 비행기 타면 곱게 가는게 아닙니다. 난류를 만나면 이게 폭풍을 만나면 흔들리죠. 분명히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어야 되는데 안식같은 소리하고 있네.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늘 흔들려요.
복음 안에서 했는데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말씀으로 인하여 다른 말로 하면 말씀 안에서 우리는 늘 멀미날 정도로 흔들립니다. 제목을 표현도 좋지만 멀미도 적당하네. 정신을 못차리겠어 정신을 못차리겠어. 가만히 있는데 찝쩍거려요. 가만히 있는데 찝쩍거리고 오늘치 사건은 예상도 못했는데 오늘치, 내일치 또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결과는 항상 감사로 이어지고 고마움으로 이어져요.
아 내가 가동하는 공장이 아니였구나. 주님이 주님 자기 공로와 자기 성과를 또다시 주님 자기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공장인데 나는 또다시 내 몸 있다고 아침에 거울보고 내 몸을 하나의 나의 가치 나의 믿음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있는 공장인줄 착각을 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성령달라 해가지고 어떤 기적적인 성령이 기도원에 가서 뜨겁게 오는걸로 알고 있는데 주께서는 그 방법을 사용하는게 아니고 뜨거운 주먹이 날라옵니다. 내가 초청하지 않은 타인. 내가 영접하지 않는 내가 반기지 않는 타인. 그들이 누굽니까? 그게 바로 ‘옛 나’. 옛날 나. 옛날 나와 똑같은 사고방식과 똑같은 정신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내가 나를 쳐들어올 때에 나는 과연 새사람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런 점을 감안할 때에 요한복음 17장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7장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7장 15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아멘.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도를 다룬다는게 나오지요. 예수님의 기도에 나오지요?
네가 너를 인생을 다루는게 아니야. 내가 다루는데 다루는 방식은 뭐냐? 너희를 세상에서 데려가는게 아니에요. 오히려 푹 젖게 만들어요. 푹 젖게 만듭니다. 그러면 복음 안에서 비행기 탈 때 기류에 흔들리는 것처럼 사도는 하여튼 세상이 겪을 수 있는 모진 고난과 고생은 다 겪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시면 안돼요. 모진 고난과 고생을 겪는다는 말은 지지리 못나고 굶어죽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평소에 우리가 이게 보통의 사람의 삶이야 라든지 이거는 일방적으로 통하는 상식선에서 사는거야 라는 그런 것을 하게 하는 거에요.
성령이 없으면 좋다고 거기에 같이 한통속이 되어 가지고 멋들어지게 삽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걸 거기서 강제로 떼어내 버려요. 성령없을 때는 말 섞을 수 있고 친구로 좋게 지내는데 성령오고 난 뒤에는 주님이 훼방질을 놔가지고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간파될 수 있도록 어떤 사태나 사건을 유발시키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쪽은 말씀인데 저쪽은 말씀이 없지요. 뭡니까? 결국 소통이 안되지요. 대화가 안됩니다. 대화가. 사고방식이 추구하는 바가 안되기 때문에.
바로 그래야 돼요. 왜냐? 바로 그래야 예수님이 삶의 재현이기 때문에. ‘표현’이거든요. 예수님이 살아가셨다가 아니라 지금 주님이 살아있다는걸 표현하는거에요. 주님은 여전히 살아있어요. 제자들 떠날 때도 살아있고 떠날 때도 살아있었고 주님은 제자들 떠났다 하지만 떠난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 속에 성령 안에서 늘 함께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와 함께 계셔요.
말씀 안에서 복음 안에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계시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 노래 부른다고 오시는게 아니고 주께서 친히 다루시는 식으로. 외로우냐? 외롭다면 성경말씀 다시 외로우니까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이게 숫자 한 7568명 있을 때 생각나겠어요? 안 나옵니다.
교회 쫓겨나가지고 달랑 3명 있을 때 생각나요. “음메 기죽어” 할 때 ‘인생 이제 종쳤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주의 종이 아닌가 보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가 절망할 때 그때 우리가 놓쳐버린 성경말씀이 다시 하나의 따뜻한 물로 샤워하듯이 멀리 갔던 말씀이 가까이 다시 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소통되지 않고 친구들이 떠나갈 때 그때도 생각나는 구절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7장에 넓은 길로 가는 자들 부러워말라 그들은 지금 뭣도 모르고 지금 신나게 지금 나락으로 지옥으로 신나게 지금 브레이크 없는 차를 타고 그야말로 놀이동산 나오지요? 브레이크 없잖아요. 막 돌아가잖아요. 정신없이 그냥 그대로 처박고 있죠. 꼴아박고 있죠. ‘브레이크 없는 벤츠’. 홍준표가 지은 책입니까? 그건 몰라도 돼요. 완전히 꼴아박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도 인생이 잘 풀리는지 이사갈 때 화장지들고 ‘잘 풀리는 집’ 들고 잘 풀리지요. 지옥으로 잘 풀리지요 지옥으로. 누가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되는데 세상 것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에요. 넉넉할 때.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좀 그래봤으면 좋겠어 진짜. 돈이 너무 많아가지고 돈을 욕조에 넣고 목욕해보면서 스스로 위로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이거 평생 다 못쓴다. 좀 그래봤으면 좋겠는데 아마 무의식적으로 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어요 갑자기. 갑자기 있다가 1억5천 날릴 수도 있고.
사람이 뭔가 있을 때는 내가 단도리 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없을 때 보게되면요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지갑을 잃어버렸다든지 동전을 오백원 잃어버렸다든지 뭔가를 잃어버리면 그 있음의 가치가 없음에서 왔다는 것을 몰라요. 그런데 다시 없다가 우연히 한번 찾아보세요. 잔치를 벌릴만큼 기분이 좋지요. 그 마음이 우리를 다스리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잃었다가 얻을 때 그 기쁨이 하늘의 잔치를 할 만큼 기쁘다.
내 기쁨을 위해서 너희들을 이렇게 좀 갖고 논다는데 네가 싫으냐? 아닙니다. 그래 내가 너를 잃게 하고 얻게 하고 간 졸이게 만들테니까. 말씀으로 항상 인생이 고요하지는 않아요.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걱정없다 하는데 걱정이 오고 걱정거리 벌써 다른 사람이 해결해버리고 항상 이래요.
여기서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점점 어려워지는데요 쉽게 하기 위해서 하겠습니다. 자, 말씀 안에서 또는 예수님 안에서라고 하는데 말씀 안에서 우리는 살고있다 했지요. 그런데 여기에 반대가 뭡니까? 반대를 알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역사 안에서 산다. 역사는 뭘 항상 하느냐? 예측 그리고 예상 그리고 희망을 부여하는 겁니다.
아까 그 동영상 촬영할 때 했는데요 다같이 신명기 13장을 한번 봅시다. 보면 볼수록 참 고마운 말씀이거든요. 13장을 누가 13장 1절에서 2절을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고 되어있지요.
한번 보세요. 이루어 졌는데 왜 청종을 안해요? 네? 안 이루어졌으면 에이 사기꾼아 하겠는데 지금 그 예언이 이루어졌잖아요. 이루어졌는데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 반대의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말을 했는데 안 이루어졌을 때는 이 사기꾼아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한대로 이루어졌는데 어떻게 누가 나서서 반대합니까?
개척교회 목사가 ?? 영 힘들어요. 교회 세워놨지요 갑자기 많은 병고침과 갑자기 어떤 온 교인들이 일이 만사형통 할 때 보세요 주님이 살아있습니다 라고 그걸 그 결과와 예측된 결과와 결부시킬 때 그게 바로 거짓선지자에요. 그게 거짓선지자라고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 버리면 뭐가 형성됩니까? 나라는 인간의 괜찮은 역사가 형성돼요. 역사가.
역사가 형성되면 이것은 부정될 수가 없어요. 자기 부인이 안돼요. 너무 귀해서. 이건 아끼고 싶어. 이건 간증집회 할 때 내내 우려먹고 이건 사골도 아니고 우려먹고 또 우리고 한번 우려먹을 때마다 편집되서 다른 내용이 막 나와요. 계속 조작되고 구라되는 계속 우려먹는거에요 이거. 여러분들 큰 교회 장로님들 기도하는거 한번 보세요.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은 교회가 어려울 때 우리 아버지께서 땅 바쳐가지고 이렇게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한 10년만 다니면 한 100번은 더 들어요.
재건파 교회는 기도내용이 이런거에요. 다른 모든 교단들이 다 신사참배할때 우리 교단만큼은 드디어 순교해가지고 우리는 일본천황 뭡니까? 일본 천황 만세. 하여큰 그 천황부를 때 우리는 하지 않고 이겼다. 그걸 그 교단 내내 써먹어요. 이게 전통이라고. 전통 안에 뭐가 포함 돼요? 전통 깨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역사 들어있지요. 역사를 주장하는 교리, 교단 이게 거짓선지자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단이 뭐냐? 개혁주의교단 아닙니까. 가로열고 합동 가로닫고. 가로열고 통합 가로닫고. 가로열고 고신 가로닫고. 합동 전통해서 우리나라 200개 이상되요. 교단이. 합동개혁 합동전통 합동대신. 역사를 우려먹어요 역사를. 한번 좋은 것 줄곧 좋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뭘 믿어요? 역사를 믿는거에요 역사를. 신명기 13장에 거짓선지자의 말을 믿는거에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영웅을 믿는 겁니다. 영웅. 아직도 박정희 찾고 그 딸 박근혜 찾고 뭔가 우리 못살던 우리를 잘살게 했던 그 박씨 집안의 공로를 계속 찾고 태극기 흔들고 태극기 흔들면서 미국 만세 부르짖는거. 이게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역사죠. 역사 또는 민족국수주의. 이제 전부다 역사입니다. 우리 가정이 어떻고 우리가문이 어떻고 3대째 목사가정 이런거요.
그런데 말씀은 뭐냐 하면 말씀은 뭐를 깬다? 이게 어려워요. 말씀은 뭘 깨겠습니까? 예상과 예측을 깨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뭐를 깬다? 역사를 개무시해버리는겁니다 역사를. 역사를 앞에서 와서 역사를 다 갉아먹어요. 쥐가 마우스가 치즈를 갉아 먹듯이. 남겨져 있는 자아 안에 있는 역사를 성령이 와서 다 갉아먹어요. 없애버린다고요.
그건 무슨 역사냐? 바로 죄의 역사죠. 거짓선지자의 역사 악마의 역사죠. 악마의 역사를 갉아 먹어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성도라고 할 수 없어요. 갉아먹으면서 나오는 표현이 뭐냐 하면은 바로 신앙적 표현이에요. 나는 믿지 않았다. 보지 않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도마가 신앙인의 모델이 되는 거에요. 나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았다.
나는 있음으로서 있는 것을 절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없는 분이 이미 죽은 분이 벌써 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나는 그 없음의 중심에서 파생된 잠시 잠깐 살아가는 언젠가는 없어지지만 지금 내 눈에는 있어 보이지만 그거는 네 착각이야. 나 죽으면 나는 살았었는데 지금 죽었네. 그때 되면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될꺼다 이 말이죠.
어차피 마지막에 죽은 자가 될거 같으면 지금 죽어서 있다고 말 못해요. 없음이 되는 겁니다. 없음이 주도권이 되는 거에요. 없으니까 우리는 귀신이죠. 귀신이니까 이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되는 거에요. 명절날 귀신이 잡채하고 귀신이 땀 흘리고 귀신 전 한번 잡숴보실래요? 귀신이 아이 놓고 귀신이 아이 보고 젖 물리고 귀신이 애들 학원 보낸다고 애쓰고. 이거 어차피 나이 들면 귀신 되니까요. 없는 존재니까.
없는데 임시적으로 잠시 잠깐 있어 보이지요. 우리 자신은. 지금 우리가 미친겁니까? 잠시 정리해봅시다. 우리 분명 미친거 아니에요? 만약에 우리가 미쳤다고 하는 것은 내 중심에 있을 때 미친거 맞아요. 내가 분명히 있는데 없다하는건 미친거 맞는데. 없는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 피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피, 없으신 분이 주님이 세상의 중심이란걸 안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 미친 것이지 제대로 미친 것이지 비정상으로 미친게 아닙니다.
주님과 우리 관계는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거에요 없는 방식으로. 이걸 도마는 이미 죽은 분의 방식이다. 부활하더라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해서 나타났잖아요. 나타나더라도 늘 나타난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없는 것이 주류고요???? 나타남은 반칙이 되는 거에요.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예수님이 늘 같이 다니는건 아니잖아요. 나타날 때만 나타났지요.
이건 뭐냐 하면 나타남이 이거는 안해도 될 일을 하신 거고 없는 분이 없는 분이지만 나의 있음보다 더 있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관계망.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믿음이 성령의 선물 아니면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요? 베드로 보고 두 번 다시 해보라고 하세요. 두 번 다시 안해요.
왜?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물만 보고 야 물이다 하고 뛰어들었습니까? 그거 아니잖아요. 해봐라 하면 안 해. 나 못해. 믿음의 행위를 해봐라. 못하지요. 본인이 한게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할 수가 없지요. 흉내도 안되지요. 전에 찬송가 불렀는데 은혜 받았다. 또 불러 보세요. 은혜되는가? 4절이 지겹지요. 4절이 미워. 4절이 미워요.
참 목사로서 주보를 제가 만들거든요. 만들 때 찬송가 고를 때 정말 심사숙고 합니다. 이 찬송가 부를 때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피곤한데 4절 긴 노래 하면 이건 예의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점심 먹고 잠 올텐데 4절 다하지 말고 3절 가사 찾아내자. 이게 몇 개 안돼요 또. 그러면 몇 개 안되니까 4절하되 빠른 템포로 하자.
지금 앞에 찬송가를 길게 넣으면 뒤에 설교시간이 줄어든단 말이죠. 빨리 12시 반에 결혼식에 참석해야하는데 그걸 감안해야 되니까. 앞에 찬송가 짧게 넣고 뒤에는 길게하되 끝나고 난 뒤에 이걸 또 느린 템포로 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것까지 계산 다 한다고요. 패가 몇 개 안되는데 골라잡는 것도 참 충돌 돼.
이 말은요 그 정도로 사람들은 시도때도 없이 믿음이 없어요. 시도때도 없이. 잠시 잠깐 은혜 받았지만 그거는 잠시 본 모습이 아니고 도로 세상으로 쉽게 가라앉아 버려요. 가라앉아 놓고 뭐라고 핑계대느냐 하면은 역사 핑계댑니다. 어제 잘 믿었잖아요. 어제. 5년 전에 은혜 받았잖아 이러고 있다고요.
왜 광야에서 만나를 이틀치를 여분을 안줬습니까? 그것은 매일 죽으란 뜻이에요. 내일 눈뜨고 살아있거든 내일 눈떠서 만나가 새벽에 오거든 계속 살아라는 신호인줄 알고 만나 없으면 죽으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금요일날 이틀치를 주잖아요. 이틀치를. 금요일날 이틀치를 주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너희들은 생존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내가 그 목적으로 그동안 6일 동안 살려줬다는 뜻입니다.
그 만나를 신명기 8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신명기 8장 봅시다. 신명기 8장에서는 그걸 만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표현 해석이 달라져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 뒤의 말이 상당이 모순되죠. 사람은 뭐로 사는게 아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뭡니까?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이 말을 이해 못해요. 인간은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맛있는거 주시면 섬기지 말래도 섬기겠습니다가 인간이에요. 왜? 인간은 자기가 있음이 우선이고 내가 살아있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죽이시면 안됩니다 쪽으로 나오는 거거든요. 주님은 이미 광야에서부터 이미 어느 쪽이냐 하면은 사는게 우선이 아니고 죽을 때 제대로 죽으라는 쪽이에요.
사는 역할을 네가 하면 안되고 하나님이 사는 역할 해야되는데 네가 살아있다 보니까 너 살아 있음이 누구 살아있음을 가려버립니까? 주님 살아있음을 가려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은 예수님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늘 죽이다가 살리죠. 간절하게 만들어요. 죽였다가 살리고 죽였다가 살리고. 죽여버릴까? 에이 살려줄게.
주도권을 살리고 죽이는 주도권을 인간에게 넘겨주지를 않았어요. 이게 바로 광야고 그 광야가 고린도전서에 보면 광야가 오늘날 이 세상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말씀을 주고 사는거거든요. 요한복음 6장에 봐도 그 떡이 뭐냐? 생명의 떡인데 그 떡이 있는 떡이 아니고 바로 내가 아버지의 뜻 내가 하늘의 만나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생명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나를 믿으라가 아니라 너희들이 날마다 나에게 당해봐라 이 말입니다. 믿으라가 아니라 날마다 너는 나에게 종속되어라. 살려주면 사는거고 못살면 못사는거고. 그러니까 자살하면 안돼요. 자살하겠다는 것은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복음 전해도 결국은 자기 주도권은 자기가 성령이 오지 않는 한 거기에 주도권을 넘길 대상이 없어요.
예수 믿어도 내가 믿어야 되고 뭘 해도 내가 해야 되고 내가 알아서 단도리를 잘해야 내가 천당에 가지 안 그러면 누가 나를 도와줄까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믿을 놈은 나 밖에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믿잖아요. 그게 현재 자기 있음을 믿으니까 그게 관계망이잖아요. 내안에 내가 주님의 죽음에 들어가지를 못하는거에요. 나는 자꾸 살고 싶어요.
또 제목하나 나왔다. 왜 자꾸 제목 나오나. ‘살고싶어요’. 살아야 취직하고 살아야 결혼하고 살아야 사랑하고 살아야 자식 낳고 모든 것을 일단은 살아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살아만 다오. 전쟁나간 자기 아들위해 날마다 새벽기도 하거든요. 우리 장모님은 아들 우리 처남되는 아들 월남전 보내고 한번도 밤에 집에서 주무신 적이 없어요. 교회에서 철야했습니다. 월남전 가고 난 뒤에. 내 아들 살게 해달라고.
집요함 참 집요함이에요 ‘집요함’. 남의 자식 살려주고 내 자식 죽으라고 기도한적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는 죽고 자기 백성 살라고 하잖아요. 그런 마음도 아니에요. 내 새끼 내가 살리자. 내 새끼. 그게 어미 된 도리다. 어미 된 도리가 아니고 동물의 도리죠. 동물본성이죠. 그런데 그 장모님을 누가 탓합니까? 완전히 스카이캐슬인데. 스카이캐슬 아닌 사람이 누가 있어요?
전부다 자기 자식 좋은 대학 가면 아 오늘 재수 되게 없다 왜 서울대 왜 들어가. TOP으로.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 봤습니까? 주여 그냥 아는 것만 나오게 아는 것만 안 쓰는 것도 실력이에요 그게. 아는 것만 나오게 해달라고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데. 아는 것만 100점이지. 그저 자기가 공부한대로만 나와라. 출제를 자기가 다 한단 말이죠. 우리 아들 공부한 것만 출제하고 공부 안한거 출제 안하고.
천국 가는 문제는 시험 문제 자체가 없어요. 왜? 쳐봐야 실력이 안됩니다. 율법도 한 문제도 못 푸는 인간이 자기 죄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슨 문제를 풀어서 천당갑니까? 시험쳐서 간다는 단체가 있어요. 제7일 안식교. 시험친다는거에요. 거기 지금 바빠요. 시험준비 한다고 바빠요. 예상문제 끄집어내놓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고 나의 행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불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불신앙의. 나의 있음을 주께서 나의 믿음의 구심점으로 주신 적이 없습니다. 대자연은 없는 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자신은 주님의 표현이다. 나는 주님의 해석이다. 또는 주님의 의미다.
그래서 성도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천사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고귀한 존재.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존재가 성도에요. 왜? 없는 존재니까. 인간이 예상을 하지를 못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이 예상했지만 다른 어떤 인간도 내가 이렇게 달라질 줄은 나도 예상 못했어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손에서 놓을지 어떻게 예상을 했겠습니까?
벽돌있는 고딕건물을 교회라고 여겼지 교회가 아닌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역사가 있는 신학과 교리가 역사의 전통성 때문에 그게 진리인줄 알았지 그게 그거 때문에 바로 비진리라는것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우리 능력입니까? 우리가 예상한거에요? 예상하면 그건 가짜에요. 사람이 흉내내고 모방하는 것은 어떤 예상된 결과를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흉내내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저처럼 하게 되면 나도 기도 잘하는 사람 되지 않겠는가? 저처럼 십일조하면 복 받지 않겠는가? 그런 예상한다는 자체가 거짓선지자의 책임이 아니고 나도 같이 거짓선지자 되는 길로 접어든거에요 이미. 그리고 한통속이 되니까 복음으로 뭐라고 하면 왜 멀쩡한 목사 왜 욕하냐고 저희끼리 이미 한통속이 되었어요. 되어가지고 주님 배척한 것처럼 배척해내고 왜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를 통해 알았잖아요. 사람이 왜 복음전하면 배척합니까?
그거는 역사가 역사를 믿기 때문에 그래요 역사를. 내가 그동안 이 교회 세운다고 얼마나 새벽제단, 갑자기 제단이 나와. 새벽제단 핏방울 눈물방울 다나와. 새벽제단에 엎어져서 하늘나라 확장하고 악마 물러가라고 그렇게 기도한 덕분에 교회가 이렇게 부흥됐는데 어디서 날라온 돌이 와서 교인들 빼갈라고 설치느냐. 사전에 발각됐으니 당회 열어가지고 나가라고 해서 남긴게 나, 내 교회 아닙니까?
내 교회 내 십자가 마을 우리교회. 전부다 앞에 나가 붙잖아요 나. '나'가 없는데 어디서 또 마귀가 했는지 나를 또 집어넣어요. 내 새끼, 내 남편, 내 아내 다 나가 붙어요. 내 교습소. 교회 날라가고 내 교습소. 여러분 시편에 나온 말씀처럼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란 우발적인거에요. 내가 살아왔다 역사를 주장하지 말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만 나타나는 신기한 일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거에요. 그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춥다고 연탄가스 피고 텐트치고 이러지 마시고.
살려주신 분을 생각해서 악착같이 살아야돼요. 간판을 교습소로 바꾸든지 어쨌든지 관계없이 악착같이 살아야돼요. 한끼라고 뺏기지 말고 달달 긁어서 먹고. 몸관리 하시고 살아야돼요. 왜? 이게 복음때문에 죽을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복음 때문에 살아준 것을 복음 허락없이 죽으면 안됩니다. 내 맘대로 함부로 굴리면 안돼요. 해독주스 잘 드시고 변비 없애시고 해야돼요.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애들한테 교육 가르쳐야 돼요. 학원 보내야되지요. 이게 주님의 도리다 하면서 가르쳐줘야 지요. 내게 맡겨준 자식이기 때문에. 팰 때는 패고 달랠 때는 달래고. 이렇게 해야지요. 똑같아요. 왜냐하면 표현이니까. 신앙은 교회 가서 하는 짓거리가 아니라 표현이거든요 ‘표현’. 그리고 생각하세요. 내가 왜 이런 표현을 하는가?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인가? 아니면 내 영광과 내 가치 내가 죽기 싫어서 하는 몸부림인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몸부림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자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만 은연중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님 생각 안하고 이미 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지막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느새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누가 발견한다? 내가 발견할 때 이게 바로 도마의 신앙입니다. 전형적인 옳은 신앙입니다. 나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 이런 족속에 불과했었습니다를 그걸 고칠 생각하지 말고 그걸 안다는 그 자체가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음을 알게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뒷전이고 내 행복 위주였다는 것을 그런 존재로 태어나게 알게하신 것도 주님이시고 이런 주님께서 이 죄인을 주님의 의에 필요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울러 저희들이 감사하고 고마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