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5b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양식
20190405b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양식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에서 제사장의 양식을 백성들이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제사장이 욕심이 많아서 된 게 아니고 그들의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선 인간 중심이 아니고 양식 중심으로 나가는 거예요. 이게 특이한 것이, 양식이란 말이 사람이 아니고 양식으로 본다는 말은 누구한테 잡아먹히란 거예요. 희생의 의미가 담겨있어요.
양식의 특징, 만나의 특징은 있더라도 누가 먹고 날아가 없어지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누구를 살리기 위한 양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죄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천국은 죄를 원치 않아요. 그럼 중간에 누가 등장해서 있는 죄를 없애는 방식이 새롭게 여기에다 부가가 돼야 돼요.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가 없는 곳에는 기쁜 소식, 복음이 의미가 없어요. 죄를 모른다는 것은 복음도 같이 그 현장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나타낼 때는 반드시 복음만 나타나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내 죄를 동반해서 나타내게 돼있어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지적하고 책망을 해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책망과 더불어서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복음의 가치가 너의 존재의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잊는 동시에 감사로 이어지지요. 이걸 말로 하니까 복잡한데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준 거예요. 신명기 8장에 보면 만나를 말씀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신명기 8장 3절에 나옵니다. 사십 년 동안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만나를 떡으로 하게 되면 네 입장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떡을 달라 했지만 하나님은 떡을 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 말씀이 사람들 보기에 마치 양식이 내려오는 것처럼 만나가 내려온 겁니다. 이 만나는 말씀이죠. 그래서 여기서 만나를 주면서 만나를 먹는다가 돼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먹는다고 바꿨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서. 제가 바꾼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꾸어서 설명해준 거예요. 말씀을 먹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물컹물컹한 물체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만나가 끊어진 상태에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겁니다. 만나는 물체니까. 그러면 만나가 말씀이 되는 과정 속에서 여기에 만나를 대신할 다른 사물체가 계속 투입이 돼야 돼요. 만나는 끊어졌으니까 만나를 대체할 다른 투입이 오늘 본문에서 그걸 제사장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제사장의 양식을 언급하면서 초반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제사장의 양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잡수시는 음식,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죠. 이걸 성물이라 하는데 하나님이 먹는 거예요. 하나님이 먹는데 실제로 누가 먹어요? 제사장이 먹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먹는 것과 제사장 먹는 것이 연결되려면 제사장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지시에 종속돼야 돼요.
제사장이 자기 먹고 싶다고 짬뽕 시켜서 될 문제가 아니고 양식 하나하나에다 전부 다 하나님의 음식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맞추어서 제사장은 먹어야 됩니다. 먹게 되면 제사장은 생존이 돼요. 제사장이 생존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물로 제사장이 설치고 다니는 거예요. 설친다는 것보다도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제사장을 하나님처럼 보겠습니까, 같은 인간으로 보겠습니까? 같은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자기와 라이벌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리 제사장이 좋은 일 하지만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고 나오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계속 사건을 유발합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 저는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제사장 섬기겠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 백날 하더라도 막상 사건 하나 탁 터져버리면 하나님 원망하고 제사장은 뒷전이고 우선 내 가족부터 먹고 살겠다고 본색을 드러내죠. 본색을 드러내는 게 하나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본인의 실수가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죄 사함이 등장하려면 반드시 죄가 등장해야 돼요.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인간은 죄를 안 짓습니다. 인간이 죄를 안 짓는 이유가, 항상 인간에게는 선과 악, 두 개의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악을 짓더라도 선을 통해서 얼마든지 악을 덮어버리고 핑계를 댑니다. 악이 다섯 개라면 선을 여섯 개 해서 6-5=1, 나머지 하나 만큼은 역시 선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인간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뉴스를 통해서 계속해서 그렇게 해요. 속초에 어떤 집이 산불로 탔다. 어지간히 나쁜 짓고 많이 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평소 우리의 선악 논리에 의하면 아직도 우리 집이 불에 타지 않고 멀쩡한 것은 그만큼 내가 착하다는 반증이라고 보는 거예요. 본인 스스로 그렇게.
인간의 본심은 어떤 식으로라도 의인으로 자꾸 돌려세우는 그러한 방식은 이건 배웠든 못 배웠든 관계없이 성깔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무기수로 잡힌 험악한 인간이라도 항상 변명거리와 핑계거리는 늘 입에 달고 다닙니다. 어떤 인간도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어요. 나쁜 짓 할 수 있고 실수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나쁜 인간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죄인은 아니라는 그것이 우리 안에 철썩 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옥 가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요. 열심히 살아가는 데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것이 점점 더 나를 의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버리죠. 우리는 늘 생각하지요. 내가 죄 안 지은 지 너무 오래됐다는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군에 가기 전에 잠시 술 먹고 그때 이후로 기억이 없네. 정말 우리는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죄 진 기억이 안 나요.
그래도 가끔은 반성하는 데요. 이러거든요. 그것은 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말 죄라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지금 죽어 마땅함을 아는 게 죄에요. 모든 부동산, 동산, 자식들 다 놔두고 지금 하나님께서 벼락 내려서 나를 산불로 죽인다 할지라도 저는 감사합니다. 이 정도 돼야 죄인이죠.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 이건 아직도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잘난 맛에 사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이 나 잘났습니다, 하는 행동이에요.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려도 미치겠다. 그림을 왜 이렇게 잘 그리지? 찬양해도 왜 소리가 그렇게 잘 나오는지 몰라. 컨디션 괜찮아. 예배 참석하다니 기특하다. 바쁜 중에도. 이런 식으로.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가 감상하면서 흐뭇해하면서 그러니까 아직도 나는 살아야 될 자격이 있고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 거야. 자기 존재감, 자존감 챙기는 데 급급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라고 그런 사람 추천할 사람 있습니까? 제가 1분 만에 그 사람 분노케 합니다.
건드려서 화 안 내는 사람 어디 있어요. 건드리면 화내게 돼있고 화낸다는 말은, 내가 이 정도까지는 욕 얻어먹을 입장 아니라고 뭔가 마지막 꼬불쳐놓은 게 있어요. 딴 건 다 건드려도 좋은데 내 자식만큼은 건드리지 말라. 이런 것 있잖아요. 나는 욕해도 되는데 내 아들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 게 있어요.
이건 누구 개인 이야기지만 어떤 가족이 은퇴해서 말레이시아에 살겠다고 미세먼지도 없고 몸도 아프신데 좋다고 친구와 같이 했는데 당신 아들이 목사니까 여기서 목회하라 해라. 그래놓고 목회하는데 돈 좀 투자해야 되지 않느냐, 아들이 지가 알아서 전도해야지. 이 소리했다고 뿔따구 나서 그 친구가 짐 싸들고 한국에 돌아오게 돼요.
딴 건 다 좋은데 내 자식, 내 아들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게 했습니다. 꽁꽁 숨겨놓은 그것마저 내놓지 아니하면 너는 네 잘난 맛에 살아가는 지옥 가는 인간일 뿐이란 말이죠.
아무리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종교를 언급하고 복음을 언급해도 주여, 이것만큼은 못 놓겠다는 것이 있다면 아직 멀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는 거예요. 신앙이란 고귀한 것이 너한테 준 그것이 고귀하지 네가 갖고 있는 것은 고귀한 게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것도 우리 안에 갖고 있으면 썩어버리는 우리는 타고난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양식을 중심으로 아까 호출한다 했지요. 모든 백성들을 네 양식 위주가 아니고 제사장 양식 위주로 율법의 모델로 삼아서 딱 제시하게 됩니다. 제시하면서 제사장과 다른 백성을 차별화시켜 버려요. 제사장 받는 음식과 일반인이 먹는 음식을 차별화시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제사장이 있다면 제사장이 제사장답게 되는 기능은 제사 기능이에요. 제사 기능을 하지 않으면 제사장이 안 되지요.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사 기능은 죽음의 기능이에요. 그러니까 제사장의 양식이라는 것은 그 과정에 무슨 절차가 있느냐 하면, 참된 억울한 죽음이 있고 난 뒤에 비로소 나타나는 양식이에요. 억울한 죽음에 참여한 자에게만 얻을 수 있는 양식이 제사장 양식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뭐냐?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죄와 만났을 때 이게 억울함이란 사실이 밝혀져요. 세상에 억울함에 두 가지 있잖아요. 하나는 내가 잘났는데 당하는 억울함이 있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억울함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일이 벌어진 억울함이 있어요.
이런 예를 들어야 쉽게 되겠지요. 내가 아침부터 제일 일찍 와서 노동을 했는데 농땡이 부려서 마지막 퇴근 시간에 한 시간만 달랑 일하고 임금 십만 원 받고, 나는 아침부터 새빠지게 일했는데 십만 원 받고. 이게 상대적인 억울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인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늘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 착한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뭐 아무리 월급을 받고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줘도 항상 내가 생각한 목표에 미달돼요. 하나님이 월급 더 주시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가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고 했으면 그 다음 주일에는 적어도 곱빼기 교인들이 와줘야 자기가 덜 억울한 걸 느끼는 거예요. 왜? 투자한 노동이 많기 때문에. 이만큼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이 늘지 않고 줄어든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지옥 갈 인간들의 억울함이에요. 전제가 뭐예요? 나는 대우받아 마땅한 의인이다. 이 억울함.
그에 반해서 어떤 억울함이 있느냐 하면, 본인이 억울한 것도 몰라요. 집에 부도가 나서 짐 싸서 이사 가게 됐다면 애는 부도난 것도 모르고 쫓겨난 것도 모르고 다만 이 동네 살다가 다른 동네로 가서 친구 만난다는 그것뿐이죠. 어른들 하는 일에 휩싸여서 그냥 이동해서 집을 떠났을 뿐이란 말이죠.
그런데 떠나는 아이 붙들고 이웃들이 너 얼마나 억울하겠느냐. 아버지가 억울하게 부도 당했단다. 아버지는 죄가 없는데 다른 사람이 사기 쳐서 그렇게 됐단다. 너 참 억울하지? 그럼 애가 하는 말이, 난 새로운 친구 만날 거예요.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 증거 하라고 지금 이런 상태로 주께서 삶을 살도록 이끄신 겁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입었으니까 호출 받았으니까. 남들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본인은 골프 치고 있어요. 물론 골프 치다가 손에 굳은 살 배기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 어느 쪽의 억울함입니까? 억울한 줄도 모르고 늘 감사하는데 주님 보시기에 복음 안에서 고난이고, 한쪽은 빡세게 입만 떼면 주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항상 입은 튀어나오고. 맨날 울고 있고. 새벽제단 두드려 가면서 콧물은 앞에 다 흘리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다 바쳤잖아요. 더는 못 내놓습니다. 십일조 내놓고 자식 신학교 보내고 다 내놨고 예배당 다 했는데 세상에 우리 사업이 이렇게 꼬라박을 수 있습니까, 이럴 순 없습니다. 맨날 이런 억울함. 데모인지 억울함인지 어디 하늘나라에 민노총 등장했어.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못 놔서 그래요. 성경은 사람 위주가 아니고 양식 위주입니다. 내 위주가 아니고 양식 위주에요. 내 위주가 아니고 네가 누구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주의 복음입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있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양식이고,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양식이 우리거든요.
흔히 우리 보고 양식이래. 남을 살리는 양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내가 양식 먹어야 되는 주인공 역할 했는데 이제는 내가 필요한 주인공은 우리도 몰라요. 주께서 누구와 붙여줄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사람 천국 보내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종으로 부리니까 희생물로 부리니까 저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구원받은 우리를 사용하시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양식으로 희생된 그 절차를 성도도 똑같이 밟아가는 거예요. 그게 제사장입니다. 사람 위주가 아니고 양식 위주가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어렵다 해놓고 하나도 안 어렵다 하는데 진짜 어려워요. 양식이 주어지게 되면 나 예수님의 생명의 떡 먹고 구원받았다. 이건 아니에요. 이거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거는 자기 위주에요. 양식이 주어지게 되면 나가 없어지고 비-개인이 돼요. 또는 비-개별. 내가 개별자, 개인이 아니에요. 누구한테 쓰임 받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관계. 이 말이 쉬워 보이지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쓰임 받는 관계는 모든 계획의 구체적인 것에 있어서 그 시도를 내 쪽에서 하는 것을 주께서 용납을 안 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기를 낳았다. 젖을 먹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엄마 보통 편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주신 아기를 젖 먹이고 잘 키워서 공부시켜서 하나님의 훌륭한 주의 종 만들겠습니다.
그게 잘못인 거예요. 걸핏하면 억울하다고 호소할 것이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미 양식화시켜서 아기를 낳게 하고 아기가 우니까 젖 먹이는 희생을 하라고 젖 먹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은 항상 어떤 일어난 일이 내가 구상하고 내가 설계한 게 아니고 주께서 설계한 대로 진척을 보일 뿐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주어진 상황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 되겠어요? 이미 주의 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데 우리는 그 벨트에 말려든 거예요. 어떤 노동자가 벨트에 말려 죽은 사람이 있지요. 우리는 돌아가는 화력발전소 벨트에 말려든 거예요.
어렵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쉽게 생각하면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자기 일 없어요. 심지어 이렇게 해요. 나는 내 일을 버렸다 했어요. 내 일을 버렸다 해놓고 천막 만들고 있단 말이죠.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가 세상사는 버릇이 항상 시작을 내가 시작할 때만 의미가 생긴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시작하고. 내가 시작하게 되면 그 결과도 내가 성취됐는지 측정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양식으로 말미암아 비-개인이 되려면 양식은 뭐가 되느냐 하면, 교체와 교환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양식을 주신 분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냈다면 그 과정에서 누가 부정돼야 돼요? 내가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부정돼야 되겠지요. 부정될 때 새로이 신자가 된 이 사람이 나를 쳐다봐야 되겠어요, 주님을 쳐다봐야 됩니까? 주님을 쳐다보도록 해야 주의 일이 돼요. 인간은 인간을 구원 못하니까. 죄인이 무슨 남을 구원해요. 주님만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가 있었지요. 거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가게 됩니다. 주께서 보낸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보면서 주께서 아미 당신을 걷게 하셨습니다, 낫게 하셨습니다, 라고 할 때 그걸 쉬운 말로 주의 이름이라 해요. 주께서 이미 당신을 성도라고 했습니다, 라고 통보하는 순간 그 사람은 걷게 된 거예요.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냅니다. 만약에 거기서 베드로가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그 사람이 안 걸었으면 구원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문제 간단합니다. 문제 되게 쉬운데 둘 중에 하난데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냥 앉은뱅이로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주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주의 능력을 다시 재확인하는 그러한 경우들을 주께서는 성도와 성도의 만남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깨닫게 하는 거예요. 추가적인 선물을 주는 게 아니고 깨닫게 하는 거예요. 네가 누리고 있는 형편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환경인지, 네가 좋아하는 출세에 좋은 환경이 아니고 여전히 너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여전히 너를 하나님 백성으로 다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그런 입장에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산림청장이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느냐? 내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골프 좋아하고 바둑 좋아하고 낚시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그 사람은 출근도장 찍고는 맨날 골프 치고 놀러다닙니다. 예를 들어서. 그런데 강원도에 산불 나서 양복 벗고 공무원들 입는 노란 작업복입지요. 열심히 일하는 티내려고 헬기 타고 산불현장에 나타났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뭘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낚시 광이고 골프광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산림청장 값을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재주가 지옥 가는 것 내 무덤 파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개입하고 관여하면 졸지에 남을 살리는 양식으로 변한다니까요. 내가 했다면 그건 신자 아니죠. 누가 한 겁니까? 주께서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아느냐? 성도기 때문에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은 그걸 설명해도 몰라요. 다른 보기엔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 진담인 줄 몰라요. 성도는 진짜 진담인데.
아무 쓸모없는 인간으로 쓸모없지요. 왜? 지밖에 모르는데 무슨 쓸모 있겠어요? 아무 쓸모없는 인간으로 남을 구원하는 데 쓰였다면 그 시작부터 계획부터 과정까지 전부 다 누구의 작품이에요? 주님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럼 누가 은혜 받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은혜 받아요, 한 마디 했던 본인이 은혜 받아요? 본인이 은혜 받는 거예요.
갑자기 없던 본인이 은혜 받으면서 뭘 아느냐? 본인이 그동안 몰랐던 죄를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죄 용서가 있지요. 죄 용서가 내 자식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한 2초 동안 그렇게 아는 거예요.
살아온 것만 해도…, 무슨 욕심을 부리면서 새벽제단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면서 철야기도하면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그게 죄인 줄 몰랐지요. 목돈으로 헌금한 게 죄인 줄 몰랐고 남한테 전도해서 교회 오라고 한 그게 죄인 줄 몰랐어요. 전부 다 죄 아닌 게 없어요. 내가 시작한 일이거든요. 자식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 그 소리도 죄인 줄 몰랐던 거예요.
내가 아무리 꼬셔봐야 한 사람도 구원 못합니다. 그리고 성도한테는 태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게으름뱅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침 열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배부르다고 잠 한숨 자고 오후 세시에 점심 먹고, 저녁에 운동하고 열시에 드라마 보고 난 뒤에 그냥 자요. 그것 성도 되게 부지런한 거예요. 무지무지 부지런한 거예요. 주께서 그걸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지는 천당 갔다고 우기니 이런 느긋함과 뻔뻔한 사람 봤습니까? 그거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얼마 후에 집에서 쫓겨나고 대출 못 갚았고 나중에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순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장례식 때 복음을 아는 목사가 이렇게 하지요. 태어나면서부터 게으름뱅이로 태어난 것이 주의 일을 위함이라. 이런 식으로. 그렇게 설교할 수 있다면 목사가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그 사람 평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평하는 겁니다. 사람이 부지런하다고요? 부지런함의 기준이 뭡니까?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는 게 부지런한 거예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게 부지런한 겁니까? 새벽 네 시,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것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인간이 아직도 선과 악을 못 벗어난 그 잘남을 못 버리고 그 미련을 못 버린 거예요.
이러면 그건 남의 양식이 될 수 없어요. 주님의 다 깨어진 그 양식과 동일한 질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걸 포기했어요. 그래 저주받을게. 이게 주님의 양식이거든요. 주님의 양식 안에는 저주가 들어있어요. 나는 저주받을만하다. 이게 양식다운 거예요. 나는 남보다 더 잘 살아야지, 더 승진해야지. 이게 아니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없어요. 나는 지금 저주받는다 해도 지옥 간다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성도의 본래의 자세에요. 이게 없으니까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제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더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편의점에 가서 보름달 빵을 훔쳤을 때 현장에서 잡혔어요. 왜 그런 짓을 했냐 하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것이 형량 감경하는데 도움 안 돼요. 이것 되바라졌다고 판사가 미워서 3년 때릴 걸 5년 때립니다. 억울하지 않느냐? 천만의 말씀. 5년 치게 한 것도 주의 뜻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나한테는 선과 악의 논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주께서 보름달이란 빵을 훔치는 계기를 저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만약에 성령을 안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빵 값을 돌려드리겠다고 나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냐 하면, 비록 악을 행했지만 그 사람이 행했던 선이 악을 이김으로써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교회 다니는 참 착한 학생이라고 평 받았을 거예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모습은 남들 보기엔 욕 얻어먹을 죄지만 그것을 주의 일로 생각해서 오히려 감사의 계기로 삼는다는 것, 그런 발상이 생긴다는 것.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양식 안에는 주님이 들어오는 순간 나와 동거가 되고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일을 시키지 않잖아요. 주께서 죄인을 가지고 일하지 죄인에게 네가 앞장서서 일하라 하진 않잖아요. 나를 잃어버릴 계기가 되기 위해서.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의 일을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20년, 30년, 50년 사는 것은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겁니다.
왜 이렇게 제사장을 언급하느냐? 제사장이 죽음과 관련된 이 일이 신약에 오게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로 구석구석 확산이 돼버려요. 확대가 됩니다. 옛날 구약의 제사장은 제사장 가족만 먹는 음식과 일반인이 먹는 음식을 구분했잖아요. 그것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모두 제사장이 돼요.
제사장이 되면서 그 다음부터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모든 삶이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내 양식이 아니고 주님의 양식 되게 하는 그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재료가 돼요. 호미로 밭의 잡초를 뽑는 그것도 주의 양식에 포함되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됐으면 교회 일만 찬송 부르고 예배 참석하고 주의 일이 끝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이라고 하는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나의 죄를 깨닫게 하는 그 일상 전체가 주께서 다른 사람,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한 제사장적 기능의 일부로 사건을 유발시켜서 우리를 만나는 사람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도가 하는 일이 복음과 무관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레위기 22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에게 온전히 드려야 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제사장이 핍박을 받지요. 제사장에게 십일조 안 하고 그래서 그들이 흩어지게 돼요.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백성들은 믿음이 없지요. 믿음이 없다는 말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단 뜻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이 귀한 줄 모르고 자기 생존만 급급한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그들은 언약을 잊었도다. 언약을 잊은 것을 너희들은 언약이 없는 여호와, 다른 신을 섬기는 거예요. 여호와든 신이 되던 언약이 빠져버리면 다른 신이 되는 겁니다. 언약을 챙기려면 제사장의 희생을 염두에 둬야 되는데 제사장의 희생, 아까 이야기한 억울함, 제사장 안에 있는 주님의 희생과 억울함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죄인을 의인 만들기 위해서 대신 희생한다는 그 정신이 없고 내 것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세상으로 퍼진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에게 가서 내 양식 돌려줘, 이렇게 해야 됩니까? 아니면 소위 자기밖에 모르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등장한 제사장도 이미 물 건너가고 자기 살 궁리 찾는 입장에서 사사기나 룻기에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다시 말해서 언약을 모르는 이 이스라엘 속에서 누가 등장하겠어요? 언약을 아는 이방여인이라든지 희생자가 등장하겠지요.
그러니까 제사장이라는 형식화된 종교 틀에서 알맹이가 쏙 빠지면서 제사장이 갖고 있던 죽음과 관련된 것이 희생과 억울함과 관련된 일이 실제로는 일반인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의한 희생자로 등장한 자로 등장했으니 그게 룻기에선 모압여인 룻, 그리고 나오미, 사사기에서는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상에선 한나, 그리고 사무엘.
구약에서 신약까지 이어지면서 예레미야, 이사야 계속해서 고난 받는 그런 모습들이 등장하지요. 엘리야, 엘리사 그 사람들 속에 제사장 양식적인 정신이 그 안에 장착돼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억울한 죽음을 그 안에 미리 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신약에선 누구 차례겠어요? 저와 여러분 차례지요.
강원도 산불 났는데 안타깝지 않느냐? 전혀, never. 왜냐하면 욥기에 보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간 자도 하나님이다. 평소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가스 불도 안 틀었는데 집이 오래 돼서 방전되어 홀랑 불타고 자기 집만 날아가면 괜찮은데 윗집, 아랫집 다 물어줘야 될 때 노후대책으로 연금 타던 것 다 토해낼 때 억울하십니까? 지금이라도 주께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이 계십니다.
왜 그렇게 안 했습니까? 그거는 조작된 희생자거든요. 뭔가 멋있어 보이는 희생 있잖아요. 에티오피아에 선교사로 간다든지 소말리아에 선교사로 죽으면 죽으리라. 이거는 건성으로 보이는 희생이잖아요. 가짜지요. 지금 멀쩡히 한국 땅에 잘 살고 있으면 이게 희생인데 따로이 뭔가 소설을 쓰고 있는 거예요.
희생이라도 이왕이면 멋있는 희생. 자꾸 그런 걸 염두에 둔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났다는 것을 아직도 포기 못하고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밥 먹고 너무 운동 안 해서 똥배 나온 희생. 그 희생은 왜 생각 안 해요? 춥다고 안 나오고 미세먼지라서 안 나오고. 운동 안 한지 몇 개월 돼서 갑자기 나오는 이것, 이게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임신 몇 개월도 아니고.
왜 사람들은 자기 잘남을 유지해야 천당 간다고 그러한 망상들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율법으로 말씀으로, 아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잖아요. 말씀으로 깁스해야 돼요. 말씀 안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됩니다.
지구가 이렇게 있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번개, 지진 모든 것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 다른 말로 언약이거든요. 언약 완성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이죠. 그럼 어떤 집에 있다가 벼락 맞았다. 이건 어디서 온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신약성경 찾아봐야 돼요.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고린도전서 3장 21절부터 23절까지 읽어보세요. 사도 바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아멘. 여기서 개인이 아니고 비-개인이 나와요. 너희, 집단이 나와요. 개인의 나라는 지옥 갑니다. 아까 그 부자처럼 지옥 가서도 개인 것만 챙기고 있어요. 그러나 천국은 중간에 개인이 없어졌어요. 뭐냐 하면, 개인에서 하나님의 양식으로 달라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제사장의 죽음 속에서 제사장은 날마다 자기를 죽여야 되니까. 내가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나에게 율법에 주어진 이 일을 제사장이 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에게 양식을 제공해야 된다는 것이 레위기 22장 이야기거든요.
이게 어디로 이어졌다 했습니까? 오늘날 신약 성도에게 그대로 주어졌잖아요. 개인이 생존하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성도의 모습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번개나 지진이든 산불이든 뭐든 간에 다 누구의 것이다? 다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뭘 자랑하지 말라 합니까?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 남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못 사느냐, 그렇게 의식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꾸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이 죽어버렸는데 비교할 게 뭐가 있다고 남과 비교합니까.
제가 어디서 그런 강의했는데 잊어버렸어요. 이런 이야기했지요. 악마가 와서 거래하자는 거예요. 네가 내 말만 들으면 네 소원 이뤄줄게. 이렇게 할 때 우리가 그 악마와 거래할 이유가 없는 게 내놓을 목숨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목숨만 살려 달라 하는데 이미 목숨이 없는데 저쪽에서 뭘 주면 내 쪽에서 뭘 내놔야 되는데 내놓을 목숨이란 게 없어요. 이미 죄 지은 인간은 죽은 인간인데 죄밖에 내놓을 게 없는데 죄는 악마가 안 받잖아요. 내놓을 게 죄밖에 없는데 뭘 거래해요, 뭘 교환합니까?
그러니까 악마가 와도 입맛이 없는 거예요. 재미가 없어요. 주고받고, 네가 이렇게 하면 실익이 있고 이익 있다고 하는데 이익이고 실익이고 내놓을 게 없는데 뭐요.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의 것인데, 그리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붙잡을 수가 없어요. 주의 것의 특징은 뭐냐? 소유대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붙잡을 주체가 없는데 뭘 붙잡고 있어요? 그냥 주의 것만 있어요.
집에 택배가 열 개 왔는데 뜯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럼 집에 들어가면 택배가 열 개가 나와 있는 거예요. 전부 다 주의 것이에요. 내 몸도 주의 것이고 내 건강도 내 자식도 전부 다 주의 것인데 뭘 뜯어봐요. 다만 주께서 만나처럼 주신 것은 만나 자체가 양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장하고 예수님처럼 제2, 제3의 예수님처럼 이제는 남을 구원하는데 주님의 억울함을 담고 희생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는 거예요. 희생하라 하니까 또 선교사 생각하고 하는데 그 희생이 아니고 내 의를 생각하지 않는 데서 오는 희생, 나는 잘난 것도 없고 요구할 권리도 없고 더 살려 달라고 외칠 입장도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그 희생 말이에요.
그냥 주시는 것 염치없지만 뻔뻔스럽지만 잘 받아쓰겠습니다, 하는 그런 자세가 돼야 돼요. 사람이 선악과 있으면 자기 잘못한 게 있으면 벌 받을까 벌벌 떨고요, 좀 잘한 게 있으면 좋은 일 생각하다 교만해서 까불어서 안 돼요. 선하면 까불어서 안 되고 좀 죄 지었다 싶으면 낙담해서 안 되고. 악마가 주는 작은 북에 같이 춤추고 있어요.
맨날 하는 일이 자기 점검이에요. 나는 오늘도 얼마나 가치가, 지가 주식입니까? 오늘 얼마나 주식 값 올랐는지 보자. 맨날 내 가치는, 내 훌륭함은, 나의 못남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나의 가치를 의미를 더 높여줄까. 하는 일이 맨날 그것 하면서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진 그 영역, 그게 바로 지옥 아닙니까.
실컷 고생하고 죽어서 또 고생하고. 바보도 아니고. 진짜 천하에 바보에요, 불신자들이. 혼자 똑똑하다고 학위가 세 개 있고 유학 갔다 오고 언어도 세 개, 네 개, 뭐 사우디 말하지요, 영어 하지요, 한국말하지요, 몇 개해도 백날 해봤자 관심사가, 나 너한테 기 안 죽는다는 오기만 남아있다면 희생이 아니고 남을 오히려 희생시킬 사람밖에 안 돼요.
우리 자신이 우릴 키울 생각하지 마시고 못돼먹은 성질머리 있더라도 이것마저 주께서 다 필요에 의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이 주의 것이니까 세상 전부가, 주께서 필요에 의해서 이렇게 만드신 것을 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러면 있던 마귀, 바이바이 하고 가버립니다.
끝으로 당부합니다. 절대로 누구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남한테 희생하고 봉사 이외에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게 물건 살 때 악착같이 아끼는 것, 그것 봉사입니다. 왜냐하면 괜히 했다가 인간 버리거든요. 저 사람 돈 좋아하게 만들면 안 되거든요. 악착같이 아껴서 몇 푼이라고 긁어내는 것, 왜 그렇게 합니까? 당신 인간 만들기 위해서 그래. 항상 상대방을 좋게 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우리는 주의 양식이 돼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위신과 가치와 의미를 포기하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