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5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양식
20190405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양식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2장 3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사장의 지시에 의해서 성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려요. 인간이 하나님께서 성물을 드린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일단 두 가지라면, 첫째, 하나님을 그린다. 하나님의 물건을 대한다.
하나님을 그린다와 하나님의 물건을 대한다, 어느 편이 인간들에게 기본적으로 원하는 바냐 하면, 하나님을 보고서 믿고 싶은 거예요. 그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물건을 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은 모르겠고 하나님이 관여하는 어떤 사물이나 물체나 물건을 조물딱거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살았다는 소식이 왔을 때 어머니가 이것이 아버지의 물건이고 아버지의 손수건이고, 이게 자식들에게 좋겠어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 확실하겠습니까? 아버지 얼굴을 직접 보는 게 확실하겠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서(그걸 성화라 합니다) 보여줄 때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마음속에 두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종교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겁니다. 자태를 그리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는 쪽을 선호하고, 물건을 대하는 것보다 그리는 것을 더 확실하게 여기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그리고 싶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도 같이 존재해서 상대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이런 식으로요.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나오지요.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요.
그런데 하나님을 물건으로 대하게 되면, 하나님의 손수건, 하나님의 바짓가랑이,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걸 대하면 이게 하나에 찬송 책처럼 밖에 안 되거든요. 얼굴은 못 보지만 물건이라도 만져서 약간은 더듬어 가는 식으로 하나님을 구성해보자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직접 안 나타나시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 만나면 죽게 돼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발생하는 그런 신체를 아담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공식 하나 적어보겠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이다. 이 공식입니다. 국무총리든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 새로 당선되든 강원도 고성에 산불 나서 집을 날리니 마니 상관없이 자기 펜션이 멀쩡하든 간에 죄가 있으면 죽은 자에요. 죽은 자에게는 산불 나고 화장하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시집가고 죽은 자가 장가가고 죽은 자가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죽은 자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자에요. 죄가 있으니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너무나 명확한 공식이에요. 이 공식이.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죄 있다 해놓고 산 사람으로 행세하는 그 뻔뻔스러움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한들 뭐합니까? 성경에 기본도 안 됐는데.
기본은 뭐냐 하면, 죄가 있는 자는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지금 지위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가정주부든 집에 백수로 노는 사람이든 그건 무조건 죽은 자에요.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었다 했잖아요.
이게 논리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현실에 실감이 안 나서 그래요.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산 자라고 계속해서 자기가 우기고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왕 살아 있는 인간, 더 가치 있게 빛내봐라. 이런 식으로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부추기니까 자기가 마치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착각들을 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죄가 있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에요. 놀러가든 집에서 잠을 자든 죽은 자로 잠을 자고 놀러가도 죽은 자로 놀러가요. 우리 상식으로는 죽은 자는 놀러 못 가고 죽은 자는 축구도 못한다 하지만 아니에요. 얼마든지 죽은 자도 국회의원 나갈 수 있고 보궐선거에 당선할 수도 있고 0.1%에 들어갈 수도 있고, 얼마든지 공무원시험에 지원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남아 있는 이상은 그 사람은 무조건 죽은 자에요. 그래서 확실한 공식으로부터 확실한 것을 뽑아내야 됩니다. 모호한 데서부터 뽑아내면 안 돼요. 확실한 데서 확실한 걸 뽑아내게 되면, 인간이 하는 일은 뭐냐? 하루 온 종일, 평생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지옥 만들기 하는 거예요. 미국 유학 갔다 왔는데, 지옥.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는데 그것도 지옥 만들기.
왜냐하면 나 혼자 사는 동네가 지옥이에요.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잠을 자고 울고불고 나 자신의 행복, 내 가족의 행복, 내 직장의 번창, 내 교회의 부흥, 이게 전부 다 지옥이에요. 천국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천국이에요. 지옥은 갈수록 내가 더욱 집요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는 게 지옥입니다.
취직해서 뭐하고 있나? 열심히 직장생활 잘합니다. 그게 뭐냐? 내가 하는 재주는 뭐냐 하면, 지옥 만드는 재주 외에는 인간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자가 아기 낳고 젖을 줬다. 이게 나쁘냐? 그게 바로 지옥 만드는 행세에요. 지옥 만드는 모습이에요.
죄가 있는 것은 무조건 죽은 자요, 심판 저주받을 자요, 그 죄가 있는 사람이 하는 그것은 천국 만들기가 아니고, 천국 만들기는 주님이 하시고요, 인간이 하는 것은 지옥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열심히 연구하고 난 뒤에 쉬는 시간에 배 타고 도전한다고 노 열심히 젓고 지옥 가는 겁니다.
주특기 무엇입니까? 지옥 잘 만듭니다. 어떻게 만듭니까? 나에게 의미를 둡니다. 나에게만 모든 의미가 쏠리도록 그 일을 참 잘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들였는데 우리 집안은 이러니까 너는 제사 제 때하고, 제사는 일 년에 열두 번밖에 안 되니까 잘하고 명절에 친척들 잘 섬기고. 그러면 되바라진 며느리가, “그래서요?” “그러면 우리 가문은 빛나지.” “어머니,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모든 의미가 나에게 쏠린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지옥은 나로 인하여 행복을 얻고 나뿐인 세계, 나만의 세계.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재주는 지옥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 재주가 없어요. 그런 인간이 하나님 보고 싶어서 하나님을 그리고 싶은 거예요. 성화라 하지요. 거룩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 레위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이게 어디서 낯짝을 나한테 들이대, 죽어. 그래서 얼굴이라는 것은 하나님 만난 모세도 하나님을 얼굴을 못 봤어요. 뒤로 주님께서 지나가도록 등을 돌려야 돼요. 얼굴을 보면 안 돼요. 죽어요. 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하나님께선 죄가 있는 인간은 백성 만들기 위해서 그 죄를 없애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 일을 하려면 먼저 우리에게 죄가 있고 이 죄가 우리 몸을 통해서 날마다 발산되고 있음을 인정해줘야 됩니다. 그리고 발산되는 그 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계속 열심히 추진해 나가는 거예요.
어떤 분의 메일에 답장을 이렇게 했어요. 지옥 가는 이 세상 사람들 가련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됩니다. 왜? 실컷 고생하는 데 그 고생이 지옥 가려고 고생하는 거예요. 아침 여섯 시에 출근해서 열 시에 퇴근하는 데 그 모든 일이 뭐냐?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 힘들게 살아가면서 그 결과는 또 힘들게 지옥 가야 돼요. 살아서도 낙을 못 보고 죽어서도 낙을 못 보고. 인간의 선택지는 오직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지옥 가게 하는 그 행위 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요, 하여튼. 알뜰하게 살고 가계부 쓰고 쿠폰 다 모으고 뭔가 열심히 사는데 지옥이에요. 이 땅에 열심히 산다고 낙도 못 누리고 죽어서도 지옥 가도 낙도 못 누리고. 바보 아니에요? 바보 등신 같아요. 지옥 가는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문제는 소위 복음을 안다는 신자가 그들을 부러워한다는 거예요. 그 딴 걸 왜 부러워합니까? 지옥 가는 게 그렇게 부러워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방향을 틀어야 되지 않습니까? 방향을 틀어야지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방향 틀어야 돼요. 그런데 방향 틀어서 천국 간다는 객관적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에 희한한 버스가 있는데 그 버스는 빈 차에요. 운전사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고, 천사가 버스 운전하면서 어떤 사람을 태우느냐 하면, 천국 갈 사람들만 태우는 버스를 하나님이 운행한다고 봅시다. 버스 번호가 1004번이에요. 천사가 운전하니까.
거기에는 귀신만 태우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만 태우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걸 아는 사람들, 그 사람은 귀신같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만 모집해서 버스에 태워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서 이걸 이렇게 해요. 부르심을 입어서. 네가 성도라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호출이죠. 초청이란 말을 해도 되는데 호출이란 말이 더 적당합니다. 호출한 거예요. 이제부터 너의 일은 없고 순전히 나의 일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는 나에게로 호출당해야 되는데 호출할 때 너의 신분과 위상이 달라져야 돼요. 그 달라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바로 레위기 22장에서 제사장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제 구약과 신약 고린도전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어렴풋이 아시게 될 거예요.
구약의 제사장이 왜 있느냐? 신약의 성도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신약의 제사장들은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에요. 그 제사장들의 복장이라든지 그들이 해야 될 처신 등은 그들이 정한 게 아닙니다. 자기 몸 편한 대로 한 게 아니고 율법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냥 율법에 휘감겨있다고 보시면 돼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율법의 깁스. 깁스가 딱딱하잖아요. 석고니까. 그러면 뼈에 완고한 율법이 둘러쳐있는 거예요. 율법 안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법 안의 존재에요. 그러면 깁스와 뼈 근육 사이에 보호대가 있겠지요.
율법과 죄인인 제사장 사이에 뭐가 오고가느냐 하면, 바로 죄가 있는 죄를 없애는 역할과 기능이 그 사이에 교류되고 그 사이에 연결돼있습니다. 율법과 제사장 사이에 죄가 있는 제사장을 죄 없이 하는 각가지 장치가 있어요. 장치, 그리고 재료들, 물체들, 사물들이 있어요. 그게 오늘 본문 핵심이 뭐냐 하면, 양식이라는 겁니다.
구약은 율법의 깁스라 했는데 신약 성도는 무엇에 둘러쳐있느냐 하면, 십자가에 둘러쳐있어요. 십자가는 무엇의 완성일까요?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그러면 구약의 제사장이 율법이 있음으로써 제사장은 거룩이 항상 보존된다면 그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안에 성도가 들어있다면, 죄 용서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 십자가의 고유 기능과 역할이 성도를 통해서 발산하게 돼있어요.
깁스는 팔이나 다리만 있는데 온 전신을 다 집어넣는 MRI자기공명영상장치 있잖아요. 선반에 누워서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사진 찍히잖아요. 그 전체를 십자가로 보게 되면 죄 많은 우리가 십자가 안에 들어갔다 나오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죄 용서받았지만, 그 과정이 중요해요.
그 과정이 뭐냐 하면, 내가 사라지고 주님의 일이 우리에게 덮치게 돼있어요. 결과적으론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됐지만 과정에서는 뭐가 없어지냐 하면, 그 동안 우리가 지옥 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뭐냐 하면, 주님의 나라가 돼야 되는데 우리는 죽어서도 누구 나라 된다? 내 나라 되는 걸 고집했거든요.
왜냐하면 이 땅에서 하는 짓거리가 오직 나만 챙기는 것으로 줄곧 일관되게 한 시도 쉬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해요. 오직 나를 위해서 계속 나만을 위해서 우리 가정, 내 가족, 하여튼 나와 관련된 모든 것, 내 나라, 내 민족, 나만 위해서 살았던 그 습관, 그 사고방식이 그게 바로 지옥이라 했잖아요. 지옥은 주님이 안 계시고 자기만 덜렁 남아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아주 잘 나와 있어요.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는데 부자를 유념해서 봐야 돼요. 부자는 지옥 갔을 때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여주는지 잘 봐야 돼요. 부자를 보게 되면 부자가 죽기 전에 하던 행동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울산바닥에서 하던 행동이 그대로 간다면 지옥 갑니다. 왜? 나를 위해서 하는 나만 생각하고 내 행복만 생각한다면 그게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게 지옥이에요. 등신같이 아직 사태파악을 못한 겁니다.
천국을 보내줄 분을 사람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깁스라면 결국 나의 태도나 나의 투쟁보다도 자기공명장치, 십자가에 둘러쳐있어야 돼요. 내가 생각한 나쁜 짓이 아니고 내 존재 자체가 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는 이상은 내 위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본성으로 완전무장 돼있다는 인지해야 돼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다는 에베소서 1장 7절 말씀이 유효하거든요.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은 자를 변호해야 됩니까, 은혜 주신 분을 변호해야 돼요? 어느 쪽입니까? 주신 분을 변호해야 되는데 우리는 너무나 자기 위주로 살다보니까 같은 동질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변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줬는데 숙제를 안 했어요. 그러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준 이유가 성적향상을 위해서 나중에 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와도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기잖아요. 그것을 다 감안해서 숙제를 내줬는데 학생들이 피곤하다고 숙제를 안 해버렸어요. 그러면 학생들이 선생님 마음을 이해한다면 선생님 편을 들어야 돼요, 자기 친구 편을 들어야 돼요? 선생님 편들어야 마땅하단 말이죠.
그런데 애들은 자기 친구 편드는 거예요. 왜? 자기와 동질한 의식 때문에.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줬으면 인간은 이미 은혜를 받았고, 다른 말로 바꾸면 혜택을 입었단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주무실 때 잠잔다, 잠잔다 해서 잠 오지 않아요. 딴 생각하다가 아침 돼버렸어요. 그러면 그동안 누가 잠재운 거예요? 하나님이 하셨잖아요.
우리는 늘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혜택주신 주님 생각 안 하고 혜택 받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할 생각부터 먼저 하고 있어요. 은혜를 깡그리 모독하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기겠다고 한단 말이죠.
혜택을 입었으면 이 혜택을 누구로부터 공급받았지, 누가 거저 계속 주시는 거야, 라고 그 관계를 생각해야 될 텐데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내 것으로 내가 원하는 내 인생 해보겠다. 전부 다 내가 들어가요. 은혜가 끊어진 상태니까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교회 한 번 나오세요, 하면 바빠서.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지금 바쁘다는 것은 몸이 안 아프다는 뜻이고, 몸이 아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다는 말 아닙니까. 정말 주시면 도대체 이 건강이 누구한테 왔지, 라고 교회 와서 나한테 어떤 절차에 의해서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밥 먹고 살고 은혜를 주느냐, 그 절차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되고 찬양해야 되는데 바쁘데.
주신 분은 깡그리 모독하고 지는 자기만 고귀하데. 자기만 고귀하고 지 새끼만 고귀하고 자기 집만 고귀하고 자기 부동산, 자기 통장잔고, 재산만 귀하다는 거예요. 자기 가치, 자기 의미만 귀하다는. 천국 갈 생각 안 하고 자꾸 지옥 만드는 일에 아주 혼신의 노력을 다해요. 그래놓고 또 피곤하데, 어깨 아프데. 지옥 만드는 게 피곤해요. 가고자 하는 지옥에 가려하면 악바리처럼 살아야 돼요.
하나님은 오늘 레위기 22장을 통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을 개조하기 전에 그건 결과고 과정으로 철수하는 거예요. 양식으로 호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그릴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 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제시한 양식에다 내가 너희를 호출하겠다.
그 양식은 제사장 양식이에요. 아까 22장 3절에 나오지만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이지만 그것을 누가 놓느냐는 이야기가 레위기 22장의 흐름이고 주제입니다. 그 성물을 쓰레기통에 버릴 일이 아니잖습니까? 누가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누가 먹는가? 제사장 가족만 먹는다.
그런데 제사장 가족에 딸이 있는데 딸이 시집가면 먹을 수 있느냐? 안 된다. 시집가면 제사장 식구가 아니고 남의 식구기 때문에 못 먹는다. 그러면 이혼하고 애 데리고 오면 먹을 수 있느냐? 그럴 때는 먹을 수 있다. 제사장 집에 있는 머슴들, 종들은 먹을 수 있나? 먹을 수 있다. 왜? 제사장과 한 식구니까. 그런 이야기가 쭉 나와요.
또 제사장이 먹을 때 부정 타는 건 못 먹는다. 8절에 보면,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돼있어요. 10절에, “외국인은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며 제사장의 객이나 품꾼은 다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나 제사장이 돈으로 사람을 샀으면 성물을 먹을 수 있다고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레위기 22장에 쭉 나와요.
제가 서론적으로 이야기 안 하고 보게 되면, 옛날에 어떤 민족의 풍습이고 끝. 옛날이야기잖아. 그랬겠지.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돼버려요. 구약과 신약은 연결돼야 됩니다. 연결되는 방법은 히브리서에 보면 나와요. 구약은 작은 모형이다. 그리고 실체는 신약에서 이미 다 드러났다. 이렇게 돼있어요.
히브리서 1장 1절에 보면, 옛날에는 모형으로 선지자들로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에는 아들로 이야기한다 했어요. 이런 걸 설명하려면 참, 복잡한 경우가 있는데 그걸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오늘날은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말은, 선지자란 존재, 선지자라는 어떤 인물, 아들이란 인물로 일한다는 말이 아니고 선지자에서 하나님 쪽에서 뭔가 준 게 있어요. 그게 물건이에요. 제도나 물건이란 말이죠. 형식 같은 거예요.
선지자 눈에 보이고 아들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아들 믿고 옛날 선지자 믿었다. 이러면 안 돼요. 눈에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떤 물건을 주는 거예요. 물건에서 기능이 나온다고요. 작용이 나와요. 여러분 잘 믿어지지요.
여기 레위기에서 제사장 양식을 함부로 먹으면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했거든요. 부정 탄다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사장 양식으로 천국과 지옥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을 레위기 22장 당시에는 제사장의 양식을 통해서 천국은 이런 동네고 지옥은 저런 동네란 것을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호출이지요. 내가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지옥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따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여줘서 천국, 지옥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떤 물체, 물건을 제공한단 말이죠. 모형이니까. 시시해 보이지만 이 물건 함부로 먹으면 저주받아, 부정 타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선지자 얼굴 봐서 뭐 할 건데요? 아이고, 우리 제사장 얼굴이, 키가 몇 센티다. 그것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우린 자꾸 천국과 지옥을 사람 얼굴 보고 가려고 하는데 얼굴 본다고 우리가 천당, 지옥 몰라요. 인물 훤하게 생겼으니까 천국 가는 목사인줄 알아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인물 훤한 목사들, 천사의 탈을 쓰고 꼬신다고. 왜냐하면 인물 좋으면 사람들에 먹어주니까. 목사 인물 너무 잘 생겼다. 거기 가보자. 사도 바울, 인물도 별로고 말도 잘 못하고. 말로 들을 때는 상상했는데 얼굴 보니까 실망했다. 실망스러우라고 사도 바울을 그러한 모양새로 주께서 쓰신 거예요.
사람들 약점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 보니까 내가 되고 싶은 조건들 있잖아요. 그 조건들 고대로 가지고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써먹어요. 그게 취약점인 걸 몰라요. 내가 이렇게 되게 되면 나는 멋있다고 생각하는 데 내 멋있는 것을 저쪽이 가져가고 있네. 그러면 저 사람은 내가 기대하는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내게 없는 결핍된 것을 갖고 있으면 존경의 예우를 표시합니다.
그런데 이건 아까 이야기한 어려운 말로 존재 대 존재로 설명한단 말이죠. 하나님은 아마 너무나 어지실 것이다. 너그럽게 생긴 신이 있어요. 그걸 두 자로 ‘부처’라 합니다. 석굴암 가볼래요? 이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얼굴을 갖고 있어요. 관상학적으로 석가모니는 괜찮은 관상을 갖고 있어요. 귀가 축 늘어져있어요. 추를 달았는지. 얼굴은 하얀데 인자한 얼굴이에요.
우리는 바로 그런 마귀를 우리의 메시아로 구세주로 선호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인물 찾지 말고 지옥이나 천국이나 결정타를 날릴 재료를 찾아라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성경에 율법입니다. 율법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제사장에게 있어서 율법은 깁스, 완전히 둘러쳐버렸어요. 제사장은 인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어떻게 누락 없이 생생하게 율법의 기능이 작용해 나오느냐 이게 관건이에요.
그리고 제사장에게 호출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호출 받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지옥 가는지 어떻게 해서 천국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사장이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경험담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그거는 제사장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의 기준만 제시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 기준은 제사장이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자기 위신 챙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집에 사람을 초청하잖아요. 어떤 가정주부는 자기가 음식을 너무 잘해서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들이나 친척들한테 그게 양식에로의 초청으로 보면 돼요. 그래서 오늘 레위기 22장은 양식에로의 호출이에요. 그 양식은 누구 양식이냐 하면, 제사장을 먹여 살릴래, 말래를 요구하는 거예요.
만약에 백성들이 성물을 주지 아니하면 누가 굶어죽느냐 하면, 제사장이 굶어죽어요. 아이고, 이스라엘 제사장이 굶어죽기야 하겠습니까, 하는데 굶어죽었어요. 왜 그러느냐? 사람은 제사장 위주가 아니고 내 새끼, 내 가족, 내 입, 내 몸 중심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살고 그 다음에 제사장 챙기기.
그런데 그러한 극한 상황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해 만들어버렸어요. 마음 같으면 하나님 일하는 제사장 챙기고 싶고 먼저 우선하고 싶지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 외에 남을 먼저 챙기는 생리적으로 그렇게 태어나질 않았어요. 친구 믿지 마세요. 결국 친구가 사기 칩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 해도 소용없어요. 보증 서달라는 이야기거든요. 술 한 잔 먹으며.
세상에 친구라는 게 없어요. 친구는 내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할 때만 그 순간만 임시적 일방적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 앞에 뭐가 붙어요. ‘내’ 친구에요. 아무리 친구라도 나를 떼어놓고 친구 없습니다. 내 친구입니다.
여자들이 결혼하고 다른 여자 친구한테 자기 남편을 뭐라고 소개합니까? 물론 남편 없을 때 주로 그런 이야기하지만. 내 것이다. 점잖게 이야기한 거예요. 경상도 말로 내끼다. 저 남자 내끼다. 손대지 마라. 만약에 그 현장에 남편이 있으면, 내가 고양이가, 개가?
그래서 남편이 있는데 여자가 다른 사람한테 설음당하면 남편이 지켜보고 있으면 아내가 남편한테 화가 나는 거예요. 왜? 당신의 물건인데 당신 소지품에 남들이 손대는 데 당신은 왜 가만있느냐? 우리 남남이야? 이렇게 놀리다 막 비약되는 거예요. 평소에 네 것인데 왜 간수를 제대로 못하느냐, 이런 뜻이에요.
사물이란 주인의 가치가 확장되는 게 사물이에요. 내 손수건, 내 젓가락, 내 가방. 가방이 저쪽에 있고 내가 여기 있더라도 누가 가방 만지면 나를 만진 게 돼요. 하나님께선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장시키는 거예요. 제사장을 소홀히 하는 것은 곧 누굴 소홀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왜? 제사장을 통해서 율법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 핵심이 뭐냐? 제사장이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럼 제사장이 살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성물이 나오잖아요. 거룩한 물건, 제사장이 먹는 양식이 나온단 말이죠. 양식이 나오면 그 다음부터 백성들은 제사장 양식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내 양식부터 먼저 챙길 것이냐, 아니면 제사장 양식이 우선이냐, 하는 겁니다. 그러한 도전에 직면해 있어요.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느냐 하면, 너는 너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런 식으로 계속 테스트 해나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죄 있는 인간이 죄 있는 인간인 체로 천국에는 못 가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했던 것 다시 해봅시다. 공식에 의하면 죄가 있는 인간은 어떻다 했습니까? 무조건 죽은 자에요. 그리고 인간의 죄는 본인으로 하여금 무조건 지옥 가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옥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세계기 때문에. 나를 위한 세계가 지옥이에요.
이것은 거지 나사로 앞집의 부자가 시범을 제대로 보여줬지요. 세상에서 하던 행세가 그대로 이어져 가는 겁니다. 죽고 나서도. 왜?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살았지요. 죽고 난 뒤에 그 행세가 어디 갑니까? 맨 나를 위해 살아요.
그래서 아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우리가 부러워해선 안 된다.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측은히 여겨야 돼요. 안타까워해야 돼요. “아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남편은 교회 안 다니고 아내만 교회 다니면 남편들이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내가 교회 안 가더라도 네가 가서 날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라. 이게 복음을 안 들어봐서 그래요.
주여, 이런 생각이 지옥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 복음인데 그 남편은 교회 가는 걸 절에 가는 것과 똑같이 취급하는 거예요. 가서 비는 것. 왜? 드라마에 나오는 성당이나 교회는 그런 식이거든요. 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들이 교회에 대해서 뭘 압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가끔 드라마에서 교회 장면이 나오지요. 그때 교인들이 모여서 찬송가 부르는 대목이 나올 거예요. 찬송가 부를 때 취사선택된 가사를 보세요. 거기 죄가 안 들어가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 이야기뿐이에요. 작가가 그런 걸 쓸 때도 전혀 복음을 몰라요.
우리나라 인권위원회에서 숭실대학교에 강력하게 요구했어요. 대학교 직원 뽑을 때 절대로 기독교 신자인지 차별 두지 말고 뽑으라고. 숭실대학에서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취지가 그런데 기독교 신자 안 뽑으면 불교 신자 들어오면 뭐냐? 인권위원회에선 그게 인권이다. 인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성경에 무슨 인권이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개인주의를 인권이라 해요. 개인의 가치는 어떤 것보다 귀하다. 그게 인권주의에요. 그러면 이 땅에서 인권주의가 만들어내면 결국 지옥이잖아요. 그러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은 살아 있으면서 계속 지옥의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나 위주거든요.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누구 위주입니까? 율법의 완성 위주에요. 왜? 제사장이니까. 율법의 깁스, 율법에 칭칭 감겼으니까. 죄가 있는 자는 자체가 죽은 자고 주께선 죽은 자는 천국에 못 넣으니까 율법을 통해서 죄를 없애주는 기능이 계속 발산되어 나왔다는 그 과정을 자기 몸을 통해서 발산해야 되는 그런 위치에 자리에 있는 것이 오늘날 성도란 말이죠.
나만 챙기고 나밖에 모른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피 흘리게 만들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계속 알려주는 그 역할, 기능이 뭐냐? 성도의 기능이거든요.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혼자 살지만 하나님 율법의 완성, 복음에 의해서 성도는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 부르심을 받은 게 뭡니까? 김 대리, 사장님이 부르신다. 이거잖아요. 김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부르시던데. 이게 호출이죠, 호출. 성경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니까 이것도 너무 상투적이라서 이제 의미가 쇠퇴했어요. 그냥 호출한 거예요.
옛날에 허리춤에 차는 것 있지요. 삐삐. 삐삐 치듯이 항상 우리에게는 호출할 기계가 내장돼있다 이 말이죠.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그 과정 속에 내 일은 없어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에요. 내 일은 없어요. 율법 완성의 일이고 복음의 일입니다. 양식에로의 호출.
자, 양식에로의 호출의 의미가 뭐냐 하면, 너 살래, 제사장 살릴래? 이 이야기에요. 네가 양식 필요한 건 아는데 제사장도 양식 필요하다. 어느 양식이 우선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제사장도 그렇지만 나부터 우선이지요, 라고 했을 때
출애굽기 16장을 봅시다. 거기에 광야의 만나 이야기 나오지요. 만나는 땅에서 시작한 양식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온 거예요? 하늘에서 내려왔지요.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남자만 사십 만 되는 이스라엘 집단은 양식을 어디서? 지가 농사 진 게 아니죠. 위에서 내려온 거죠. 위에서 내려와서 그들의 양식을 먹었다면 광야 사십 년을 견뎌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살려준 거예요.
하늘에서 살려준 그들, 그 양식이 레위기 22장에 들어오면 이제는 구체화되는 거예요. 그 내용이. 네가 준 양식이 그때는 드롭프스 같다, 빵 같다, 과자 같다 하지 이제 구체적으로 진도 나가볼까? 그 만나는 누구의 희생 때문에 생긴 만나였음을 제사장을 통해서 희생제사 작업에 종사케 하고 거기서 발생되는 제사장의 양식이란 강조점은 옛날 광야의 만나와 같은 계열인 것을 백성들이 고백해야 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실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시고 난 뒤에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6장 33절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 떡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고 예수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발생된 살과 뼈, 예수님의 살과 떡이 광야의 만나의 완성으로서 제시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는 사람은 레위기 22장의 제사장의 가족이 되는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가족의 되는 겁니다. 그것은 공통된 양식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경쟁적으로 우선돼야 될 양식은 바로 우리가 육체를 위해 먹는 탄수화물, 단백질이 아닙니다. 지방질이 아니에요. 비타민, 오메가3 아닙니다. 우선되는 것은 예님의 떡이에요. 예수님의 하늘의 만나 같은 양식입니다. 그러면 양식은 어떻게 해서 신약까지 이어지는가? 그건 10분 쉬고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