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없는 다윗 190408
20190408a 부산강의 : [시편]18(11편)-다윗 없는 다윗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11편 할 차례지요. 다윗의 시라고 돼있습니다. 시편에서 해석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성도 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와 관련돼있어요. 우리가 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지옥에 왔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 오시지 아니하면 내가 살던 고향 이 동네가 지옥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게 돼요. 지옥에 살던 사람은 이미 천국과 결별된 상태기 때문에 담이 막혀 있어요. 경계선이 쳐져 막혀 있는 상태에요.
그 막혀 있는 상태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22절에 나오지요. 요샌 성경구절이 아슬아슬해요. 맞는 게 이상할 정도로. 23,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부부를 쫓아버렸다. 우리가 굉장히 유념해야 돼요. 함께 못 살겠다는 것, 나가라. get out 꺼지란 말이죠. 나가라. 너는 나와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그런 본질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그러면 여기서 결별이죠. 하나님 계시는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이 결별된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지 얼마나 강한지요, 천사들을 통해서 오늘 길목을 강력하게 차단했습니다. 두로 도는 화염검이란 불붙은 천사들이 못 오도록 지키는 거예요. 이 경계선이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고 극단적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경계선 자체가 움직여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등장한다는 말은 이 차이성, 경계성, 차단성을 끝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흔히 제가 그런 예를 드는데 젊은 남녀가 사귈 때 사귀는 장소가 축대 있는 골목길이어야 돼요. 개 오줌 누는 전봇대 있고, 그리고 분위기는 70년대고 아가씨 집은 옛날 동네쯤에 있어야 돼요. 아가씨는 남자가 싫다는데 작구 남자가 집적대면서 사귀자고 옵니다. 여자가 기어이 싫다고 하니까, 싫다는 말이 뭡니까? 네 영역과 내 영역은 철저하게 차단돼있다. 너와 관계를 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남자 쪽에서 화가 나서 여자를 밀어붙이는데 축대가 왜 필요하냐 하면 축대까지 밀어붙여요. 마치 뽀뽀라도 할 기세로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는 물러설 때가 없으니까 완전히 궁지에 몰리겠지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창세기 3장 23, 24절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의 등장입니다. 네가 신을 찾는다는 자체가 반칙이라는 거예요. 신은 이미 차단했는데 인간 쪽에서는 이 차단을 자기 현실로 집어넣지 않고 탁 트인 것처럼 그러한 망상 속에 있는 거예요.
망상은 주로 누가 많이 하지요? 치매, 보편적으로 정신병자지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망상이 끊이지 않으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망상이에요. 그 망상을 고상한 말로 희망이라 하죠. 희망이 뭐냐? 망상이에요. Just look don’t think 보기만 하라. 생각하지 마라. 인간은 그냥 보는 대로 살 뿐이지 생각은 망상에 속할 뿐입니다. 어떤 생각이든. 내일 해는 내일 돼야 떠요. 그렇잖아요. 내일 뜨는 해를 오늘 당겨서 걱정할 이유가 없단 말이죠.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이는 그게 전부입니다 아침에 거울 보면 보이는 내 모습 그게 전부에요. 그래서 죽음이라든지 신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인간의 망상에 속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뭘 대비하자.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뭘 해야 된다. 이게 전부 다 망상입니다. 정신병자 같은 짓이에요.
이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하나님 거기 계세요. 내가 찾아갈 테니까. 이런 뜻이라고요. 창세기 3장 22절, 23절에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사실을 모르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이라 할 때는 나쁘게 생각하겠어요, 좋게 생각하겠어요? 하나님 자체를 좋은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도 우리한테 사랑 못해줘서 환장하신 분 있잖아요. 마치 어미가 자식을 못 보태줘서 환장한 것처럼 하나님이란 사랑을 못해줘서 더더더 뭐해줄까, 이런 식으로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준비된 신으로 여기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과 강한 대척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밀어붙일 때 경계선, 차단성을 갖고 올 때 차단성이 벽이나 담이라면 그 두께가 있다면 그 두께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나는 너희를 쫓아내었다는 내용물이 그 담 안에 같이 응축돼있겠지요.
남자가 여자를 축대 밑으로 몰아넣을 때에 솜사탕으로 몰아넣습니까? 노래 부르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합니까? 강하게 어깨로 하잖아요. 네가 싫다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너를 포기 안 할 거야, 하는 폭력성을 갖고 있단 말이죠. 큰 폭력은 아니지만 밀어붙일 때 자칫하면 나중에 엎어져서 발착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살짝 밀어붙였는데 정신적 충격 받을 수 있지요. 위협적이란 말이죠.
주님께서 밀어붙이는 그 담에는 창세기 3장 23절, 24절을 절대로 포기한 게 아니고 그걸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차단성을.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하나님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관계에요. 이게 망상인 줄 상상도 못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릴 추방했다는 사실을 애써 안 들은 걸로 여기는 겁니다.
말썽꾸러기 시집간 딸을 친정아버지가 이제는 니가 네 남편과 같이 굶어죽든지 나는 모르겠다. 너 같은 말썽꾸러기는 처음 본다 하고 쫓아냈는데 아이 셋 데리고 살랑살랑 웃으면서 아버지, 하면서 찾아오게 되면 아버지는 안 받아주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날 받아줄 거라는 그건 망상입니다. 아버지는 어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웃도 잘 돌보기 때문에 친 딸인 나를 그냥 배척하진 않을 거야. 지 혼자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했지만 정신병자 네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아담입니다. 옛 아담입니다. 흙으로 만든 아담은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새로운 아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는 동시에 사람은 딱 두 종류가 돼버리죠. 아담에 속한 인간은 창세기 5장에 죽으리라, 죽으리라, 죽어야 되고 새로운 아담은 그 죽음을 극복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고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거예요.
문제는 이게 종교교리냐, 신학에 불과하냐 아니면 현실이냐 이게 문제에요. 이게 하나의 이론이고 우리가 살 궁리를 트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안이고 아이디어라면 이건 또 망상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가 망상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사이좋은 관계라는 그것과 완벽하게 대 충돌이 일어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이 믿음이에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였다는 것이 완전히 구겨지고 부셔져야 돼요. 나는 내 입장에서 하나님 쳐다봤는데 이제 그 입장 자체가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는 뭐냐? 하나님 쪽에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이게 망상 때문에 몰랐던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이 다가오는 거예요.
사람들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교회입니다. 교회가 망상이에요. 주일 좋다고 돼지고기 사 먹는데. 내가 댓글 올려놨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면 주일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살라고. 주일에 교회 가는 재미 말고 천국 가는 재미로. (부러우면 부럽다 하세요.^^) 왜 부럽지 않은 이유는 우린 더 맛있게 먹기 때문에. 우린 맛있는 걸 못 찍어 올려요. 왜? 남들이 시험 들까 싶어서.
좋다는 것은 무엇을 유발하느냐 하면, 네가 나쁘다는 것을 조건 해서 좋은 거예요. 좋다는 소식이 복음이죠. 기쁘다는 것은 너는 그동안 슬픈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비극의 창출자는 너다. 네가 비극의 창출자 되는 겁니다. 왜냐? 아담의 모든 요소가 부분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우리 안에 그대로 다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자 콘에 아이스크림 담잖아요. 우리는 콘이라면 거기다 아담의 모든 죄가 아이스크림으로 그것도 넘치도록 소복이 담기는 거예요. 이것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죄를 담는 그릇에 불과했다. 그걸 로마서 5장과 6장에서는 죄의 종이라고 해요. 죄의 노예라고 돼있는데 그걸 약간 틀어보겠습니다. 죄를 담는 종지기.
성경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종지기죠.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면 우리가 매일같이 내뱉어야 될 고백이 모델로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모든 능력은 나한테 있다, 없다? 나한테는 없다. 그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큰 능력이 함께 있는 결과입니다. 이건 단순한 겸손이 아니에요. 불교 중들이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신나는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더 보탤 수 없는 상관없는 일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쌈 싸먹고 그 모든 일이 내 구원과 전혀 무관한 일이었음을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구원과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해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독한 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구원에 지장이 없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내용물이 좋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 자체가 없어요. 다만 전에는 망상으로 가득 찬 자리가 게워내고 그 망상이 있고 죄가 있던 자리에 주님이 차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게 아니고 죄인이 되신 거예요.
내가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내가 죄 진다고 죄를 아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죄 짓게 되면 죄를 아는 게 아니고 변명만 늘어나게 돼있어요. 변명은 곧 나는 의롭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모순이죠.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자기가 점점 더 의로워지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인간은 고집이 세요.
죄라는 것은 내가 지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게 네 자리라고 지적한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에 가게 되면 우리는 평생 착한 일하고 희생적인 일을 해도 그것이 죄 자체였다는 것, 남을 돌보고 희생하고 남을 사랑하는 자체가 죄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는 자리를 주께서는 죄인이 되심으로서 알려준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어려운 말로 범주라 합니다. 범주는 일시적으로 칸막이 친 거예요. 일군의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여기까지는 그냥 특정 인간이라고 하고 모이면 교회라 하는 거예요. 교회란 자체가 사실은 바깥에 범주 자체기 때문에 범주 벗겨버리면 질적으로 똑같아요. 교회 밖이나 안이나 똑같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라는 범주를 의미를 두는 이유는 구원받지 못해서 그래요. 아직까지 지옥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위로 삼아 교회로 삼아 테두리 치는 거예요. 빨간 벽돌로 고딕 쳐서 그걸 교회라고 우기는 것은 전혀 내가 믿을만한 것이 없기에 내 쪽에서 믿을만한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종교적 열심히 유발된 게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흐름이에요. 쉬운 예로 전류의 흐름이죠.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데 이 경로를 이미 한 차례 다녀가신 분이 게십니다. 예수님께서 없는 길을 텄어요. 길을 길답게 하기 위해서 기다란 파이프에 성령을 흘렸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요단 강 세례 받을 때 남들은 물만 뒤집어썼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뒤집어썼지요. 예수님 자신이 성령의 흐름 따라 가는 첫 번째 모범자로 등장한 겁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사히 모든 과업을 성취하시고 이제는 그 성령의 업무를 자기로부터 자기 백성에게 인수인계하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성령을 보냈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 주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게 되면 자기 백성은 뭐가 돼요? 죄인이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그런 놀라움이 벌어집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죄인인데 길을 잘 텄어. 길은 아까 이야기한 차단성입니다. 철저하게 다른 사람은 외부적인 인간의 힘으로 여기 끼어들 수 없는 강력한 파이프에요. 벽이 두꺼워서.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차단성 안에는 무슨 내용이 응축돼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너희를 추방한다. 아담의 부부를 쫓아낸 거예요. 강력한 의지. 그 다음에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인간이냐? 오지 마라, 이거에요. 내게 오게 한 것은 인간이 아니고 새 인간이죠. 인간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인간이냐, 그러면 글렀다. 끝났어.
그래서 아담 이름 자체로 주님께서 아재 개그를 해요. 원래 아담 이름이 인간인데 아재 개그로 흙이 돼요. 흙이니까 어디로 돌아간다? 무효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만한 권한은 있다는 거예요. 네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흔히 그걸 죽음이라 하는데 흙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죽어서 죽음이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는 죽음의 힘이 거기서 작용하고 있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