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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84강-창 48장 8-13절(복의 핵심)190403-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184강-창 48장 8-13절(복의 핵심)1904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8장 8-13절입니다. 구약성경 77페이지입니다.

창 48:8-13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여기 축복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축복이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한테는 소유의 더함, 현재 내가 가진 것이 더 풍부해짐, 그리고 건강한 내 몸이 더 건강해짐, 이처럼 축복이라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더 필요한 것들을 추가적으로 더 얻어내는 것, 그것을 사람들은 복이라고 생각하지요.

이것은 모든 민족, 특히 우리 고유의 한민족, 단군의 자손에서 복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해 왔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의 개념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이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하지요. 성경에서의 복의 개념과 세상 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정 반대라는 것을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르쳐주지를 않았습니다.

가르쳐주게 되면 교회 안 올까봐서. “여러분이 복 얻고 싶지요? 준비된 복 하나님이 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몰라서 복을 못 받았는데 이제 하나님을 알고부터는 복된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복을 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영업을, 장사를 해왔던 거예요. 줄곧 그렇게 해왔던 겁니다.

반대가 된다는 생각은 감히 못하지요. 자기가 잘되고 자기가 번창하는 것을 복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비단 우리민족뿐 아니고 유대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면 잘된다고 생각하고 기대를 했지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왔을 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그들이 기대하는 복은 저주였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저주가 바로 복이었습니다.

반대로 바뀌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알기 쉽게 간단히 말해서, 교회 올 때 복을 받으려고 와서는 안 되고 저주받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교회 앞에다 “우리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면 필히 저주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플래카드 걸면 어지간히 간이 부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교회에 감히 들어갈 생각을 못하지요. 뒤로 막 꽁무니 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뒤로 꽁무니 뺄 뒷자리가 없어요. 주께서 준비한 저주가 유일한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게 유일한 길이에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주받을만한 자에게 합당한 저주를 주는 것, 그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복 준다는 하나님은 악마가 하나님 탈을 쓴 거예요. 마귀의 일군이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 천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와요.

이것은 신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약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지혜를 끄집어낸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주의 뜻이 왔을 때, 언약이 이 지상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바로 복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뜻대로 펼쳐질 때 더 이상의 복이 없어요. 그게 복의 전부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복의 전부에요.

내가 어떤 뜻을 갖고 있든지 그런 것은 완전히 뭉개버리시고 주의 뜻만 여기에, 내가 있는 여기에 주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복이 되는 겁니다. 야곱에게 꿈에 사다리 타고 내려올 때 야곱에게 약속한 것이 그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계획한 뜻이 다 이루기까지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고집이고 하나님의 열심입니까?

거기 야곱의 뜻 같은 것은 일체 개입하지 못해요. 내 뜻, 물론 있어요. 잘되고 싶어요. 행복 하고 싶어요. 그러나 행복은 곧 저주가 되는 겁니다. 행복을 포기하고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그 현장에 내 행복 말고 주의 뜻만 현장에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이게 바로 복과 언약의 만남이에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복은 뭐냐? 인간인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언약의 세계에 들어가는 진입구를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시는 것, 그게 바로 복입니다. 복을 받을 때 그 복을 받는 당사자가 언약의 나라, 천국이죠, 천국에 들어가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게 돼요. 어떤 인간도 행복을 원하고 진짜 세상적인 복을 원하기 때문에 이런 저주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이것을 다 기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기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뜻의 세계, 언약의 세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복을 받게 되면 비로소 그 언약의 나라,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머리가 잘 돌아가시는 분은 정리가 될 거예요. 아하, 그러면 복은 뭐냐? 복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내 인생의 판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그걸 재편하는 겁니다.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질서체제가 구겨지는 것이고 파괴되는 것이고 깨지는 거예요. 그냥 두지 않고 와장창 접시 깨듯이 깨버리는 겁니다. 깨버리고 다시 새로운 질서로서 정열을 다시 하고 배열을 다시 하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일어나신다면 여러분은 복 받으신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그동안 나의 나됨을 하나님께서 용납지 아니하시고, 나의 나됨을 인정치 아니하시고 그걸 거부해주시고 거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 나라고 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나를 제치고 하나님이 나의 주도권을 쥐고 이 자리에 오게 하시는 것, 그게 복이지요. 내 자리가 주님의 자리로 바뀌어지는 것, 그게 복입니다.

주님만 달랑 오시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속해 있던 그 질서, 그 나라, 그 상황이, 그 영역이 같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복이에요. 네가 살던 식으로 더는 너는 못산다. 그래서 복을 받게 되면 그동안 내가 탈출하지 못했던 나로부터의 탈출이 성사되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더 이상 내 세계,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게 된 것, 내가 장래에 어떻게 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게 복이에요.

보통 어떤 여자가 이혼한 뒤에 재혼하게 되면 축하하는 뜻에서 팔자를 고쳤다 하지요. 성도가 이런 복을 받으면 팔자 고친 겁니다. 내가 나에게 신경 안 써도 새로운 남편이 다 해줘요. 세상에 이런 팔자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신부래요. 주님의 색시라는 겁니다. 그 신랑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떤 사람은 신랑이 오는데 기름준비 못해서 탈락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기름 준비해놨다가 신랑 맞이한 그 다섯 처녀들은 정말 땡잡은 겁니다. 복 받으신 거예요. 자기가 잘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내가 생각하는 내 세계 그대로 해서는 언약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복은 언약을 삽입하는 방식이 복이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언약을 삽입하는 방식이 복입니다.

복을 통해서 매치가 되지 않는 언약을 드디어 그 사람에게 언약이 덮치도록, 복을 통해서 실행케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는가? 언약의 내용은 복을 받게 되는 그 사람의 살아온 형편이 곧 언약의 내용을 미리 보여준 것이 돼요. 새로운 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인생 이렇게 살아온 것을 뒤돌아보니까 벌써부터, 창세전부터 준비된 복에 의해서, 그 스토리에 의해서 인생을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복을 통해서 뒤늦게 파악을 하게 되는 거예요.

아, 복을 새삼스레 받는 것이 아니고 복 받아왔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복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복을 줘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야곱에게, 더 정확하게 해서 야곱언약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걸 우리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창세기 41장 50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온’이라는 지역의 제사장이죠)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므낫세는 고난을 잊어버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첫 번째 아들이 고난을 잊어버린 거예요. 두 번째,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두 아들의 이름이 야곱이 이 땅에 펼칠 야곱언약의 내용이 되는데 그 내용을 고난과 고난 후의 번창,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고난 + 번창, 고난 뒤에 번창이 되는 거예요.

번창한다는 것은 고난이 없는, 고난의 질을 갖지 아니한 사람은 번창의 혜택을 맛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걸 더 쉽게 말하면, 언약의 나라는 천국인데, 번창의 나라인데 그 번창의 나라는 입구가 아주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이에요. 고난이에요. 고난을 겪었던 자들만이 번창. 이렇게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고난에 참여한 자만이 넣어지는 천국의 나라. 그렇게 보시면 돼요.

왜냐하면 천국의 주인인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았으니까.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경험했던 자들, 그들만의 세계, 이게 천국이에요. 이게 언약의 세계입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복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이 제시하는 그 복의 나라에, 아무도 모를뿐더러 알려줘도 들어갈 생각을 안 해요.

왜냐하면 기존의 것을 고난으로 응축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고난 받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진해서 저주받겠다는 사람은 없잖아요. 말이 고난이지 예수님이 가는 고난의 길은 곧 저주의 길이었어요. 아버지께 버림받은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자진해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포기를 의미하는데 평생토록 나는 행복하겠다, 건강하겠다, 잘 되겠다 할 때는 반드시 그 전제가 뭐냐? 나는 기어이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야무짐이 있거든요. 자기 고집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고집 같은 것이 있으면 복을 달라는 거예요. 교회 와서 하나님한테 빌면서.

거기에 대해서 “당신은 저주받을 사람이니까 저주받으세요.”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습니까? 다른 말이 안통하지요. 통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버지 이스라엘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요셉 아들보고 합니다. 11절에 나와요.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자기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죽었으니까 못 만난다고 철석같이 믿었더니만,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는데 보기까지 하고 이제는 네 소생까지 보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에게 있어서의 그 복의 의미가 뭐냐?

자기가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언약을 줬는데 그 언약의 내용은, 자기가 은근히 기대한 방식이 아닌 예상 밖의 방식으로서, 의도적으로 야곱의 기대를 벗어나 야곱이 미리 예측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야곱언약에 의한 자손을 하나님이 야곱 눈앞에 등장시킨 거예요. 야곱은 그것을 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고난이죠, 자기가족에게 어린 나이에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객지에서 얼마나 숱한 고생을 했습니까? 부모도 없이, 형제도 없이, 혼자서 산다는 자체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살았어요.

야곱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물론 도와주셨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손이 생긴 것은 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의 자식을 내가 기대하는 방식을 비켜나가서 내가 손 못 대도록 그렇게 자식을 낳는 이유는 은근히 기대하는 인간의 육이 하나님의 복의 내용에, 언약의 내용에 끼어들 수 없는 부정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야곱은 지금 스스로 자백합니다.

내가 끼어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사된 자식, 그런데 그 자식은 하나님의 야곱언약을 통해서 약속한 하늘의 별같이 많은 그 자식의 번창, 에브라임이니까, 번창이니까, 그 번창이 되기 위해서는 감히 생각 못한 하나님이 준비한 그 진입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이라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은 사람과 거기서 언약대로 어떤 열매가 있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세계, 천국에 이미 들어온 것으로 확인해주는 거예요. 쉽게 이렇게 합시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상대방이 부담 없이 아주 가볍게 질문했을 때 “고난 받고 성공하신 그분이 따로 계시다는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이미 그 쪽 세계 천국의 백성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가 악바리같이 설쳐서 들어갔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고 나를 제켜놓고, 나를 제치고, 내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그 길을 홀로 가셔서, 그게 고난입니다, 므낫세에요, 홀로 가셔서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준비한 새로운 피조물집단, 그런 천국의 집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오심이죠, 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줬을 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확신은 없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으로 인하여, 아무도 흉내 낼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는 그분 홀로 하신 그 고난의 길과 번창의 상태가 분명히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된 것, 그것은 이미 구원된 사람에게만 아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왜? 나를 제켜버렸으니까. 나와 상대하지 않으시고 이미 이루었으니까.

그렇다면 오늘11절의 말씀처럼 야곱은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게 준 언약을 야곱 본인이 스스로 이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야곱의 오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을 줘도 실질적으로 언약을 이루신 분은 야곱의 소홀 때문에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요셉에 의해서 나에게 준 언약을 요셉이 주인공이 되어서 다 이루고 그 언약의 자손도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눈앞에, 코앞에 등장시킬 때 “나는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서 언약이 스스로 언약대로 모든 결과를 성취시켰습니다.” 하는 고백을 지금 야곱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복을 내리시고, 지난 번 말씀처럼 그것을 아들 반열에 올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야곱은 뭘 생각하느냐? 이 두 사람에게 복을 줌으로서 열 두 지파를 요셉화시키는 거예요.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했잖아요. 미워한 이유는 ‘내 인생에서 네깟 것은 필요 없어.’라고 내쳤다는 말이지요.

내쳐진 자가 도리어 야곱언약의 성취자가 되어버렸으니까 이제는 나머지 열 한 아들, 이스라엘을 요셉이 갖고 있던 고난과 번창으로 물갈이하는 겁니다. 갈아엎는 거예요.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복을 통해서 그걸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복을 통해서 현실화시킨다는 말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일어났던, 하나님과 요셉사이에 있었던 모든 경우를 이제는 메시아 올 때까지 모든 열 두 지파의 운명의 주도권이 되게 하옵소서, 라고 복을 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요셉지파 빼놓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지파 빼놓고 나머지 지파는 어떤 입장에 있느냐 하면, 복 받은 요셉 앞에서 그들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그들은 요셉을 미워 했었고요. 그렇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죄인이 되어버리면 그들은 죄인 되었다는 입장에서 결속이 되어버려요.

개인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고 누구 앞에서 죄인이라는 관계로 말미암아 이제는 각자 놀던 그 열두 형제가 복을 받은 요셉지파를 바라보면서 모두 다 ‘네 덕분에 우리가 복 받았다.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마음을, 생각을 같이하게 돼요. 이것은 저절로 이스라엘이 되는 거지요.

그 전에는 요셉이 있으면 내가 어떤 이익이 있을까? 항상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 개별자로 태어나요. 자기 자신만을 산다고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두 가지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하나는 개인의 행동은 용납이 안 되고 집단만 용납된다는 사실과 내가 의인이라고 우겼던 것이 복 받은 요셉 앞에서 내가 졸지에 죄인이 된다는 것.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라는 것,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 된다는 것, 두 가지의 변화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단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의 입장에서 다른 지파 놔두고 요셉지파가 복을 받아야 되는가? 그것은 요셉이 고생했던 나라가 애굽이거든요. 야곱이 볼 때에 요셉은 그냥 단순히 애굽의 국무총리, 애굽의 높은 사람정도가 아니고 아예 애굽나라 위에 존재하는 위치를 갖고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인간나라, 세상나라 위에 있는 나라는 무슨 나라밖에 없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나라, 언약의 나라에요. 그 언약의 나라의 대표자가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것으로 야곱은 받아들여서 요셉이 갖고 있는 위상을 이제는 자기자손들, 이스라엘식구들 가운데서 그 위상을 그대로 복을 가지고 반지에 다이아몬드 박는 식으로 그대로 박아 넣어버린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평소에 요셉이 꿈꿀 때 왜 다른 형제들은 왜 그 높은 요셉의 위상을 몰랐던가? 이게 육의 한계인데요. 예를 들면 아리스타르코스라는 사람이 bc 3세기 그리스사람인데 그 사람은 지구가 돈다고 했어요. 지구가 도는 것을 지동설이라고 하고 하늘이 도는 것을 천동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 약 250년 전에 그리스 사람이, 하늘은 그대로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했습니다.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받았어요. 이것은 십만이고 백만이고 누가 봐도 다 하늘이 돌지 지구가 돌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지구가 있는데 하늘이 돈다고 천동설을 주장하다가 코페르니쿠스에 와서 좀 더 관찰해 보니 지구가 돈다는 것이 나왔어요. 제가 왜 지동설과 천동설을 이야기하느냐?

지구가 돈다고 이야기했을 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지구가 도는 것이 아니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돌고 태양이 돈다고 했을 때 그렇게 철석같이 믿던 사람이 지구가 도는 것도 모르는데 그 사람이 천국 갔겠습니까? 엄청난 착각을 했는데도 그래도 천당 갑니까?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그 시대에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그 시대에 옳다고 하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겼던 겁니다. 무조건이 아니고 남들 의견 들어봤겠지요. 하지만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나오기 전에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돈다고 믿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bc 3세기에서 지동설이 나온 것이 16세기니까 1300년 동안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은 그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뭘 생각했느냐 하면,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하늘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에요. 왜? 아는 것이란 그 시대에서 알려준 것이 전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시대에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자부할 수가 없다는 말씀을 제가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은 최종적인 안목으로 봐야 돼요. 세상 끝에서 거꾸로 세상을 볼 때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더라도 인간은 한결같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게 통합적 안목이에요. 좀 착한 것 있고 의로운 것이 있더라도 죄인이에요. 이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를 예를 들면, 민수기 5장을 잠시 알려드립니다. 너무 기니까 요약해 드릴게요. 어떤 남편 있는 여자가 간음을 했어요. 간음을 했는데 남편이 가만 생각해보니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민수기 5장의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에게 그 아내를 데려가요. 이 여자가 바람피운 의심이 드는데 어떤 조치를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조치가 굉장히 소박한 조치를 합니다.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거든요. 그러면 물증을 누가 만들어내느냐 하면, 제사장이 물증을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성막 바닥의 흙을 가져다가 물 담긴 그릇에 그 흙을 넣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성막 앞에 세우고 머리를 풀게 하고 거기다가 그 물을 자기 손에 들고 맹세를 하게 해요. 네가 다른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네가 남편을 두고 간음을 했으면 내가 저주를 받겠습니다, 라는 맹세를 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한다는 저주를 네가 각오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21절, 22절, “(제사장이 그 여인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줏거리, 맹셋거리가 되게 하실찌라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찌니라.”

제가 아까 했잖아요. 굉장히 소박한 방법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성막에 있는 흙은 인간 자체를 뭘 로 보느냐 하면, 얼마든지 간음할 수밖에 없는 육의 속성인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증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더 어렵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그 여인이 만약에 간음했다면 성막의 위상, 성막은 하나님의 약속이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여인이 간음하게 하셔서 그 여인으로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육의역할은 그 역할이니까. 성막에 있는 흙이 하나의 여인을 저주받게 할 수도 있고 만약에 그 여인이 간음한 일이 없다면 퉁퉁 붓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논리가 간단한 거예요. 복잡할 것이 없고 간단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벌써부터,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성막 흙을 통해서 증명해낸다는 그 말입니다.

표정이 지금 아니라는 표정을 짓는 겁니까?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의인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저주받을 짓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막부터 발단이 된 언약은 나중에 어디서 마감이 되느냐? 십자가에서 마감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간음도 안했습니다. 나는 살인도 안했습니다.”하는 그 어떤 인간도 간음자요 살인자가 되도록 십자가가 그 역할을 해준다는 그 말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죄인이다, 아니다, 고백하기 이전에 십자가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로서 주께서 십자가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셨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이미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는 그 말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지동설과 천동설 이야기할 때 한 것처럼 십자가가 최종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른 지파를 놔두고 요셉지파를 축복하는 이유는 ‘그 때 요셉한테 잘해줄걸’ 이런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요셉은 애굽 위에 있는 존재에요.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그렇게 고생고생 하게 하신 거예요.

고난과 그 후에 나오는 번창, 이게 언약안의 세계거든요. 그 언약안의 세계를 이스라엘에 심어놓은 것은 다른 야곱의 아들들, 다른 형제들과 야곱뿐만 아니고 그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을 요셉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특혜, 언약적으로 자손이 생산되는, 두 아들이 나오는, 그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그 증거 앞에서 그들이 죄인으로 결속이 된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된다는 뜻이에요.

개인적으로, 앞으로 잘 처신하겠습니다.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면 안돼요. 개인은 집단으로, 의인은 죄인으로. 우리 가운데 누가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그리고 이미 고난 후에 일어나는 번창을 성공리에 마치신 분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이미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저희들이 이 땅에 출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 사실을 아는 그 자체가 이미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천국 백성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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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5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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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