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20장 19절(인격 파괴)190319a-이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20장 19절(인격 파괴)190319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일단은 23절까지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까지.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문을 닫았는데 주께서 그 문을 통해서 닫은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그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그것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주님이 들어오시는 문은 없어요. 제자들은 그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거에요. 이게 이제 수준이 낮은거지요. 주님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문은, 문이 있으면 인간들은 문에 예속되요. 벽으로 못들어 오지요. 그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뭐냐 하면 문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문이 되어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면 그 현장에 문이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예상하는 곳은 천국의 문이 아니라는 거에요. 인간이 예상하는.
인간들은 평소에 하는 버릇이 문이 있고 문을 통해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가고자 하는 그것이 인간들의 생각의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문을 천국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지요. 어디로 통하면 천국가는 길입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가고자 우리는 갈 수 있는 그런 고난과 자격이 있습니다. 다만 길을 몰라서 그렇고 문이 몰랐을 뿐이지 우리에게 길과 문만 알려주시면 그걸로 가서 천국에 같이 합류하거나 도달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문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께서는 사람들이 의식하는 그 방식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어닥친거에요.
한쪽은 문을 기다리는 쪽과 한쪽은 문이 필요치 않는 본인이 문이 되는 분과의 합작, 같이 합류를 한겁니다. 합류를 했으니까 대화하거나 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해석을 우리의 모든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이죠. 더구나 오늘 이야길 할 것이 중요한 것이 또 뭐냐 하면 여기 문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방금 예수님을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문인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문되게 하신거죠. 그런데 지금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문되게 하시는 그 방식을 예수님께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이 세상에 또 예수님같이 문으로 만드신 거에요.
그래서 23절에 보면 “너희가 누구든지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자기가 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도가 사람들속에서 장차 그들의 구원의 천국가는 문이 된다면 여기서 어떤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해서 들어가는 주체자를 본인으로 계속 이렇게 쥐고있는 이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게 변동이 있어야 돼요. 나는 여기 있는데 나중에 천국간다라는 것.
왜 그러느냐 하면 문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나는 멀쩡한 상태에서 문만 통과하게 되면 천국에 이제 곧 도달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기독교 장례식에 가보면 전부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께서 맨션 아파트를 하늘에 한 채 장만했기 때문에 가시면 이제는 들어가시면 편히 쉬시면 됩니다 라고 하거든요.
어디 천국에 놀러가요? 놀러가는 데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문이니까 들어가세요가 아니라 뭘 언급하느냐 하면 죄 사함을 언급해버려요. ‘죄 사함’을. 이 말은 뭐냐 하면 죄인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그런 취지에요. 이게 자기주제도 파악 못하면서 거룩한건 알아가지고 천국이 좋다는건 알아가지고 낼름 거기에 자기 부동산 하나 장만하려고 내 땅이야 이거는 내 좌석이야 자기 지분하나 얻을려고 그런 식으로 넘볼수 있는 입장이냐 하는겁니다.
사도가 성령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성령을 하면서 사도가 해야될 일이 곧 성령이 하시는 일인데 성령이 하시는 일을 쪼개보면 무슨 일이 들어있느냐 하면요 죄사함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죄 사함에. 그러면 죄사한다는 말은 일단 죄인은 있어야 돼요. 죄인은 있어야 되고 그 죄인은 어떤 규정을 받느냐 하면 천국에 갈수 없는 존재가 죄인으로 규정되어야 돼요.
천국에 갈 수 없는 자가 죄인인데 이 죄인들이 자기 죄를 모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메시아 믿어서 누굴 만나서 천국가겠다 라고 지금 자기 분수도 모르는 발설을 해버린 거에요. 그게 바로 성령님 보시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사도가 보기에 죄가 되는 거에요.
따라서 나는 천국가고 싶다는 구원의 욕구죠. 구원에 대한 욕구, 그걸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그냥 구원파라고 보면되요. 구원파. 어떤 특정집단이 구원파가 아니고 모든 인간은 구원파에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자기 온 정신은 뭐냐 하면 괜찮은 사람 도움으로 내가 죽어서 구원받고 싶고 천국가고 싶고 이 땅에서는 지지리 궁상으로 고생 되게 했지만 죽어서는 낙을 봐야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보상심리 같은거 작용해가지고.
고생하고 또 지옥 가서 고생하고 그건 남는 장사 아니거든요. 고생할 때 무슨 보람이 있어야 이게 인내하고 기어이 참아낼 수 있단 말이죠. 버틸 수 있는거에요. 아까 버티다 이야기 했는데. 장차 좋은 나라 있기 때문에 이까짓것 이런 고난 내가 견뎌내야지. 견뎌낸 사람에게 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에는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거는 세상이 지어낸거고요. 작가들이 몰라서 그래요. 성경에 참는자는 복이 있다는 그런거는 성경구절에 없습니다. 찾아볼라고 애써도 그런 구절은 없어요.
어쨌든 참는 만큼 참는 동기 유발을 천국이라는 것이 좋은 미끼가 되어서 우리에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 받아서 인내할 수 있겠다 이렇게 버티지요. 로마서 5장입니까?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그 대목 같은거 이렇게 그 대목 자꾸 생각하면서 참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참을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참고 안 참고 할 것도 없이 근본적으로 참는 한이 있더라고 천국가겠다는 그게 바로 네가 그동안 몰랐던 죄가 되는 거에요.
천국이 나 천당 보내라고 준 나라가 아니에요. 그거는 그냥 오판입니다. 잘못 생각한거에요. 그런 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가 그런걸 가르치죠.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인간은 욕구가 천국가려는 욕구가 있는데 그 천국가려는 욕구는 결국은 나 잘 되기 위한거거든요. 결국은 그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볼 때 지금 보다는 모든게 내가 우수하게 될거라는 그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기대감이 있다면 스스로 자기가 자기 힘으로 자기 지배를 하게 돼요. 자기 치료 방법을 가동시키는 겁니다.
천국은 분명히 하나님 계신거니까 하나님은 훌륭한 분이고 좋은 분이니까 아마 좋은 사람을 간택할것이고 시험 쳐도 좋은 사람만 합격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내가 이 땅에서 할 것은 내가 나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서 그걸 기본으로 해서 그 지배하고 난뒤에 뭘 집어넣는가? 도덕적인 처방을 나한테 가하는 거에요. 도덕적인 처방을.
인간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고 뭐고 딱 짜보면 한약 그 삼베에 거친 삼베에다가 막대기 끼워서 옛날엔 한약을 그렇게 짰거든요. 야무지게 짰다고요. 쓰기도 해. 짜듯이 인간의 모든 그 행동 태도를 한약같이 짜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도덕적 처방이에요. 도덕적 처방. 이걸 성경적으로 하면 선악 논리. 선악 논리가 너무 어렵다면 도덕적 처방하면 돼요. 날이 갈수록 내가 우수한 존재가 되기를.
짜보면 뚝뚝 떨어져 자기의 도덕이. 주님은 짜보면 피 밖에 안나오는데 인간은 짜보면 도덕밖에 안나와. 피가 안 나오고 도덕이 나오는 거에요.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성령을 통해서 짜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죄가 나오지요. 죄가 나온다고요. 인간은 자기 의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 의가 나오는데 대해서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아주 흐뭇하게 여기고 대견하게 여겨요. 자기 자신을.
교회 나온 사람치고 스스로 안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오늘도 악마의 시험을 뿌리치고 교회까지 나왔습니다. 흑흑흑흑 만화책에 나오는 거에요. 흑흑흑. 주여 이러면서 자기 자신을 아주 뿌듯하게 대견하게 여기죠. 그 대견함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 나오는 그것이 죄다. 이게 죄가 나오는 것이다 라고 여기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대목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도덕으로 자기를 뭐한다 했습니까? 처방하죠. 도덕적인 처방을 내립니다. 도덕적인 처방을 내리는데 도덕적인 처방을 내리게 되면 여기에 막혀있는 인간세계와 막혀있는 하나님 나라 세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분명히 문이 있을 것이고 통하는 문이 있을거고 그 문에는 도덕적으로 무장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지금 제자들도 그런거에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문을 이 문으로 오신게 아니고 닫아놓은 문에서 예수님 오신게 아니고 예수님은 그 자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자체가 문이라고 했지요. 인간이 다니는 문을 사용을 안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문을 의식한다는 것은 인간 + 문 그 전체를 자신이 구원받기에 필요한 그러한 환경이고 영역이고 그러한 용도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했다는 말은 이것은 어려운 말로 하겠어요. 여러분들은 수준이 있으니까 어려운 말로 쓰겠습니다. ‘탈자연화’. 보통 세상의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을 벗어난게 아니고 자연을 이용하고 활용하는 거에요. 자연의 변화를 이렇게 배열을 하고 정리 정돈을 함으로서 필요한 원리를 뽑아내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다 외우고 있는거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다 외우고 있는거. 이러면 거의 못 외운다고 보시면 돼요.
그 주기율표라는게 있어요. 화학의 주기율표 금속의 110가지 인공지능까지 하면 120개쯤 되는데 뭐 이런게 있어요. H 수소 리튬 벨릴륨 인 황 그 다음에 프로린 그다음에 네온 그다음에 마그네슘 이렇게 쫙 나와요. 이렇게 배열을 하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기가 나오더라 이 말입니다 주기가. 이상하다. 금속들을 보니까 여기는 활성화가 높은거 있고 여기 끝에는 활성화 되지 않는 불활성기체라하는데 기체가 점점 나중에 고체가 되고 금속이 되거든요. 은이라든지 금같은 것은 79번인가 멀리 있다 이 말이죠.
이 주기가 있을 때 아 이런걸 잘 배열해서 잘 이용하면 내가 그 자연에서 이용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왜 이런 주기가 생길까? 과학자들은 그걸 자기 딴에는 밝혀냈다고 보는거죠. 과학은 핵이 있고 그 다음에 핵 주위에 전자기들이 돈다고 하는데 도는게 아니고 배치되어 있는데 에너지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뭐 이런게 있어요. 여기서 그들이 하나의 껍질을 전자의 껍질을 형성하고 그 껍질 안에는 전자들이 존재할 확률이 많은 그런 궤도같은게 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궤도에서는 방 하나 되어 있는데 방 하나에서는 서로 전기장 때문에 같은 것은 같이 들어가지만 방향이 회전방향이 반대로 들어간다 이게 배타의 원리라는게 있어요. ‘파울리의 배타의 원리’. 그리고 방에 들어갈 때는 꼭 두 개만 들어간다 이걸 ‘쿤트의 원리’라는게 있어요. 화학에선 이걸 이렇게 이야기해요. 꼭 십자가 마을 방 배치하는거랑 똑같아요. 하나씩 하나씩 다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 끼어 들어가고 하는거에요.
이렇게 해서 여기서 빛은 왜 반짝이느냐 뭐 이렇게 왜 이것은 결합이 잘되고 전자가 하나 들어가면 여기서 이걸 잘라내면 유전자 잘라내고 새로운 화학제품이나 만들 때 이런걸 이용해가지고 쉽게쉽게 자연에서 얻어내는 거거든요. 이걸 ‘탈자연화’예요. 자연에 있는 원리를 알아내서 우리한테 이용하겠다는데 어디 이용하느냐 하면 내가 사는데 이용하고 내가 건강한데 이용하고 내가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는데 필요한 것들을 이렇게 과학에서 끄집어내면 경제는 그것을 생산과 분배를 하고 돈으로 변환시켜서 경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과 경제 그걸 잘 분배해놓고 거기서 너무 욕심내지 말고 만드는게 뭐냐? 정치. 과학, 정치, 경제. 약간의 좀 배부르다 싶으면 이제 문화생활. 문화. 이게 세상이잖아요. 그 기원은 뭐냐 하면 우리는 살아야 되겠다는 거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정치 과학 경제 문화 가운데서 죄는 어디 있습니까? 죄는 없지요. 죄는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 이게 있어요.
형법이 있어요 형법. 형법 또는 형법에 의한 형벌이 있지요. 형법. 형을 집행하는 법. 오늘 본문에 19절에 봅시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여기 유대인들 그다음에 뭡니까?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두려워하지요. 뭘 두려워 하는거에요? 형법을 두려워한거에요. 형법을. 나라에서 에너지를 백성들에게 골고루 분배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협의에 의해서 만들어 낸 그 법에 욕심내서 남의 것을 뺏어가면 도둑질로 간주해서 벌을 내리겠습니다 라고 그 공동체 내에 협의를 했으면 그건 뭐냐? 형법이 되는 거에요 형법이.
냉커피 왔는데 그걸 먹지도 않고 쏟아버린 경우에는 깔끔하게 닦아야 됩니다 라고 벌칙점을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그런 형벌을 내린다면 형법이 되는 거지요 형법. 그러면 유대인들이 그 제자들이 자기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그럼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누굴 무서워해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서워해야 하는데 지금 이 제자들은 누구를 무서워 합니까? 유대인들을 무서워하는 거에요.
그러면 어디에서 못 벗어 난거에요? 정치 경제 과학 여기서 그들은 못 벗어난겁니다. 그들이 못 벗어났다는 말은 죽기 싫다는 얘기예요 결국은. 죽기 싫다는 겁니다. 죽기 싫으면 그러면 죽기 싫으면 계속 유대인하고 같이 한통속되서 얼싸안고 예수 죽이는데 같이 가담을 하고 하지 왜 따로 노느냐? 죽기는 싫은데 그 다음에 남들이 모르는 추가적인 자기에게만 주어진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제자 자기들을 천국에 보낸다는 그 약속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이 내부적으로 지금 모순이 벌어진거에요. 형법은 무섭고 그게 우선적으로 그것도 우선적으로 무섭고 벌벌 떨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주 포기할 수는 없고 그 동안 쌓아왔던 우정이 얼마입니까. 3년동안 쌓아왔던 그 청춘이 아까워서 버리기는 뭐하고. 이 둘이 조합이 안되는 거에요. 오늘날 교회 가는 모습하고 똑같은 거에요.
가정은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경제적으로 별 탈 없고 과학적으로 세상적으로 좀 이렇게 유명한 직업으로 공부도 좀 많이 하고 이렇게 했으니까 일단 사는 것은 괜찮은데 남은 문제는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가 그게 문제니까 내가 예수님을 내가 포기를 못하겠고 이게 내부적으로 이게 하나가 안되는 거에요. 내부적으로. 둘다 문제에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도 문제고 살겠다는 것도 근본적으로 문제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그 시대의 그 정치 형법 있잖아요. 그 형법을 예수님 자신이 그걸 자기 손에다가 집어 넣은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20절에 나오는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이 생긴 상처는 뭐 자해한거에요? 어떻게 한거에요? 죽어야 돼!! 스스로 칼 가지고 자기를 찌른겁니까? 어떻게 된거에요 이게. 손과 옆구리의 그 상처는 뭐에요?
인간들을 제자들을 꼼짝 못하게 벌벌벌 떨게 만드는 무서워서 어쩔줄 모르게 만드는 그 법을 예수님이 삼켰다고 보면 되요. 예수님이 그 법을 삼켜버리면 그 다음부터 뭘 무서워해야 하면 되냐면 법을 어겼다는 것들이 형벌이 온다는 것 때문에 무서워하면 안되고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곧 영원한 지옥이고 형벌이 되는 거에요. 예수 안 믿는 것이.
예수님께서 지옥 보내고 예수님께서 인간을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현장에서 지옥을 만들어 내고 천국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왜? 예수님이 문이시니까. 자꾸 우리가 예수님을 상대할려고 하면 안돼요. 예수님에 의해서 상대 당하는 자가 되어야돼요. 내가 상대할 때는 반드시 의도가 있어요. 음흉한 의도가 있다고요.
밥은 먹여주니까 감사한데 죽어서 천당가는 것은 주께서 보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증서라고 뭐 이렇게 도장 찍고 증서라도 하나 써주면 좋겠습니다. 너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거 뭐 이런거 써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어떤 정서라든지 이런거 공증 같은게 있어야 된단 말이죠.
예수님은 그 방법을 사용한게 아니고 제자들 자체가 우리 성도 자체가 공증이 되게 하는거에요. 공증을 쥐고 있는게 아니고 너 반드시 천당가는게 아니라 제자들을 예수님 하는 일에 거기에 합류를 시켜줘버린 거에요. 제자들이나 성도는 주님이 하는 일에 소비자가 아닙니다. 소비자가 아니고 같은 직원이죠.
소비자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다 해놓으면 돈주고 사거나 그걸 구매하면 되지만 생산자로, 소비자가 아니고 주님의 하시는 생산자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 사람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 일종의 공장같은 거에요. 공장이 되어가지고 늘 지옥과 천국을 계속해서 늘 거기서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성령받은 이 사도들은 이 제자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했던 천국과 지옥의 문의 역할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은 천국의 문인 동시에 무슨 문이 되겠습니까? 지옥의 문이 되는 거에요.
23절 봅시다. “너희가 누구든지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죄가 없으면 천국이고 죄를 그대로 두면 지옥이고. 이걸 간추려서 이야기 하면 세상은 곧 지옥이고. 왜? 안 건드리고 놔두면 그냥 지옥이고. 그래서 88올림픽이나 월드컵 할 때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했잖아요. 지옥 나라 짝짝짝 짝짝. 지옥 이루어 진다. 지옥 별표 이루어 진다. 이런거 있잖아요. 그대로 지옥이에요. 그대로 지옥입니다. 거기는 뭐가 있다? 형법이 있고.
그 형법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법이 아니에요. 국가라는 체제 건드리면 너는 모진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형법입니다. 국가라는 것. 그 국가는 다니엘서에 보면 그걸 두자로 뭐라고 되어 있어요? 국가를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니엘서에. 짐승이죠 ‘짐승’. 짐승을 달리 표현하면 괴물이죠. 거대한 공룡입니다. 욥기에 보면 거대한 리워야단, 공룡. 우리는 공룡의 비늘이고. 기능의 일부로서 붙어있는 거에요.
거대한 공룡이 이렇게 흔들거리면서 움직이게 되면 우리가 따라다니면서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이거 부르면서 같이 따라다니는 거에요. 외국에 나가게 되면 태극기 앞에 이렇게 따라다니고. 국가대표는 바로 공룡의 마크를 달고 저쪽 공룡하고 이쪽 공룡하고 붙는거에요. 일본 공룡하고 우리 공룡하고. 트럼프 공룡하고 북한의 새끼 공룡하고. 욕하는거 아닙니다. 작다는 뜻이에요. 핵 포기 때문에 붙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뉴스가 다 지옥 이야기에요. 지옥 이야기.
지옥에 0.1% 에 들어가야 된다. 이게 스카이캐슬. 왜냐하면 성공해야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성공해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내가 지금 안 맞다는 겁니다. 이게 자꾸 틀어진다는 거에요. 좀 인기있고 자기 집안 돈 좀 있고 아주 10대가 술을 어디서 먹어가지고 술 먹는거 배워가지고 나이트 클럽 가가지고 하루에 1500만원 술값내고 까불때는 천하자기 세상 인줄알고 자기 아버지 고급차 승용차 몰고 돌아다니고 스포츠가 몰고 돌아다니고 두려움이 없지요.
없다가 이번에 나이트 클럽 형법에 걸렸잖아요. 사람들이 지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요 이런 이야기 해요. 참 요새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했는데 도덕이라는 말은 사실은 요즘 세계에서는 참 구태의연한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그 도덕이 보통 도덕 윤리를 같이 봅시다.
도덕은 개인의 성품을 품량하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란 그런 도덕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는걸 필요하다는 것을 윤리다 이렇게 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조선시대때 이야기고 도덕과 윤리는 근대가 되게 되면 도덕과 윤리보다도 뭐가 위냐 하면은 힘이 위이고요 이 힘은 뭐로 측정이 되냐 하면은 돈인데 여유돈이라고 하지요. 여유있는 돈. 집에 돈 많아도 집에 빚이 많으면 소용 없잖아요. 여유있는 돈. 내가 자유를 느낄수 있는 돈. 힘.
힘이 뭐를 대신했습니까? 도덕과 윤리를 대신한거에요. 그래서 자녀 교육도 너 어릴 때부터 영어 배워야 돼. 왜? 그래야 네가 착한 사람 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영어를 강요하는 부모 봤습니까? 그런 식으로 안하지요. 영어 꼭 해야 돼. 왜? 그래야 너는 훌륭한 도덕적인 사람 되기 때문에. 이렇게 안하지요. 그게 바로 여유돈을 가지고 있는 힘이 되는 거에요, 힘이.
제가 혹시 주일 낮 설교 들은 사람은 제가 끝 부분에 예를 든게 있지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에 나왔지요. 그 때 영화배우 이름이 순간 생각이 안났어요. 주께서 생각 못하게 하셨는지 이제는 생각났는데 고현정이에요. 김태우하고 고현정하고 편지 주고받는 이야기를 그게 홍상수 감독이 나왔다 이 말이죠. 거기에 편지 내용에 보면 도덕과 윤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자기 행복이죠. 자기 행복. 행복한거에요.
그 행복은 어디서 규합된 자료를 가지고 뭉쳐진거냐 하면 바로 이 지옥에서 행복하게 살기에요. 지옥 벗어나기가 아닙니다. 지옥 벗어나기가 아니에요. 제가 오늘 강의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이야기에요. 인간은 벗어날 세계가 없습니다. 인간이 갖춰있는 그걸 제가 주일낮에 비빔밥 안이라고 했는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이죠.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 인간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린거에요. 메시아가 나타나게 되면 바로 힘없는 유대나라가 아니라 힘있는 나라가 되요. 로마에서. 로마에서 벗어나서. 자기들은 다니엘에 나오는 그 짐승을 로마로 보고 그 로마에서 벗어날 때 진짜 나라가 그야말로 다니엘이 예언한대로 이 유대사회에 여호와 믿는 나라만이 우뚝하게 다윗 왕국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게 천국이다 라고 유대사회는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힘으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메시아냐 하면 아직 나타나지 않는 메시아에요. 아직 나타나지 않는 메시아.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한거에요. 아직 성령을 못받았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런데 정작 메시아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나타났습니까? 이미 나타났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거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쇼크에요. 사람들은 이걸 지옥으로 보지 않고 대기상태로 보기 때문에 죽어서 좋은 점수 받으면 내신 성적 높으면 천국 일종의 대기 상태, 논산 훈련소가 되어 가지고 아직 자대 배치를 안했다고 본거에요.
여기서 중립지역이고 여기서 얼마나 자기를 잘 했느냐 따라서 천국 갈 사람 천국 가고 지옥 갈 사람 지옥 간다 이렇게 생각한거에요. 유대사회에서 오늘날 교회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니까 교회가 지금 악마의 편드는 단체가 되고 말았어요.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미 나타난 메시아에요. 뭘 안고? 손과 옆구리에 뭘 안고? 상처를 지니고 나타났어요. 그야말로 상처받은 분이에요. 상처받은 분으로 오셨다. 상처 받은 분으로. 멀쩡한 육체가 아니고 상처받은 상처가 있는 분으로 오셨다 이 말이죠.
여기 요한복음 20장 27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아멘.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상처가 어찜이뇨 하는 대목도 있어요. 그 상처가 어찜이뇨. 사도행전인가 나와요. 스가랴에 나오는가? 이사야에 나와.
그 상처가 어찜이뇨. 지금 사람들은 메시아를 원하지 상처를 보고자 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메시아를 원하는 그들에게 (너무 떠들어서 옆방에서 시끄럽다 할까 모르겠다. 형벌받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메시아를 원하는 자에게 상처를 앞장세워 들이미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십자가가 상처가 눈 앞에 보이는데 왜 네가 아직도 엉뚱한 발상을 유지하고 있느냐. 상처가 있다 상처가.
이 상처는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람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에요. 소위 하나님이고 뭐고 메시아가 어떻고 죽어서 천당간다 지옥있다 그런 논쟁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쓰잘데기 없는 논쟁에 불과한 것을 딱 보여주는게 뭐냐 하면 바로 상처에요. 메시아가 온게 아니고 상처를 준거에요. 이 상처 너하고 관련성 없으면 너는 끝났어 이런 뜻이거든요.
우리가 믿었고 우리가 알고있던 거룩하고 고상하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그거 다 찢어버려라 이 말이죠 그거. 그거는 그 자체가 지옥에 살아야될 사람들이 이 고통에서 면제하고 싶어서 면하고 싶어서 온갖 도덕적인 품성가지고 지어낸게 그거에요. 제가 아까 동영상 촬영할 때 두 번째 했던가? 메시아 이야기할 때 메시아 모습이 어떤한가. 대부분 갸름하다 그랬어요. 갸름하다.
이렇게 볼이 쏙 빠지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 그 사람처럼 수염나고 아주 보기만해도 인자하고 고상스럽고 또 우리나라의 동양철학에 보면 제사 지낼 때 병풍있지요? 그 안에 도인들 보세요. 전부다 얼굴이 뾰족해요. 뾰족하고 왜냐하면 똥배나오고 이런 예언자가 없다는 거에요 얼굴 통통하고 옥동자 같이 그렇게 생긴 사람 그런 메시아는 없어요. 지성적이고 누추하고 예민하고.
마치 애들보고 삼손 그려보라고 하면 전부다 울퉁불퉁 근육에다 근육질에다가 이래가지고 이렇게 그린다고요. 이게 머리카락 힘인지 근육의 힘인지 구분안되게. 선입견이란게 무섭지요. 하나님은 칼과 병기로 구원하는게 아닌데. 하나님은 의로 구원하잖아요. 의만 있으면 돼요. 의만 있으면. 나한테 없는 의. 내가 예상못한 의. 나를 계속 죄인으로 몰아세울만한 그러한 근거가 되는 의. 그 의는 바로 이미 우리는 상처나 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정적으로 알려주는 그 무엇. 객관적 증거. 그것을 앞장세워서 오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이분이 바로 진짜 예수에요. 다른 예수는 가짜입니다. 이미 오셨어요. 이미 오셨다고요. 그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제자들이 내몰려 도망친것처럼 우리도 똑같아요. 우리는 다른 예수를 계속해서 교회를 통해서 계속 다른 예수를 우리 마음 속에 세뇌받았어요. 다른 예수, 내 소원대로 이루어주는 예수, 기도에 응답하는 예수, 교회 부흥시켜주는 예수, 계속 엉뚱한 예수.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아픈 사람 건강하게 해주고 가족 화목하게 해주고.
그런 예수. 노골적으로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너무 또 밝힌다 싶어서 끝내 참으면서 주를 위해서 고난 받겠습니다 하면서도 그 고난 받겠습니다 하면서도 그 뒤에 고난받으니까 내거는 일단 챙겨주셔야 됩니다 이런거 있잖아요. 겉으로 나타나는 그 기도내용과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그래도 좀 한번 봐주셔야되지 않습니까 라고 마지막 건지고 싶은 그 뭐 하나 그걸 보조 발전기라고 했는데. 거의 마지막 정말 이거 없이는 나는 안된다는 거 그거 하나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내가 정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정했는데 그건 내 자유에요. “인격파괴”. 인격파괴되지 아니하면 예수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격은 자기가 자아됨의 마지막 마지노선이거든요. 진짜 이거 무너지면 나는 인간 아니다 나는 개다. 마지막 지키고 싶었던게 있는 거에요. 유대의 형법이 무섭고 하지만 예수님을 버릴수는 없고 제자들의 마지노선은 바로 문단속 하에 있는 꼭 지금 우리 같애. 문 닫힌 안에 있어.
문 닫힌 이 안에 있어가지고 다른 사람 뭐 로마군병 들어오기를 늘 감시해야 될거에요. 누가 똑똑~ 할거 같으면 고구마 잘 있나? 감자 잘 큰다. OK. 암호 통과하고 열어줘야 할 정도로 그들은 내부에서 벌벌 떨고 있었던 거에요. 그 제자들의 그 모임이 각각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내부인간 내부의 모습을 바로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문닫힌 최후의 모임 이 장소입니다.
자기 내부의 그런 공포를 갖고 있어서 그런거에요. 그리고 그들의 소원인 예수가 있다면 예수님은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 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겠어요.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자기가 지금 엉뚱한 예수 엉뚱한 다른 천국을 생각한지를 모르고 우리를 지켜주실 때 진정한 메시아답지 않습니까 라는 사고방식. 자기 자신을 지켜달라는 거에요.
마지막 인격이 나라는 인격 이것만큼은 좀 안 다치게 해주신다면 제가 진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라고 빼주겠습니다 할 정도로 그런 식으로 그런식의 사고방식이 제자들이에요. 그럼 제자들은 끝까지 제자들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거에요. 그들은 인간이 취할수 있는 마지노선을 보여주고 마지막 선. 그 마지막선을 주께서는 허락없이 그걸 무용, 그 마지막 선의 무용성을 이야기하죠.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게.
마지막 내가 지키겠다는 그곳에 주께서 합류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에 오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주님께서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와버려요. 내가 기다리는 곳에 오지않고 내가 기다리지 않는곳에 가버린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그쪽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갈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상처 없는 메시아를 원했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다치지 않는 예수. 나와 메시아가 좋은 관계가 유지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메시아. 그다지 메시아에게 상처주지 않는 ‘괜찮은 나’인 것을 동반해서 드러내주는 그런 메시아. 너 참 고생했다. 훌륭했다. 너 대단했어. 나 때문에 어려웠지? 라고 위로받을만한 짓거리를 한 것을 주께서 주로부터 인정해주는 그런 메시아를 원했던거에요.
27절 다시 보게 되면 도마가 이르되 27절 앞에 보게되면 25절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제자들의 마지노선이라면 그 마지막 선에 마지막 그 지점에 누가 있는가? 바로 도마가 있습니다.
도마는 축구로 말하자면 최후의 골키퍼에요. 골을 지켜야될 마지막 인간의 인간다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과 인간의 순수성을 마지막까지 지켜줘야 될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도마에요. 도마. 저는 부엌에 가서 도마만 보면 늘 도마가 생각나요. 이제 도마에게 상처가 입혀질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도마의 상처가 되고 예수님의 상처가 베드로의 상처가 되고요. 예수님의 상처가 사도 요한의 상처가 되고 예수님의 상처가 오늘날 우리들의 상처가 됩니다. 왜? 우리 자신이 이제 문이니까. 천국가는 문 아니고 지옥가는 문.
다시 보겠습니다. 23절에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대로 둔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내어버려두는거에요. 답답할거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보고 실적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보고 실적을 요구하지 않아요. 몇 명 더 끌어 모아라 이런거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혹시 교인수가 8명 됩니까? 8명 돼요? 8명 거기에 에너지 확률상 2명될 때도 있고 12명될 때도 있는데 가장 분포가 높을 때 한 8명 된다고 봅시다. 그러면 노아입니다. 노아에요. 노아 몇 명 구원했습니까? 8명 구원했지요. 그럼 노아가 달랑 8명 딱 해놓고 천국가서 지금 벌 서고 있습니까? 내가 피를 흘렸건만 너는 달랑 8명?! 이 게을러 빠진 인간아 이러고서야 네가 천국을 오다니 손들고 있어 반성해! 이 게을러 빠진 이렇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습니까?
반대에요. 어떻게 하느냐. 너 9명 구원할까봐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어차피 8명 온다면 8명 타야지, 9명 오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같은 동네 동창이니 봐줘가지고 천국도 못가는데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해가지고 안된다 이말이죠. 그래서 노아든 사도든 간에 그 모임 그 관계유지에 기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
십자가 복음, 십자가 피로써만 관계가 유지되야 되고 엮어져야 돼요. 부모도 마찬가지고 자식도 마찬가지고. 십자가를 거부하거든 그다지 성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참 성격 좋은데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보시면 돼요. 윤리적 도덕적으로 자기에게 도덕적 처방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 이게 바로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왜 윤리 도덕적으로 하면 이게 지옥가느냐 하면 윤리 도덕을 처방하게 되면 처방하는 대상이 나라는 대상이 계속해서 점차점차 더 건전하게 유지가 된다고 자기 역사를 써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제가 주일오후 설교에서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게 관점의 상승이라고 이야기 했지요. ‘관점의 상승’.
관점을 늘 수정하면서도 뭔가 상승된다는 것. 독수리 날개처럼 올라간다고 스스로 그렇게 자부하는 거에요. 계속 자아 자신의 가치를 그 귀한 것을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자기라는 마지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거에요.
자,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하고 10분 쉬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닫았을 때에 제자들은 그 문을 열고 다 들어왔기 때문에 문을 닫아놓으면 아무도 못온다. 그러면 제자들 바깥에는 뭐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형법. 무서운 형법 유대인의 무서운 형법이 있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거기서 두려움 속에 문은 닫았지만 닫은 안에서 바깥 두려움이 안쪽 두려움까지 여전히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딱 들어오니까 갑자기 두려움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주님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 때 순간에 뭐가 없어져요? 평화가 주어진거에요. 그 말은 주님을 수입한다든지 주님을 이용해서 평화 얻어지는게 아니고 내가 안 깨지는 마지막 인격이 깨어질 때 그것도 주님에 의해서 깨어질 때 평화가 달리 평화가 뭡니까 그게 평화지요. 그게 평화인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내 주인공이 아니고 나는 주님이라는 일에 나는 직원으로서 이미 취직이 되어 있으니까. 복음 생산 업무에 포장이든지 맡아서 주님 공장직원으로 이미 한통속이 되어 버렸으니까 공장 부도나도 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10분 쉬는 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