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3 - 나와 우리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3 - 나와 우리
19,03,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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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받는 것도 집단적으로 처리되는 일인 동시에,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서 형벌을 당하는 경우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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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 아닌, '집단' !!
여기에 "용서를 받는 것도 집단적으로 처리된다" 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보면 이게 당연한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행동이 자기에게 결과로 주어진다고, 그렇게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용서가 집단적으로 된다고 하면, 자기가 행동한 것과 용서한 것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기도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우리' 라는 것인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에게'가 아니고 '우리에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니 성경은 '나'와 '우리'의 싸움인데, 그래서 교회에 올 때는 '나'로 왔다가,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우리'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나'로부터의 해방,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 손을 뗄 수 있는 자유함,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 갈렙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 !!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갈렙이 들어갈 수 없는 불가능한 나라에 들어간다고 우겼을 때, 그 갈렙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신약에서 밝혀진다는 겁니다. 갈렙의 의식이 계속 발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말이죠. 신약에서는 "갑렙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있다" 라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하는데, 혹은 "여호수아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구약에서는 갈렙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은 '나'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 '너'의 싸움이 된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갑렙 너는 무엇이기에 들어간다고 우기는가?" 라고 하게 되면, 그렇다면 '갑렙'과 그 외의 사람들인 '너'의 싸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갈렙이 개인적으로 믿음이 있습니까? 그런 차원이 아닌데, 왜냐하면 신약에 오게 되면, 갈렙 개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갈렙 속에는 뭔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설교시간에 '신기한 것'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말이죠.
아주 장대한 민족이 버티고 있는 그 나라에 오합지졸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들어간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종류의 인간들이기 때문에 말이죠. 이스라엘도 힘으로 버티고, 토착민들도 힘으로 버티고, 그러니 둘 다 약속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즉 "전쟁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꾸준히 약속의 땅까지 근접하게 만드신 이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언약궤' 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길을 열어주어야만 바로 길이 열린다는 말이죠.
* '언약궤' 라는 이질적 요소가 !!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먼저 건너게 되는데, 그렇게 기적적으로 건넜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길갈에 12개의 돌을 가지고 제단을 쌓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길갈의 사고방식으로 중무장이 된 12개의 돌,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12지파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는 각 개인의 가치라는 것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수 4:1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 4:16)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수 4:17)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수 4:18)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
(수 4:19)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수 4: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수 4: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수 4: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수 4: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수 4: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 우리는 시다바리 !!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넌 것이 인간들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고, 물론 인간의 믿음도 아니고, 그것은 언약궤가 먼저 길을 열어주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이 언약궤가 바로 믿음인데, 그러니까 갈렙은 단순하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는 게 맞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간다고 하니 들어간다. 우리는 시다바리처럼 뒤따라갈 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약속을 따라가서 가면 되는데, 그런데 그 약속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나'의 일이 아니고 '너'의 일이 아닌데, 이러한 '나'와 '너'가 만나서 '우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은 이 세상에서 통하는 공식이지 하늘나라에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와 싸우는 '우리'는 없는 '우리' 라는 것인데, 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담겨있는 '우리' 라는 겁니다.
* 기존의 '나'와 대비되는, 새로운 '나' !!
그러니 개인적인 의도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개인의 생각은 자기가 자기를 천국에 가는 것을 가로막는데, 왜냐하면 그 '나'가 계속해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를 없애고 우리로 전환을 시켜야 하는데, 그 '나'에게 없는 '우리'로 전환하기 위해서 '나'와 대비가 되는 새로운 '나'가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새로운 '나'가 누구인고 하니,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바로 그 '나' 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고 버티고 있는 '나'가, 예수님의 '나'와 만나서 박살나고, 바로 이 예수님의 '나'에서 발생되는 것이 바로 없었던 '우리'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겨나게 된다는 말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용서에 있어서도, '개인' 용서라는 것은 없고, 어디까지나 '우리' 용서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시작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20장을 보겠는데, 17절입니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여기에 보면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너희', 즉 '우리' 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나'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 즉 '우리'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이 보증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각 개인의 행함에 의해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 행동에 따라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만약에 자기 행동여부에 따라서 그것이 결정이 된다고 하면, 그렇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되어버리면,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출발점이 '나' 라는 것이 아니고, 그 '나'를 대체해서 주님이 그 자리에게 계신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24페이지와 125페이지에 나오는데, 그러면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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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그 예수님을 표상하기 위해서 첫 번째 아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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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두 번째 아담을 위한 첫 번째 아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출발을 '나'로부터 하면 안 되고, 즉 '나'를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계셨고, 그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 만들어지고 나타나야 한다" 라는 겁니다. 직업이 어떻든 간에,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무엇을 하든, 그런 것은 아담이라는 포괄적인 범주 안에 있다는 겁니다. 여행을 가서 독감에 걸리든 말든, 그런 것은 다 아담에 속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 라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반응과 모습들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자기의 우수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 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을 어떻게 받습니까? "네가 남들에게 내세울 자랑거리가 있어야 인생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라고, 우리는 그렇게 줄기차게 교육을 받아왔다는 말이죠.
* 광산 김씨, 똑바로 해 !!
그래서 소위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뭐라고 합니까? "그 따위 짓을 하려면 우리 집안에서 나가라" 라고 하는데, 즉 "우리 집안의 사람이라면 집안의 사람답게 살아야한다" 라고, 그것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특히 '광산 김씨' 라는 TV프로를 보면,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똑바로 해. 그렇지 않으면 광산 김씨 집안에 먹칠을 한단 말이야" 라고 하는데, 광주에 가면 이런 광산 김씨들이 많다고 하는데 말이죠.
(녹취 구 - 목사님, 광산 김씨가 떴는데, '하나 뿐인 내편' 마지막 회에도 출현했습니다. ㅋㅋ)
이것은 광산 김씨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역시 그런 교육을 받아왔는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우리 집안의 그 '우리'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 '나'를 살려내는 '우리' 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 와서 예수님이라고 하니, 무슨 생각을 합니까? 당연히 '나'를 위한 예수가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까지도 다 얹어서 통합을 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애굽에 나올 때는 좋았는데, 그래서 휘파람을 불고 찬양을 하면서 난리가 났다는 말이죠. 마치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좋아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는다는 겁니다. 약속에 땅에 가지도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