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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190308b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90308b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 율법의 요지부동으로 이스라엘을 장악했습니다. 마치 서울에 미세먼지가 장악한 것처럼. 미세먼지 날아왔는데 봉투에다가 한 오 만원을 넣어가지고 중국한테 주면 미세먼지가 사라집니까? 그런 거 없죠. 그냥 미세먼지가 만들어졌을 때에 어쩔 수 없이 갇혀있는 셈이죠. 그게 마땅함이에요. 운동을 하던 춤을 추든 뭘 하든 미세먼지는 속속들이 전부 다 스며들고 있으니까. 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다른 나라는 상상도 못해요. 이스라엘은 모든 일상 속에 율법이 다 스며들고 있어요. 마치 미세먼지와 같아요. 그리고 바이러스 같이. 그리고 그것이 어떤 마땅함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만약에 어기면 저주가 주어지고. 엄포가 아니에요. “저주받는다. 무섭지?” 이게 아니고 그냥 실제라니까요. 이게 엄포가 아니고 실제라고 하는 것은 다윗성에 언약궤가 올 때까지, 웃사가 만지다가 사람들 많이 죽었잖아요. 언약궤 자체를 건드리지를 못해요. 언약궤 자체를 인간이 뭐 건드리고 조절하거나 말릴 수가 없어요. 그걸 오늘 제목으로 한다고 했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궤가 뿜어내는 마땅함. 그걸 신약적으로 하면 십자가가 뿜어내는 마땅함. 그러면 구약 때 이스라엘에서는 언약궤의 위엄성과, 존엄성이죠. 위엄성과 위험성. 정말 이렇게 위험한 물건이 없어요. 이거 뭐 언약궤에서 나오는 그 말씀을 어겨버리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저주받는다 이 말이죠. 그 저주받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주변에 있는 바벨론, 앗수르, 모압, 암몬, 아람, 특히 아람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괴롭히지는 몰라요. 블레셋. 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사사기에 보면 알아요. 들락거리면서 뿅 망치. 뭐 뿅 망치 같으면 장난이나 하지요. 이거는 실제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보세요. 맨날 얻어맞고 죽고 조금 회개하게 되면 사사 보내서 숨통 트였다가 다시 그들이 다른 신, 우상을 섬기면, 시스라, 미디안, 온갖 이름도 낯선 이방민족들이 와서 완전히 짓밟아놓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선지자들이 와서는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부러 그랬다는 거예요. 너희가 여호와를 신봉하지 않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그럼 여호와 신봉하지 뭐? 이렇게 하는데, 여호와를 신봉할 때는 신봉하는 방법이 이게 바알 섬기는 것하고 달라요.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해서 섬겨야 돼요. “죽어 마땅합니다.”가 되어야 해요. 바알은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신과 어떻게 거래할 것인가, 흥정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어요. 만약에 여기 시장, 신곡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콩나물을 팔고 있는데, 돈 주고 콩나물을 사면 돼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챙기면 되는데, 어떤 사람이 돈은 없는데 갓난아기 젖 먹여가면서 “아주머니, 집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콩나물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그저 아줌마! 돈은 없는데 조금만 줄 수 없습니까?”라고 사정할 때,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는 당신한테 내놓을 것 없고 그냥 죽여주옵소서.”하는 심정으로 나오는 거죠. 여호와 앞에서는 그렇게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그런 혜택을 입었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의지했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갔을 때. 이방민족한테 다 뺏겼을 때. 이제는 지 자존심이고 뭐 우쭐대고, 나는 착했다, 나는 한때 뭐 하나님 잘 믿었다, 라는 그런 큰소리마저도 바닥이 날 때.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그런 어떤 여지도 남아있지 않을 때는 그냥 살살 빌듯이 “살려만 주이소”라고 비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이방민족을 물리쳐주는 것이 아니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언약을 기억하느냐?”라고 먼저 물어요. “언약을 기억하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제공된 마땅함을 니가 곱게 수용할래? 말래? 그걸 묻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니가 말씀이 우선되게 살래? 아니면 너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는 식으로 그렇게 살 거냐? 아니면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거냐를 들이대면서 묻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마땅함이 우선이냐? 아니면 내가 죽든 말든, 고생하든 말든 주님의 말씀과 언약의 마땅함이냐? 어느 쪽이냐 이 말입니다. 사무엘상 2장 6절에 보면,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한 것인데 다시 봅시다. 여호와는 어떤 마땅함인지 한번 들어보세요. 들어보시면 오늘 강의하는 것이 아, 지금 이런 취지로 강의가 흘러가는 것을 아실 겁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게 뭐냐 하면 여호와의 뭐다? 여호와의 마땅함이죠. 이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여호와는 이런, 이런 일이 자기와의 약속이거든요. 여호와 자기가 자기하고 약속하는 거예요. 누가 배제됩니까? 이스라엘은 배제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약속을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실현되어나가는데 동원된 자들이 누구다? 이스라엘이잖아요. 그걸 달리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자기이름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시고, 땅에 있는 주의 이름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하나님께서 활용하신다. 이래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다른 민족은 인간과 하나님과 상대하거든요. 인간을 배제하지 않고. 근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주의 이름과 하나님과 상대해서 나온 결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지금 구약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야기 한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심을 입은 자, 본인보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니가 합당하게 살기 이전에 주님이 갖고 있던 마땅함이 너의 남아있는 인생 모든 것을 결정짓고 종결짓는다 이 말이에요. 그럼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가만히 있는 모습이 뭐냐 하면은 때로는 죽기도 하고 때로는 살기도 하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건강하기도 하고. 이게 내가 생각하는 가만히 있는 것하고는, 이게 요동을 쳐요. 근데 그것이 주님보시기에는 주님의 마땅함의 여러 가지 변형체에요. 내가 사정이 어려워도 마땅히 어려워야 되고, 좀 잘 되도 마땅히 잘 돼야 돼요. 어느 대목이든. 아, 참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뻔뻔스러워야 정말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정말 뻔뻔스럽다는 말 외에는 달리 저는 말 할 수가 없어요. 보통 인간은 자기 일에 자기가 잘했다든지 잘못했다든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잘했으면 칭찬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이방종교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이방종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칭찬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해서 환장을 했다고요. 뭐가 없어져버렸어요? 자기가 자기 인생에 홀로 남았어요. 자기를 둘러친 마땅함의 환경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런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보니까, “주께서 고난의 길을 갔으니까 니도 고난의 길을 가라.” “예. 고난의 길을 가고말고요. 다 내좋아라고 하신 말씀인데. 나를 천당 가도록 한 이 길을 가겠습니다.” 이래 나오더라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마땅함입니까? 하등 달라질 게 없는데요. 지금 전혀 안 달라졌어요. 고집스럽게 내 가치를 지키겠다는 고집만 덜렁 있다 이 말이죠. 자, 칼빈의 사상이 이와 같은데 칼빈 사상을 이야기할 테니까, 여기 문제점을 이야기해보세요.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럼 인간의 노력은 뭐냐,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그 은혜가 은혜답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력하는 것이고, 성화하라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노력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구원받았다. 이게 칼빈의 사상입니다. 문제점이 뭐예요? 실컷 복음 듣고 실컷 공부해도 칼빈이 한마디 딱 던지니까 할 말이 없죠. 칼빈이 뭔가 좀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라. 뭐가 잘못 되었는데요? 개인구원취지입니다. 칼빈은 달라져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우리가 행한다고 은혜가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라는 칼빈의 생각. 제가 이렇게 이 이야기를 안 하고 그냥 이야기하니까 반박하기 힘들죠. 그렇잖아요. 어? 지금 칼빈이 이야기했어?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한 게 아니고 칼빈이 이야기했어? 칼빈의 이런 개인적인 구원사상은 뭐가 마땅함이에요? 내 구원이 마땅함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내 구원이. 그게 달라져야 된다니까요. 그게. 그게 성령님을 통해서 달라져야 된다고요. “목사님. 저 구원받았어요. 구원받았으면 됐지, 뭐 필요합니까?”라는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돼요. 근데 할머니 될 때까지 안 달라져. 이게 정말 나이 많이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안 달라질 거예요. 이게.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자꾸 자기 존재가 있으니까 자기 존재의 마땅함을 포기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 마땅함을 계속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아까 언약궤를 이야기했지만, 구약에서 율법과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언약궤 자체가 제사하는 것이잖아요. 제사하는 것. 그래서 선지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잘 보세요. 선지자는 잔소리하는 사람이지, 선지자는 구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선지자로 하여금 그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니 본래의 마땅한 자리로 가라는 거예요. 그 마땅한 자리가 뭐냐 제사하는 자리에요. 죽음이 있는 곳이에요. 죽음이 있는 곳. 그 죽음이 있는 곳에는, 우리의 마땅함은 죽음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는 제단 앞에서는 날아가 버려요. “너의 마땅함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죽어버려라.” 죽어버려야 돼요. 죽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요지부동의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이 누구냐 하면은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레위언약이 회복이 됩니다. 제사장 언약이에요.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뭡니까? 하는 일이 뭐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에요? 죽이는 일이에요? 먼저 죽이는 거예요. 사람 죽이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보자. 니가 죽은 다음에 눈뜨고 한번 보자는 거예요. 그럼 순환하는 회전목마에서 잡아 땡기면 우리는 삽니까? 죽습니까? 죽지요. 뭐가 죽느냐 하면은 나의 존재의 마땅함이 깨지면서 이게 죽음으로 오는 거예요. 죽음으로. 사람이 자살할 때 왜 자살을 합니까?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자살을 하잖아요. 자기 뜻대로 되는데 자살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자기 뜻대로 잘 돼서 자살한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자기 맘대로 안 돼서 자살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자살하기 직전에 생각했던, 자기는 뭘 갖고 있습니까? 자살한 어떤 목사를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자살을 했는데 자기 뜻대로 잘 돼서 자살했습니까? 목매서. 아니죠. “내가 복음을 전해줬으면, 진실을 전해줬으면 이 인간들아 좀 믿어도!” 지금 이런 마땅함이 있죠. 이런 고집스러움이 있는 거예요. “내가 거짓을 고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했으면 좀 이렇게 받아도!”라는 말이죠. 그게 안 되니까 자살한 거죠. 그게 안 되니까.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제가 한 이야기는 억측이 아닙니다. 기분 좋은데 자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죠. 기분 좋은데. “아, 기분 좋은데 오늘 자살이나 하자. 퍼뜩 문 열고 투신하자.” 이런 사람은 없죠.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은. 기분 나빠서 뛰어내린 거예요. 기분 나빠서. 보통 여자들이 부부싸움하고 충동적으로 뛰어내린다고 하잖아요. 근데 아파트 살 때는 제발 1층 좀 하세요. 아파트 구입할 때는. 이 면상만 갈도록. 뛰어내릴 것도 없이. 괜히 충동적으로 뛰어내리니까 이게 5층인지, 6충인지 구분이 안 돼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세상에 중력의 마땅함을 누가 이깁니까? 중력의 마땅함을 누가 이겨요. 지가 뭔데 중력을 이겨요? 완전히 가루가 돼버리죠. 지구가 셉니까? 지 몸, 한 69킬로그램이 셉니까? 지구는 엄청 질량이 많은데. 과학도 몰라. 기분 좋아서가 아니고, 이미 자기만의 마땅함이 있죠.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마땅함입니다.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우수함, 나는 행복해야 돼. 앞에 있는 교회가 뭐예요? 행복 나눔 교회죠. 그 뜻은 뭡니까? 우리는 행복해야 마땅함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구원파가 뭡니까? 우리는 구원을 해주겠습니다, 라는 거죠.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처럼 구원파가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묻는 것은 전제가 뭐가 깔려있어요? 전제가. 그라운드에. “우리는 구원받아 마땅합니다.”라는 게 깔려있다고요. 그러면 주님의 율법의 마땅함은 그런 인간을 죽여 버리잖아요. 그 구원의 마땅함을 죽여 버리고, 오직 언약의 마땅함을 앞장세우고자 그걸 교체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작업을 이스라엘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마땅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게 죄 아닙니까? 마땅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게 죄거든요. 그러나 죄를 아는 것이 죄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마땅함 자리에 서서 그 시선으로 보니까. 아, 내 위주의 마땅함이 죄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아는 것이 죄가 아닌 의에 자리에 이미 와있기 때문에 비로소 죄를 아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구약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여호와를 잊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잊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가 주신 언약을 잊었다는 겁니다. 그 언약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에요. 당신은 무슨 근거로 해서 그걸 주장하느냐고 하면 바로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인되는 지점은 어딥니까? 자기 집입니까? 아니면 모리아산이에요? 모리아산에서 누굴 바쳐요? 뭐 아무나, 이스마엘을 바쳤습니까? 이삭을 바쳤습니까? 이삭을 바쳤죠. 이삭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삭은 누구 뜻이었습니까? 아브라함 자기 뜻이었습니까? 자기의 마땅함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아니죠. 이삭 안에는 아브라함의 마땅함이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럼 이삭은 뭐로 태어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천사가 이야기하죠. 이삭은 누구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누구의 마땅함이에요? 하나님의 마땅함이, 그걸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자녀다. 약속의 자녀가 어디로 들어간다? 바로 하나님의 마땅함을 보여주는 제물로서, 거기에 유일한 제물로 들어간다고요. 그러니까 마땅함으로 성사가 되려면 인간은 배제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은 배제되는 거예요. 뭐가 들어가요? 하나님의 자식이라야 할 수 있는 이삭이 죽음으로서, 제물로서 아버지의 칼 앞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무리가 되는 그 마땅함이 내 존재의 마땅함과 바꿔치기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마땅한 겁니까? 백 살 넘은 할아버지보고 이야기해보세요. “오래 사셨으니까 이제는 죽어도 마땅하죠?” “미쳤나! 내년에 또 살 건데.” 자기존재의 마땅함이죠. 그 사람한테는 무엇의 마땅함을 거부하는 겁니까? 죽음의 마땅함, 나한테는 죽어야 된다는 마땅함이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해버리는 겁니다. 제가 방금 백 살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천식 있는 마당에 잘 됐네. 복음 안 전하고 죽으면 되겠네. 미쳤어요? 약 여덟 가지 먹고 살아서 다시 낯짝 뵈었다 이 말이죠. 살아서 빵 먹고 박카스 먹고. 이 뻔뻔스러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뭐냐 이 말이죠. 주님? 아니죠. 약속, 십자가 아니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의 존재의, 나의 생계의 마땅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마저 이게 엉터리고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의인입니다. 성령 받은 의인이에요. 우리가 일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을 찬송할 용의가 되어 있어요. “아이고, 이렇게 잘 돼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사스럽고 뭉개지고 망가지고 남한테 손가락질 당할 때에, 그것에 자기 자신한테 실망을 한다는 자체가 그게 잘못이에요. 우리는 자기 자신한테 실망할 자격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 자격도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바보같이 내가 그런 잘못을 하다니, 라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주의 이름을 뭉개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정리해봅시다. 자, 주의 이름은 구약에서 무슨 작업을 하신다? 주의 이름은 제사작업을 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내린 것이 뭐다? 언약이다. 그 언약을 구체적인 물체로 만든 것이 뭐다? 언약궤다. 그래서 그 언약궤가 있는 곳에 누가 있다? 주의 이름이 그곳에 계시는 거예요.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뭐로 몰아넣는다? 죽음으로 몰아가서, 그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몰아세움으로서 무엇의 마땅함이 등장하느냐? 언약 또는 약속의 마땅함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크게 쓰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강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이스라엘은 만두의 속 재료” 그 이스라엘이 십자가를 통해서, 새 언약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라면, 교회라면 성도는 뭐다?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만두에 들어가는 만두의 속 같은 거예요.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받고. 우리는 뭉개지든지 짓밟히든지 망가지든지 우리 일상에 관계없이, 우리는 만두피 안에 소복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도 납작 만두 말고요. 군만두 말고요. 토실토실한 고기만두. 마치 눈사람같이 위에 불룩 튀어나온 고기만두 안에, 여러분 상상을 좀 해보세요. 고기만두의 만두피, 밀가루가 쪼개지는 순간 고기하고 두부하고 부추하고 막 들어있다고 생각하죠. 그것도 신곡시장에서 잘못사면 만두피만 이만하고 속 재료는 없을 수가 있는데. 우리 인생은 누구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그 만두 속에 보면 어떤 사람은 고기로 들어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두부로 들어간 사람이 있죠. 각각 주님께서 속을 빚은 데에 있어서 사람마다 똑같은 게 없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로, 어떤 사람은 집사로, 어떤 사람은 그냥 평신도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여러 가지가 있더라도 그게 뭐 대수에요. 그 다양성은 하나의 단일성 속에 다 모이잖아요. 만두 속이라는 것. 자, 여러분들이 오늘 제 강의를 이해했는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내가 만약에 무슨 실수를 했다. 그러면 우리는 보통 나의 존재의 마땅함, 나의 가치의 마땅함 같으면 우리는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두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의 마땅함의 결과로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가슴 칠 일이 아니고, 다시 한 번 내 마땅함을 으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잘나야겠다고 우기는 내 마땅함을 박살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집안은 이정도 되어야 하고 내 아이는 공부 잘해야 된다는 그것. 스카이SKY정도의 대학은 가야 된다는 그것을 박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스카이인데, 우리 애는 그런 대학을 안 가도 좋습니다. 그저 하버드나 예일대나 이런 데. 또 잘못 가가지고 6만불 물어내고 하지 말고. 왜 우리는 누구 속에 들어가는 재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변화 못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홀로 존재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홀로 존재하면 안돼요. 부름 받았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 처음부터 새로 들어가 봅시다. 도대체 주께서 불러줬다는 말은 뭐냐, 거기에 만두를 집어넣어야 해요. 갑자기 제목이 ‘마땅함’에서 ‘만두’로 바꾸고 싶은데. 우리를 왜 불러줬습니까? 우리를.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 구원받으려고요? 그래서 내 존재의 마땅함을 긍정하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우리는 아담에서 태어났어요. 아담의 본성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서 태어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쳐다보느냐 하면은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다 지켜봐요. 지켜보니까 제각기, 제각기 자기 마땅함에 아주 충실해요. 아주 충실하다고요. 결혼하기 전에 총각들 모여가지고 뭐 이리 핑계다고 술 한 잔, 저리 핑계대고 술 한 잔 하다가 갑자기 결혼하고 난 뒤에는 오늘 회식 못한다. 나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 집사람이, 내 아내가, “오빠! 일찍 들어와!”라고 해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 갑자기 술친구의 마땅함에서 가정의 만두 속이 되고 말았어요. 누구의 소속이 되고 말았죠. 아휴! 정말 성령 받아야 이런 변화가 있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 받은 척 하지마세요. 성령 받은 척하면 이게 안 돼요. 성령 받은 척하면 이게 개인구원 돼요. 아까 칼빈은 개인구원이잖아요. 목사님, 이래, 이래가지고 구원되잖아요. 맨날 하는 소리가 이렇게 해서 구원되잖아요. 예수 믿고 은혜 받아 감사해서 봉사하면 될 게 아닙니까? 맨날 자기구원의 마땅함이에요. 자기 구원의 마땅함. 오늘 제가 마땅함이라는 단어를 백 개는 더 했지 싶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그 율법의 마땅함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 죽어 마땅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율법에 들어가는 제물이 뭐냐 하면 이미 알아요. 우리가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것을 이미 안다고요. 알기 때문에 희생양을 준비하는 거예요. 어린양을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꽂혀야 되느냐 하면은 그 희생양에 꽂혀야 돼요. 자기의 가치에 꽂히면 안 됩니다. 그거는 자기 가치의 마땅함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구심점, 핵심은 어린양, 그 희생제물의 마땅함 그것만 고집합니다. 우리는 어린양 속에 죄인으로 기어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게 뭐가 어려워요? 아니, 참 어렵구나! 그게 무척 어렵구나! 사람이 살아오면서 지 잘난 맛에 살아오기 때문에 그게 누적이 되어 있어요. 그 암 조직이. 우리 전체가 암 조직이에요. 나 잘났다. 나 잘났다. 그 세포를 하나하나 뗄 때마다 나 잘났다. 또 이거 떼면 나 잘났다. 어느 구석이든 나 잘났다, 에요. 나 잘났다가 뭉쳐서 우리가 육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제일 실례가 되는 것은 허락 없이 손으로 남의 육체를 건드린 게 이게 실례가 돼요. 우리는 굉장히 점잖은 체 하지만 허락 없이 누구의 몸을 만지면, 터치하게 되면 분노합니다. 국회의원들이 말로 하는 것은 괜찮아요. 뭐 이렇게 욕하는 것은 괜찮은데, 뭐 이렇게 해서 말로 하다가 밀잖아요. “어! 이게 어디서 손대고! 이거 폭행이다 빨리 찍어라! 폭행죄다.” 인간이 말로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느냐 하면은 내 신체에 대해서 나 말고 아무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커서는 부모나 일가친척이나 가족도 자기 허락이 없이는 못 만져요. 만질 수가 없어요. 오래 함께했던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여보! 오늘 고생 많이 했지?” “어딜 손대고 있어. 저리가! 침대에서 나가 밑에서 자! 내 허락도 없이 어딜 기어들어와! 어딜 베개 들고 와! 밑에 내려가!” 참고로 우리 집에는 침대가 없습니다. 우리집이야기는 아니에요. 비난하는 것은 좋지만 신체에 손대는 것은 용납이 안 돼요. 강제추행이 되겠죠. 그 정도로 나의 하나는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나의 신체의 마땅함, 절대성 이거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르심이 20미터만 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요. 20미터, 30미터, 50미터, 계속해서 부르심.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불러준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육체 자체가 고집스럽게 자기의 마땅함을 포기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실타래, 십자가의 등대가 반짝일 때마다 다시 한 번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알았다고 해서 내가 의인이 된 게 아니고, 그게 용서의 부르심의 의로움, 불러주심의 의로움이에요. 내가 의인이 되는 게 아니고, 나 여기 있는데 주께서 불러주심 자체가 말씀의 완성으로서 이게 의가 생산이 되는 거예요. 부르심 자체에서, 그 관계성 자체에서 의가 된다는 거예요. 관계성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에 의인이 되면 이게 또 자기 의의 마땅함으로 전락해버립니다. “나 의인이다.” 이런 식으로. 그게 뭐다? 아까 이야기한 칼빈의 잘못이었다. 루터의 잘못이에요. 또 개인구원으로 가버렸어요. 개인구원으로. 만두 속이 아니고 지가 만두라고 우기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구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따로 놀겠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늘 누누이 말했잖아요.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그걸 만두 속으로 바꾸세요. 만두 속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만두 속으로. 자 이쯤 했으면 오늘 본문이 이해된다고 제가 약간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20절을 봅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자, 21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독단적으로 마땅함을 갖고 있는 너희여! 그 자체가 죄고, 죄이기 때문에 주의 십자가가 등대처럼 반짝입니다.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구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했죠. 언약에서는 뭘 다룬다? 제사장들이 뭘 다룬다? 죽음을 다루죠. 예수님은 뭐다? 예수님 자체가 제사장이고 예수님 자체가 제물이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죠. 주님 자체가 주의 이름이잖아요. 그것이 이 땅에서는 확실한, 영원한 마땅함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십자가의 마땅함이에요. 그게 피 흘림의 마땅함이라고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뭘 얻기 위해서? 피 뿌림이다. 피의 마땅함이에요. 아! 참, 이 피의 마땅함. 이 함축적이 된 것을 정말 여러분들이 아셨으면! 아시겠지! 여러분의 마땅함, 성령 받았으니까. 피 안에 함축이 되었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축구를 하던 야구를 하던 뭘 하든 그게 피의 기능이에요. 야구장에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야구 구경하면서도 그게 피의 기능이라니까요. 피. 롯데 이겨라! 두산 이겨라! 두산이 이겨야 마땅함이 아니고, 누가 이기든 그거는 마땅함이 아니다, 라고 아는 그 피의 마땅함. 야구를 해도 주의 피의 의미 안에서 야구하게 되어 있어요. 홈런을 몇 개 치느냐는 것도 주의 허락이 나야 홈런을 쳐요. 홈런인데 새가 와서 물어 가면 홈런이 안 되거든요. 그렇죠. 1회에 홈런 다섯 방 날려서 15대 1, 2회에 25대 1, 3회에 비가 오면 몰수 게임으로 없는 것이 돼요. 홈런 100개를 쳐도 홈런 다 날아가 버려요. 야구의 마땅함이 아닙니다. 남북경협의 마땅함이 아니고, 남북통일의 마땅함이 아니에요. 경제발전의 마땅함이 아니고, 내 생존이 마땅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마땅함이에요. 세종시에 사는 어떤 집사님은 아파트를 샀는데 아파트 준공검사가 안 떨어져서 못 들어가요. 전에 말씀드렸죠. 대전강의에서. 거기다가 온 재산을 다 넣어놨으니까. 그럴 때 우리 마음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나는 구원받은 거 맞다고 얼마나 우기겠습니까? 항상 어떤 사태가 오는데 그 사태는 십자가 등대에서 번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실타래가 풀려서 뭘 유발한다고 했습니까? 사태가 유발되는 거예요. 실이 이만큼 풀리면 그만큼 새로운 사태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50미터 왔다가 이제는 또 20미터 들어간 거예요. 50미터 왔을 때 나는 십자가 아니까 구원받았구나! 생각했는데, 그 자체가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 변화가 20미터 가니까 갑자기 아파트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입주가 안 되니까. 이거는 십자가의 고귀함은 절대 위로가 안 돼요. 아파트 입주를 해야 돼요. 지금 그 분이 입주를 했기에 제가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입주를 안 했으면 약 올린다고 할 텐데 입주가 됐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십자가로 은혜를 받는다고 해놓고 막상 사태가 일어나고 사건이 벌어지니까, 갑자기 내가 쌓아왔던 내 가치, 내 의미의 마땅함이 다시 불현 듯 내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내가 계속해서 연이어 달라져야 한다는 조짐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 내가 여기서 다 됐구나, 라는 것이 안 되는 거예요. 여기서 다 됐다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말씀의 위주입니까? 우리 개인의 행복위주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내가 살아있습니까? 말씀이 살아있습니까? 말씀이 살아있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그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고. 십자가의 그 자취를 밟아오기 위해서 내일되면 주께서 준비하신 화살이 뭐가 날아올지 몰라요. 아니 날아와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마땅함의 근거는 나의 존재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이미 ‘다 이루었다’의 피에 있기 때문에. 만두가 내 만두가 따로 없어요. 내 만두를 없애버립시다. 우리 만두를 칼 가지고 찢어버려요. 우리 만두는 없고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 만두, 예수 안이 전부에요.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올 생각을 말고 주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면 되거든요. 이렇게 볼 때에 다시 여러분들이 지난날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혼동하고 무엇에 무지하게 살아왔는가를 보세요. 은근히 내 구원을 챙기는 그 버릇을 되풀이하지 않았는지. “주님, 십자가 감사합니다.”라는 그것을 땡겨서 자기 구원에 유리하도록 나한테 달라붙게 만든 것은 아닌지. 어느 쪽의 마땅함을 버리고 어느 쪽의 마땅함 속에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지를. 지난 과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지난 과거를 생각해보라고 하느냐 하면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앞으로도. 내일 되면 무슨 사태가 또 일어날는지. 개가 또 내 손가락을 물지.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거예요. 오토바이 타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문제고. 치마를 샀는데 치마가 안 맞아서 반품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도 있고. 얼마나 왕짜증나겠어요. 하지도 못하는 홈쇼핑에 주문 겨우 해놨는데 와보니까 치수가 안 맞다 이 말이죠. 반품하려면 또 눌러서 “고객님!” 하면 짜증나는 거예요. 짜증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여,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하고 으르렁대죠.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 뭐라고 하냐? 니 마땅함이 니 행복의 마땅함이냐? 왜 니가 왜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느냐? 암이 또 재발했다.” 우리는 맨날 암이 재발해요. 나 우선의 암. 나 위주의 암. 자, 그 다음에 22절을 봅시다. 여기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제 이해가 될 거예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주님 욕 안 했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주님 입에서 하신 적 없어요? 우리는 그것을 욕으로 해석합니까? 마땅함으로 해석합니까? 마땅함으로 해석해야 돼요. 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 집에 어떤 탤런트가 집을 방문했다. 그럴 때 정말 솔직담백하게, 남 눈치 안 보고 용감한 9살 먹은 어린 조카가 하는 말이, “우리 탤런트 누님! 드라마에서 볼 때는 되게 예쁜데 현실에서 보니까 진짜 못생겼네요.” 이게 욕일까요? 솔직함일까요? 솔직함이죠. 주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은 솔직함이에요. 독사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솔직하게 하면 돼요. 뭐 일부러 욕할 필요는 없어요. 솔직하게 하면 돼요. 아닌 건 아닌 거거든요. 미워서가 아니라 그러함이 마땅함이기 때문에 할 뿐이에요. 23절,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보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이겁니다. 여기 목사님이 계시니까 물어봅시다. 목사님이 평생 동안 식구들을 위해서 봉사하셨습니까? 구체적이 아니라 아주 두리뭉실하게입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까? “예” 지금 정답을 알아서 ‘예’라고 하는 것 같은데, 무조건 이거는 아니고 보자, 겐또, 어림잡아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장이 되면 누구나 가족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게 되어 있어요. 봉사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세요. 가장이 되었으면 봉사를 많이 한 게 아니고 가족들로 봉사를 받았어요. 목사가 복음을 전한다, 이러잖아요. 목사가 복음을 전해서 교인들을 섬겼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정말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오히려 교인들로부터 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남한테 봉사한다고요? 우리가 주님한테 매일같이 봉사 받고 있습니다. 근데 주님한테 고맙다고 합니까? 아니면 짜증내고 반항합니까? 반항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내 마땅함 때문에 말씀위주의 마땅함이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틀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매일같이 알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아는 것이 뭐가 아니다? 죄가 아닌 거예요. 죄를 아는 것이 죄가 아닌 거예요. 이 말씀대로 지켜라가 아니라 이 말씀의 마땅함 쪽으로 가게 되면 너는 얼마나 어설프며 그리고 니가 말씀보다도 내가 잘 되어야 되고 내가 구원되어야 된다는 그 마땅함이, 아직도 죽을 때까지는 내 몸에 계속 살아있다는 그 의심스러운 잘못된 그 모습을 내 눈으로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길이다? 그게 바로 좁은 길이고 영생으로 가는 길이에요. 영생으로 가는 길은, 주님 어디로 가셨습니까? 이게 아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알 수 있는 그길. 그게 바로 영생의 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좁은 길로 가는데 어느 바보가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마땅함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죠.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나오잖아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원치 않는 길은 무조건 좁은 길이에요. 왜냐하면 내 원함은 여기서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재벌 집에 시집을 갔는데, 뭐 여기 계신 분들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재벌 집에 갔는데 그 아가씨가 어릴 때 트라우마가 있어가지고 잡채를 못 먹어요. 그런데 그 재벌 집은 시도 때도 없이 잡채만 먹는 집안이라면 행복하시겠습니까? 바짝 말랐어요. 먹을 게 없어서. 우리 총수 재벌님이 잡채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바짝 말랐어요. 혹시 오늘 오실 분이 안 보이는데, 그분 빵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요. 50미터 왔으면 주께서 원하는 길을 들어줄만한데, 50미터 오든 80미터 오든 계속해서 원치 않는 길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열심이고 주님의 고집입니다. “난 절대로 니 고집에 말려들 생각이 없다. 그리고 니도 니 고집 포기할 생각 없지? 그러니까 니는 죄고 나는 의가 되는 것이다.” 죄인이 갈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옥가야 마땅함. 그게 바로 우리의 소속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율법이 저주의 마땅함이죠. 그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죠. 십자가 앞에 우리는 지옥가야 마땅함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주님의 그 율법의 완성이 우리가 아무리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육의 한계, 마땅함의 한계를 그냥 두고서, 그냥 그걸 둬요. 뭐, 이렇게 촉구하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두고 주님의 의가 그걸 덮쳐서 그 못돼먹은 그것을 그냥 만두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 안에서 졸지에 우리는 의가 돼버린 거예요. 내가 죄인인 줄 알고 정신 차린 것이 아니에요. 그냥 정신 차려도 소용이 없어요. 그저 며칠 가면 또 마찬가지가 되니까.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데, 다만 달라진 게 뭡니까? 내가 착하게 살겠다, 나는 나쁜 짓 안 하겠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달라진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만두의 속이 되었다는 사실. 이런 안목이 바로 달라짐이에요. 이제 이 말씀을 알겠습니까? 이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부르심 안에 이렇게 절차가 주어지고,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주의 부르심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부조내면 그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식권 딸려 나옴. 2장정도로. 이게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부조 냈는데 식권 달라고 하니까 따로 5만원이라고 나오면 이거는 이상한 거잖아요. 주께서 십자가 졌다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죄인도 뭐 된다? 구원된다! 까르르! 이게 포함이 됐다 이 말이죠. 십자가 안에. 진짜 믿어지십니까? 정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길로 가버리면 갑자기 주님의 십자가 이거는 뒷전이고 구원받은 내가 내 자랑거리가 돼버려요. 나는 내 구원받은 것을 증거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건 개인구원이 되죠. 칼빈처럼, 루터처럼.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아시겠습니까? 안다고 치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마땅함이 이미 둘둘 감겨있음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촉구함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변화가 주님의 약속의 든든함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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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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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