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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마땅함 190308강의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90308a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1-23절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장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예수님이 가게 되면 그 뒤를 누가 따라간다고 했습니까? 그 뒤를 성도가 따라가는 걸로 되어 있죠. 그런데 누가 불러주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따라올 성도를 먼저 불렀죠. 예수님이 먼저 불렀다 이 말이죠.

그렇게 따라갈 때에 따라가기를 시작했던 그 지점,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주님이 불러주세요. 오늘 강의가 좀 난해하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주님이 우리 성도를 부르신다 이 말이죠. 불러주신다. 그렇게 할 때, 이 ‘불러주신다’가 우리가 부름을 받고 반응을 나타나게 되면 이 ‘불러주신다’가 사라질까요? 아니면 우리 안에 흡수통합 이 될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줄 때에 그 불러줌에 응답해서 우리가 따라간다면 이 불러주심이 도중에 사라져버립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불러주심에 의해서 우리가 움직였으니까, 이 불러주심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흡수통합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죠. 이 불러주심이.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가 되겠죠. 근데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이것이 옳은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일까요? 이것이 성경이고, 계시고, 바른 고백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 겁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 이게 계시냐 이 말입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것이.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나는 나라고 우기는 데에 문제의 시발점이 시작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께서 불러줄 때는 달라야 된다 이 말입니다. 달라야 된다. 부르심을 입기 전의 나와 부르시고 난 뒤에 내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에서 여기 우리까지가 한 100미터라고 봅시다. 그럼 100미터 이전에 부르심을 입었잖아요. 부르심이 있으니까 주님을 따라갑니다. 좁혀갑니다. 100미터 전에서 한 20미터를 왔을 때에 20미터의 내가 여기에 있죠. 20미터의 나. 그렇겠죠? 부르심이니까 우리가 주님께 가잖아요.

그럼 여기 100미터이전을 A라고 하고 20미터를 B라고 한다면 A와 B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첫째는 똑같다. 두 번째는 달라졌다. 어느 쪽일까요? 나를 불렀으니까, 부르심이 중요하니까, 나는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이 그냥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는 변화가 없는 부르심은 없습니다.

변화가 없는 부르심이 없다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왔을 때에 우리는 달라져야 하잖아요. 그 달라졌던 그것을 우리 자신이 인식하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한 50미터를 더 갔다고 봅시다. 20미터에 30미터를 보태서 50미터 갔다고 봅시다. 그럼 50미터 왔을 때에, 20미터 다르고 100미터 전까지는 다르고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우리가 어디에 치중하느냐 하면은 도대체 나는 어떤 점에서 부르심을 입고 난 뒤에 변화되었는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부르심을 입고 난 뒤에 인간은 그냥 고정된 나를 주장할 수 없고 달라져야 된다는 것. 달라져야 되는데, 근데 그 달라져야 되는 그것이 나는 달라졌다고 이야기 할 때 그게 과연 정답일까? 하는 그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달라졌다고 할 때 제대로 뭘 알고 달라졌다고 하는지, 아니면 달라졌을껄! 해가지고 일방적으로 달라졌다고 우겨서 달라진 것인지, 그것의 원리를 생각해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지, 먼저 잘못된 생각부터 말씀드릴게요. 잘못된 생각은 내가 달라졌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러면 안 달라지는가? 달라지죠. 달라지는데, 달라진 것도 모르고 무조건 내가 달라진 거 맞습니다, 라고 자꾸 우기는 버릇이 있다 이 말이죠. 주님 앞에 책망 안 들으려고. 뭐가 달라진지 몰라요. 모르고, 하여튼 달라졌습니다. 주여! 이런다 이 말이죠.

주님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부르심을 더 구체화시키는 쪽으로 달라졌느냐를 묻는 겁니다. 나는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때에, 이 관심사는 뭐냐 하면 부르심에 관심사가 있어요? 아니면 자기 구원 받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구나! 기분 좋다! 자기 구원받았다는 데에 관심이 있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부르심 자체가 도중에 소실돼버려요. 그리고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됐다고 하면 한 번 부르심으로 모든 것은 그 다음부터는 안 불러주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불러주셨다. 그래서 내가 달라졌다. 뭐 더 이상 불러줄 게 뭐가 있어요? 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몇 번 부르심이어야 하느냐? 두 번. 그럼 까짓것 두 번 달라져보지. 그럼 두 번 달라지면 부르심이 없습니까? 에이, 그러면 세 번. 그럼 세 번 불러주고 달라지면 그걸로 종치는 거예요? 1학년, 2학년, 3학년, 어디 중학생입니까? 3학년만 하고 졸업하게? 에이, 모르겠다. 490번. 490번하고 끝나는 겁니까? 용서하되 490번만 용서하면 그 다음부터는 용서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490번만 용서하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490번인데, 그 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런 겁니까?

자, 어떤 사람이, 하린이 네가 490번 용서했다고 치자. 그러면 용서를 되게 많이 했잖아요. 490번이니까. 그럼 491번은 그전에 용서한 것이 많아가지고 491번째는 이제는 느긋하게 용서 안 해도 천국 가는데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490번이나 용서했는데. 됩니까? 안 됩니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8장에서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잖아요. 그럼 490번 했다 이 말이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단하지. 그중에 몇 개 빠질 수가 있는데, 야무지게 딱딱 장부에 적어서 드디어 26년 만에 490번! 이래 된 거예요.

여러분들 중에서 나이가 한 50넘게 되면, “목사님, 저도 어릴 때부터 계산하면 490번이 넘습니다.”라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거예요.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걸핏하면 뭐든지 용서해주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 490번이 아니고 여러 사람까지 계산해보면 그 정도 된다 이 말입니다. 490번. 용서는 처벌이 뒤따라오고 난 뒤에 되는 거예요. 한 대 맞아야 용서가 되지 그냥은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490번을 용서를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용서를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해야 되겠죠.

그러면 용서를 해야 된다는 말은 490번 가지고는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뭐가 추가가 되어야 해요? 계속해서 부르심이 추가가 되어야 되겠죠. 결국은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지금 이 말씀이 너 이렇게 부르심을 받고 따라오면 구원받는다고, 구원을 챙기라는 구원의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지속적인, 멈추지 않는 그러한 주님의 하신 일을 드러내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초점과 강조점을 나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에 두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한 번 정리해봅시다. 주께서 불러줄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 변화가 뭐냐 하면 차츰 나아지기, 차츰 착해지기, 차츰 경건하기, 지금 이런 문제가 아니고 무슨 문제냐 하면은 내가 얼추 주님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을 안다고 하는 것이, 여기 100미터에서 20미터 땡겼으니까 한 80미터 왔죠. 그 80미터의 상태가 나는 이제 부르심도 알고, 주님도 알고, 주께서 인도 하는구나, 라고 한다면 그것이 50미터에 왔을 때는 어떻게 된다? 그것마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그것마저 달라져야 해요. 그래야 계속 예수님의 부르심만 살아남죠.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경우가 왔었는데 정신 바짝 차려서 죄를 안 짓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죄를 안 짓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죄짓는 상황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유야무야 사라졌습니다. 그럴 때, “주님! 죄 지을만한, 시험들만한 경우가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효과입니다.”라고 이렇게 했을 때에,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의 가치보다 말씀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니가 왜 모르느냐?” 우리는 말씀을 생각할 때, 결국 궁극적으로 자기 가치가 어떠냐에 대해서 치중을 하면서 말씀을 본 거예요. 나의 가치에다가.

반대로 생각을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만 죄를 지었어요. 참지 못해서 시험에 들어 죄를 지었다 합시다. 그러면 “주님이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인정합니다.”라고 했을 때에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 인정해라. 회개하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너의 가치보다 말씀의 가치가 더 낫다는 것을 니가 왜 모르고 또 다시 너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부르심의 효과를 니가 지금 곡해하고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불러주게 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변화가 되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월등한, 월등하게 나아진 존재로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부터가 달라져야 한다는 이 말이죠. 그게 부르심의 효과거든요. 이렇게 고함질러서 천식 회복됐는데 다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닌지. 본문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자취는 인간이 연구하고 탐구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자취는 누가 본을 끼쳤으니까, 모델이 되었으니까, 모델, 갑자기 모델이라고 하니까 전현무가 한혜진하고 헤어진 게 생각이 나네. 모델이 되었으니까, 주님께서 패션쇼에서 옷 입고 런웨이runway하는 거예요. 모델이 되었으니까 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부르심을 입었다는 그 말은 뭐예요? 주님 가신 그 길만 용납이 되고 다른 길은 용납이 된다? 안 된다? 용납이 안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주님께서 자취를 벌여놓지 아니하면 우리 나름대로의 예수님을 재해석해가지고 “주님, 이렇게 가면 주님 가신 길이 맞죠?”라고, 결정을 누가하느냐 하면 본인이 결정을 해요.

근데 본인이 결정해서 가게 되면 그 사람은 조금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잘 가고 있는데 뭐가 달라? 뭘 또 여기서 달라질 게 뭐가 있어요? 달라질 게 없죠. 결국 주께서 불러준다는 말은 뭘 잊으라는 말입니까? 나 조금만 더 하면 나 천국 간다는 생각, 그 생각을 잊어버려야 돼요. 그러면 자꾸 내 쪽에서 기대를 하게 되는데, 그 기대를 하게 되면 뭣이 뭉개지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길을 냈고 자취를 갔던 그 의미가 자꾸 배척이 돼요. 그 가치가 밀어진다고요. 사라진다고요.

오늘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주님을 믿었으니까 고난의 길로 가자, 라고 나선다면 백발백중 지옥 갑니다. 이거는 제가 장담하는데 지옥 갑니다.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게 예수님이 가신 길인데, 자기가 뭘 안다고, 예수님이 아마 이쪽으로 갔을 걸? 하고, 자기가 생판 천국으로 통하는 길도 애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모르면서 왜 자기가 고난의 길이라고 우기면서 개척하듯이 그렇게 가냐 이 말이죠.

지금 제가 말을 짧게 하지만 이것가지고 온 교회, 한국교회 역사 속에 다 들어가 가지고 적용을 해보세요. 전부 다 이런 쪽이에요. 주님 가신 길, 고난의 길 해가지고 자기 딴에 개척교회하고 선교사하고 또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고난이 있다고 하고 또 권사님들 집사님들 장로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난의 길을 안 간 사람이 없어요. 안 간 사람이. 전부 다 나름 고난이에요. 나름 고난. 오늘 제목을 ‘나름 고난’이라고 할까요? 전부 다 나름대로 고난이에요. 애 키운다고, 둘이나 낳고 키운다고 고난을 받죠. 세상에 고난이 아닌 게 어디에 있어요? 고난 아닌 게. 전부 다 고난인데.

그러나 고난에 가면 갈수록 누가 빛나요? 본인의 가치는 더욱더 강화가 돼요. 갈수록 못 놓아요. “이만큼 올라온다고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걸 놔! 미쳤나? 이걸 내가 왜 포기해! 지금까지 고생, 고생해서 왔는데.” 어디까지 갔는데? 지옥가려고 고생, 고생한 모양이에요. 고생, 고생해서 이렇게 교회를 번듯하게 부흥시켜놨는데 그 가치를 왜 무시해? 이래 나오더라 이 말이죠. 주님의 고난이에요? 자기 고난이에요? 자기 고난이죠. 자기 고난은 변화가 됩니까? 변화 안 됩니까? 변화가 안 되죠. 그걸 더욱더 간직하죠.

금요철야기도에 가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 적용해보세요. 전부 다 적용이 다 됩니다. 금요철야기도 때 고생 얼마나 합니까? 커피 서너 잔 먹어가면서 그것도 고생이죠. 그리고 가족과 교회를 위해서, 우리나라 대한민국 기독교 국가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남북통일부터 시작해서. 자기 딴에 그게 주님 가신 길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보세요. 거기에 겟세마네가 있거든요. 동영상 올려놨죠. 그 나무가 최근에 심은 뽕나무 아니에요. 전설이 아니고 실제에 의하면 그때 그 나무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한 오십 그루는 넘는 것 같아요. 한 그루였다면 벌써 우상시되었을 거예요. 오십 그루 정도 되니까, 많으니까 어느 쪽이 주님이 하셨는지를 모르니까 아직까지는 멀쩡한 것 같아요. 그 옆에 주님 기도한 겟세마네 이름으로 교회가 또 세워져있어요.

주님이 이 나무 밑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다. 그래서? 그게 고난의 길이다. 그래서? 나도 철야하면서 땀방울이 핏방울까지는 안 되지만, 뭔가 삐질삐질 땟물이라도 안 나오겠어요? 열심히 기도하면 땀이 쏟아지고, 땀 찌꺼기가 나오면 그거는 주님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고난의 길이 맞다, 라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맞아요? 누구 맘대로. 그게 자기의 변화를 유도합니까?

지금 제가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기도하는 이것이 주님의 고난의 길이라는 생각을, 그게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생스러운 철야기도를 내가 한 이상은, 사람이 자기가 한 이상은 자기가 바꿀 마음이 없어요. 그 얼마나 큰 마음먹고 기도했는데. ‘나 오늘 실컷 장난치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하다가 왔어.’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에요. 변화된 사람입니다. ‘아무 부질없는 짓 하고 왔다. 다음 주 금요일에 또 부질없는 짓 해야지.’

보통 부질없는 짓은 안 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변화된 사람은 안 해도 부질없는 짓이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고 도대체 내속에서 무슨 부질없는 짓거리가 이렇게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를 확인하는 입장에서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가족과 우리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니 주님 마귀를 이기고 주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근데 주여, 오늘도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질없는 짓을 제가 또 할 겁니다.” 왜? 나는 뭘 해도 부질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게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이게 부르심을 입었다고요.

주님이 고난 받은 길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이제는 달라졌으니까, 이제는 달라진 내가 뭔가 힘든 일을 하는 고생을 해서는 안 돼, 라는 그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말이죠. 표정들을 보니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취지를 못 알아듣는 얼굴인데, 가정에 보면 실이 감겨있는 실타래(실패)가 있죠. 실타래에서 끝이 조금 풀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누구 옷이나 기워주고 바지 단 떨어진 것을 할 때 이만큼 나와 있는 실을 땡겨 버립니다. 땡겨 버리면 실타래가 한 바퀴 돌겠죠.

여러분 등대 알아요? 등대. 등대를 보면 등대의 불빛이 돌 때마다 번뜩번뜩 빛이 나오죠. 늘 비추는 것이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내 쪽에 왔을 때 번뜩하고 저쪽은 꺼지고 하잖아요. 실타래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풀려있는 끝이 점점 길어지겠죠. 또 한 바퀴 돌리면 길어지겠죠. 십자가를 등대라고 봅시다. 십자가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거기서 실타래처럼 새로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허락이 되고 허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자취를 본받게 하는 이 말씀의 주체자가 누굽니까? 인간입니까? 주님이십니까? 이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은 주님이죠. 주님이라면 누구는 아니다 라는 말입니까? 누구는? 누구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입장인 거예요.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그 난의 길을 따라오게 하는 그 주체가 내가 아니고, 내 구원받겠다고 설쳐대는 나의 욕구, 욕심이 아니고, 이거는 내 욕구욕심하고 관계가 없어요. 이거는 일방적인 주님의 말씀이 더 가치 있게 드러내기 위해서 부질없는 우리가 이 길로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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