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 190308
안양20190308a야5장1절(봉사)-이 근호목사
야고보서5장1절에 보면 부한 자들아, 되어있지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에서의 중요한 것은 이 들으라 부한 자들이 부한 자보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부한 자들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가 부한 자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부하지 않고 나도 부자 욕 좀 해보자고 하는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라고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 나는 부자 아니니까 나는 빼주세요.” 이런 거 안돼요. 성경에 그런 거 없습니다. 부한 자들아! 할 때는 우리보고 들으라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은근히 부에 대한 질투 같은 게 있기 때문에. 남을 욕한다는 것은 질투심 때문에 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가 뭔가 좋은 건데 못 가졌다는데서 오는 결핍을 질투심으로 마저 메꾸기 위해서 자기 조정이라 하는데 스스로 남한테 밀리지 않도록 내가 나를 조절하는 겁니다.
이게 참 무서운 거예요. 이게 큰 죄입니다. 이게 죄에요. 자기 조절. 자기 조절 이런 짓하면 안 되거든요. 사실은 자기 조절. 성경에서는 자기 조절을 오히려 유도하고 있잖아요. 자기 관리, 자기 절제, 이런 성경 비슷한 말이 나오니까 자기 조절을 해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기 조절을 하게 되면 계속 떨어지는 결과물은 어디에다가 치중해야 돼요? 자기에게 치중해야 되지요.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라 하고 점점 멀어지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주님은 우리한테 책임을 묻지 않거든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책임을 물을 것 같으면요, 메시아를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주님 섬길 때 똑바로 섬겨라! 그거 하라고 메시아 보낸 게 아니에요. 내가 메시아 보내줬잖아. 그러니까 메시아를 잘 대접하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우리한테 메시아를 보내줬다는 그런 근거로 또 우리한테 책임을 묻고 그렇지를 않아요.
메시아가 우리의 손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보면 이런 게 있지요. 신용불량자 나왔을 때에 누구한테 자문을 얻느냐 하면 법무사한테 주로 가요. 법무사한테. 그럼 법무사가 신용불량자한테 대접 잘하세요. 똑바로 하세요. 이렇지 않지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수수료만 주시면 제가 알아서 가장 적절하게 채무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럴 때 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가 적절한 거예요. 보혜사,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 이거와 가장 비슷한 직업이 오늘날 뭐냐 하면 간호사에요. 간호사. 옆에서 도와주는 거예요. 치료된 사람을 잘 건사해 주는 것. 치료된 사람을. 이미 건강하게 된 사람을 건강 유지하도록 돌봐주는 겁니다. 참 친절하신 하나님이시지요.
니 건강했지. 이젠 니가 알아서 해라. 이런 거 없어요. 예수님 보내주시고 그 다음에 또 누구까지 보내주신다? 성령 보내주시는 거예요. 예수님 보내주시고 땡하고 손 떼는 거 아닙니다. 성령 보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면서도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제가 알아서 식업 난 이제 정신 차린 내가 알아서 내 인생 내가 욕심조절하고 죄 조절하고 이리 나온다면 누구 보내심이 의미가 상실하지요? 성령오심이 아무 의미가 없지요.
예수님 보내주시고 성령 보내주시는 것은 예수님도 먼저 성령 보내주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메시아 의무를 다 마무리 짓도록 그렇게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 혼자 하신 게 아니에요. 희생은 혼자 하셨지만 모든 희생을 도와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했고 그건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자기 조절을 계속해 봅시다. 이게 자기 조절을 나서버릴 때에 여기에 뭐가 따라오는 개념이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나쁜 개념인데 뭐냐 하면 ‘희망’입니다. 희망은 자기 조절과 관련되어있어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저걸 반드시 희망, 다른 말로 하면 요걸 기대함이에요. 내가 기대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저 기대를 쟁취하고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히 나는 어느 작업에 돌입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나 조절에 나서야 내가 기대했던 그 소기의 성과를 소유할 수 있다는 의식이 이렇게 같이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러니 희망만 없다면 자기 조절이 있어요? 없어요? 희망이 없으면 그냥 자살하지 뭐하려고 자기 조절하겠어요. 뭔가 내다보는 게 있기 때문에 은근히 내가 아직도 버텨야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잖아요. 희망이 없으면 자기 조절도 없는 거죠. 같이 없지요. 그러면 희망은 왜 생기느냐 하면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 망가져야 된다. 이게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서 악마가 주는 시험과 협박과 요새 또 유행하는 개념, 급박 고전적인 개념입니다. 협박, 급박, 두려움, 공포, 이 모든 바탕에는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 모든 교육의 상담이라든지 심리적 상담의 그 기저, 그 그라운드 바탕에는 나는 절대로 이 세상은 망가져도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목회하시잖아요? 망가지고 싶어요? 안 망가지고 싶어요? 교인 앞에서 자기가 좀 존중받는 목회자 되고 싶은 생각 없습니까? 그게 주님의 얼굴을 모독하는 거예요. 깡그리 짓밟는 모습이에요. “망가져도 괜찮아요.” 라는 목회를 해야 돼요.
아~~ 이거 진짜 목사님이 이 목사한테 잘 배워라했는데 잘 배우는 거예요. 욥기에서 마귀가 계속 하나님하고 내기하는 게 뭐예요? 인간은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고 악마도 알아요. 욥이 한계까지 가는데 악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욥은 자기 한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한계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 대로 순종 하고 믿음 다할 테니까 제발, Please 제발 나를 안 망가지게 해주시옵소서! 만약 이 대로 망가진다면 저 차라리 제가 안 태어났으면 저한테 이익이 될 뻔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욥의 그러한 본심이지요. 여러분, 제가 전에 여러 번 했는데 진심하고 진리하고 같아요? 안 같아요? 진심은 진리다. 아니지요. 진심은 본심이에요.
본심인데 인간은 우기지요. 내 솔직함이 곧 진리이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진리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회사에서 신입사원 여자직원을 뽑는데 다른 사람은 토익이 900점이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옆 사람 보니까 자기는 스펙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면접 보면서 막 우는 거예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지금 암 걸려서 말기인데요. 하면서 이리 나온다 말이죠. 회사 업무의 생산성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 삶의 시달림가지고 막 울고불고 내 반드시 해가지고 병든 엄마와 불쌍한 애를 돌봐야 한다고 할 때, 그러니까 찌질이죠.
제가 만약에 면접관 같으면 그 면접하는 아가씨 호소에 그 자리에서 웁니다. 울고 위로해 줍니다. 불합격시켜요. 합격은 회사에 얼마나 생산성을 보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가가 합격해야지 동정하는 거 하고 달라요. 그 아가씨는 뭘 이야기했습니까? 다른 사람은 실력을 이야기할 때 자기는 진심을 이야기했지요. 진심은 회사에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진리가 아니지요. 울고불고 한다고 천당 갑니까? 못가지요. 아픈 것은 아픈 거 맞아요. 괴로운 것은 괴로움 맞아요. 그걸 거짓되다고 우리는 욕하면 안돼요. 속 쓰리지요. 그러나 천국의 원리와 부합되느냐 그걸 생각해야 돼요.
천국의 원리와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원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아는 원리는 너는 어떻게 고생해도 그건 니가 고생하기에 마땅함이라. 망가져도 니가 원래부터 안 망가져야 될 인간이 망가진 게 아니고 처음부터 애초부터 어떻게 더 많이 망가져도 니는 입 다물라. 너는 입 다물라.
거기에 대해서 권리라든지 자기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을 모른다. 왜냐 하면 니는 니 진심을 이야기했지만, 주님, 하나님 안목을 니가 전혀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니 진심은 모른다. 하나님 안목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바로 저주받아 죽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내 자리는 그 자리에요. 십자가 자리에서 죽어 마땅한 거예요. 죄로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4장 끝에 한 번 봅시다. 4장15절, 5장 들어가기 전에 4장15절 다시 한 번 정리해야 돼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4절에 보면 우리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지요. 잠간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면 안개 주제에 희망을 갖겠다는 자체가 이건 자기의 본질과 대치가 되는 주장입니다. 안개 같으면 안개 다워야 되지요. 안개는 안개다워야 돼요.
안개가 뭉쳤다고 해서 그걸 실체라고 우기면 안 된다 말이죠. 매일같이 우리는 슬라이스처럼 전기톱에 고기 썰려나가듯이 대패삼겹살 있지요. 백종원이가 히트 친 거. 계속 슬라이스처럼 잘라내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이렇게 더 잘게, 잘게 부서지는 거예요. 부서지면서 우리는 그 부서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막강한 내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는 데서 나오는 강력한 숨어있는 반발심이 우리 속에서 이렇게 괴물처럼 고개를 내밀게 되어있어요.
그게 우리 안에 어두운 동굴 안에 잠복되어있던 겁니다. 마귀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마귀를 끄집어내는데 성공하시지요. 불신자 같으면 그냥 내어버리기 때문에 수술을 안 해요. 주님께서는 완전히 절개합니다. 절개하고 암 조직을 물컹하게 끄집어낼 때 이게 십자가의 위력이다 말이죠. 십자가의 위력을 설명할 때 가장 간단한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낯설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 집께나 잘 살고 훌륭하고 남한테 욕들은 적 없고 착실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알았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껏 살아온 것과 연계성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연계성이 하나도 없는데, 쓱~ 하고 십자가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뭐지 이거?
착실하게 되면 복 받는다. 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각이거든요. 죄 안 짓고 바르게 살게 되면 뭔가 좋은 날 볼 거야. 희망을 가지니까 나는 자기 절제와 자기 조절에 충실해야 돼. 이 관계망, 이 그물망인데 십자가가 훅 들어오면 낯선 것이 들어와 버리면 지금껏 했던 것은 전부다 폐기처분하고 이것은 쓰레기통에 다 던져버려야 되거든요. 여기서 오는 희열, 기쁨, 말할 수 없지요.
이걸 내가 살아왔던 이 자기조절 모든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는 거거든요. 사람과 상대. 사람이 왜 인생 피곤합니까? 사람과 상대하기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가 훅 들어오면 이제는 사람 상대할 필요가 없어요. 자유에요. 자유. 사람을 자꾸 안목, 시선, 평가, 부모는 자식한테, 자식은 부모한테, 아내는 남편한테, 남편은 아내한테, 그거 너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사람 의식하는 게. 뭐 공부하겠다고 밤중에 돌아다니느냐. 성경공부 한다고 돌아다니느냐. 이러한 남편의 잔소리도 너무 이게 스트레스 받는다 말이지요.
그런데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쓱~ 들어와 버리면 이건 뭐냐, 니는 누구와 사귀라? 이제는 주님과 사귀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깊은 현실감’ 주님과 너무 가까이 사귀다보니까 이젠 주님만 생산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이게 눈이 나빠 가지고 흐릿하게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안보이고 안개로 보이는 겁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열 명 온다. 안개 또 열 명 오는구나. 안개로 보이는 거예요. 왜?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의 무게가 내 인생에 너무 대부분 차지하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 상대하는 것은 건성 건성으로 상대하는 거예요. 건성 건성으로. “우리 회사 왜 지원하시려는 겁니까?” “뭐, 내가 좀 필요한 거 같아서요.” “뭐 잘하는 거 재주 있습니까?” “스펙 쌓았고 이런 일 잘합니다.” 면접관이 이야기하면 면접하러온 신입사원이 그냥 어디 툭툭 던지는 거예요. 내가 이 회사에 꼭 되어야겠다는 것은 아까 뭡니까? 희망이란 말이죠. 그런데 옆에 있는 지원자는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넥타이 다시 한 번 모아 매면서 ‘나, 이거 떨어지면 벌써 12번째 떨어지는 건데. 요번 해가지고 요번 추석 때는 촌에 가야 돼. 이 회사 떨어지면 나는 이제 죽어. 지금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도 못하고 미뤘는데 이거 해가지고 빨리 결혼해야지.’ 그러니까 바짝 긴장이 돼가지고 자기 조절되는 거예요. 예 썰! 예! 하고 있는데,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고 주님하고 실존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남을 대할 때 편하게 대하지요. 의식하지 않고. 제가 면접관 같으면 그 사람 합니다. 그 사람해요. 왜냐 하면 눈치 본다는 것은 자기를 감춘다는 뜻이에요. 진짜 본심은 감추고 자기를 위장해서 자기를 조작해서 그 사람에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회사가도 나올 가능성 있어요. 아마 면접관쯤 되면 그런 것은 알 거예요. 저 사람이 진짜 자신감이 있는지, 아니면 지금 자기를 겸손해 보이려고 위장하는지 대번 알아요.
야고보서4장에서 우리보고 뭐냐 하면 안개 같다 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사실은 쓱 들어오게 되면 이건 낯설다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예상 밖이에요. 결국은 이 세상은 예상 밖의 것과 우리가 예상한 것과의 경쟁마당 이리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예상한다는 말을 쓴 것은 아까 기대한다. 또는 나는 희망을 가져야 돼. 했지요. 희망을 갖는다는 이것이 일종의 이 세상에서 악마가 제시한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든 아주 마지막 무기가 희망이에요. 그 희망에 우리가 발목 잡힌 거예요. 악마한테.
저는 거리에 가면서 취미 중에 하나가 운동할 때 심심하잖아요. 또는 시내 걸으면서 내 잘 아는 거리에 가면서 뭘 보느냐 하면 저 가게 새로 새 간판 걸었는데 6개월내 문 닫는다 내기 걸어요. 나 혼자서. 정말 우리 동네에 6개월 안에 다 문 닫아요. 혼자 꽃하고 축하합니다. 해놨지요. 6개월 되면 다 문 닫아요. 우리 동네에. 시장조사도 안 해봤어. 분명히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폐업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뭐냐 하면 폐업이 안 되면 폐업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2년 계약 해놨지요. 막상 해보니까 장사 안 되지요. 은행 대출 이자는 나가지요. 그러면 이게 계약 1년만 해도 빨리 1년 되면 손해보고 걷어치우고 딴 데 다른 장소에서 해야 되는데 이게 2년 계약이 되어 요새는 5년 계약 요새 법에 10년 계약한다고요.
그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빼도 박도 못해요. 울면서 겨자 먹기로 계속해서 집세 나가야 됩니다. 나중에 다 떨어 먹고 나가야 돼요. 그런데 그 장사 안 되는 가게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까? 내 희망이 내 발목을 잡는다니까요. 진작에 희망을 버리면 될 거 가지고.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애초에 딱 신혼여행 갔다 오고 안 된다고 싶으면 갈라서야지요. 아직 혼인신고 안했을 테니까. 보통 혼인여행 갔다 와서 하잖아요. 그런데 남의 이 눈치 저 눈치 봐가지고 이러다 애 생겨버리고.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애 생기고 이혼하면 더 힘들다고요. 내가 이혼을 조작하는 것 같고. 빼도 박도 못해요. “엄마 그 사람 아무리 봐도 아니야.” 하면 친정엄마가 등짝을 들이 패면서 “야, 들어갈 때 오천만원 들었다.” 금전적으로 문제 잡고 들어오고요. “니 빚 다 갚을래? 니가 집안 우사 하려고 아예 하지 말고 아예 눈 꽉 감고 고추 단추 맵다하되...” 그런 노래 있지요. 우리 민요조 히트 친 대중 트로트 노래 있어요.
여자의 일생은 참는 거다. 이래 가지고. 언제까지? 이건 무기한이에요. 내가 몸 담았던 곳에 내가 발목을 못 뺀다는 것. 그냥 안개처럼 왔다가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이건 성경 말씀이고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몸 담았으면 내 마음대로 못 뺍니다. 내 마음대로 못 빼요. 내 마음대로 폐업이 안돼요. 그런다고 자살하면 안돼요.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그래서 이 야고보서4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성도는 사적인 의도를 갖지 않는 사람’ 사적인 의도입니다. 사적인, 개인적인 의도는 없어요. 성도는 개인적인 의도는 없습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집단에 소속되어있어요. 교회나 또는 이스라엘이라는. 여기 야고보서1장에 흩어진 열두지파지요. 흩어진 열두지파가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택배회사 직원들 많지요. 전부 다 자기가 돈 내서 차를 하던 간에 일단 대한통운이라든지 옐로우 캡이라든지 전부 다 어쨌든 간에 개인적인 사업체긴 하지만 그 상표는 전부 다 그걸 해야 돼요. 그거 해야 전화오던지 그럴 거 아닙니까. 이삿짐센터도 마찬가지지요.
흩어진 열두지파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놀아도 그것을 묶고 움직이는 것은 열두지파를 동일한 원리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각자 직업이 다 다르고 건강상태부터 인물부터해가지고 남녀노소 전부 다 달라요. 다르지만, 뭐 하나만은 같으냐 하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은 그 집단은 사적인 의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점이에요. 사적인 의도.
아까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저는 희망이라고 했잖아요. 니가 힘을 갖던 있든 간에 관계없이 안개처럼 다루신다 말이지요. 그럼 안개처럼 살면 구원받습니까, 할 때 그게 바로 사적인 구원욕구에요.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 훅 들어왔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자! 라고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조차도 그것은 마귀의 교리에요. 예수 믿어야 피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그것도 마귀의 교리입니다. 그 말이 뭐냐, 사적인 의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뭐냐 하면 벌써 보편적으로 안개를 처리했기 때문에 안개가 무슨 사적인 의도나 가치가 있겠어요? 그냥 잠시 나타났다가 소멸하면 끝나는 거지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거 무슨 뜻이에요? 개인이 있더라도 니는 니 의사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위에서 보는 드론에서 보는 안목입니다. 위에서 봐야 돼요. 아래에서 쳐다보게 되면 계속 내가 남아있어요.
그래서 직업을 바꾼다든지 이제는 다 때려치우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까요? 이런 사적인 기대조차도 그것도 악마에게 발목을 잡힌 겁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하는데, 인간은 뭘 변신해도 유죄에요. 사적인 의도를 가지면 뭐든지 그건 주께서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사적인 의도를 갖지 않는 상태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이미 주님에 의해서 접수당한 세상입니다.
야고보서5장 1절 이제 들어갑시다.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요? 주님에 의해서 접수 당했다. 주님이 나우바리에요. 어떤 것도 주님의 권한밖에 못 벗어납니다. 우리가 이것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다가와야 되는데 이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적인 나우바리, 자기 영역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래요. 접수의 반대말은 뭐예요? 고수에요. 고수.
자기 고집하는 거예요. 고집하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했지요. 안 망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안 망가지려고 고수하니까 손에 꿀 들고 아카시아 꽃 근처에 가면 누가 달려 듭니까? 난데없는 초청하지도 않는 비행물체가 마구 달려들지요. 벌떼면 괜찮은데 거기에 말벌도 온다는 게 문제에요. 귀신들 오면 괜찮은데 마귀까지 온다는 게. 귀신에 대왕까지 오는 거예요. 손을 놓으면 되는데, 자기가 망가지면 돼요. 나는 너무나 고상하고 나는 너무나 인격이 품위가 있는 품격이 있는 여자기 때문에 나는 안 망한다 하는데, 품격하면 강남에 가던지 해야 돼요.
본인에게 마귀가 오는 요인이 작동하고 있는데. “목사님, 자꾸 마귀가 와서 나를 힘들게 합니다.” 본인이 뭘 놔야 되는데 안 놓고 있어요. 어떤 아파트에 보니까 시공업자가 세면대??